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은 언제부터 이어진 것일까? 추사는 유가이면서도 많은 불교 승려들과 교유를 했다. 1815~1816년경 추사는 시인이자 다인(茶人) 승려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과 절친한 벗이 되었다.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었다. 초의는 전라도 강진에 유배 와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만나 유학과 실학을 접한 뒤 그의 제자가 되었다. 초의는 다산에게 차를 배웠고,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과 추사를 통해서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가 되었다. 추사는 초의선사와 혼허 외에도 운구(雲句), 해붕(海鵬), 금계(金溪), 풍납(豊衲) 등 많은 출가자와 교유했다.
추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은 1816년 11월부터 1818년 12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경상도 감영은 대구에 있었다. 1817년 32세의 추사는 경주에 가서 '무장사비(䥐藏寺碑)'를 찾았다. 그는 '무장사비' 비편에 제기(題記)를 썼다. 1818년 33세의 추사는 '합천해인사소장대적광전중건상량문(陜川海印寺所藏大寂光殿重建上樑文)'을 썼다. 경상도 관찰사 김노경은 해인사 중건에 관여하였는데, 이때 추사가 해인사 중창을 위한 '권선문(勸善文)'과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 이 '상량문'은 추사 해서체의 최고 명작이자 기준작이라고들 한다. 이때 추사는 대구 감영에도 들러 부친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을 것이다.
당시 추사는 은해사에 들렀을까?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시절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던 중 은해사에 들렀으며 영파대사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영파대사는 1812년에 입적했다.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4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또, 추사가 평소 영파대사와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영파대사는 1728년생, 추사는 1786년생이다. 언뜻 계산해도 58세의 차이가 난다. 1812년 영파대사가 입적했을 때 추사의 나이는 겨우 28세였다. 두 사람이 58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어떻게 교유를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영파대사와 추사가 평소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당대 화엄학의 대강백으로 이름을 날렸던 영파대사를 추사가 흠모하고 존경했다는 표현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은해사 앞을 흐르는 치일천
김노경과 추사는 조선 왕실의 외손이었다. 영조는 김노경에게 진외증조(陳外曾祖), 추사에게는 진외고조(陳外高祖)였다.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었으며, 영조의 어제수호완문을 보장(保藏)한 사찰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경상도 관찰사 김노경은 아들 추사를 데리고 대구 감영에서 팔공산을 넘어 은해사에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혼허가 은해사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헌종(憲宗, 1827∼1849)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노론(老論) 시파(時派)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노론 벽파(僻派)를 철저하게 숙청하기 시작했다. 경주 김씨 추사 가문은 대대로 노론 벽파였다. 죽은 생부 김노경은 관작을 추탈(追奪)당했고, 추사는 1840년 9월 기약없는 유배길에 올라 제주(濟州)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중에 불교에 더욱 귀의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8년 12월 6일 추사는 63세가 되어서야 마침내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장장 8년 3개월의 기나긴 귀양살이였다. 추사는 제주에서 인고의 유배생활을 견디며 조선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를 완성했다. 1849년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는 예산의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용산 한강변의 마루도 없는 집에서 기거했다.
은해사 중수를 마친 혼허는 교유가 깊었던 추사에게 부탁해서 은해사, 대웅전, 불광각, 보화루, 일로향각에 걸 현판 글씨를 받았다. 또, 백흥암의 '山海嵩深(산해숭심)',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 글씨와 함께 여섯 폭 주련 글씨도 받았다. 이처럼 추사가 많은 작품을 써 준 사찰은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은해사가 추사의 작품 야외전시장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큼 추사와 은해사의 인연이 깊었음을 말해 준다. 추사는 1851년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이 작품들을 남겼다.
1862년 혼허가 쓴 '은해사중건기(銀海寺重建記)'를 보면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다. 1879년(고종 16) 영천군수 이학래(李鶴來, 1824~1883)가 쓴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은해사)', 불당의 '大雄殿(대웅전)', 종각의 '寶華樓(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을 '一爐香閣(일로향각)'이라고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銀海寺沿革辨(은해사 역사를 살피다)
聖上十三年丙子余宰永川郡郡西有八公山嵂然盤踞九邑正榦東有仁宗胎室麓下數里有寺曰銀海卽胎室守奉處也屬庵十二距郡三十里規度亞於通度海印而其環麗若新門額之銀海寺佛堂之大雄殿鐘閣之寶華樓皆秋史金侍郞筆爐殿曰一爐香閣亦秋史隸也余曰此非舊建也建何歲老釋曰憲廟丁未全寺回祿而重建矣有古蹟乎釋進宗親府堂上古關文卽我英宗大王潜龍時 敎飭守護而押與印尙煌煌矣余曰敬藏之問其沿革而始建於 胎室奉安後其前無徵又問奚以銀海名曰亦不祥矣余歎曰惟我仁宗誕于 正德己亥歲今六回有一歲矣名蘭往蹟之無槪見於郡誌野史何哉越己卯夏余兼綬新寧見邑誌有梨旨銀所高麗末陞爲縣仍屬永川繼有崔瀣碑文略曰至元元年上護軍安子由等朝京師還以天后命復梨旨爲縣名若曰永川梨旨銀所古爲縣中以邑子爲國名廢而籍民稅白金稱銀所者久今其土人那壽也先不花幼䆠禁中積給使勞以其功陞鄕貫復爲縣王敎有司行之如中旨明年那壽奉使東還以故處卑狹徙縣于古所若干步置縣舍長吏若初又五年也先不花函香繼至謂興復遷徙顚末不可無述謁王請記于碑那壽官奉議大夫甄用太監也先不花官中議大夫中瑞司丞姓皆李氏本國又封那壽信安君也先不花永利君此在小略盖其曰梨旨縣者卽公山之下而介於永靈地矣土人曰高麗太祖敗於甄萱來保于此食梨而佳之故曰梨旨云此與郡誌所云太祖旨在郡西三十里高麗太祖爲甄萱所敗退保公山下一小峯因名爲太祖旨者相近矣其曰在縣南二十五里者以縣之西南公山也東南川流之限永川也特其正南爲梨旨故也而今銀海等地卽寧之正南也則銀海之住於梨旨銀所之境也昭昭矣然而銀海於寧可二十里或疑其五里之舛差而凡道里之載於誌者皆至坊曲終境而量之也自寧量抵今之銀海則爲二十里量至古之梨旨終境則爲二十五里理勢固有然者矣其曰本永川梨旨銀所者言其梨旨之降縣爲銀所者本是永而後屬寧也其曰高麗末陞爲縣仍屬永川者言麗王之奉中旨復梨旨爲縣還屬于永而以至元年號攷之則事在麗忠肅王二十三年盖縣之復實那壽也先不花之功也而勒碑紀其實也崔瀣麗朝文章人而碑文中此在小略云者與其銀所之誌略其事而睬碑有所據也梨旨之旣復而不曰縣誌曰所略者重其沿革而襲舊也但所略今無傳焉寧邑誌曰碑石今無幷可歎也然而初無是碑是誌則銀所之降梨旨之復梨旨銀所之屬寧而還屬永實無以稽今日銀之建在於古之梨旨銀所尤無以訂之矣銀海銀以其銀所之同符於佛家銀地而取之歟銀海之銀亦有取於先明海般若海淸淨海妙法海之海歟嗟呼梨旨之復在於至元乙亥胎室之奉在於正德乙亥地靈之古干支叶有若造物相感者而至元後五百四十年之間沿革之明證是寺之名義不與山訛水幼而十無一二疑也余與是話於僧僧皆釵手而拜曰是可作山中檮杌余且念此事不辨終遺後人之惑遂著之爲
歲己卯仲夏知郡李鶴來靑田稿幷書
[지난 병자년(1876)에 나는 영천군수가 되었다. 군 서쪽에는 팔공산이 우뚝 솟아 있어 주위에 9읍을 거느리고 있다. 그 정간(正幹) 동쪽에 인종의 태실이 있는데, 산기슭 아래 몇 리 되는 곳에 절 하나가 있으니 바로 태실을 수봉하는 은해사이다. 부속 암자가 열둘이며, 군에서부터 30리 거리에 있다. 그 규모는 통도사나 해인사와 비슷하지만 주위 환경은 그보다 더 아름답고 울창하다. 절에 가보면 문에 걸려 있는 ‘은해사(銀海寺)’편액을 비롯해서 ‘대웅전(大雄殿)’과 종각의 ‘보화루(寶華樓)’가 모두 추사(秋史) 김시랑(金侍郞, 김정희)의 글씨다. 그리고 노전(爐殿)이 있어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추사의 예서이다.
노승에게 “이 건물들은 오래 전에 세운 것이 아닌데 언제 지었소?”라고 물어보았다. 노승은 “헌종(憲宗)의 정미년(1847) 때 모든 사찰 건물이 불타 없어진 후 새로 중건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옛일을 기록한 문헌이 있소?” 하고 다시 묻자 노승이 ‘종친부당상고관문(宗親府堂上古關文)’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영조(英祖)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시절에 절을 수호하기 위해 도장을 찍어 보낸 것인데, 아직도 도장을 찍은 자리가 역력히 보였다.
“정성스럽게 잘 보관하시오.” 하고 말하고 이어 절의 연혁을 물어보았다. 태실을 봉안하기 위해 절을 지은 것이고, 그 전의 일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바가 없다고 했다. “‘은해(銀海)’라는 절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것이오?”라고 다시 물어보았으나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인종(仁宗)이 정덕(正德) 을해년(1515)에 태어났으니 지금으로부터 361년 전이다. 그동안 옛사람들의 발자취나 절의 일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데다가 군지(郡誌)나 야사(野史)도 마찬가지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올해 초여름에 나는 신녕현감(新寧縣監)을 겸하게 되었다. 그때 신녕읍지를 보니 ‘이지은소(梨旨銀所)’라는 말이 있었다. 신녕은 고려 말 현(縣)으로 승격하면서 영천(永川)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해(崔瀣)의 비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지원(至元) 원년(1335)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황후의 명으로 이지은소를 현으로 복구시키면서 영천이라 했다. 이지은소는 옛날에는 현이었으나 읍인 가운데 한 사람이 국명을 어겨 폐지되어 소(所)가 되었는데, 세금으로 백금을 내게 되었으므로 은소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곳 출신으로 나수(那壽)가 있었는데,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유폐되어 있을 때 공을 세웠으므로 그 공로로 그의 고향이 다시 현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왕이 교시를 내려 중국의 뜻대로 하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나수는 사신을 따라 고려로 돌아왔는데, 나라에서는 그의 고향이 비천한 곳이므로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현감이 숙사를 놓고 관리를 파견했다. 5년 뒤 야선불화의 함향(涵香)을 갖고 잇달아 와서, ‘이 고장이 회복된 전말에 대한 사실 기록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며 사왕(嗣王)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나수는 봉의대부경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이 되었고, 야선불화는 중의대부중서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이 되었는데, 둘 다 이씨(李氏)이다. 고려는 다시 나수를 신안군(信安君)으로 봉했으며, 야선불화는 영리군(永利君)이 되었다.
대체로 이 같은 사실이 최해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지현(梨旨縣)은 바로 공산(公山) 아래로 일명 영령지(永靈地)로 알려져 있다.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한 뒤 이곳으로 와 숨었을 때 배(梨)를 먹고 너무 맛있어 했으므로 이지(梨旨)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군지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태조지(太祖旨)는 영천군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한 뒤 태조지와 가까운 공산 아래 한 작은 봉우리에 숨었으므로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 전하기를, 태조지는 신녕현 서남쪽 25리에 있다고 한다. 신녕현 서남은 공산이며, 동남천(東南川)의 흐름이 다한 곳이 영천(永川)이다. 특히 그 정남은 이지로 지금의 은해사 등지인데 곧 신녕의 정남이다. 그렇다면 은해사가 자리하고 있는 이지은소(梨旨銀所)의 경계를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은해사는 신녕현으로부터 20리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5리의 차이가 생기는 셈인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체로 책에 길의 이수(道里)를 적을 경우 방곡(坊曲)은 고을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 끝까지 헤아리기 때문이다. 신녕현으로부터 지금의 은해사까지는 20리를 헤아리지만, 옛날 이지의 영역 전체는 25리이다. 따라서 그처럼 이수(里數)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영천 이지은소라는 곳은 이지가 현에서 강등되어 은소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레서 본시 영천에 속했으나 후에 신녕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고려 말에 다시 현으로 승격되어 영천에 속했는데, 고려 왕이 중국의 뜻을 따라 이지를 현으로 승격시켜 다시 영천에 속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원이라는 연호를 생각해보면 그때는 곧 충숙왕 22년(1335)이다. 그리고 현으로 복귀된 것은 실은 나수의 덕택이니, 그가 야선불화를 도운 공이 있어서다. 그러한 사실을 비문에 새긴 것이다. 최해는 고려의 문인인데, 그의 비문 가운데 대략 그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은소지(銀所誌)에도 대략 그런 내용이 있다. 그러나 전거(典據)가 되었다는 비문을 확인해도 이지가 복현(復縣) 되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으며, 현지에 대략 기록된 내용도 예전의 연혁을 그대로 답습해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략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신녕읍지에 ‘최해의 비문이 지금 없다.’고 되어 있으니 실로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처음 비석이나 지(誌)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면 은소로의 강등이나 이지현으로의 복귀, 이지은소가 신녕에 속하게 된 것, 그리고 다시 영천으로 속하게 된 것을 등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더군다나 오늘날 은해사가 옛 이지은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사실을 전혀 상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은해의 ‘은’은 은소의 은인데, 불가에서 말하는 은지(銀地)와도 부합하므로 그렇게 취한 것이다. ‘해’는 반야해(般若海), 청정해(淸淨海), 묘법해(妙法海)의 해에서 취한 것이다.
이지가 지원 을해년(1335)에 복구되었고, 태실의 봉사(奉事)는 정덕 을해년(1515)이니 많은 세월이 지난 만큼 조물(造物)의 서로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지원년으로부터 지금까지는 540년이 지났다. 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간 연혁의 명증(明證)이라든가 은해사라는 이름의 뜻이 산중에 전해 내려오는 바와 다름을 밝혔는데, 아마도 열에 한둘의 의혹도 없을 것이다. 내가 승려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합장하고 절하며 “참으로 산중(山中)의 도올(檮杌)로 삼을 만합니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이 일을 생각하니, 똑같은 일이 후인에게 역시 의혹으로 남기지 않도록 해야 되겠으므로, 그 같은 내용을 글로 적게 되었다.
기묘년(1879, 고종 16) 5월 지군(知郡) 이학래(李鶴來) 짓고, 청전(靑田)이 썼다.]
‘은해사연혁변’은 은해사의 역사와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학래는 1876년 영천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은해사를 찾아갔다. 그는 영조의 어제수호완문(御製守護完文)의 가치를 알아보고 잘 보관하라고 일렀다. 또 절 이름에 대해서도 문헌을 동원해 그 유래를 고증하고 있다. 특히 영천과 신녕, 그리고 은해사와의 거리를 세밀하게 따져 각각의 경계를 정확하게 상정했다. 그는 영천 부근의 옛 지명인 이지(梨旨)에 은소(銀所)가 있었고, 바로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섰기 때문에 은해사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은해사의 설명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학래는 선조 때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이성중(李誠中, 1539~1593)의 10세손이다. 그는 보성군수를 지내다가 1876년 영천군수로 옮겨와 5년 동안 재직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14년(1877) 8월 21일 조에는 영천군수 이학래가 사환미(社還米) 1,880석을 창고에서 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설 전에도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관아의 비축미 58석을 내어 진휼하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1879년에 이학래가 10대조 이성중의 문집 '파곡유고(坡谷遺稿)'의 초판 판목을 천주사(天柱寺)에서 찾아 재판을 한 뒤 그 판목을 안흥사(安興寺)에 보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학래는 영천군수 시절의 치적이 인정되어 1880년 장흥부사로 영전했다. 그는 1882년까지 장흥부사로 근무하다가 1883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최해(崔瀣, 1287~1340)는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거쳐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된 최해는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주부를 지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그는 1320년(충숙왕 7) 안축(安軸), 이연경(李衍京)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때 안축, 이연경 등은 낙방하고 최해만 급제하였다.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된 최해는 5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귀국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그는 예문응교(藝文應敎), 검교(檢校),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최해는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삼으며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가까이 사겼다. 그의 저서에는 자서전인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고려 명현의 명시문을 뽑아서 엮은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 문집 '졸고천백(拙藁千百)' 2책이 있다. '졸고천백'은 일본에 있으며, 1930년에 영인되었다.
안자유는 안산(安山) 안씨(安氏)의 시조이다. 조적(曺頔)의 난뒤 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때 시종한 공으로 1342년(충혜왕 복위 3) 2등공신이 되었다. 부모와 처는 삼등(三等)을 뛰어 봉작(封爵)되고 아들 한 명에게는 8품이 주어졌으며 전(田) 70결(結), 노비 5구(口)를 받았다. 뒤에 폐신(嬖臣) 강윤충(康允忠)과 가까이하여 정치도감관(整治都監官)이 되었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태묘(太廟)에 제사하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제사 때 쓸 소를 자신이 다니는 절에 주고 태묘에 바치지 않았다. 백원석(白元石) 등 감찰(監察)들이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사위 이읍(李浥)을 시켜 강윤충에게 뇌물을 주어 면하고 오히려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에 간관(諫官) 송천봉(宋天鳳), 이방실(李方實), 안원룡(安元龍)이 사첩(謝牒)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참리(參理)로서 사신이 되어 모시를 바치러 원나라에 다녀왔다.
나수는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에 가서 환관(宦官)이 되었으며, 순제(順帝) 때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다. 에센부카는 몽골 케레이트씨(怯烈氏)이다. 시호는 문정(文貞), 항양왕(恒陽王)에 추증되었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는 2남이자 황태자였던 친킴(眞金,1243~1285) 유종(裕宗)을 연왕(燕王)으로 봉하였을 때 에센부카에게 보좌하도록 하였다. 친킴은 고려 충렬왕의 처남이자 테무르(鐵穆耳)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테무르는 원나라 성종(成宗)이 되었다. 유종은 성종이 추증한 묘호이며, 시호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이다. 성종 대덕 2년(1298)에 호광행성평장(湖廣行省平章)에 임명된 에센부카는 대덕 8년 하남행성으로 옮겨졌다. 그는 황허(黃河)가 범람하려고 하자 유사와 병사를 독려하면서 잘 대비하여 카이펑(开封)에는 위험이 닥치지 않았다.
은해사 보화루
'寶華樓(보화루)' 편액
천왕문을 지나 400~500m 정도 올라가다가 치일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은해사다. 은해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보화루를 지나야 한다. 보화루는 2층의 누각이다. 해서체(楷書體)로 쓴 '寶華樓(보화루)' 편액은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무심한 마음으로 쓴 듯 졸박미(拙樸美)가 보인다. '樓(루)'자 '木(목)'변의 략(掠)획을 짧게 그은 것은 나머지 두 글자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보화(寶華)는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불보살(佛菩薩)의 세계 즉 불국토(佛國土)를 말한다. 그래서 보화루를 지나는 것은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은해사 극락보전
은해사 '大雄殿(대웅전)' 편액(출처 인터넷)
은해사 경내로 들어가니 대웅전은 보이지 않고, 금당(金堂) 자리에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우뚝 자리잡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1850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극락보전에는 추사가 쓴 '大雄殿(대웅전)' 편액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추사의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지금 은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봉은사 '大雄殿(대웅전)' 편액
진관사 '大雄殿(대웅전)' 편액
봉은사 '板殿(판전)' 편액
서울 강남구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 '大雄殿(대웅전)', '板殿(판전)' 편액과 은평구 북한산 기슭 진관사(津寬寺) '大雄殿(대웅전)' 편액도 추사의 작품이다. 봉은사 '板殿(판전)' 편액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진관사 대웅전 현판은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버리고, 사진만 남아 있다. 봉은사와 진관사의 편액 글씨는 거의 똑같다.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세 편액의 '殿(전)'자와 은해사 '大雄殿(대웅전)'의 '殿(전)'자를 비교해보면 그 형태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체 '殿(전)'자의 고졸미(古拙美)는 은해사의 초기 형태에서 발전하여 진관사, 봉은사 '殿(전)'자에서 완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가 쓴 은해사 현판 중 '大雄殿(대웅전)' 글씨는 전형적인 추사체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은해사의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개화파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 성립론'에서 추사체에 대해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평했다.
은해사 '佛光(불광)' 편액(출처 불교신문)
불광각이라는 전각도 찾을 수 없었다. '佛光(불광)' 편액이 불광각에 걸려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佛光(불광)' 편액은 지금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佛光(불광)'은 대형 글씨인데다 '佛(불)'자의 한 획이 유난히 길다. 이 작품은 추사의 글씨 중에서도 대표적인 수작으로 꼽힌다. 필획에 힘이 있으면서도 한결 부드러운 완숙미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佛光(불광)' 편액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은해사 주지는 불광각에 걸 편액 글씨 '佛光(불광)'을 추사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그런데 사람을 몇 차례 보내 독촉해도 글씨를 보내 주지 않았다. 주지는 안되겠다 싶어 마지막에는 절의 불상을 하나 선물로 들고 가서 간청했다. 그러자 추사는 크게 웃으면서 불상을 사양하고는 아랫사람을 시켜 벽장 속에 가득하게 써 놓은 '佛光(불광)' 글씨 중 잘 된 것을 골라 오라고 했다. 추사는 아랫사람이 골라 온 것을 보더니 잘못 골랐다고 책망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작품을 직접 골라 내주었다.
추사는 그동안 편액 글씨를 안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득의작(得意作)을 하나 건지기 위해 글씨 쓰기 연습을 수없이 반복했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서화가였지만 추사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건지기 위해 수없는 실패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佛光(불광)'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은해사 주지가 '佛光(불광)' 글씨를 가져와 편액을 만들려고 하니 갈등이 생겼다. '佛(불)'자의 세로획 하나가 유별나게 길어 그대로 편액을 만들면 편액이 통상적인 모양이 안될 것이고, 거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지는 고민 끝에 '佛(불)'의 세로로 긴 획을 ‘光'자의 세로 길이에 맞춰 잘라버리고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나중에 은해사를 방문한 추사가 그 편액을 보게 되었다. 추사는 아무 말 없이 편액을 떼어오라고 했다. 편액을 가져오자 절 마당에서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추사가 고심 끝에 내놓은 '佛光(불광)'의 핵심은 바로 '佛(불)'자의 긴 세로 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작품 구성이 빈 공간과 조화를 이뤄 멋진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런 작품의 핵심 획을 잘라 버리고 평범한 글씨의 편액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추사가 그냥 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은해사 주지는 추사가 크게 화를 내는 이유를 깨닫고는 용서를 빌고, 다시 글씨 원본대로 판각을 해서 불광각에 걸었다. 불광각이 없어지자 '佛光(불광)' 편액은 대웅전, 우화각(羽化閣) 등에 걸려 있다가 은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佛光(불광)' 편액은 송판 4장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대작으로 세로가 135㎝, 가로가 155㎝ 정도 된다. '佛(불)'자의 가장 긴 세로 획의 길이는 130㎝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이 편액은 세로 획 덕분에 가로 글씨 편액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와 비슷한 편액이 되었다. 현존하는 추사의 친필 글씨 중 가장 큰 대작으로 알려져 있다.
천양희(千良姬) 시인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파지(破紙)’라는 시를 남겼다. 천 시인은 추사가 쓴 '佛光(불광)' 편액 글씨가 나오게 된 사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듯하다.
그 옛날 추사(秋史)는/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시(詩) 한 자 쓰기 위해/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힘들어 못 쓰겠다고 중얼거린다//파지를 버릴 때마다/찢어지는 건 가슴이다/찢긴 오기가/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은 아닐까/파지의 늪을 헤매다가/기진맥진하며 걸어나온다//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은해사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출처 인터넷)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이 걸려 있었다는 노전(爐殿)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은해사 지장전(地藏殿) 동쪽 바로 옆에 있는 우향각(雨香閣)이 옛날의 노전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해본다. 한국의 큰 절에는 대웅전과 함께 노전이 있다. 노전은 향촉(香燭)을 피우고, 시간을 측정하며, 불전(佛殿)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은 향로전(香爐殿)의 준말이다. 향로전은 응향각(凝香閣), 일로향각(一爐香閣)과 같은 말이다. 줄여서 향각(香閣)이라고도 한다.
양산 통도사 소장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 탁본(출처 과천문화원)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것과 같은 글씨 편액이 통도사에도 있는데, 은해사의 편액 글씨를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두 편액을 비교해보면 복사를 한 듯 서체가 아주 똑같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수리 중이라 추사의 편액 글씨들을 볼 수 없어서 유감이었다.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을 보러 통도사에도 들렀으나 볼 수 없었다. 대여 전시를 하고 있다는 양산문화원까지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은해사에서 바라본 팔공산 은해능선
은해사에서 추사의 묵향은 보화루에서 맡을 수 있었다. 은해사에서 서서 팔공산맥에서 뻗어내린 은해능선을 바라보았다. 백흥암은 저 은해능선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박물관이 문을 다시 여는 날 은해사에 다시 오리라는 기약을 하고 백흥암으로 향했다.
2019.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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