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해방동모 역사기행 1] 남조선노동당 총책 김삼룡 생가 답사

林 山 2021. 10. 26. 17:34

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解放同侔)와 함께하는 역사기행은 첫 번째 답사지를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 남로당) 총책 김삼룡(金三龍, 1910년~1950년)의 생가로 정했다. 2021년 9월 18일 토요일 오후 해방동모 김성동 상임고문, 김인국 공동대표, 임종헌 상임대표 등 3명은 우태욱 신명학원 전 이사장의 안내로 충북 충주시 엄정면 미내장터길 6번지(엄정면 용산리 470-2)의 김삼룡 생가 터를 찾았다. 충주 시내에서 버스로 약 30분 걸리는 곳에 위치한 김삼룡의 고향 엄정은 한때 '충북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인공'(인민공화국)의 세력이 컸던 곳이다. 

 

남한에서는 금기시된 영웅 김삼룡의 생가 터는 엄정면 동충주농협 바로 뒤, 내창시장 초입에 있었다. 지금은 옛 생가는 사라지고 2층 식당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장가네아구찜'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은 현재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장가네아구찜' 전에는 '오성식당'이라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고 한다. 건물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생가의 옛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선의 체 게바라(Che Guevara) 김삼룡의 생가 터에는 그 흔한 표지석조차도 하나 없다. 

 

김삼룡 생가터에 들어선 식당 건물

우태욱 전 이사장에 의하면 김삼룡의 일가친척은 6.25 전쟁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떠나 버렸다. 고향에서는 살아가기가 몹시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삼룡의 본적은 충주시 엄정면 용산리 470번지로 되어 있다. 출생지 및 생장지 주소도 같다. 김삼룡은 1910년 아버지 김용서와 어머니 전운계 사이에 6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세상을 일찍 떠났다. 편모슬하에서 큰형(쌍룡)은 담배농사를 지었고, 작은형(복룡)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선원으로 가계를 꾸려 나갔다. 

 

1922년 김삼룡은 13세에 엄정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당시는 만학이 보통이었다. 1학년 때 민족주의자인 이형재(李亨栽) 선생을 만나면서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놈의 차별, 식민지 종주국 일본의 악랄한 수탈을 목격하고 저항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1928년 3월 19세에 엄정초등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한 김삼룡은 바로 이형재 선생을 따라 서울 효자동에 있는 고학생 자활단체인 칼토페(고학당)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흥미를 갖고 좌익 서적을 섭렵했다.   

 

김삼룡 생가 터 앞에서 김인국 신부(좌), 김성동 작가, 임종헌(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는 좌익 서적을 보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범죄 행위였다. 배재고등학교 김병선과 독서회를 조직한 것이 문제가 된 김삼룡은 1930년 1월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고 첫 복역을 하게 된다. 이때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유명 혁명가인 이재유(李載裕)를 만나 많은 감화를 받았다. 

 

김삼룡은 출소 후 엄정으로 내려와 형의 농사일을 도왔다. 당시 일본 순사들의 감시는 심했다. 엄정 주재소와는 5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아 행동의 부자유를 느낀 그는 4개월 후 인천 부두의 하역 인부로 취직했다.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이관술(李觀述)과 그의 누이동생인 이순금(李順今), 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여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던 김삼룡은 1936년 12월 15일 이재유가 다시 검거되자 고향인 엄정으로 내려와 은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초치하자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을 맡았다. 그해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의 지도로 경성전기·대창직물·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던 김삼룡은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잡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처럼 김삼룡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김삼룡 생가 터 앞에서 임종헌(좌), 우태욱 신명학원 전 이사장​(우)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한 김삼룡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金炯善)과 함께 조직책임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다. 이후 그는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이강국(李康國)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삼룡도 피신하였다.

 

195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남로당 핵심간부 김삼룡, 이주하 검거 보도 기사(출처 위키백과)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조직부장의 책임을 맡은 김삼룡은 이승엽(李承燁)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 지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하다가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충주시 엄정면 자바위길 13(충북 충주시 엄정면 용산리 463-4) 김삼룡 활동지 터

김삼룡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조만식(曺晩植)과 김삼룡의 교환을 제의했다. 하지만 교환 협상은 불발로 끝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삼룡은 이주하와 함께 사형을 당했다. 사형 장소는 남산이라는 설도 있고, 한강 백사장이라는 설도 있다. 

 

김삼룡의 사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를 남조선 혁명가 반열에 올려주고 조국통일상(1990년)과 공화국 영웅 칭호(1993년)를 수여했다. 그의 묘비는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김삼룡 활동지 터 앞에서 임종헌(좌), 김성동 작가, 김인국 신부(우)

김삼룡은 1945년 8월 7일(혼인신고일) 리옥숙과 결혼하여 경애, 영애, 해산 등 세 딸을 두었다. 이들은 현재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 호적에는 이옥숙이 아니라 이승렬(李承烈)로 기재되어 있다. 이승렬은 1916년 5월 17일생이다. 충남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 242번지에서 아버지 이종학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옥숙의 수기에는 '1950년 6.25 전쟁 때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차를 보내 나와 세 딸을 월북시키고 최고 사령부 근처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김 주석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93년 1월 나와 세 딸을 초대하여 오찬을 베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 주석은 1990년 남편의 80회 생일상을 보내줬으며, 나의 70돌과 80돌 생일상도 선물했다. 현재 평양시 중구역에 살고 있으며 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권기관의 주요 직책에 근무하고 있다. 나는 충남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서 태어나 지금 나이가 90세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수기에 따르면 김삼룡의 가족은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각별한 배려로 잘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21년 9월 18일

기록 해방동모 대표 임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