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보던 봄
박테리아보다 작고 여간해서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이번 봄은 속절없이 지나가버렸다.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 일이 끊겼고, 오거니 가거니 해야 하는 하늘 길도 막혀버렸다. 숙주가 있어야만 겨우 생존하는, 생물체랄 것도 없는 한낱 ‘입자’에 지나지 않는 그것 때문에 삶이 맥없이 주저앉다니 어이가 없다. 오늘 당장이 문제지만 바이러스 창궐의 끝에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하다.
봄이 있어야 봄을 가진다
고행의 봄이라고 부를 수밖에. 하지만 공연한 수고는 아닐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감히 맞서리오 하고 마음을 다지면서, 아울러 ‘코로나 이후’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할 바를 곰곰 궁리한다면 뜻밖의 결과를 만날 수 있다. 기왕 엎어진 김에 면모일신의 기회로 삼자. 하여 묻는다. 여기저기 어디서나 볼 것이 많은 봄, 무엇을 보았는가. 나뭇가지의 눈이 트이듯 마음의 눈도 트였는가.
꽃 피었다고 봄이 아니다. 봄(見)이 없으면 봄(春)은 오나마나 있으나마다. 봄을 가진 자만이 봄의 참다운 주인공이다. 네 복음서가 소개하는 부활의 ‘봄’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토마스 사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의심하는 신앙’의 대명사로 유명해졌지만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오히려 우왕좌왕했던 것은 그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한 번 보자(마르 16,1-13 참조). 향료를 들고 무덤에 찾아갔다가 하얗고 긴 옷을 입은 젊은이로부터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던 세 여인은 두려움에 빠져 끝내 아무 말도 못했다. 얼마 뒤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해주었으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또 시골로 가던 제자 둘이 예수님이 나타나신 일을 동료들에게 들려주었지만 모두 시큰둥했다. 남의 말을 귀로 듣는 것과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같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
봐야만 믿겠다는 전제에 집중하는 바람에 우리가 놓쳐버린 결정적인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토마스 사도가 기어코 뚫리고 찔린 자리를 확인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 옛날 마르티노 성인에게 사탄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성인은 속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상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피 흘린 적이 없고 그래서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흉터도 갖지 못한 그런 자라면 나의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 속임수가 많은 불신의 시대에 도대체 누구에게 나의 믿음을 줄 것인가. 믿음credere이란 심장cor을 내어주는dare 일이라던데, 하나뿐인 심장을 준다면 누구에게 드려야 하겠는가? 줄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 먼저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신 분이 있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못에 찔린 자리를 눈으로 보고 창에 꿰뚫린 옆구리를 손으로 만지고 싶었던 것은 부활했다는 자가 정말 심장을 꺼내주신 나의 스승이 맞는지 따져봐야겠다는 뜻이었다. “나에게는 상처 입은 손과 꿰뚫린 옆구리 말고는 그분께 가는 다른 길이 없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그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사나이의 순정을 누가 감히 논할 수 있으리오.
예수님은 이심전심으로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질 수 있게 해주셨다. “토마야, 이번뿐 아니라 앞으로도 너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거기에서 나를 만날 거야. 어쩌면 사람들이 신음하는 곳에서만 나를 알아볼 지도 몰라. 그러니 이런 만남을 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을 명심해다오.” 요한복음은 이런 귀엣말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만질 수 있는 자리, 상처
“보시오. 이 사람이오”(요한 19,5)라고 했던 빌라도, “보라, 하느님을”(요한 20,28)이라고 했던 토마스, 같은 사람의 같은 상처를 두고 해석은 그렇게 달랐다. 하나는 상처에서 인성만 보았고, 다른 하나는 신성까지 보았다. 빌라도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 보는 자마다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대는”(시편 22,7-8) 그런 인간, 그저 피 흘리고 서 있는 상처덩어리를 보았을 뿐이다. 건성건성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떠넘기던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은 존재, 빌라도는 이것이 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저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반면 봄의 사람인 토마스는 그 분을 확인하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발생시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제자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9)라고 하셨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보고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는가. 구멍 난 옆구리 그 틈새로 미소 짓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했을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 짧은 탄성으로써 상처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지는 유일한 장소요,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운 일치가 이뤄지는 거룩한 지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상처 입은 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누구보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분은 모세가 장인의 양떼를 돌보는 도망자 신세일 때 나타나 이름까지 알려주셨다. 예수님도,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은 세상의 초라한 자들과 연대할 뿐 아니라 그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셨다. “내 형제인 가장 작은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5) 예수님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말씀도 남기셨는데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란 볼품없는 사람들이다. 흔히 무시당하고 종종 서러운 사람들, 여기저기 상처와 흉터를 달고 사는 이들이 곧장 하느님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오상 뿐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포함해서 세상의 온갖 고통이 다 ‘그리스도의 상처’다. 상처를 어루만질 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 모든 찔린 옆구리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동자와 마주하라. 봄이 와서 봄.
김인국 - 충주 연수성당 주임신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족 - 이 글은 경향잡지 5월호에 실린 글이다. 김인국 신부는 이 글을 경향잡지에 실리기 전에 내게 먼저 보내왔다. 이 글도 내게는 죽비소리로 다가오는 화두다. 글에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마음으로 돌보라는 죽비소리가 들어 있다. 아픈 사람들을 내 몸, 내 형제, 내 부모처럼 여기라는 무언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