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5일 토요일 영흥도(靈興島)에 해국(海菊)이 피었다는 소식이 풍문에 들려왔다. 토요일 진료를 마치자마자 점심도 거른 채 영흥도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영흥도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하는 섬이다. 충주에서는 약 162km의 거리다.
동서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화성 송산마도 IC에서 내려 지방도 305호선-318호선에 이어 301호선을 따라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前谷港)과 안산시 대부도(大阜島)를 잇는 탄도방조제(炭島防潮堤)를 건넜다. 탄도(炭島)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던 섬이었다. 북쪽의 불도(佛島)와 180m의 불도방조제, 동쪽의 화성시 서신면과 탄도방조제로 연결되어 대부도와 연결되었다. 탄도방조제를 건너면 바로 탄도항이 있다. 탄도방조제에서는 코레아케라톱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탄도는 조선시대 섬이었을 때 숲이 울창해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굽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숯무루, 탄모도(炭毛島), 탄매도(炭埋島)로도 불렸다.
불도(佛島)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던 섬이다. 1988년 2월 북쪽의 선감도(仙甘島)와 290m의 방조제, 1987년 4월 남쪽의 탄도와 180m의 불도방조제로 연결되어 대부도와 하나로 연결되었다. 불도라는 지명은 옛날 어느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려 나온 작은 불상을 집으로 가져와 불당을 만들어 모셨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선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던 섬이었는데, 시화방조제 건설로 대부도와 연결되었다. 섬의 최고봉은 125m의 대흥산이다. 선감도라는 지명은 속세를 떠난 신선이 내려와 맑은 물로 목욕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선감도는 선감학원(仙甘學園) 사건으로 유명한 섬이다. 1942년부터 1982년까지 선감도에는 소년들을 강제 수용하여 노동을 착취하던 악명 높은 선감학원이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로 당시 경기도 부천군 대부면의 선감도에 세워져 1942년 4월 200명의 소년이 처음 수용되었다.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에 이어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초기인 1982년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운영되었다. 선감학원 피해자는 4,691명에 달했다. 선감학원은 부산의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원생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와 인권유린이 저질러진 지옥도의 현장이었다. 선감학원 사건은 2017년 SBS 시사보도 프로그램 뉴스토리 154회 '선감학원 그곳은 지옥이었다', 2020년 선감학원 사건을 재구성한 탐사보도 프로그램.'그것이 알고싶다 - 광복절특집 사라진 아이들과 비밀의 섬 선감학원의 진실'이 방영되면서 그 악랄한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선감학원 피해자 조사와 피해배상, 그리고 책임자 처벌과 신상공개를 해야 한다.
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한 섬이다. 화성시 남양반도에서 바라보면 큰 언덕처럼 보여 대부도라 불린다. 시화방조제 건설로 대부도는 선감도와 탄도, 불도와 연결되었다. 방아머리 선착장에서는 자월도(紫月島), 승봉도(昇鳳島), 대이작도(大伊作島), 덕적도(德積島) 행 여객선이 출항한다. 주요 관광명소로는 효자문(孝子門), 쌍계사(雙溪寺), 자선비(慈善碑) 등이 있다. 쌍계사는 조선 숙종 15년(1689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작은 절이다.
지방도 제301호선 도로변에는 대부도 포도를 파는 노변상점들이 상당히 많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량들이 꽤나 많았다. 왕복 2차선 지방도로에다가 군데군데 교통신호등이 있어 수시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선재대교(仙才大橋)를 건너 선재도(仙才島)로 둘어갔다. 선재대교는 길이 550m의 왕복 2차선 다리다. 선재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에 속하는 섬이다. 1871년 무렵에는 소우도(小牛島)로 불렸다. 선재도에는 서해 최대 규모의 바지락 양식장이 있다. 선재대교 근처에는 작은 섬 측도(測島, 목섬)가 있다. 썰물 때는 선재도에서 측도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선재도에 딸린 섬에는 측도 외에도 외항도(外項島), 항도(項島)가 있다.
영흥대교(靈興大橋)를 건너 드디어 목적지인 영흥도로 들어섰다. 2001년 11월 15일 개통된 영흥대교는 길이 1.25 km의 왕복 2차선 다리이다. 영흥대교를 건너면 바로 지방어항인 진두항이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영흥도는 마한과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거쳐 553년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에 속하였다가 이후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에 편입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지금의 화성시)의 관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영흥도는 대부도와 함께 부천군에 속했다.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영흥도는 경기만의 다른 섬들과 함께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에 합쳐졌다.
영흥도의 최고봉은 내리의 국사봉(156.3m), 외리의 양노봉(156.3m)이다. 영흥도의 주요 관광명소에는 통일사, 서어나무 군락지, 십리포 해수욕장, 장경리 해수욕장 등이 있다. 통일사는 6 · 25때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3년에 창건한 절이다. 서어나무 군락지는 내리 십리포 해변에 있다.
영흥도에는 '탑골우물'과 '비운의 김장사'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탑골우물'은 영흥면 내4리 입구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탑을 허물어 우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운의 김장사'는 영흥도에서 장사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벌을 받을까봐 아이의 두 팔을 잘랐다. 아이는 성장하여 가출하고 나중에 나루터 사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장경리 해변은 영흥도의 북서쪽 내리에 있었다. 장경리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바닷물이 빠져 드넓은 백사장이 드러나 있었다. 영흥로 757번길 끝에서 바위투성이 해변으로 들어섰다. 바위벼랑에는 오매불망 보고싶던 해국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해국을 가까이에서 보려면 바위절벽을 올라가야만 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해국의 강인한 생명력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해국은 2006년 마라도에서 만나고 15년 만에 처음 다시 보는 것이라 몹시 반가왔다. 162km를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장경리 해변에서 바라본 무의도(舞衣島)는 한 폭의 풍경화였다. 무의도라는 이름은 섬의 생김새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장수가 칼춤을 추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여인의 춤추는 모습을 닮아서 무의도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무리'를 한자로 쓸 때 '무의'로 잘못 썼다는 설도 있다.
무의도 북서쪽에는 실미도(實尾島)가 있다. 실미도 사건으로 유명한 섬이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 시절인 1971년 8월 23일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한 실미도 북파부대(684부대) 대원 23명이 섬을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다가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이다. 4명은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었으나 곧 사형을 당했다.
공군 수사당국은 축소 수사로 일관했다. 부대를 창설하고 공군을 지휘했던 중앙정보부에서 실미도 부대로 내려간 예산이 대거 횡령된 정황도 포착되었지만 유야무야 되었다. 2004년 2월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 한꺼번에 행방불명된 7명의 청년들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무 죄도 없는 7명의 청년들은 국가기관원들에게 납치되어 684부대로 끌려갔던 것이다.
잊혀져 가던 실미도 사건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된 후,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세상에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한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철저한 진상규명과 684부대원과 그 유족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할 것이다. 책임자 처벌과 신상공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말이다.
영흥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는 흙탕물처럼 흐렸다. 하늘도 흐렸다.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서해바다는 무언가 우울해 보였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23명의 684부대원들을 기억하자. 실미도 사건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부당한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자.
해국을 찾아다니다가 까실쑥부쟁이도 만났다. 연보라색의 작은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며 까르르 웃는 듯했다. 까실쑥부쟁이는 부지깽이나물, 쑥취라고도 한다. 꽃말은 '옛사랑', '순정(純情)', '인내(忍耐)'다.
산비탈에서 노란색 꽃이 활짝 핀 이고들빼기도 만났다. 이고들빼기는 노란색 꽃잎 끝이 치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고들빼기는 사람들에게 나물로도 인기가 많다. 어릴 때 뿌리째 캐서 데친 뒤 초고추장에 무쳐 먹거나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한다. 생으로 쌈을 싸먹거나 겉절이를 해 먹기도 한다.
저녁 때가 가까워지자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밀물이 들어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드넓게 드러났던 장경리 해변 백사장은 순식간에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벌등골나물과 뚝갈을 만났다. 벌등골나물이라는 이름은 벌판에서 주로 자라는 등골나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등골나물은 잎맥이 등골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등골나물의 꽃은 좀 특이하다. 줄기의 끝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꽃대 끝에서 다시 많은 꽃자루가 나온다. 하나의 꽃자루에는 다섯 개의 연한 붉은색 관상화가 핀다. 관상화는 꽃잎은 다섯으로 갈래지며, 끝은 뽀족하다. 꽃술은 하나의 유도관에서 두 개의 술이 갈라져 나온다.
뚝갈은 전국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식물이다. 꽃이 흰색이어서 백화패장(白花敗醬)이라고도 한다. 꽃은 가지 끝과 원줄기 끝에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뚝갈과 마타리를 본초학에서 패장(敗醬)이라고 한다. 청열해독(淸熱解毒), 배농파어(排膿破瘀)의 효능이 있어 장옹(腸癰, 충수염), 하리(下痢), 적백대하(赤白帶下), 옹종개선(癰腫疥癬) 등을 치료한다. 뛰어난 효능을 가진 진통소염제다.
뚝갈의 유사종에는 마타리와 금마타리가 있다. 마타리는 줄기 윗부분에서 가지를 치고, 털이 없으나 아래쪽에는 약간의 털이 있으며, 밑에서 새싹이 나와 자란다. 금마타리는 줄기가 서고, 근생엽은 손바닥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가야 할 길이 멀어서 밀물이 들어오는 장경리 해변을 뒤로 한 채 귀로에 올랐다. 영흥도의 최고봉 국사봉과 양노봉을 오르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2021. 9. 25. 林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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