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
“더러운 오랑캐 도움을 받을 수 없다.”
1588년 선조가 했다는 말이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던 여진족을 하나로 묶어세운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팔기군 5만 명을 보내 조선으로 쳐들어 올 왜군을 물리쳐 주겠다고 했을 때였다. 대명사대(對明事大)에 빠져 기본적인 군사체계가 무너진 조선으로 왜군이 들어온 것은 그 4년 뒤인 1592년 4월 13일 하오 5시께였다. 믿었던 신립 장군이 달래강에 몸을 던졌다는 소식 듣고 서울을 버린 선조가 아비나라가 있는 압록강 쪽으로 뺑소니를 쳤던 것은 왜군이 들어온 지 보름이 되는 4월 29일 밤이었다.
선조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몇 사람 비빈만 거느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아비나라인 대명제국 신하로 살겠다는 이른바 ‘요동래부책’(遼東來附策)이라는 것을 내비치기 비롯한 것은 개성 지나고 평양 거쳐 평산(平山)에 이르렀을 때였다. 조선이 왜국과 손잡고 저희 나라로 쳐들어오려는 올가미라고 의심한 명나라 자빡댐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 <요동래부책>이야말로 그때 조선 지배계급들 의식구조를 똑똑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때 부산 앞바다로 밀려든 왜군은 15만 8,700명이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번대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2만 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번대 1만 1,000명으로 머리지은 모두 9번대 병력이었다. 여기에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들이 안동하는 수군 9,000명들을 넣어 도파니(모두) 20여만 명이었다.
방어사령관인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이 손아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을 데리고 충주에 이른 것은 4월 26일이었다. 그 때 왜적을 막으러 갈 군사를 모으는데 따르는 자는 죄 저잣거리 소악패(불량소년)들 뿐이었다. 군사체계가 상비군이 아니라 그때그때 뽑아 쓰는 응모군 체계였는데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태평세월 200년이 흘렀을 때였다. 충주에 이른 신립이 충청도 얼안 장정들을 모아들인 것이 8,000여 명이었다고 하나 같이 식칼 한 자루 잡아본 적 없는 풋내기들이었다. 믿는 것은 만주 벌판에서 여진족 짓밟던 직할 부대 100여 명뿐이었다. <일월록>을 보자.
△ 신립이 새재(鳥嶺)를 막 오르려다가 길이 험해서 말 달리고 활쏘기 비편하다고 물러와 충주에 진을 쳤다. 리일(李鎰)은 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갔다. 립이 적세를 물으니 일은, 이 적은 경오·을묘년에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막을 것 같지 않은데 이미 험한 곳을 지키지 못하고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이나 지키자 하였다. 립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패군(敗軍)하고 또 다시 군중을 놀라게 하여 요동시키니 군법에 의하여 마땅히 목을 베일 것이지만 적이 이르거든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라”하고 또, “바다를 건너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하고 달래강(達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탄금대는 달래 두물 사이 충주 5리쯤 되는데 있다)에 배수진을 쳤다.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일월록)
△ 처음 김여물이 립에게 말하기를, “적이 기세가 날래어 맞대고 싸우기 어려우니 새재를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소”하니 립이 “적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기병(騎兵)이니 넓은 들판에서 맞아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 듣지 않았다. 적은 벌써 숨어서 재를 넘어 28일에는 길을 나누어 크게 밀어닥쳤다. 여물이 또 “먼저 고지를 점령해서 역공을 합시다”해도 듣지 않고 배수진을 쳤다. 적이 아군 뒤로 나와 강으로 포위하였다. 싸움이 처음 어울리면서 아군은 모두 달아나 흩어져 장수와 졸병이 겁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자 적이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립이 여물을 불러 “자네는 살려고 하는가”하니 여물이 웃으면서 “어찌 나는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하고 같이 탄금대 밑에 가서 손수 적 수십을 죽이고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명신록·일월록)
△ 신립은 본관은 평산이며 찬성 잡(磼)의 동생이다. 무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임진년 봄에 신립과 리일을 나누어 보내어 변방 준비를 순시(巡視)하게 했다. 일은 충청·전라도에 가고, 립은 경기·황해도에 가서 모두 달이 넘어 돌아왔는데 활, 화살, 창, 칼이나 점검(點檢)하였을 뿐이요 립은 본래 잔포(殘暴)하기로 이름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조야기문·징비록)
탄금대는 저 옛날 악성으로 일컬어지는 우륵이 가얏고를 뜯으며 옛 살라비 가야 시절을 그리워했다는 곳이다. 대당제국이라는 외간 것 끌어들여 어거지 삼국통합을 이룬 신라에서는 가야와 고구리와 백제 유민들이 딴 마음을 품을 것을 걱정해서 세 나라 유민들을 곳곳에 흩어 살게 하였는데 가야사람들이 살던 데가 충주였던 것이다.
이른바 이긴 자들 적발이인 역사책에서 말하는 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아니라 계해군변(癸亥軍變)이 일어난 것은 1623년이었으니 신립 장군이 자진한 지 꼭 31년만이었다. 김류(金瑬 1571~1648), 리귀(李貴 1557~1633), 김자점(金自點 1588~1651),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신경진(申景禛 1575~1643), 리괄(李适 1587~1624), 리서(李曙 1580~1637)들이 선조 서손(庶孫)인 능양군(綾陽君)을 내세워 일으킨 쿠데타였다.
왕 자리에 있기 15년 만인 49살에 쫓겨나 강화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 17년 동안 살다 66살로 열반한 광해군이었다.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정세에서 사이불복(事而不服), 비이불굴(卑而不屈)하는 등거리 외교로 나라를 지켜 내었던 현명한 군주 광해를 폭군으로 만들어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던 반란세력이었으니– 저희들 권력과 부를 누렸던 명분이 이른바 도덕개념이었다. 한 마디로 탐욕의 정치를 도덕정치라는 허울로 가렸던 이익공동체가 이른바 반정공신들이었던 것이다.
왜제국주의자한테 나라가 결딴나자 그때까지 권세자루 틀어쥐고 있던 서인 고갱이들로 간추려진 노론독재 조선 지배계급은 이른바 ‘양반과 사림’이라는 도덕적 겉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왜제에 기대어 백성들 위에 독판쳤고, 그 양반지배 계급 자손들은 가짜 해방이었던 8.15 뒤 남조선을 틀어쥐고 미제국주의 국시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빌붙어 오늘까지 부와 권세와 영예를 누리고 있다. 21세기가 된 지 스물두 해가 된 오늘까지 조선왕조 5백년은 끝나지 않았고 지배계급 또한 바뀌지 않았다. 계해군변 때 그대로인 것이다. 모둠살이 곳곳이 다 그렇지만 더구나 그때 그 노론 뒷자손들이 틀어쥐고 있는 데가 사학계이다. 노론독재를 부셔버리려다 삼급수(三急手)에 걸렸던 리성(李祘) 정조대왕 죽음에 대해서 모르쇠로 한결같은 저들이다.
문예부흥을 이룬 조선왕조 세종 다음 현군이라는 영정시대에 역모사건이 가장 많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가짜용인 임금을 용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짜용 곧 미륵을 그 자리에 앉히려던 것이 이른바 역모사건이었는데, 그것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지 못한 공다리들이 사건을 은폐, 축소시킴으로써 저희들 모순과 비리를 감추려 했던 것이 왕조사였다. 조선왕조가 뒷녘으로 접어들면서 요즘말로 대자보인 벽서 곧 괘서(掛書)사건이 자주 일어났으니 숙종-철종 사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괘서 사건만 165군데이다.
참 얘기가 옆길로 흘렀는데 신립 장군 아들이 신경진이고, 김여물 장군 아들이 김류이다.
△ 도움거리 삼아 한마디 덧붙이고 싶으니-
우리가 시방 알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가 참으로 있었던 우리나라 역사였는가 하는 점이다. 신립, 김여물 장군이 달래강에 몸을 던졌던 임진왜란 말이다. 리순신 장군 거북선 말이다. 왜국 침략선 수백 척을 쳐부수다가 남해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그 거북선이 왜 한 조각도 건져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앞 고리 때 가라앉았던 화물선에서는 배와 함께 고리청자를 비롯한 생활필수품들이 수없이 건져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임진왜란 주전장이 해전이 벌어졌던 데가 조선 땅 남해바다가 아니라 저 중국대륙 하이난섬(해남도) 딛고 호남성 위 장강까지 쳐올라갔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가도입명은 역사의 본모습을 감추려는 왜인들 꿍꿍잇속이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천 년 앞서부터 중국대륙으로 밀고 올라가려는 왜인들 침략은 이어져 왔으니 임진왜란 전장은 중국과 조선 두 군데였다는 것이다. 리순신 장군이 용맹을 떨쳤던 주전장은 대륙 쪽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땅으로도 왜군이 밀려왔으나 주전장은 동남아 곳곳 여러 섬나라 싸울아비들이 올라갔던 것은 대륙 쪽이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리영호라는 이가 쓴 <조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 조선역사의 미스테리>라는 책이다. 여러 가지 지도와 문건들과 실록 새롭게 읽기로 제 생각들을 뒷받침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는 책이다.
△ 계해군변 고갱이 도꼭지였던 김류는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하였으니-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세자루를 틀어쥐려는 서인 반란군 도꼭지들이 자문 밖 시내에서 칼을 씻으며(그래서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됨) 창덕궁으로 밀고 들어가려는데 쿠테타군 도꼭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반란세력 간을 졸아 들게 만든 일은 또 있었으니 이제 세검정 옆댕이에는 연신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에 연신내(延伸川)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쿠데타군 고갱이 병력 3백 명을 거느린 장단부사(長湍府使) 리서가 늦게 왔던 것이다. 군사반란 정보가 광해군 귀에 들어간 지 오래였고 쿠데타 앞날에 자신이 없었던 김류가 망설이는 판에 한시가 급한 반란군 고갱이들은 김류 대신 리괄을 반란군 대장으로 모셨던 것이다.
뒤늦게 김류가 왔고 계해반란은 그렇게 성공한 쿠데타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리흥립(李興立 ?~1624)이다. 목숨 걸고 창덕궁을 지켜내야 할 훈련도감 병정 이끌고 쿠데타군에 붙어 버린 훈련대장이다. 이제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장 또는 수도방위사령관이 쿠데타군을 두 손 들고 맞아들였으니 광해 임금 살매는 끝나버린 것이었다. 리흥립을 쿠데타군 쪽으로 돌려세운 것은 평산부사 출신 리귀였다. 서인정권한테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받은 광주군으로 수원부사 겸 경기방어사 자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싶던 그는 그 한 해 뒤 일어난 ‘괄련(适璉)의 난’ 때 반서인 쿠데타군에 붙었다가 리괄(李适 1587~1624), 한명련(韓明璉 ?~1624)이 무너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리흥립이었다. 반반정(反反正)을 일으킨 리괄이 받은 공신 등급은 1등 김류 다음인 2등이었다.
여기에서 반드시 적어둬야 할 것이 있으니 인조와 서인정권이 했던 짓거리이다. 서울을 버리고 뺑소니치기 바로 전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1562~1624)을 비롯한 49명 반서인 세력들을 괄련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목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던 한명련 장군이 돌아간 다음 그 아들 윤(潤)은 만주로 간다. 그리고 2~3년 뒤인 정묘년에 후금군 3만 명 길라잡이가 되어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었다.
김류 아들 그러니까 김여물 장군 손자가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이란 물건이다. 정묘호란 9년 뒤인 1636년 12월 일어난 병자호란 때 강화도 수비사령관인 검찰사로 있으며 수비 방책은 없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다가 강화를 청군한테 넘겨줌으로써 인조 정권 멱을 죄었던 물건이다. 강화도 개펄에는 이제도 불그스레한 벌풀이 피어나는데 ‘경징이풀’이라고 한다. 숱한 부녀자들이 뻘밭에서 능욕을 당하고 죽임당하면서도 만주에서 온 여진족 오랑캐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경징아, 비겁한 경징이 놈아!”하고 김경징을 원망하면서 죽어갔으니 그네들이 흘린 피에서 피어나는 원한의 풀이라고 해서 ‘경징이풀’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오랑캐는 한족들이 쓰는 멸칭이고, 순록치기를 가리키는 우량하이는 우리와 한겨레이다. 바이칼 동쪽에서 순록을 기르던 코리족을 비롯한 순록 유민 한 떼가 순록 먹이인 이끼 길을 따라 흥안령 넘어 만주 벌판 거쳐 한반도 조선 반도에까지 이르렀다는 이른바 ‘순록민족이동설’을 말하는 정수일 박사임)
임진왜란을 다른 말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호랑이 전쟁>이 그것이다. 왜군들은 조선 땅에서 숱한 질그릇 바치들을 끌고 갔는데 그들이 왜국으로 끌려가 만든 도자기를 유럽 나라들에 판 돈으로 20세기 경제대국 밑받침이 되었다는 것. 왜군들은 또 조선 땅을 짓밟는 살륙전이 없을 때면 조선사람 사냥꾼을 길라잡이 해서 숱한 호랑이며 범, 곰 같은 맹수들을 잡아 그 껍데기를 벗긴 ‘호피’, ‘웅피’를 제 나라로 보냈는데 또한 유럽나라들에 큰돈 받고 팔아 도자기와 함께 경제발전 밑돌이 되었다는 것.
왜국 서울이었던 교토에는 ‘미미쯔까’라는 귀, 코무덤이 있다. 동래왜성을 쌓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1561~1625)라는 왜장이 있다. 그는 3만 왜군을 끌고 조선에 쳐들어 와 부산 증산왜성 등을 쌓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사촌으로 모리부대에서 선봉대를 맡았는데 1597년 9월 1일부터 같은 달 26일까지 전라도 연안에서 조선군 코 1만 4,800여 개를 베어갔다고 <깃카와 가문 문서>에 적혀 있다. 그런데 참으로는 조선군 코가 아니라 노약자와 아녀자 같이 힘없는 조선 백성들 귀와 코를 베어간 것이었다.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등 한겨레 기자 3명이 펴낸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을 보자. 왜군들은 전사자들 목을 모두 베고 코까지 베었다. 달아나는 조명 연합군을 진주까지 쫓아갔던 왜군들은 민간인들도 닥치는 대로 죽여서 코를 베었다. 베어낸 코는 나무상자 10개에 담고 소금으로 절였다. 승전 증거물로 본국에 보내려는 것이었다.
왜군은 전공을 확인받기 위해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군 머리를 잘라 본국에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겁다는 이유로 이후에는 왼쪽 귀를 잘라 보냈고 정유재란 때는 코를 잘라 보냈다.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도 닥치는 대로 죽여 귀와 코를 잘랐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오가와치 히데모토(大河秀元)는 <조선물어<朝鮮物語)>에서 “조선사람 머리 18만 538개, 명나라 사람 머리 2만 9,014개 등 21만 4,752개를 교토 헤이안성 동쪽 대불전 부근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고 기록했다. 남원지역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 “왜적은 사람을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무조건 코를 베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 거리에서 코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썼다.
사천왜성에 주든했던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 집안에 전해지는 <시마즈 중흥기>를 보면 “시마즈 다다쓰네 군대 1만 108명,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 9,520명, 시마즈 요시히사 군대 8,383명 등이 조명 연합군 3만 8,711명 목을 베어 그 코를 잘라 10개 큰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다다쓰네는 요시히로 아들이고, 요시하사는 요시히로 형이다. 하지만 사천왜성 전투에 투입됐던 조명 연합군은 2만 9천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전사자는 8천여 명이었다. <시마즈 중흥기>에 적힌 숫자가 맞는다면 왜군들이 인근 고을 무고한 백성들까지 대량 학살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왜군은 조명 연합군 전사자들 주검을 사천왜성 앞에 파묻었는데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들끓자 7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옮겨 파묻었다. 이 무덤은 명나라 병정들 무덤이라는 뜻에서 ‘당병무덤’ 또는 목 잘린 병정들 무덤이라는 뜻에서 ‘댕강무데기’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패전의 기억은 잊혀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조그만 언덕으로 알고 있다.(왜군이 그때 끌고 간 조선 사람이 10만 명인데 왜국에 와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한테 팔려 포르투갈로 끌려갔음)
△ 초야 사학자 리덕일이 쓴 글에 나오는 대문이다.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인명 손실은 물론이고 왜란 전 170만 결이었던 전국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될 정도로 많은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경복궁 창덕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으며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일부 부유한 백성들은 군공(軍功)이나 납속(納贖)으로 양반 지위를 획득한 반면, 가난한 백성들은 조선 지배체제를 정면에서 거부했다. 전란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고 그나마 생산되는 식량이 명나라 군사들에게 먼저 조달되면서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는 인상살식(人相殺食)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명나라 동정제독(東征提督) 리여송이 4만 3천여 병대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1592년 12월이었다. 그로부터 358년 뒤인 1950년 6.25때 그랬던 것처럼 주전장을 조선반도 안으로 울치자는 것이었으니– 양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 요동 벌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내자는 것이 6.25 때였다면, 섬 오랑캐가 압록강 넘어 요동 벌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내자는 것이 임진왜란 때였다. 임진왜란 때 압록강 넘어온 명군은 한족이 아니라 남쪽 오랑캐로 부르던 베트남 쪽 그러니까 장강(長江) 아랫녘 장정들과 북녘 오랑캐로 부르던 이제 몽골과 만주벌 여진족이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인과응보라는 불가 가르침이다. 우리 하늘 밑에 벌레들이 눈으로 보고 몸뚱이로 느낄 수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저 온 누리에 꽉 차 있는 전자파 가운데 겨우 5퍼센트밖에 안 되는 빛(가시광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세계 곧 우리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지구라는 이름 땅별은 이제 이루어져 머무는 성주(成住)를 거쳐 무너져 사라져 버리는 괴공(壞空) 층층대로 접어든 지 오래이다. 여기저기서 그런 늦(조짐)들이 나타나고 있고(기후변화 등) 뜻 있는 이들은 문명사적 인류사적 꼭짓점에 와 있음을 걱정하며 조심하라고 알려주고 있다. 도인 또는 이인들이 갑자기 많이 돌아다니는 것들이 그렇고 지진, 해일, 화산폭발, 북극권 해빙이 그러하고 핵이 터져(천재지변으로) 천조일손(千祖一孫)할 것이라고 한다.
왜국열도와 유럽과 북미대륙 거지반이 죄 가라앉고 우리나라도 30만 명쯤만 살아남는데- 조상한테 제사를 저쑨 공덕으로 선조들 보호령이 보살펴 주시는 것과 본디가 신선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틀란티스가 가라앉은 다음(문명의 끝) 살아남은 이들(가장 앞서가는 과학자들)은 이집트와 멕시코, 그리고 인도와 티벳, 그리고 조선으로 흩어졌는데 이집트, 멕시코, 라틴아메리카(잉카, 마야, 파라오)쪽으로 간 이들은 신 또는 왕으로 지배자가 되어 그곳 원주민들 윗자리에서 뻐기었으나 티벳과 조선쪽으로 온 이들은 스스로 제바닥사람들과 한 몸 되어 살면서 잃어버린 저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궁구, 곧 선도(仙道)를 해왔던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온 나라가 짓이겨지고 사람들 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겨졌던 그 때 조선백성들이 했다는 말이다. “왜놈이 얼레빗이라면 되놈은 참빗이다.”(그 때 명나라 군대는 지나가는 조선 땅에 있던 소, 가이, 돼지 같은 집짐승들을 죄 잡아먹었는데 그네들이 더구나 좋아했던 집짐승인 닭은 씨가 졌다고 함. 네 발 달린 것이라면 걸상만 빼고 죄 잡아먹었다 함.)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대목이다. “명군이 들어가는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와 닭 같은 가축이 몽땅 없어진다. 명군이 가장 즐겨 먹는 것은 닭이어서 피 한 방울이라도 버리는 것이 없다.”
글쓴이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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