음력설도 며칠 남지 않은 날, 밤새 내린 눈으로 온세상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온통 하얀 세상이다. 거리의 도로와 집들이 눈속에 파묻혀 버렸다. 계명산과 금봉산 자락도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고요히 누워 있다.
밤새 내린 눈은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온세상을 순식간에 순백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파트 복도 창가에서 인근의 산과 들에 펼쳐진 아름다운 설경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순백의 세상은 내 마음마저 들뜨게 만들어 주체할 수 없게 한다. 이런 날은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운 법이다.
눈발이 간간이 날리는 늦은 오후 집을 나서서 금봉산으로 향한다. 탐스러운 눈송이가 사뿐사뿐 어깨에 내려 앉는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발밑의 감촉이 폭신폭신하다. 하늘에는 은빛 구름이 잔잔하게 떠 있어 온누리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듯하다. 보드라운 눈을 밟으면서 걷고 있노라니 어느덧 내 마음도 푸근해져 온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샘골 초입으로 들어서자 빽빽하게 들어찬 아름드리 낙엽송 가지마다 눈꽃이 찬란하게 피었다. 은은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꽃이 가히 환상적이다. 꿈의 궁전이 따로 없다. 지금 샘골에는 눈꽃들이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눈꽃들이 벌이는 축제의 향연에 나도 흥겨운 마음으로 참가한다. 숲속에서 재잘재잘 지저귀는 새들도 반가운 손님이다.
훈훈한 기분이 되어 소나무가 우거진 능선길로 들어선다. 소나무들은 저마다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눈을 가득 이고 있다. 보기에도 힘들어 보인다. 어떤 곳은 눈이 무릎높이까지 쌓여 있다. 아까보다도 함박눈이 더 많이 내린다. 바람에 날리는 눈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선뜩선뜩한 느낌이 든다. 해질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눈 오는 날의 적막강산이다.
샘골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임연규 시인의 '마즈막재'라는 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곱돌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사고로 죽은 광부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시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2천미터나 되는 지하갱도에서 일하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비명횡사한 광부의 비극적인 사연이 가슴을 후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꼭 이 시를 읽곤 한다.
해는 이미 서산에 졌는지 땅거미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아래 마을에는 이미 불이 들어와 있다. 내 뒤로는 하얀 눈위에 선명하게 찍힌 두 발자욱만이 말없이 따라오고 있다. 바로 얼마전 회사측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신나를 몸에 끼얹고 분신자살한 두산중공업 배달호 씨가 문득 떠오른다. 그는 노조 대의원으로 파업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파업에 대한 손실을 이유로 그를 징계하고 게다가 월급마저 압류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 가압류를 당했으니 그 얼마나 고통이 많았으랴!
50대의 가장이 하나뿐인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이 기막힌 현실에 목이 메인다. 배달호 씨가 부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천지신명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 하나를 하늘에다 새겨본다.
천지시명이시여
눈을 내려 주시려거든
몇 날 며칠이고 밤낮으로 쏟아부어
온세상을 천지개벽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죄없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악한 무리들을
천 길 만 길 눈구덩이에 파묻히게 하소서.
또한 사악한 무리들의 더러운 앞잡이들도
천 길 만 길 눈구덩이에 파묻히게 하소서.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그러나 천지신명이시여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하얀 쌀가루로 내려 주소서.
흉년으로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에게도
하얀 쌀가루로 내려 주소서.
펑펑 풍성하게 내려 주소서.
천지신명이시여
나의 기도가 천지신명께 꼭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억누르고 착취하는 세상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 모든 사람이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에 잠긴 채 능선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전망대에 올라선다. 시내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집마다 들어온 전등불빛과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그리고 손님을 유혹하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한데 어우러져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야경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가을하늘의 은하수가 내려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한적한 길가의 가로등이 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가로등이 마치 하얀 눈바다에 둥둥 떠있는 것 같다.
나는 다시 푸근한 마음이 된다. 어둠속에 잠긴 금봉산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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