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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동모 역사기행 2] 조선공산당 3인자 정태식 생가 답사기 : 세 정씨(鄭氏)를 찾아서 - 김성동

林 山 2021. 10. 29. 12:46

2021년 10월 23일 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에서는 두 번째 역사기행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 정태식(鄭泰植, 1910년 5월 29일~1953년 12월 27일)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역사기행에는 '만다라', '국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을 쓴 김성동 소설가, '사람이 좋아 사람이', '잡설' 등을 쓴 김인국 신부, 신명섭 동의회 회장, 해방동모 충주모임 임종헌 대표 등 4명이 참가했다. 

 

정태식 선생 생가 터( 진천읍 읍내리 386-1)에 들어선 현대아울렛 DC백화점

정태식 선생 생가 주소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산로 85-4(지번 주소 : 진천읍 읍내리 386-1)이다. 생가 터에는 현재 현대아울렛DC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DC백화점 바로 옆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은 옛날에는 대포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꽃집 플라워데이가 들어서 있다. 

 

정태식 선생 생가 터 바로 옆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

진천 사람들은 정태식 선생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한에서는 지워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생가터를 돌아본 다음 진천읍 도당산(都堂山)에 있는 길상사(吉祥祠)를 찾았다. 길상사는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길상사에서 일제시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정태식 선생에게 술 한 잔 올리는 간단한 제를 지냈다. 아마 70년만에 처음 받아보는 술잔이리라. 

 

생가터 앞에서 신명섭 사무총장, 임종헌, 김인국 신부, 김성동 작가(왼쪽부터)

며칠 뒤 김성동 작가가 정태식 선생 생가 답사기 '세 정씨(鄭氏)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김성동 작가의 답사기 전문이다.<林 山> 

 

일제 형무소 수감 시절의 독립운동가 정태식 선생

세 정씨(鄭氏)를 찾아서 -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이른바 '3김씨(三金氏)'는 알아도 '3정씨(三鄭氏)'를 아는 이들은 없다. 70여 년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충북 진천(鎭川) 출신 세 정씨(鄭氏) 말이다. 독립운동 동네 사나운 장수들이었다. 정재달(鄭在達, 1895년~?), 정태옥(鄭泰玉, 1909년~1945년 2월 1일), 정태식(鄭泰植) 선생 세 분 어르신이 살아오신 길은 창작과비평사에서 박아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 1996)에 짧게 나와 있다. 정태식 선생 발자취는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이 쓴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꽃무혁, 박종철출판사, 2014)에 많이 모자라는 솜씨로나마 더듬어 본 바 있다. 

 

모두 5명의 독립운동가를 낳고 길렀던 진천이다. 한낱 군 얼개로 봐서 죽어도 적은 숫자가 아니니 하물며 하나같이 저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처럼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신 어르신들임에랴! 진천의 독립운동가 5분은 '2옥(獄) 2월(越) 1불(不)'이다. 리상욱(李相勖, 1905년~1932년), 정태옥 두 어르신은 왜노(倭奴)들이 세운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정재달 어르신은 평양으로 올라가신 뒤로 그 발자취를 알 수 없다. 정태식 어르신은 1950년 8월 월북해서 1951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농림성 기획처 차장에 임명되었다가 1953년 박헌영(朴憲永)의 남조선노동당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리종옥(李鐘玉, 1910년~?) 선생은 행방불명되셨다.

 

리종옥 선생은 정태식 선생과 동갑내기 불알동무로 진천 군내에 있던 보통학교, 중학교, 청주에 있던 청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하냥 다니셨다. 맑스주의자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입김 받아 맑스레닌주의에 깊이 들어간 선생께서 정태식 동무한테 받은 '메이데이', '프롤레타리아' 같은 좀책(소책자)과 인민대중을 뒤설레 놓는(격동시키는) 알림쪽지(전단) 피뿌리다(흩뿌리다) 경기도 경찰부 왜경한테 붙잡힌 것이 두 달 뒤인 1934년 5월 25살 때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행방불명(行方不明, 행불)이었다. 이 중생이 '꽃무혁'에서 쓴 바 있지만 그 성명 석자라도 남기신 어른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고, 헬 수 없이 많은 어르신들이 역사라는 이름의 비정한 강물에 그 몸을 실어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왜제 때 행불되신 어르신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슴이 미어지게 안타까운 것이 '해방8년사'에서 움직이셨던 어르신들이다. 자본주의 천국인 남조선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은 그 함자(銜字)나마 남아 있지만, 사회주의 지상락원인 평양쪽으로 올라가신 '남짜'들은 그 자취가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없다. 1925년 4월 17일 세워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때부터 한결같이 싸워오신 독립운동가들은 요동벌에서 장총 들고 싸우셨던 빨치산들만 남겨놓고 죄 지워버렸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과 벗하매 건국동맹에서 노농군(勞農軍)을 얽는데 힘을 기울이셨던 정재달 선생도 그렇고, 1937년 6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중공산주의자동맹'을 얽고 옥중투쟁 중 해방을 6달 앞둔 1945년 2월 1일 37살로 돌아가신 정태옥 선생도 그렇지만 더구나 눈에 밟히는 것이 정태식 선생이시다. 청주고보 개교 이래 천재로 일송오백(日誦五百) 하였던 정태식 선생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한테 들었던 말씀으로 하루에 몇 자를 외우느냐로 그 사람 뇌가 좋고 나쁨을 알아보았던 예전 사람들이었다. 천재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박현주(朴賢珠)라는 새내기 글지가 산내학살사건(山內虐殺事件)을 다룬 '랑월(朗月)'에 써준 발문이다. 

 

'조선왕조 5백년을 비다듬었던(장식했던) 세 사람 천재를 들어보겠다.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과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9년),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이 그들이다. 일송일천(日誦一千)으로 하루에 책 한 권을 떼었던 다산(茶山)이었고, 일송이천(日誦二千)으로 하루에 책 두 권을 떼었던 것이 화담(花潭)이었으며, 일송삼천(日誦三千)으로 하루에 책 세 권을 떼어마친 하늘이 낸 대천재가 죽도(竹島)였다.' 

 

그들만은 못하겠지만 해방 바로 뒤 계급해방을 이룬 바탕 위에서 민족해방을 이뤄내고자 밤을 낮 삼아 뛰어다니느라고 신 벗을 사이 없었던 혁명가들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그 천재 혁명가들이 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라는 이름의 비정한 강물은 우리 겨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던 그이들을 죄 지워버렸다. 쏘비에트 물결이 넘쳐오는 것을 막아내고자 미제가 쳐놓은 갯둑(방파제)인 3.8선 이남에는 쓰레기들만 남았다고 한숨쉬었던 그때 사람들 마음을 알 것만 같으니-조선말 하는 왜놈과 조선말 하는 양놈이 다스리는 오늘인 까닭에서이다. 

 

4년 남짓 시달림 겪었던 프랑스에서는 친독파 20만 명 위를 처단했는데, 강화왜란(江華倭亂)부터 꼽아 150년 동안 종살이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한 명 친왜파도 처단하지 못하였다. 우리 겨레가 겪는 온갖 괴로움을 줄밑걷어 보면 죄 왜제와 닿아 있다. 양제는 그 다음이다. 

 

박동무가 월북한 1946년 9월 29일부터 조선공산당과 그 뒷몸인 남조선노동당 당수였던 김삼룡(金三龍) 선생이 대한민국 서울시경찰국 특별경찰대에 붙잡혀 간 것은 1950년 3월 27일이었다. 그때부터 남조선노동당 당수 권한대행이 된 정태식 선생이 했던 가장 큰일은 김삼룡, 리주하(李舟河) 선생을 감옥에서 건져내는 일이었다.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었으니 옥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꾀하게 된 것이 팔공산에 있는 인민유격대(人民遊擊隊) 싸울아비들 2개 소대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그때에 남조선에는 불뫼 리현상(李鉉相, 1905년~1953년) 선생이 거느리는 남부군(南部軍)이 지리산(智異山)에 있었고, 배철(裵哲, 1912년~1953년?) 선생이 위원장인 남조선노동당 경북도당에 딸린 인민유격대가 대구 팔공산(八公山)에 있었는데, 남부군 못지않게 짱짱한 무장력 갖춘 싸울아비(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정태식 당수 권한대행 명을 받은 비선(秘線)과 만나기로 한 비상 연락선 경북도당 선전부장이 약속 장소에 나오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으로써 그 마지막 카드조차 써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정태식 선생마저 잡히게 된 것이었다. 4월 6일이었다. 이로써 인민대중 80퍼센트 위로 뜨거운 손뼉소리 받던 노동자, 농민 대변자였던 남조선노동당은 문을 닫게 되었으니 열흘짜리 당수였다. 용산에 있는 윤군본부 군사법정에서 20년 징역형을 받은 것이 5월이고, 서울로 밀고내려온 인민군한테 해방된 것이 6월 28일이니 감옥살이 달포만이었다. 

 

"늬 애븨만 해두 일송삼백(日誦三百) 하던 충청지(忠淸知) 중 유일천재(唯一天才)였다만..... 긔한테만은 죅탈불급(足脫不及)이었구나"

 

할아버지 말씀이었다. 이 중생 아버지를 넣은 그 시절 헌걸찬 정신들을 떠올릴 때마다 애가 끊어지게 안타까운 것은 그이들 잡힐손(재능)이다. 사흘에 책 한 권을 떼는 일송삼백이니 거기에 곱쟁이 가까운 일송오백 하셨던 정태식 선생이라면 더 이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버러지 같은 하늘 밑에 벌레들만 도토리 키재기 하는 오늘 대한민국 남조선 정치판을 볼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미어지게 떠오르는 그 시절 어르신들이다. 

 

정태식 선생이 태어나서 자라셨던 진천읍내로 길라잡이 하여 준 분이 있었다. 진천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청주고등보통학교 뒷몸인 청주고등학교를 나와 충주 연수성당에서 사목하는 김인국(金仁國) 신부님이시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를 지낸 분으로 정태식 전배가 지녔던 '조선의 얼'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정태식 선생 생가 터 ( 진천읍 읍내리 386-1)에 들어선 현대아울렛 DC백화점

왜제가 옮겨 심으려던 자본주의에 거슬러 일떠섰던 정태식 선생이 태어나서 자라셨던 곳에는 자본주의 박람회장인 백화점이 들어와 있었다. 생가 자리에서 여남은 발짝만 가면 있던 왜식집은 그대로였다. 그 집 목로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셨을 정태식 선생이 자꾸만 눈에 밟혀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진천읍 벽암리 산 36번지 길상사

선생이 태어나서 뼈를 대물리셨던 곳이 내려다보이는 길상사(吉祥祠)에서 두 손바닥 곧추세운 네 사람이었다. 일통조선, 해방조선, 민주조선, 평등조선, 자유조선을 그리워하는 '해방동무 충주사람들' 림종헌(林鍾憲), 김인국 대표와 신명섭(申明燮) 사무총장, 그리고 이 중생이었다. 법주 일배 올리고 나서 인민대중이 깔아드리는 손바닥만한 돗자리 위에 엎드려 저쑵는 분향 없는 재배였는데, 하늘 높이 소소리쳐 날아오르는 멧새 한 마리였다. 

 

나무미륵존불(南無彌勒尊佛)!

2021년 10월 23일 밤에

 

글쓴이 - 김성동(金聖東,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