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페이스북에 "고은이 아니라,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이라 다행이다"라고 썼다. 이들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럴 권위도 안목도 없고, 이들의 작품을 비교 평가할 만큼 충분히 읽은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나온 20세기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21세기 서사를 풀어낸 작가에게 상을 준 것에 주목했을 뿐이다. 확실히 노벨상은 눈이 밝았다. 고은과 황석영의 시대를 넘어서 현대 한국인의 내면을 읽어낸 작가를 선택했다. 고은과 황석영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를 뛰어넘은 한강을 골랐다는 것이 반가웠다.
만약 고은이나 황석영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 우리가 지나온 혹은 두고 온 어느 터널에 우리에 대한 해석을 맡겨야 했을 것이고, 그만큼 답답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그런 시대를 살아낸 우리의 오늘을 선택해 주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류 현상에 대한 수준 높은 주석 하나가 더해졌다. 박찬욱과 봉준호와 홍상수의 영화 언어를 설명하는 데 한강의 문학만큼 유용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강이라는 패스트 트랙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피로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한 역사의 질곡을 녹여낸 한강 작가의 집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 경사스러운 날 노벨상 시상식장 앞에서 'K 파시스트 윤석열, 민주주의를 멈추다(K-FASCIST YOON "DEMOCRACY STOPS HERE")'라는 푯말을 들었다. 서글픈 일이다. 역사의 질곡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란 것을 전 세계인에게 고백한 셈이다.
나 또한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계엄과 윤석열과 탄핵을 입에 담지 않기를 원했다. 이제는 국민 레포츠가 된 '국난 극복'을 우리는 또 해낼 것이고,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으로 이 비루한 현실을 영원히 박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Konserthuset) 앞에서 한강 작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교포 청년 한 명이 'K 파시스트 윤석열, 민주주의를 멈추다'라는 푯말을 들고 행사장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나왔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청년에게 푯말을 빌어 나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스톡홀름 콘서트홀에 박제했다. 스웨덴 경찰이 달려왔다. 교포 청년이 1인 시위고 나는 관광객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니 바로 물러났다. 푯말을 넘겨주고 오는데 조국의 짐을 교포 청년에게 떠넘기고 온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한강 작가는 노벨상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시상식장에서 푯말을 든 행위가 여행자의 객기일 수 있지만, 이 짧은 동참이 한강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었기를 바란다.
글쓴이 고재열 여행감독(전 시사IN 기자)
기사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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