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에서는 2022년 4월 30일 김윤후(金允侯) 장군이 노비군(奴婢軍)을 이끌고 몽골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대림산성(大林山城)을 답사했다. 역사에 나오는 대몽항쟁(對蒙抗爭) 승전지(勝戰地) 충주산성(忠州山城) 또는 충주성(忠州城)이 바로 이 대림산성이다. 4차 답사에는 소설 '만다라(曼陀羅)', '국수(國手)'의 김성동(金聖東) 글지(작가), 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인국(金仁國) 신부, 해방동모 대표 임종헌(林鍾憲) 등 3명이 참여했다. 답사 후 김성동 글지는 '세계 최강 침략군 물리친 충주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지어 김윤후 장군과 그가 이끈 노비군을 추모했다.
세계 최강 침략군 물리친 충주사람들 - 김성동(金聖東)
김윤후라는 사람이 있었다. 중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그냥 여느 중이 아니라 많은 싸울아비들을 거느리는 ‘승장(僧將)’이었다는 것이다.
‘방호별감(防護別監)’이라면 외간 것(외세)이 쳐들어왔을 때 들어맞는 고장이나 멧잣(산성, 山城) 따위에 남달리 맡겼던 무관(武官)을 말하니, 김윤후를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뭔가 야릇하지 않은가. ‘윤후(允侯)’라는 그 이름말이다. 맡 윤(允) 자, 제후 후(侯) 자로 으뜸가는 제후가 되라는 말 아닌가.
중 이름이라면 원효(元曉)나 경허(鏡虛) 같이 무언가 그윽하고 깊은 뜻이 담겨 있어야지 윤후(允侯)가 뭔가. 김윤후는 한마디로 고승대덕(高僧大德)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른바 ‘수원승도(隨院僧徒)’였던 것이다. 선종(善宗) 스님 궁예(弓裔)와 같은 지체였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높다란 법상(法床) 위에 결가부좌 틀고 앉아 ‘거룩한 법어(法語)’ 날리는 고승대덕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며 절집 궂은일을 맡아보던 아래치 승려였다는 말이다. 김윤후한테 받쳐지는 ‘장군’은 그러므로 저 김백선(金伯先, ?~1896) 장군이나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장군처럼 인민대중이 받쳐 올린 아름다운 메꽃다발이었던 것이다.
김윤후 장군 본디 이름은 김윤황(金允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발톱을 드러내기 비롯한 세계 최강 대원제국(大元帝國)에 앙버티는 고리(高麗) 사내가 보여주었던 민족자주, 민족자존 의식 몸짓이었는지도. 윤황을 윤후로 바꿔버린 것은 사대파들이었는지도. 윤후라는 소중화적 이름이 보이는 것은 대위국(大爲國)을 세웠던 정심(淨心) 스님 묘청(妙淸) 대화상이 열반하신 지 꼭 97년만이었기에 해보는 말이다.
김윤후라는 성명 삼자를 지지펄펀(땅이 질고 넓게) 늘어놓는 데는 까닭이 있다. 나라 살매(명운)가 바람 앞 등불 같았던 때마다 어뜨무러차(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때 내는 소리) 불끈불끈 떨쳐 일어나 쓰러져 가는 나라를 버팅겨 냈던 것은 이름난 벼슬아치나 유명짜한 인사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밑바닥 풀잎 사람들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 최강 몽골 기병대를 물리쳤던 충주사람들 얼 이어받았던 것이 그 641년 뒤 일떠선 갑오봉기(甲午蜂起)와 그 51년 뒤 짜여진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였다.
김윤후 장군이 이제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곡리에 있던 작은 흙뫼인 처인성(處仁城) 동문 밖에 300미터쯤 떨어진 수펑이(숲)에 엎드려 있던 부곡민(部曲民)으로 불리던 천민들 손으로 세계 최강 몽골군 3만 기병대 총사령관 사르타크(撤禮塔)를 쏘아죽인 것은 1232년 12월 16일이었다. 아귀세게 앙버티는 일장산성(日長山城, 남한산성) 지나 용인 거쳐 충주 쪽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한 400미터밖에 안 되는 처인성 둘레에 몽골 철갑병을 별러 매긴 다음 대여섯 명 돌봄병만 안동하고 엿살피고자(몰래 정탐하고자) 동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김윤후 장군이 거느리는 숨어있던 싸울아비들 화살에 멱을 꿰었던 것이다. 땅 위로 굴러 떨어져 버둥거리는 총사령관을 살려내려고 달려왔던 기마병들 또한 싸울아비 천민들 손에 몰사주검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살매(운명)련가. 세계 최강 몽골군 명장으로 이름 높던 사르타크를 죽인 곳이라는 뜻에서 그곳은 이제도 ‘살장터(殺將場)’라 불린다. 다음은 고리사(高麗史) 세가(世家) 고종 19년 치 기사이다.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수주(水州, 수원) 속읍인 처인부곡(處仁部曲) 소성(小城)에서는 바야흐로 (적과) 대전할 제 괴수 살례탑(撒禮塔)을 쏘아 맞춰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또한 많았으며 남은 무리는 궤산(潰散, 허물어져 흩어짐)하였다. 이로부터 기세를 상실하여 안정함을 얻지 못하여 이미 조사를 돌이켜 가는 것 같도다. 그러나 일시에 모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은 먼저 가고 혹은 뒤에 가며 혹은 동으로 혹은 북으로 가고자 하는 고로 가히 시일을 지정하지 못하겠으며 또 어느 곳으로 향하여 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청컨대 귀국은 비밀히 정첩(偵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몽골군이 충주성을 둘러싼 것은 1253년 10월, 예구(也窟)를 총사령관으로 아모간(阿母侃)과 민족반역자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이 부장이었다. 다음은 <조선전사>에 나오는 <1253년 몽골군의 제5차 침략을 반대한 인민들의 투쟁>이다.
[몽골의 제5차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가장 빛나게 장식한 것은 충주인민들의 용감한 항전이었다. 10월 적 괴수 야굴은 직접 침략군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충주인민들은 적들의 제2차 침입 때 그 괴수 살례탑을 쏘아죽인 김윤후의 지휘 밑에 또 다시 싸움에 떨쳐나섰다. 이때 충주인민들은 적 주력의 포위공격을 70일 간이나 견디어내면서 용감히 싸웠으며 적들에게 큰 손실을 주고 끝까지 성을 고수하였다. 싸움이 오래 계속됨에 따라 식량이 떨어진 위급한 순간이 닥쳐왔을 때 방호별장 김윤후는 <누구든지 힘을 다하여 싸우는 사람이라면 귀천의 차별 없이 벼슬을 주겠다>고 하면서 관노비들을 등록한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포획한 소와 말들을 나누어주었다. 노비를 비롯한 성 안의 인민들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워 끝까지 성을 사수하였다.
충주성 방어전투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노비를 비롯하여 천대받던 신분에 속하는 인민들이었다. 관노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을 <해방>하겠다고 한 김윤후의 언약이 그 후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이러한 조치가 노비들의 사기를 고무하였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충주인민의 투쟁은 그 견결성에서 이 시기 성을 지켜왔던 인민들의 투쟁의 노비들이 반침략투쟁에서 발휘한 높은 투쟁정신을 보여주었다. 충주인민들의 결사적 투쟁에 의하여 심대한 타격을 받은 적들은 다시 더 남쪽으로 기여들지 못하였다.(…)
1253년 11월 적 괴수 야굴은 충주를 비롯한 륙지 인민들의 치렬한 항전에 의하여 침략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국내 깊이 기여들었던 군사들을 이끌고 개경 근방으로 퇴각하여 국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몽골 사신을 접견한다면 물러가겠다는 것을 제의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몽골 방문이나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리현(李峴)이라는 민족반역자가 있었다. 타고난 바탕이 게염스러워(탐욕) 선군별감(選軍別監)으로 검은 돈(뇌물)을 많이 받아 ‘은상서(銀尙書)’라는 딴 이름이 붙었다. 고종 39년인 1252년 추밀원부사로서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1253년 제5차 몽고침입 때 장군 예구(也窟) 군사를 길잡이 해서 입국, 그 앞잡이가 되어 양근성(楊根城), 천룡성(天龍城)을 항복시키고 그곳 다루가치(達魯花赤, 몽골이 복속시킨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파견한 민정民政 담당자로 총독總督이라는 말임)가 되어 두 성 향민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70일 동안 둘러싸고 쳐들어갔으나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몽골군이 물러갈 때 따라가지 않고 고리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리고 그 아들과 사위들도 죽임당하거나 귀양 보내졌으니, 제가 저지른 죄는 생각지 않고 세계 최강인 몽골군 거센 힘만 믿었던 민족반역자 뒤끝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노들이 물러간 지 76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대한민국 남조선 땅에서는 단 1명 민족반역자도 처단되지 않았다. 이제 이 땅에서 비롯되는 모든 불행의 씨앗은 죄 여기에서부터 비롯되니, 나무 미륵보살 마하살!
군더더기
고리가 썼던 외교정책으로 <8자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동북아 강자였던 고구리(高句麗)가 무너진 다음 그 얼을 이어받아 세워졌던 것이 ‘고리’였는데, 고구리 옛터에 들어선 동북아 강자였던 대료제국(大辽帝国)과 대금제국(大金帝國)과 대원제국 때까지 지켜져 왔던 외교철칙이었으니, 섬기기는 하되 굽실거리지 않는다는 <사이불복 事而不服>과 낮추기는 하되 무릎 꿇지 않는다는 <비이불굴 卑而不屈>이 그것이다.
모스크바를 넣은 아시아 대륙 모두와 헝가리, 폴란드를 넣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80개 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대원제국이었다. 몽골족은 본디 이제 터키인 돌궐족(突厥族) 갈래로 중국대륙 북쪽 테두리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중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한족(漢族)들이 ‘오랑캐’로 낮춰 부르던 ‘우량하이(兀良哈, 순록치기)’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씩씩한 싸울아비라는 뜻에서 ‘몽골’이라고 하였는데, 들깬겨레(야만인)라는 뜻에서 ‘몽고’라 한 것은 한족이었다. 그 ‘몽골’을 ‘대원’으로 바꾼 것이 칭기스칸 손자인 쿠빌라이 칸 곧 대원제국 세조였다. ‘대원(大元)’은 하늘과 같이 큰 으뜸나라라는 뜻이니 주역(周易)에 나오는 ‘건원(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면 대원제국이 6차례나 쳐들어왔을 때 죽거나 다친 고리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6차 침략 때 잡혀간 포로만 20만 6천 8백 명이라고 한다. 포로가 이만큼이라면 싸우다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기에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죽은 사람까지 보태면 얼마나 되겠는가?
1231년 사르타크가 쳐들어 온 것으로 비롯되어 1270년 개경 환도로 끝맺는 39년 동안 고리 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화탕지옥(火湯地獄)이었다. 이러한 일됨새였으므로 더구나 뜻 깊은 것이 충주성 싸움인 것이다. 초야 사학자가 쓴 책을 보자.
[몽골기병들은 울긋불긋한 비단옷을 휘날리며 입으로는 말린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이들이 씹는 양고기를 고리사람들은 인육(人肉)이라고 수군거리며 몸을 떨었다. 또 이들이 섶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성 안에 던지고 그 기름이 사람 몸에서 짜낸 인유(人油)라고 떠들어 댔다. 충주성을 둘러싼 예구 총사령관이 거느리는 몽골군이 소리쳤다. <우리는 진짜 몽골군사이다. 너희들은 빨리 항복하라. 만일 항거하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도륙을 내리라.> 지배계급 그러니까 양반 벼슬아치와 부자들은 바리바리 은금보화 싸들고 도망친 성 안에는 중과 노비 같은 밑바닥 천민들만 남아 있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운 김윤후 장군이 소리쳤다. “겁낼 것 없다. 몽골군은 기껏 순록치기(우량하이)에 지나지 않는다. 양치기들이란 말이다.”]
글쓴이 김성동 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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