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 3차 답사
영원한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생가
답사일 : 2021년 12월 4일(토요일) 13시 30분
집결지 : 충주시 교현동 부강상가 임종헌한의원
류자명(柳子明, 1894년 1월 13일~1985년 4월 17일) 선생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無政府主義者, Anarchist)이다. 또한,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이다. 개명 전 이름은 류흥식(柳興湜)이고,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우근(友槿), 개명한 이름 유자명(柳子明)은 원래 별명이었다.
류자명 선생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 충주군 이안면 삼주리(현주소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 404~4)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충주농업고등학교의 전신인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육로를 통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류자명 선생은 무장 항일 투쟁에 뜻을 두고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선생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등과 더불어 아나키스트로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1924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설립에 관여한 선생은 1930년 4월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아나키스트운동의 강령과 규약을 발표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류자명 선생은 중국인, 인도인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회장을 맡았으며,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한글과 중국어, 영어로 발행했다. 선생은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 등의 독립 운동 조직에 가담했으며, 1930년대에는 항일무장투쟁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지도위원,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류자명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923) 기초에 참여했을 만큼 아나키즘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 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조선 독립 운동계의 일급 활동가였다. 선생은 독립 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长沙)에 있는 후난대학(湖南大學) 농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후난대학 대학원 원예학과 이학석사에 이어 이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류자명 선생은 중국인과 다시 결혼한 뒤 광복 후 한국 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치면서 중국 최고의 농업대학인 후난농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퇴임했다. 선생이 두 차례 귀국 기회가 있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은 것은 남북 분단 상황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통일된 조국에 돌아가고 싶었던 선생은 중국 국적도 갖지 않은 채 생애 마지막까지 무국적자로서 영원한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류자명 선생은 중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농학자로 평가 받는다. 후난대학은 류자명 선생의 기념관과 동상을 세웠다. 정작 선생의 출생지인 충주에는 동상은 커녕 제대로 된 기념관조차 없는 것과 비교된다.
류자명 선생은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원예학자로 활동하였고, 후손들도 대부분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활동 내역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후 선생의 독립 운동 공적이 알려지면서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북한에서도 1978년 3급 국기훈장을 수여받아 남북한에서 동시에 인정 받은 독립 운동가가 되었다. 선생의 유해는 참여 정부 시절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한국인, 중국인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류자명 선생의 저서에는 회고록 '나의 회억'(1984)이 있으며, 전기로는 '행동하는 지식인 류자명 평전'(원제 '불멸의 지사 류자명 평전', 류연산 지음, 충주시 예성문화연구회, 2004년)이 발간되었다. 오랫동안 선생을 기록했던 중국의 한 여기자는 '훈장을 단 원예학자'(1995년 중국농업출판사)라는 책도 출간했다.(출처 위키백과)
중국 후난성 대한민국 영사관 협력원과 한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훈씨는 '중국의 교육 편제가 한국과 다르다. 류자명 교수님은 한국에서는 원예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농업학 전체를 아우르셨던 분이다. 육종 사업도 많이 하셨지만, 농촌 선진화, 그리고 고고학 부문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셨다. 한국인으로서 중국 현지에서 류자명 교수님이나 항일 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조사하다 보면 문화 차이에서 오는 오류를 종종 목격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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