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폭 주련의 내용도 시홀방장 및 유마거사와 관련이 있다. 숭나라 대문장가인 쑤둥포(蘇東坡)가 유마경(維摩經)의 내용을 인용해 지은 시구를 추사가 쓴 것이다. 주련의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의 여섯 폭 주련(柱聯, 출처 인터넷)
쑤둥포는 아버지 쑤쉰(蘇洵), 동생 쑤티에(蘇鐵)와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탕숭8대가에 속한다. 쑤둥포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저우(黃州)로 유배되었다.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둥포(東坡)'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쑤둥포는 어우양시우(歐陽修), 메이야오첸(梅堯臣) 등이 기틀을 마련한 송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어우양시우와 메이야오첸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둥포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이면서도 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둥포는 시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철학을 초지일관 실천한 사람이다.
진영각의 주련
我觀維摩方丈室(아관유마방장실) 사방 열자 유마의 방 들여다보니
能受九百萬菩薩(능수구백만보살) 능히 구백만 보살을 들여도 남고
유마(維摩)는 비마라힐(毘摩羅詰)을 가리킨다. 비마라힐은 비말라키르티(Vimalakirti), 비말라힐(毘沫羅詰), 유마힐(維摩詰), 유마라힐(維摩羅詰), 비마라난리제(鼻磨羅難利帝)라고도 하며 정명(淨名), 무구칭(無垢稱)으로 번역된다. 비마라힐은 인도 비야리국의 장자이다. 고타마 싯다르타(悉達多喬達摩)와 같은 때 사람이다. 집에 있으면서 보살행을 닦고, 거사로서 학덕이 높아 우바실사(優婆室沙, 舍利弗), 마하가섭((摩訶迦葉) 등 샤카무니(釈迦牟尼)의 10대 제자들도 그의 법력(法力)과 학해(學解)를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보디사트바는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지혜를 가진 자’ 등으로 풀이된다. 특히 대승불교에 있어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가리킨다.
진영각의 주련
三萬二千獅子座(삼만이천사자좌) 삼만 이천에 이르는 사자좌를
皆悉容受不迫迮(개실용수불박책) 모두 들이고도 비좁지 않으며
부처는 인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이므로 사자에 비유된다. 따라서 사자좌(師子座)는 부처가 앉는 상좌(牀座)를 말한다. 사자좌는 부처가 앉는 자리 외에도 불상을 모셔 두는 자리. 법회 때 고승이 앉는 자리라는 뜻도 있다.
진영각의 주련
又能分布一鉢飯(우능분포일발반) 또한 능히 한 발우의 밥을 나누어서도
饜飽十方無量衆(염포시방무량중) 한없는 대중 배불리 먹일 수 있겠더라
발우(鉢盂)는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이다. 발우의 어원은 '식기'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파트라(पात्र, paatra)'를 음역한 '발다라(鉢多羅)'와 의역한 '우(盂)'를 합친 것이다. 발우는 나무나 놋쇠로 만들고 발우대, 발다라, 바리때, 바리 등으로도 부른다. 부처가 탁발할 때 중생이 공양하는 음식이 아무리 많아도 넘치는 일이 없고,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그릇에 가득 차 보였다고 해서 응량기(應量器), 응기(應器)라고도 부른다. 한국에서는 밥, 국, 물, 반찬 그릇 네 개가 한조로 되어있다. 발우를 포개어 놓았을 때 제일 아래 놓이는 큰 그릇은 어시발우(頭鉢)라고 하여 죽이나 밥을 담고, 크기에 따라 국, 청수물, 반찬 순서로 담는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은 세 벌의 가사와 하나의 발우라는 뜻인데, 승려들이 꼭 지녀야 하는 승물이기도 하고, 옛 조사들이 전법할 때 전법의 증표로 삼기도 하였다.
시홀방장과 화엄실 건물 맞은편 선방에는 '尋劍堂(심검당)' 편액이 걸려 있다. 강건한 필획으로 단정하게 쓴 이 편액은 누가 썼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에 쓴 글씨로 추정되고 있다.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심검당의 검(劍)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취모리검이란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얹어놓고 입으로 ‘훅’ 하고 불면 그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모두 잘린다는 매우 날카로운 전설의 칼이다. 구도자의 마음이 궁극적 경지에 이르면 그 지혜의 날카로움이 취모리검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심검당은 지혜의 칼날을 세워서 화두와 불법을 참구하는 집이라는 뜻이 되겠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대개 심검당과 적묵당(寂默堂)이 함께 있다. 이런 경우 적묵당은 선원,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된다.
백흥암 보화루 내부
백흥암에서 주출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보화루 하부의 중간 통로이다. 통로 양쪽에는 고방과 창고 등이 있다. 누각 밑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중정 건너편으로 훤출하게 자리잡은 극락전이 우뚝 다가온다. 보화루는 마당 쪽으로 완전히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루바닥은 중정과 그 높이가 거의 같다.
보화루의 '山海崇深(산해숭심)' 편액
보화루에는 추사가 쓴 '山海崇深(산해숭심)' 모각본 편액이 걸려 있다. 원본은 도난을 우려하여 은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원본의 '海(해)'자는 가로획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썼는데, 모각본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쓴 점이 다르다.
백흥암 '山海崇深(산해숭심)' 편액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山崇海深(산숭해심)', '遊天戱海(유천희해)' 예서(隷書) 대련 글씨체와 똑같다. '山海崇深(산해숭심)'은 기괴(奇怪)한 듯하지만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이 넘치는 글씨다. 예서를 바탕으로 행서풍(行書風)의 운필을 약간 곁들여서 쓴 이 글씨는 뛰어난 필력과 한 자 한 자 한껏 살려낸 조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의 '山海崇深(산해숭심)' 편액(출처 인터넷)
'山海崇深(산해숭심)'은 칭(淸)나라 웡팡깡(翁方纲)이 추사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학문 태도를 격려하며 1811년(순조 11)에 보내준 '實事求是' 현판에 붙어 있는 잠언(箴言)이다. 잠언은 '攷古證今(옛날을 고찰하여 지금을 증명하니) 山海崇深(산은 높고 바다는 깊도다)'이다. '攷(고)'는 '考(고)'의 고자(古字)이다. 이 현판은 지금 서울 덕수궁 조선왕조 궁중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불교에서 '산해(山海)'는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의 약칭이다. '법화경(法華經)'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에서 샤카무니는 10대 제자 중 다문(多聞) 제일로 알려진 아난(阿難)에게 미래에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고 있다. 또 10대 제자 중 밀행(密行) 제일의 라후라(羅喉羅)에게는 미래에 답칠보화여래(踏七寶華如來), 학무학(學無學人) 2천 명에게는 보상여래(寶相如來)가 되리라고 수기하고 있다. 불교에서 '산해숭심'은 부처의 한없이 높고 깊은 자비와 지혜를 표현하는 말이다.
'山海崇深(산해숭심)'은 스승 웡팡깡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지은 찬사(讚辭)에도 나온다. 바로 추사의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이다. 실사구시는 실제의 일에 있어서 옳음을 구한다는 뜻이다.
攷古證今(옛날 것을 고찰하여 지금 것을 증명하니)/山海崇深(산은 높고 바다는 깊도다)/覈實在書(사실을 조사함은 책에 있고)/窮理在心(이치를 궁구함은 마음에 있도다)/一源勿貳(하나의 근원을 둘로 나누지 말아야)/要津可尋(중요한 나루를 찾을 수 있도다)/貫澈萬卷(만 권의 서적을 관철하는 것은)/只此規箴(다만 이 실사구시잠에 있도다)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썼다. 실사구시라는 학문 방법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쓴 글이다. 추사는 이 글에서 '구체적인 일로써 실질되게 하고(實事), 옳음을 추구한다(求是)는 것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이다.' 라고 했다. 학문의 방법과 지향점에 대해 추사는 구체적으로 하학(下學), 상달(上達), 박학(博學),독행(篤行)을 강조했다. 추사의 학문이 고증학(考證學)과 깊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문 방법론으로 고증학을 내세운 추사는 한(漢)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중시했고, 특히 정쉬안(鄭玄)의 주석을 신뢰했다.
고증학의 방법론으로서 추사는 금석학(金石學)을 중시했다.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서 추사는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가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의 비석이었다가 그의 손을 거쳐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삼맥종(彡麥宗)의 순수비로 고증했다고 썼다. 이는 실제의 일에 있어서 옳음을 추구한다는 추사의 실사구시 정신과 부합되는 것이다.
보화루의 '百興大蘭若(백흥대난야)' 편액
보화루에는 '百興大蘭若(백흥대난야)'라고 쓴 편액도 걸려 있다. 힘차고 날렵하면서도 단정한 글씨체다. 편액에는 도서가 새겨져 있지 않아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운부암(雲浮庵) 선방에 '雲浮蘭若(운부난야)'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은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 환재(桓齋, 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글씨로 전해진다. 박규수가 1863년(철종 14)에 경상도 안핵사(按覈使)로 내려왔을 때 쓴 것이다. 원만(圓滿)하고 유려(流麗)하면서도 중후(重厚)한 필체가 느껴지는 편액이다. '百興大蘭若(백흥대난야)' 편액도 박규수가 쓴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두 편액을 비교해보면 서체가 서로 많이 다르다.
대난야(大蘭若)는 삼림(森林)이나 숲속을 뜻한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리 떠난 조용한 곳, 사람이 없어 적막하고 텅 빈 곳, 마을과 떨어져 있는 곳이나 인적이 드문 산 속에 마련한 수행처를 통칭하는 말이다. 아련야(阿練若), 아란나(阿蘭那), 아란야가(阿蘭若迦), 무쟁성(無諍聲), 무성처(無聲處), 적정처(寂靜處), 난야(蘭若)라고도 한다.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庵子)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201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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