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묵향을 찾아가는 기행차 서울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修道山, 75m) 봉은사(奉恩寺)에 들렀다. 봉은사는 코엑스 건물 등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봉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직할교구) 본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경기도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한남정맥(漢南正脈)은 수원 광교산(光橋山, 582m)에 이르러 한 줄기는 서쪽으로 서해를 향해 내달리고,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뻗어나가 백운산(白雲山, 564m), 청계산(淸溪山, 618m)을 지나 북서쪽으로 관악산(冠岳山, 632.2m)에 이른다. 관악산을 떠난 산줄기는 다시 한강을 향하여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우면산(牛眠山, 293m)에서 매봉산(95m)으로 뻗어간다. 매봉산으로 이어진 지맥 가운데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이 뻗어서 역삼동 국기원(國技院) 근처의 역삼공원 구릉(84m)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수도산으로 이어진다.
수도산 북쪽 기슭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있고, 남쪽 기슭에 봉은사가 자리잡고 있다. 현재 수도산은 봉은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선종수사(禪宗首寺)로 지정된 봉은사가 입지한 사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은사(奉恩寺) 진여문(眞如門)
봉은사 창건설에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조선 중기에 견성사(見性寺)를 중창하여 봉은사라 하였다는 설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8 피은편(避隱篇)에 연회(緣會)는 영축산 영취사(靈鷲寺)에 은거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읽으며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관행법(觀行法)을 닦았다. 영취사 연못에는 시들지 않는 연꽃이 사시사철 있었다. 신라 원성왕(元聖王)이 이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국사로 삼으려고 하자 연회는 암자를 버리고 멀리 달아났다. 그러나, 도중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고 난 뒤 돌아와 왕명을 받들어 국사가 되었다고 한다. 연회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연회국사의 입적에 대해서도 '승전(僧傳)'을 인용하여 함통 4년(863)에 입적했다고 했지만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1932년 권상로(權相老)는 봉은사의 연혁을 정리한 ‘조선선종갑찰대본산경기도광주군수도산봉은사사적비명(朝鮮禪宗甲刹大本山京畿道廣州郡修道山奉恩寺事蹟碑銘)’을 쓰면서 791년(원성왕 7) 연회국사가 봉은사를 창건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원성왕 10년 7월조에 봉은사를 창건했다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38에 성전사원(成典寺院) 7곳 중 사천왕사(四天王寺), 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 봉덕사(奉德寺), 영묘사(靈廟寺), 영흥사(永興寺)와 함께 봉은사가 언급된 것 등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권상로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소재 봉은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삼국사기'에 '원성왕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794년에 봉은사를 창건하였고, 대궐 서쪽에 세운 망은루도 봉은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때의 봉은사는 혜공왕(惠恭王) 대에 시작해서 원성왕 때 완공했으며, 경주 지역 어딘가에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원찰로 세워진 것이다.
'修道山 奉恩寺 首禪宗(수도산 봉은사 수선종)' 편액
가람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진여문(眞如門)은 봉은사 일주문(一柱門)에 해당한다. 진여(眞如)란 불교에서 우주 만유의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궁극적 진리, 만물의 본체를 뜻한다. 진여문 앞쪽 '奉恩寺(봉은사)', 뒤쪽 '眞如門(진여문)' 편액은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이 썼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누각인 악양루(岳陽樓) 편액도 오재봉의 작품이다.
'眞如門(진여문)' 편액
오재봉은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과 절친한 벗이었다. 필자의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제목이 '요산(樂山) 김정한론(金廷漢論)'이다. 석사 학위 논문을 쓰느라 부산에 내려가 김정한 당시 동아대 교수를 자택으로 몇 번 찾아뵌 적이 있다.
봉은사의 고려시대 사적은 불교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봉은사 청동은입사향완(奉恩寺靑銅銀入絲香垸, 보물 제321호)'이 유일하다. 사명당(四溟堂)이 쓰던 이 향완은 오동향로(烏銅香爐)라고도 한다. 이 향완의 구연부 테두리 밑에는 100여 자의 은입사로 새긴 명문(銘文)이 있다. 일부 내용을 보면, ‘至正四年五月日敬造靑銅縷銀香爐一座奉獻于三角山重興寺大殿佛前(지정4년5월일경조청동누은향로1좌봉헌우삼각산중흥사대전불전)’이라 하여 1344년(충혜왕 5)에 제작되었고, 본래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봉헌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봉은사는 조선시대 성종(成宗)의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중창된 것이 실질적 창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하여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바꿨다. 1501년(연산군 7)에는 조정에서 봉은사에 왕패(王牌)를 하사하였다.
1551년(명종 6) 어린 명종 대신 섭정을 한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봉은사를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 광릉(光陵)의 봉선사(奉先寺)를 교종의 수사찰로 삼았다. 또, 보우(普雨)를 봉은사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이 되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유림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불교중흥정책을 펼쳐 그동안 폐지되었던 승과(僧科)를 1552년(명종 7) 다시 부활시켰다. 승과는 잡과(雜科)와 함께 3년마다 과거가 시행되었다. 1552년의 첫 승과에서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 1562년 마지막 승과에서는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 사명대사)이 급제하였다.
승과평 자리에 들어선 코엑스
승과에 합격하면 승려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승려들이 과거장에 모여 들었다. 그 많은 인원들이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 봉은사 앞 벌판인 승과평(僧科坪)이었다. 승과평에는 지금 국제전시장인 코엑스가 들어서 있다
1562년 보우는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宣陵) 동쪽으로 옮기고 절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1563년(명종 18)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사패(祠牌)를 봉안하기 위하여 봉은사에 강선전(降仙殿)을 세웠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불교중흥정책도 폐기되었고, 봉은사에 대한 특혜도 끊어졌다. 1566년(명종 21)에는 승과도 완전 폐지되고 말았다. 문정왕후는 죽어서 봉은사가 지키는 정릉(靖陵)에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지만 유림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인지 이곳에 묻히지 못하고 노원구 태릉(泰陵)에 묻혔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도 요승(妖僧)으로 지탄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정의 명을 받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장살(杖殺)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봉은사는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과 조청전쟁(朝淸戰爭, 병자호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1637년(인조 15) 경림(敬林)과 벽암(碧巖)이 중건한 봉은사는 1665년(현종 6)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92년(숙종 18)에 왕실에서 시주하여 샤카무니불(釋迦牟尼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불(藥師佛) 등 삼존불상을 안치하였다. 봉은사는 1702년(숙종 28) 중건을 거쳐 1757년(영조 33)에도 상헌(尙軒), 영옥(穎玉), 선욱(善旭) 등이 또다시 중수하였다.
1789년(정조 13) 왕명으로 선욱(善旭), 포념(抱念) 등이 세자각(世子閣), 대웅전(大雄殿), 명부전(冥府殿), 향각전(香閣殿), 관응당(管應堂) 등을 보수하였다. 1790년 봉은사는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와 경기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였다. 1824년(순조 24)에는 경성(鏡星), 한영(漢映), 승준(勝俊) 등이 세자각 등 당우들을 중수하였다.
봉은사는 일제 강점기 31본산(三十一本山) 시대에 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당시의 가람으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향각(大香閣), 화엄경판전(華嚴經板殿), 선원(禪院), 영산전(靈山殿), 심검당(尋劒堂), 관응당, 천왕전(天王殿), 강선전, 독성각(獨聖閣) 등이 있었다.
1939년 화재로 대웅전, 동서 양 승당과 진여문(眞如門), 만세루(萬歲樓) 등이 소실되었으며, 1941년 주지 도평(道平)이 대웅전과 동서 양 승당, 1942년 영산전, 북극전(北極殿), 만세루, 천왕문(天王門) 등을 새로 세웠다. 1943년 절의 서쪽에 있던 종남산(終南山) 명성암(明性庵)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였다.
1972년 동국역경원의 역장(譯場)이 이곳에 들어왔다. 1975년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였고, 1982년에는 진여문과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1996년에는 미륵대불(彌勒大佛)을 조성하였으며, 1997년에는 천왕문과 법왕루(法王樓)를 철거하고 당우를 새로 지었다. 이밖에 봉은사에는 1392년에 주조한 동종이 있다.
봉은사 부속시설로 역경원(譯經院)이 설치되어 있다. 판전 서쪽의 명성암(明性庵)과 승방 등에서 대장경의 한글 번역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봉은사 일대 1만8,000여 평은 사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봉은사 법왕루(法王樓)
진여문 바로 북쪽에는 법왕루(法王樓)가 자리잡고 있다. 법왕루는 대법회가 열릴 경우 부족한 기도공간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봉은사 대강당이라고 보면 되겠다. 법왕(法王)은 법문(法文)의 왕(王)이란 뜻인데, 곧 부처를 가리킨다.
법왕루 '禪宗宗刹 大道場(선종종찰 대도량)' 편액
법왕루 뒤편에 걸려 있는 '禪宗宗刹 大道場' 편액은 위창(葦滄, 韙傖)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전서로 쓴 글씨다. 역관 출신의 서화가이자 독립운동가 오세창은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오세창의 부친은 역관 출신 서화가이자 금석학자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다. 오경석은 바로 추사의 제자였다. 따라서 오세창도 추사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선종종찰(禪宗宗刹)은 선종갑찰(禪宗甲刹)과 같은 말이다. 봉은사가 조선 선종의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편액 왼쪽에는 '佛紀(불기) 二千九百七十年(2970년)'이라고 적혀 있다.
불기(佛紀)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을 줄인 말이다. 불기에는 북방불기(北方佛紀)와 남방불기(南方佛紀)가 있다. 우리나라는 한때 중국, 일본 등과 함께 북방불기를 따랐다. 북방불기는 샤카무니(釋迦牟尼)가 탄생한 해를 기원으로 삼는다. 북방불기에서는 BC 1026년(계축년)에 샤카무니가 인도 가비라국(迦毗羅國)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던 인도 아소카왕의 비문에도 BC 1026년을 불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편액의 2970년은 북방불기를 적은 것이다. 북방불기 2970년은 서기 1943년이다. 서기 2019년은 북방불기 3046년이다.
남방불기는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에서 쓴다. 남방불기에서는 샤카무니가 입멸한 해를 기원으로 삼는다.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에서는 샤카무니가 BC 624년에 태어나 BC 544년에 입멸했다고 본다. 따라서 남방불기는 BC 544년이 남방불기 1년이다. 서기 2019년은 남방불기로 2563년이다.
남방불기와 북방불기는 483년이나 차이가 난다. 불교 종파 간 불기가 통일되지 않음으로써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르자, 1956년 네팔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총회에서 남방불기를 채택하기로 의결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불기는 남방불기로 통일되었다.
2019.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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