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38

임씨(林氏) 기원설(起源說)

1. 임씨(林氏) 득성설(得姓說) 지금(2006년)으로부터 3100년 전 중궈(中國) 샹(商, BC 1600년경~1046년경) 왕조(王朝) 말기 쩌우왕(紂王, 帝辛, BC ?~1100년경)은 성(姓)이 즈(子)씨였다. 쩌우왕(紂王) 띠신(帝辛)은 샹의 마지막 왕으로 폭정을 하여 숙부(叔父)인 삐간(比干)이 '신하되는 자가 군왕의 무도함을 보고 죽음으로써 간하지 않으면 신하가 아니다'라면서 충언(忠言)하다가 괘씸죄로 심장을 도려내는 참형(慘刑)을 당하니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으로 추앙(推仰)받고 있다. 그후 백성들이 분노하여 샹이 망하자 삐간의 후손은 창린산(長林山) 숨어 살다가 쩌우(周)가 세워져 우왕(武王)은 후손을 찾아 보링(博陵)에 봉하고 성(姓)을 주니 그이가 임씨(林氏) 시조(始祖)로 1세인..

장흥임씨세보서(長興林氏世譜序) - 김희수(金羲壽)

長興林氏世譜序 人之有譜譬如木之有本有末水之有源有流. 譜其族者觀於千枝萬派同出於一本一源卽末而求本沿流而溯源孰不有孝悌之心哉. 然枝分派別末繁流遠以至於親竭而服盡服盡而情殺則忽忘而不爲塗人者幾希譜可得巳乎. 是以吾東方譜學大盛古家世族莫不有世譜長興林氏之譜亦其一也. 林氏之先出自中國而皆胄於忠節公八及. 其後長興君爲八君之一而子孫因以爲貫平章事諱蕡卽其鼻祖也. 後承之散處嶺湖者旣蕃且顯八世而有諱雨所通判商州仍家焉. 三世而至鴻山公諱貴枝復徙于襄陽之有林自鴻山公始也. 間者襄居諸宗以來晜之不錄於舊譜者爲多謨所以重刊而續修之使林君魯運問序于不佞不佞何敢當. 然記曰禮不忘其祒樂樂其所自生. 林氏此擧出於尊祖敬宗之意而氣類合矣精神萃矣. 其不忘本而樂其所自出如此則安知林氏無復振之日乎. 蓋聞根深者未茂源大者流長吾將以是卜林氏之興也. 忠節公仕於唐爲兵部侍郞翰林學士以直節不容與七學士浮海而東文..

장흥임씨세보서(長興林氏世譜序) - 임봉흥(林鳳興)

長興林氏世譜序 我林氏系出長興舊有譜牒而多疎漏宗族之居靈光康津老未得係譜後孫之在此地者通輸世未及錄鳳興竊嘗病之. 歲甲戌墓奠日諸宗族謂余曰吾宗爲先事不爲不多惟是譜牒未遑屬余脩正余曰諾族譜何等重事而尙今遷延未就此吾平生所慨然者何敢以老病辭. 遂與五六人會于栗里齋舍隨處收單讐校斤正衰爲一帙出齋舍若干物貿白而令從侄옥(沃밑에土)寫出於是紀代之先後分派之遠近事蹟之巨細昭然可徵豈非吾門之徽典也哉. 嗚呼林姓之在東國者各略其貫若羅州平澤扶安恩津襄陽長興者甚衆而其礎則一. 鄭昆壽令公序扶安林氏族譜曰林氏出自中國懲箕子于宋世爲望族國朝鮮朝名將林慶業譜牒曰始祖八及之後有八大君各爲分派云吾長興之林正是八君中長興君後而無譜可稽後世以諱蕡爲始祖至于今二十一世九代同宗之人觀是詣而思一人之分講百代之誼. 敦睦篤愛疎而愈親遠而愈近世世無替則庶幾有補於麗敎. 而若莫剖劂則財力凋殘未易拮据姑存是譜以俟後之子孫云爾. 崇..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족보개간서(族譜開刊序) - 임진(林溍)

族譜開刊序 吾門譜牒之八梓先君宿昔之計也. 時則物力殘弊雖未果焉而修草譜記序文以俟于今日者則今日之事信乎非今而斯今也. 不肖殘劣雖愧於繼述之道而賴我諸宗之合謨同力以遵先父兄未遂之遺志不肖感幸當復如何. 序文之在草譜者與今開刊時辭語有差異. 故追記顚末以付于後不肖子澈敬誌譜牒之作豈偶然哉. 講親疎序遠近乃所以敦睦之誼. 而一源之水分位萬派千枝之木俱是一根則在吾人溯流推本之道其如何耶. 惟我長興之林散居湖嶺之列邑舊有譜牒間多疎漏世代漸遠而不知愈近子孫漸疎而不知愈親豈不慨然. 不佞以垂老之年有志於修譜而餘日不遠齎恨於遷延矣. 何幸醴泉宗人先得我心以完大事吾門徽典有光於嶺海以南焉. 我東方林氏自八君以下至于今爲一代望族而十一代祖縣令公莅于昌平家於靈光靈光之有林氏自此始焉. 第念長興君以上綿遠無譜可記而古牒難稽於兵燹之餘此爲吾宗中普切之恨耳. 遠近子孫未及該錄而觀此譜也一人之後百代之誼瞭然於一卷..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족보개간서(族譜開刊序) - 임옥(林沃 밑에 土)

夫同姓白代之親百代其初一人之身也. 一人之身分而至於白代則白代雖遠其可忽忘而不親哉. 蘇明允譜族之意其以是. 夫我林氏始祖諱八及周武王時從箕子于東. 東方之有林自此始而厥後子孫漸遠兵燹累經古跡無徵譜牒難繼. 故始祖以下代數曠而未錄別書遠代孫諱蕡爲長興吾林之始祖而子孫之散在湖嶺二南者其麗不億. 然而不過爲二十餘代則豈可謂疎遠而不睦乎. 舊有譜牒而間多疎漏. 故歲乙亥春諸宗合議收單始爲釐正而再從叔鳳興氏幹其事外裔高正郞裕序. 其後常而未及刊行爲恨矣. 今年春鳩聚財力方營剞厥之擧而通告于靈光宗人自靈光轉通於康海諸宗收單鳩財來會于栗里齋舍讐校斤正衰爲一帙閱數月而始刊出於是乎. 世代之高下分派之援近昭然於一卷之中. 玆豈非吾門之一大美事者乎. 噫吾宗之居在醴泉至今累百年矣. 同宗之散在湖南亦過十餘代數而地隔千里會合無緣. 刊譜一疑有志未就者積有年所而到今修譜之日彼此會同合帙刊出以遵父兄之遺志又備..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서문 - 임오상(林伍相)

한국(韓國) 임씨(林氏) 장흥관(長興貫) 2008(戊子)년 발보(發譜)에 즈음하야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유구한 역사 조선 왕조(朝鮮王朝) 21대 영조(英祖) 41년 을유년(乙酉年, 1765)에 유사이래(有史以来) 영호남(嶺湖南) 장흥후인(長興后人)들이 득관조(得貫祖)이신 분조(蕡祖)를 1세(一世)로 하여 최초로 족보(族譜)를 발간(發刊)한 것은 후손들을 위한 역사적 대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사오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연(然)이나 그후 신사년(辛巳年, 1821)에 영남독자(嶺南獨自) 2회 족보를 최초보(最初譜)와 같이 분자조(蕡字祖)를 1세로 발간되었는데, 그로부터 54년 후 을해년(乙亥年, 1875)에 호남단독(湖南單獨)으로 1세조(一世祖)를 언자수자조(彦..

장흥임씨공조판서공파보(長興林氏工曹判書公派譜) 서문 - 임병룡(林炳龍)

무자보(戊子譜, 2008년)를 발간하며 장흥임씨(長興林氏) 득관조(得貫祖) 세은조(世殷祖)를 일세(一世)로 해야 하는 설명서(說明書) 장흥임씨 세보(世譜) 편찬사(編纂史)를 고찰해보면 1회 서기 1765년 을유보(乙酉譜) 영호남합보(嶺湖南合譜) 1세조(一世祖)는 분조(蕡祖)이시고, 2회 1821년 신사보(辛巳譜) 영호각보(嶺湖各譜)는 1세조 분조로 원조(遠祖)에 세은조(世殷祖)를 봉장흥군묘재양주군장산자손지관용장흥자차시(封長興君墓在楊州郡丈山子孫之貫用長興自此始)로 되어 있고, 3회 1904년 갑술보(甲戌譜)는 호남독편(湖南獨編)으로 1세를 분조로, 4회 1934년 갑술보(甲戌譜) 영남독편(嶺南獨編)은 1세조를 팔급조(八及祖)로 하고, 5회 1958년 무술보(戊戌譜)는 영남독편으로 1세조를 언수조(彦修祖), ..

대한민국 장흥임씨(長興林氏)에 대하여

언젠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에 갔다가 문득 내 조상의 뿌리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던 적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의 족보는 대부분 가짜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조상에 대해서 사실 무심했었다. 하지만 족보의 진위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동족의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임씨(林氏)의 조상은 중국 상(商)의 왕자 비간(比干)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종종 내 몸 속에 중국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긍지로 여겼던 적도 있다. 비간이 내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의 28대 태정제(太丁帝) 문정(文丁)의 아들로 태어난 비간은 그러니까 제신(帝辛) 주(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