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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장 손글씨전展 - 30년 만의 외출

林 山 2023. 4. 28. 10:27

김성장 손글씨전展 

 

30년 만의 외출外出

 

김성장이 쓴 송찬호의 시詩

 

전시 기간 및 전시장

2023년 계묘년

 

 5월 10일~5월 20일 대전 테미오레 관사 6호

5월 23일 ~ 6월 4일 국립세종수목원

6월 11일~6월 19일 옥천 전통문화체험관

6월 29일 ~ 7월 5일 서울 백악미술관

 

송찬호 시인의 보탬말

김성장의 글씨 첫 개인전에 부쳐  


김성장의 글씨는 푸른 억새를 닮았다. 획이 단단하고 삐침은 부드럽고 민첩하다. 그런 글씨들이 모여 삶의 이야기로 수런거리며 울울한 먹의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의 글씨는 여울을 닮았다. 글씨들이 모여 소용돌이쳐 외치기도 하고, 재잘거리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고, 실쭉샐쭉하다가, 소곤거리기도 하면서, 삶을 노래하며 흐른다.
 
김성장의 글씨를 들여다보면, 글씨와 글씨 사이에 경계가 없다. 어떤 글씨는 이웃 글씨에 살짝 기대기도 하고 다른 이웃을 받쳐주기도 한다. 글씨의 배열이 물길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이처럼 획일적인 행간에 갇혀있지 않고 유동하는 공간에 위치한 그의 글씨에서, 새로운 서체를 찾아 유목하는 그의 글씨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작품으로 완성된 김성장의 글씨에서 쉽게 음악적인 요소와 회화적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글씨의 조형성을 중요시하고 여백을 잘 운용하기 때문이다.
 
김성장의 글씨는 서실에서만 다듬어지고 숙련된 게 아니다. 그의 글씨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일터에서, 거리와 광장에서, 세월호 곁에서, 만장 형태나 깃발에 적혀 풍찬노숙을 견뎠다. 성상이 쌓이면서 그의 글씨는 온유해졌다. 그가 처음 붓을 잡으면서 뜻했던, ‘현실의 구체적 목적이 있는 곳에서 글씨 쓰기’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도, 어느덧 그의 글씨에 식물적 상상력과 인간을 돌아보는 유연한 사유가 깃들며 원숙해졌다.
 
일찍이 김성장의 글씨는 신영복 민체의 정수를 이어받았다. 김성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글씨를 써보고 싶은 생각을 키웠다. 하여, 그가 주목한 것이 조선시대 필사본 소설이나 편지 등의 실용적 글씨이다. 그는 이와 같은 옛글씨를 바탕삼아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글씨들을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썼다. 옛글씨에서 드러난 고법(古法)을 따르되, 그것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현대의 감각으로 오늘의 실용에 맞게 글씨를 썼다.
 
김성장은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그는 글을 쓰고 글씨를 쓴다. 서예가 요구하는 시와 서의 품격을 두루 갖추었다. 세상의 부름으로, 그의 글씨가 오랜 시간 사회적 실천의 현장에 있다가 돌아온 후, 김성장은 ‘앞으로 무슨 글씨를 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 성찰 속에서 조심스런 모색과 전망을 글씨에 담아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아니 잠깐, 그동안 수없이 붓을 들었는데 이제사 첫 전시회라니!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소식이자 뜻밖의 즐거운 사건이다.

필자는 김성장과 30년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곁을 자주 오갔지만, 그의 깊은 재능을 다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삶과 글씨를 일치시키며, 앞으로도 그가 유현한 묵(墨)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지난해 어느 날,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시에 쓰일 글씨의 텍스트로써, 꽃을 소재로 쓴 필자의 시를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이로써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자고 있던 시들도 김성장 글씨의 옷을 입고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김성장 전시회를 찾는 선남선녀의 발걸음마다 무장무장 꽃구름이 피어나길 바란다.

전시회를 열며 - 김성장 

 

왜 글씨를 쓰는가

 

1. 시대의 글씨가 있다. 내가 쓰는 글씨는 이 시대의 글씨다. 

 

2. 서탁보다 길바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글씨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속했던 시민단체 예술단체 노동단체 등. 정식으로 붓글씨를 배운 건 서른이 넘어서다. 옥천의 동이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평거 김선기 선생께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는 과정에 두 번인가 충북도전에 글씨를 냈다.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서실에 다니기 어려워졌고 혼자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의 한글 민체 글씨를 만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갔다. 구체적 목적이 있는 현장에서 글씨를 쓰고 싶어졌다. 98년도에 전교조 합법화가 이루어지고 그동안 전교조 활동에 힘을 보태준 사람들에게 감사장을 배포한 적이 있다. 당시 전교조 충북지부장이었던 도종환 선생의 글을 내가 붓글씨로 썼다. 사람들에게 처음 내 글씨를 선보인 셈이었다. 1999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의 고백과 다짐>을 썼다. 김인국 신부의 요청이었다. 보은에 사는 동안 동학 관련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깃발 글씨를 썼다. 만장형태였다. 그후 충북 민예총을 비롯한 이곳저곳 시민단체의 행사에서 만장 형태의 글씨를 썼고 좌우명이나 가훈을 써 주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05년 원광대 대학원에 갔다. 옥천의 언론문화제 행사에 오셨던 여태명 교수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석사 논문 <신영복 한글서예의 사회성 연구>를 썼다.


글씨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퇴직하고 나서였다. 책을 쓰며 서실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씨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출발은 대전에서였다.


2017년 세종으로 옮겨간 후 서울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신영복 따라쓰기> 강좌를 맡고 공주 옥천 등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글씨를 가르친다기보다 글씨를 배우고 싶어 오는 사람들과 나도 배우면서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같이 붓을 들고 글씨를 쓴다는 것 이상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 노무현 전태일 김남주 등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다. 2022년 세월호 관련자들의 증언집을 바탕으로 100개의 작품을 만들어 거의 1년에 걸쳐 전국 순회전을 연 것은 그동안 해왔던 활동의 종합편이었던 셈이다. 50명의 작가들이 참여했고 16개의 도시를 찾아갔다.

어쨌든 꾸준히 글씨를 쓰다보니 그 부작용으로 획은 점점 단련되어 갔고 다양한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첫 번째 내부로의 외출이다. 그동안 바깥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글씨를 썼다. 


내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조선시대 글씨들 가운데 필사본 소설이나 편지 등 실용적 글씨들이다. 흔히 민체라고 이름한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서체(판본체)와 궁체처럼 규격에 맞춘 듯이 형식의 완성도를 높이려했던 글씨가 아니고 내용 전달 중심의 실용적 목적으로 쓰인 것들이다. 정해진 글자의 형태가 없이 매 순간 휘청거리며 쓴 듯한 이 글씨들이 나에게 다양한 느낌을 준다. 같은 글자들이 문장에서마다 매 순간 달라지는 그 모습은 재미있고 신기하며 다정하다. 양반들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이 삶의 어느 순간 필요해서 썼던 그 글씨들은 풍부한 조형성과 서로 다른 감성이 배어있다. 궁체는 우아함 그 자체이고 판본체는 완고함과 질서정연함이 있는데 민체는 바로 여기에 없는 맛이 있다. 어리숙함, 순함, 얌체같음, 똥폼잡기, 부끄러움, 실죽샐죽 등의 이런저런 정서가 거기 담겨 있다. 그 글씨의 숲에서 길을 헤매는 일은 붓을 들고 이 곳에 온 자의 운명이자 흡족한 산책이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와 함께 연필과 펜이 들어오며 붓이 필기구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예술로서의 붓글씨(서예)’가 시작되었다. 해방과 함께 글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글씨는 서예라는 이름으로 각기 전문화의 길을 가며 분리되었다. 90년대까지 서예는 훈민정음 서체류의 판본체와 궁체가 주류였다. 붓글씨로서 전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것은 여태명 교수의 활동이었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글씨를 집중 연구하여 새롭게 민체를 탄생시켰고 이는 오늘날 유행하는 캘리그라피의 씨앗이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오랜 문인화의 전통도 유전적 씨앗 속에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오래동안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신영복 한글 민체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한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때 긴 이야기를 하겠기에 간단하게 짚고 넘어간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만들어낸 한글 민체는 글의 내용에 어울리는 서체가 필요하다는 의도를 가지고 목적의식적으로 기획된 첫 한글 서체라 할 수 있다. 가로형으로 쓰기 적합한 형태로 만들려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민체로서 흘림체를 구현한 것으로서도 새롭다.

 

3. 송찬호의 시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대부분의 그의 시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시집을 곁에 두고 종종 읽고 있다. 그의 시는 무뎌진 내 상상력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옷에는 현실의 가시밭길을 거쳐 온 먼지와 상처가 가득하다. 나에게 그렇게 읽힌다. 그리고 잠시 그와 이웃집에 살면서 알게 된 그의 삶은 나를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내가 만난 유일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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