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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4 -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 판전(板殿) (2)

林 山 2019. 9. 25. 11:32

봉은사 대웅전(大雄殿)은 법왕루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썼다. 서울 은평구 북한산 기슭 진관사(津寬寺) 대웅전 현판 글씨를 복각한 것이다. 대웅전 편액의 '殿'자는 판전의 '殿'자와 매우 유사하다. 추사 말년의 졸박미가 느껴지는 글씨다. 


봉은사 대웅전(大雄殿)


'大雄殿(대웅전)' 편액


진관사 대웅전


하지만 추사의 득의작(得意作)은 아니라는 중평이다. 득의작은 작가의 실력이 최고로 발휘되어 작가 자신도 만족하는 작품을 말한다. 진관사 대웅전 현판은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버리고, 사진만 남아 있다.    


봉은사 3층석탑


대웅전 앞 중정에는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봉은사 3층석탑은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을 약간 축소한 모형처럼 비슷하다. 석가탑(釋迦塔, 무영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석탑이다. 봉은사 3층석탑도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봉은사 판전(板殿)


대웅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판전(板殿)이 있다. 1856년(철종 7) 9월 봉은사는 주지 호봉 응규(虎峯應奎)를 중심으로 남호 영기(南湖永奇)가 새긴 경판(經板)을 안치하기 위한 전각을 세우고 판전(板殿)이라 이름을 붙였다. 추사는 1852년(철종 3)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果川)에 있는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머물렀다. 추사는 봉은사를 왕래하면서 또 때로는 여기서 머물며 응규, 영기와 교분을 쌓았다. 


영기는 1820년(순조 20) 전남 고부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 학자 정경세(鄭經世)의 후손이다. 1833년(순조 33) 승가사(僧伽寺)에서 출가하여 대연(大演)의 제자가 되었고, 1854년 망월사(望月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면서 화엄경 판각을 결심하였다. 그는 당대의 화엄강백으로서 봉은사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내원암(內院庵)에서 아미타경(阿彌陀經), 흥국사(興國寺)에서 연종보감(蓮宗寶鑑), 철원 석대암(石臺庵)에서는 지장경(地藏經)을 간행하고, 해인사(海印寺)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을 인경하여 오대산(五臺山)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설악산(雪嶽山) 오세암(五歲庵)에 봉안하는 등 경전의 간행과 보급에 힘썼다.  


'板殿(판전)' 편액


봉은사 화엄경 판각 불사를 본 추사는 '금강경(金剛經)에서 부처님이 경전서사(經典書寫) 공덕을 높이 찬양한 것은 바로 호봉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면서 1856년 10월 7일 71세의 나이로 생애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리며 '板殿(판전)' 글씨를 써 주었다. 이 글씨는 대교약졸(大巧若)의 극치를 보여주는 글씨다. 말미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관지가 적혀 있다. '71살 과천의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란 뜻이다. '果'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 때 쓰던 별호(別號)인 과로(果老), 과옹(果翁)을 의미한다. 꾸밈없는 졸박(拙樸)한 글씨에서 추사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을 엿볼 수 있다. 추사는 이 글씨를 쓰고 사흘 뒤인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판전에는 '화엄경소'를 비롯한 많은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목판본은 총 16부 3,479매에 달한다. 소장된 경판은 다음과 같다.


'대방광불화엄경소초( 大方廣佛華嚴經疏抄)'는 1856년(철종 7)에 개간한 것인데 한문으로 되어 있다. 총 3,133매로 결판(缺板)이 45매 89판이다. '유마힐소설경직소(維摩詰所說經直疏)'는 125매로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결판이 3매 있다. 간기에는 함풍(咸豐) 4년(1854)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성주장판(聖住藏板)으로 되어 있다.


'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은 1869년(고종 6) 개판되었으며, 한문으로 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다. 모두 21판인데, 1매의 결판이 있다.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한글로도 음석(音釋)되어 있다. 36매 72판의 완본으로서 의정(義淨)이 번역한 것을 경화(敬和)가 주석하였다. 서(序)와 발문 역시 경화가 적었으며, 간기에는 도광(道光) 19년(1839) 철원 보개산 석대암장판(石臺庵藏板)이라고 되어 있다.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은 1915년 개간본으로 한글로 되어 있으며, 8매 32판의 완본으로 추정된다. '심경(心經)'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4판으로 되어 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9판이다. 결판으로는 '발심(發心)' 1매가 있다. '한산시(寒山詩)'는 한문판 51매로 되어 있으며, 결판은 2매이다.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은 한문 16매 완본이다. 간기에 함풍 7년(1857) 광주 수도산 봉은사장판으로 되어 있다.


'준제경(准提經)'은 한문으로 된 12매의 완본이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19매로 결판이 다수 있다. '고왕경(高王經)'은 한문판 1매로 되어 있으며, 결판이 다수 있다.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은 1528년(중종 23)에 개판하였다.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는 1856년(철종 7)에 개판하였다. '불설칠구지불모준제다라니병염송관행법(佛說七俱胝佛母准提陀羅尼竝念誦觀行法)'은 1587년(철종 8)에 개판하였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은 1861년(철종 12)에 개판하였다.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각과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


판전 서쪽 바로 옆에는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와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紀績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조선 말기 최고 권력자의 비석답게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에는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노지에 세워진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와는 대조적이다.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각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문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 음기(陰記)에는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와 섞여서 여러 해 동안 송사(訟事)에 시달려 어려움이 많았는데, 대원군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서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원군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권력 실세였으니 그가 나섰다면 해결 못할 일이 없었으리라. 비문은 다음과 같다.


恩寺賜牌混入農圃(은사사패혼입농포) 왕실에서 받은 봉은사 땅 주변 농토와 섞여 혼동되어/僊殿位田事訟有年(선전위전사송유년) 선전이 자리한 땅의 송사가 어러 해 동안 있었는데/今焉歸正鐫石頌恩(금언귀정전석송은) 이제 바로 돌아감에 그 은혜를 돌에 새겨/惟雲峴賜垂千萬禩(유운현사수천만사) 운현궁(대원군)을 천만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上之七年庚午六月 日  住持僧 需峰 建(상지칠년경오유월 일 주지승 수봉 건) 고종 칠년(1870년) 경오년 6월 모일에 주지 수봉(需峰)이 세우다.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


대원위영세불망비 바로 옆에는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봉은사 판전의 편액을 써준 추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다. 봉은사 연표를 보면 1983년 추사 탄생 200주기를 맞이하여 기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봉은사 영산전(靈山殿)


 '靈山殿(영산전)' 편액


봉은사 영산전은 대웅전 바로 뒤 언덕 위에 있다. '靈山殿(영산전)' 편액은 문인화가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이 예서체로 굵게 쓴 글씨다. 지운영은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池錫永)의 형이다. '靈'자에서 가운데 '口'자 하나를 생략해서 복잡함을 피했다. '山'자는 위로 들어올려 굵은 글씨 세 자가 나란히 놓일 때의 답답함에서 시원하게 벗어났다.  


봉은사 북극보전(北極寶殿)


북극보전(北極寶殿)은 칠성각(七星閣)이다. 칠성각은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우리나라 불교사 초기와 중기에는 사찰에 칠성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사찰에 칠성각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도교의 칠성신을 사찰에서 수용하여 습합(習合)한 것이다.    


봉은사 미륵대불


봉은사 미륵대불(彌勒大佛)은 2018년 9월 30일 점안식을 가졌다. 당시 미륵대불 옆으로 미륵불 2,506위, 미륵가족불 22위, 보살입상 7위, 금강역사 2위를 1차로 봉안했다. 미륵대불은 불사를 시작한 지 30여년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미륵신앙(彌勒信仰)은 미륵보살이 현재 머물고 있는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과 미래에 인간세계에 태어나 중생을 교화할 미륵불의 구원을 갈망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 있다. 지배층은 주로 사후에 극락왕생하여 도솔천 내원궁에서 천중들에게 교화하는 미륵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도솔천으로 왕생을 서원하는 상생신앙을 선호한다. 반면에 피지배층은 샤카무니(釋迦牟尼) 입멸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뒤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미륵불로 성불한 뒤에 용화수 아래에서 3회 설법을 할 때에 친견하는 하생신앙을 선호한다. 미륵신앙이 혁명성을 띠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석불비결 설화에서 미륵신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동학(東學)의 후천개벽 신앙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 도솔암 마애불 가슴의 배꼽 속에 든 비결이 꺼내지는 날 조선 왕조는 망하리라는 참언이 전해져 왔다. 실제 1892년 무장현 동학 접주 손화중포(孫化中包)가 석불비결을 꺼냈다는 설이 전해진 후에 1894년 고부농민봉기가 발발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혁명성을 상실하면 더이상 미륵신앙이 아니게 된다. 미륵신앙은 사기꾼들이 혹세무민하기 좋은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미륵불을 참칭하고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봉은사 범종각(梵鐘閣)


봉은사 범종각(梵鐘閣)은 1974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 종루 앞마당에 있었다. 2017년 9월 2일 범종각을 해체하지 않은 채 포크레인으로 통째로 들어 올려 미륵전(彌勒殿) 옆, 판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종루(鍾樓)가 조성되기 전에는 범종각에서 조석예불을 올렸다. 범종각 대들보에는 ‘大銅施主芳啣(대동시주방함) 1974.10.15'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 범종의 종신부에는 ‘修道山俸恩寺梵鐘(수도산 봉은사 범종)’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범종각에는 보통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범종(종) 등 네 가지 사물이 갖추어져 있다. 아침에는 운판을 제일 먼저 친 다음 목어, 법고를 치고 범종을 28번 친다. 저녁에는 범종을 33번 치친 다음 법고와 목어, 운판 순으로 친다. 


법고는 육지의 모든 생명체를 제도하고, 목어는 물속의 생명체를 제도하며, 운판은 날아다니는 생명체를 제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범종은 모든 대중들을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게 하거나 때를 알리기 위해 친다. '범(梵)'은 브라만교에서 설하는 우주의 최고 원리, 우주를 창조하고 전개시키는 근본 원리, 만물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힘을 뜻한다. 그래서 범종은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지혜가 생겨 번뇌가 없어지고, 악도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지옥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봉은사 종루(鐘樓)


범종을 칠 때는 게송(偈頌)도 함께 왼다. 아침에 외는 게송이 있고, 저녁에 외는 게송이 있다. 새로 지은 봉은사 종루 기둥에는 아침, 저녁 예불 때 외는 게송을 적은 주련이 걸려 있다. 


아침에 외는 게송이다.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 아래 어두운 지옥을 고루 밝혀 주소서/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지옥 아귀 축생 삼도의 고통을 벗어나고 칼산지옥 깨어져서/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소서. 


저녁에 외는 게송이다. 聞鍾聲煩惱斷(문종성번뇌단) 이 종소리 듣는 중생 번뇌가 끊어지고/智慧長菩提生(지혜장보리생) 지혜가 자라나 보리심을 발하소서/離地獄出三界(리지옥출삼계) 지옥을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서/願成佛度衆生(원성불도중생) 원컨대 성불하시고 중생을 모두 제도하옵소서.


봉은사 연회루(緣會樓)


연회루(緣會樓)는 봉은사 창건주로 잘못 알려진 연회국사의 법명을 딴 당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봉은사는 신라 시대 경주에 있던 사찰이다. 서울시 강남구 소재 봉은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절이다. 고대 고승들과의 인연설은 유서 깊은 절임을 강조하고, 권위와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봉은사 부도전(浮屠殿)


허응당(虛應堂) 보우대사(普雨大師) 봉은탑(奉恩塔)


영암당(暎巖堂) 임성대종사(任性大宗師) 부도와 비


진여문과 법왕루 사이 언덕에는 부도전이 있다. 부도전에는 허응당(虛應堂) 보우대사(普雨大師) 봉은탑(奉恩塔)을 비롯해서 조계종 청백가풍(淸白家風)의 상징 영암당(暎巖堂) 임성대종사비(任性大宗師碑),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다. 


2019.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