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영화를 몹시 좋아했다. 어린 시절 1년에 한두 번 며칠씩 면소재지에 가설극장이 들어올 때면 내 마음은 들뜨기 일쑤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기에 돈을 주고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다.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도 들으려고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가설극장 주변을 맴돌곤 했다. 그러다 운이라도 좋은 날이면 기도를 보는 아저씨가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도 했다.
일년에 한두 번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무료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이라도 들여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은 설레였다. 그 날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도 아마 그 때 보았을 것이다. 주인공 장동휘는 어린 나의 우상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영화에 대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용돈이 생기는 대로 그것을 모아 영화를 보러 갔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들어왔는데 돈이 없을 때는 몰래 극장의 담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은 영화를 보다가 선생님께 들켜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걸리면 정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TV가 나왔고...... 언제부터인가 TV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주말의 명화'는 나의 단골 프로였다. '주말의 명화' 외에도 영화를 틀어주는 프로는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다.
영화에 대한 갈증은 한의대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폭발했다. 한의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영화 비디오를 하루에 거의 3~4편씩 보았을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날이 하얗게 샐 때까지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 나중에는 영화 스토리가 이게 그거 같고 그게 이거 같아서 헷갈릴 정도였다.
TV에서든 극장에서든 나는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1928년~)가 음악을 맡은 영화는 아마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서부영화에서 긴장감을 더해주던 그의 음악은 절묘함 그 자체였다. 영화의 극적인 감동과 함께 마음을 울려주던 주제곡들의 강렬한 인상은 아마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 내한공연 포스터
그러던 어느 날.....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2007년 10월 3일 내한공연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의 내한공연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침 티켓을 구할 수 있어서 공연 날짜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그 수많은 명곡들을 쓴 거장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연날 10월 3일이 돌아왔다. 공연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러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하릴없이 공원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공연시간이 다 되어 공연장인 체조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입장권은 18만원짜리 R석인데도 무대에서 한참 멀었다. 연주장면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무대 양쪽에 설치한 화면을 통해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엔니오 모리꼬네
공연은 예정보다 20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막이 오르자 무대에는 이미 80인조의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100여명에 이르는 합창단이 자리를 잡고 엔니오 모리꼬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가운데는 엔니오 모리꼬네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한 연주자들도 많았다. 관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무대에 오른 엔니오 모리꼬네는 객석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한 뒤 곧바로 지휘봉을 들었다.
전체 5부로 구성된 공연의 1부 주제는 '삶과 전설(Life & Legend)'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영화 '언터처블(The Untouchables,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1987)' 주제곡을 오프닝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언터처블'은 FBI 엘리어트 네스(케빈 코스트너 분)가 청렴강직한 요원들로 특수조직을 만들어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로버트 드 니로 분)와 갱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소탕작전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FBI와 마피아 사이의 쫓고 쫒기는 긴박한 상황을 실감나게 잘 나타낸 연주였다.
'The Untouchables' Main Titles theme, live in Munchen
'언터처블'에 이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1984)' 삽입곡으로 애상적인 '데보라의 주제곡(Deborah's Theme)'과 우울하면서도 구슬픈 '빈곤(Poverty)',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차례로 이어졌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 - 'Deborah's Theme', live in Venice
'once upon a Time in America' - 'Poverty', live in Warsaw, Poland
'once upon a Time in America' Main Titles theme, live in Warsaw, Poland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속의 세계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나는 가난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갱단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유태계 이민자 소년이 되어 골목을 휩쓸고 다녔다. 또, 어린 시절의 데보라(제니퍼 코넬리 분)가 발레 연습하는 장면을 벽에 난 구멍을 통해서 몰래 훔쳐보는 소년 누들스(스코트 타일러 분)가 되기도 하고, 갱이라는 이유로 짝사랑하는 데보라(엘리자베스 맥거번 분)에게 구애를 거절당하고 절망에 빠지는 청년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 분)가 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 희망을 찾아 신대륙 미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에서 평생을 산 천재 피아니스트(팀 로스 분)의 삶을 그린 판타지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1998)'의 주제곡 'The Legend Of The Pianist on The Ocean'을 마지막으로 1부 테마 연주가 끝났다.
'The Legend of 1900' - 'The Legend Of The Pianist on The Ocean', live in Warsaw, Poland
처음에는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다가 바이올린의 애잔한 선율이 이어지고, 막바지에 이르러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클라이막스에 오른 다음 다시 도입부처럼 잔잔한 멜로디로 여운을 주면서 연주는 끝났다. 또 다시 쏟아지는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 세례......
'사회 속의 시네마(Social Cinema)'라는 주제를 가진 2부는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선동적인 서사극'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lri,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 1965)' 주제곡으로 시작되었다.
'The Battle of Algiers(La Battaglia Di Algelri)'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알제리 전투'는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저항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투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였다. 트럼펫과 트럼본, 호른 등 금관악기의 협주로 시종일관 긴박감을 자아내는 연주는 FNL의 핵심지도자인 알리(브라힘 해기아그 분)와 그의 동지들이 프랑스군에 항복을 거부하고 장렬하게 폭사하는 비극적인 장면이 눈에 선했다. 이 영화는 프랑스와 그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오랫동안 상영이 금지되었었다. 제국주의 프랑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영화였다.
'알제리 전투' 주제곡이 끝나고 이탈리아 영화 '완전 범죄(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엘리오 페트리 감독, 1970)'의 주제곡이 이어졌다. 이 곡은 영화 '사이코(Psycho,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1960)의 주제곡을 만든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강렬한 서스펜스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음악과 함께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경찰 수사관(지안 마리아 볼론테 분)이 살인을 한 뒤 멀어지는 계단 장면이나 피가 샤워 배수구로 소용돌이를 치면서 빠져 들어가는 장면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이어진 연주는 안토니오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독재정권 치하의 리스본에서 한 신문사의 문화부 편집자로 일하는 페레이라(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분)가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청년(스테파노 디오니시 분)를 만나면서 포르투갈 정치체제의 어두운 면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의 영화 '소스티엔네 페레이라(Sostiene Pereira, 로베르토 파엔자 감독, 1995)' 주제곡. 클래식 기타 연주가 차분하게 이어지다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강렬한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According Pereira(Sostiene Pereira)' - 'A Brisa do Coração', live in Venice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The working class goes to heaven, 엘리오 페트리 감독, 1971)'의 주제곡은 다소 무겁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연주였다. 이 영화는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를 당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The working class goes to heaven'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전쟁의 사상자들(Casualties of War,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1989)' 메인 테마곡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서 미군들에게 윤간당한 뒤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베트남 소녀의 넋을 기리는 슬픈 장송곡이었다. 장중한 합창 피날레를 들으면서 가슴 한켠에 자리잡는 복잡미묘한 감정..... 그것은 분노였을까? 절망감이었을까?
'Casualties of War'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영화 '번(Burn, Queimada,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 1969)'의 테마곡으로 경쾌하면서도 장중한 합창곡인 '아볼리손(Abolisson)'을 마지막으로 2부 '사회 속의 시네마'는 끝났다.
'Burn(Queimada)' - 'Abolisson', live in Venice
2부 '사회 속의 시네마'를 통해서 엔니오 모리꼬네는 작곡가로서 높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도 이런 작곡가가 한 사람쯤 있었으면 좋겠다.
3부 주제는 '조각난 악보들(Scattered sheets)'. 첫곡은 초현실적인 코미디 영화 'H2S(로베르토 파엔자 감독, 1969)의 메인 테마곡이었다. 피아노 주자의 한 손으로 경쾌하게 치는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H2S'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시실리안(Le clan des siciliens, The Sicilian Clan, 앙리 베르누이 감독, 1969)' 주제곡은 프랑스 범죄영화 특유의 고독하면서도 우수에 찬 비장미를 기타 사운드에 실어서 잘 표현했다.
'The Sicilian Clan(Le clan des siciliens)'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이어진 연주는 '어느 날 밤의 만찬(Metti Una Sera A Cena, Love Circle, 쥬세페 파트로니 그리피 감독, 1969)'의 메인 테마와 '열정적인 사랑(Uno Che Grida Amore)'. 메인 테마는 세 개의 음이 무한반복되는 멜로디가 이탈리아풍의 아련한 무드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곡이었고, '열정적인 사랑'은 느린 템포의 단조로운 멜로디가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 찾아드는 공허감.....
'Love Circle(Metti Una Sera A Cena)'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Love Circle(Metti Una Sera A Cena)' - 'Uno Che Grida Amore', live in Venice
3부의 마지막 연주곡은 '막달레나(Maddalena, 예르지 카발레로비치 감독, 1971)'의 메인 테마 '컴 막달레나(Come Maddalena). 영화는 보지 못했다. 묵직한 베이스 기타 연주로 시작되어 단순한 멜로디를 무한반복하는 타악기와 관현악 협주가 후반부로 갈수록 고조되면서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합창이 장려했다. 엄숙하면서도 경건한 어떤 힘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Maddalena' - 'Come Maddalena', live in Venice
4부의 주제는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의 신화의 모더니티(The modernity of mith in Sergio Leone cinema)'. 엔니오 모리꼬네와 세르지오 레오네는 학교 동창이라고 한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수잔나 리가치(Susanna Rigaci)를 에스코트해서 무대로 나오자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우뢰처럼 쏟아졌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출세작으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의 메인 테마가 연주되자 관객들의 박수가 우렁차게 쏟아졌다. 휘파람 소리와 총 소리가 등장하는 유명한 테마 음악이다. 관악기와 휘파람, 장중한 남성 합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말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연상케하는 퍼커션 연주가 점점 고조되면서 서로 주고받는 리코더와 휘파람의 멋진 어울림..... 순간 오버랩되는 블론디(클린트 이스트우드 분)가 말을 타고 황야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장면..... 강렬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힘찬 남성 합창은 석양을 향해 달려가는 서부 사나이들의 고독과 낭만을 물씬 느끼게 했다. 항상 시가를 입에 물고 얼굴을 찡그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다음 연주는 '옛날 옛적 서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Once Upon A Time In The West, C'era una volta il West, 1968)' 타이틀 테마곡. 찰스 브론슨이 우수어린 하모니카 솜씨가 일품인 떠돌이 총잡이 '하모니카 맨', 헨리 폰다가 그 지역을 주름잡는 악당 프랭크로 나왔다.
'once Upon A Time In The West(C'era una volta il West)'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관현악 화음과 수잔나 리가치의 허밍 코러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고조되는 서사적 비장미..... 솔로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실려오는 애절한 슬픔과 외로움..... 이 메인 테마는 영화음악을 오페라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천상의 목소리'는 조수미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어진 연주는 마카로니 웨스턴 '석양의 갱들(A Fistful Of Dynamite, Giu la testa, 1971)' 주제곡..... 일명 'Sean's Theme'이라고도 한다. 주인공의 애칭인 'Sean'이 여러 차례 코러스로 반복되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수잔나 리가치의 허밍 절창은 고전 서부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했다.
'A Fistful Of Dynamite(Giu la testa)'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코트 안쪽에 다이너마이트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터프 가이 제임스 코번..... 그가 터뜨리는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영화다.
4부의 마지막 연주는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의 저 유명한 메인 테마 'The Ecstasy Of Gold'..... 장중한 관현악 연주와 함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수잔나 리가치가 부르는 격정적인 허밍 코러스는 장내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 'The Ecstasy of Gold', live in Venice
'투코(엘 왈라시 분)가 공동묘지에 도착해서 환희에 넘쳐 뛰어다니는 모습을 속도감 넘치는 패닝(panning) 기법으로 찍은 장면에 삽입된 이 곡은 감정을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하는 명곡이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곤 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작품에서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영화음악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록 그룹 메탈리카도 이 곡에 얼마나 매료되었으면 공연 때마다 오프닝 곡으로 사용할까!
Metallica - 'Ecstacy of Gold', July 28, 2009, Live in Copenhagen, DNK
5부의 주제는 '비극, 서정 그리고 서사시의 시네마(Tragic, Lyric and Epic Cinema)'. 이제 공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5부의 첫 연주곡은 '타타르 사막(The Desert of Tartars, Il Deserto Dei Tartari, 발레리오 줄리니 감독, 1976)'의 타이틀 테마.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단조롭고 느리게 연주되는 곡은 'The Ecstasy Of Gold'로 한껏 고조되었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The Desert of Tartars(Il Deserto Dei Tartari)'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이어진 연주는 '리차드 3세(Richard III, 1995)'의 타이틀 테마. 친형과 동생, 조카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왕권을 찬탈한 권력욕의 화신 리차드 3세..... 신경을 거스르는 고음의 트럼펫 연주..... 관악기와 현악기의 불협화음..... 리차드 3세의 악마성을 표현하려고 했음일까?
'Richard III'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엔니오 모리꼬네는 '타타르 사막의 재평가(The Desert of Tartars-Reprice)' 버전을 다시 한 번 들려 주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의 지평선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The Desert of Tartars(Il Deserto Dei Tartari)-Reprice', live in Venice
드디어 영화 '미션(The mission, 롤랑 조페 감독, 1986)'의 메인 테마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의 연주가 시작되자 쏟아지는 관객들의 박수..... 남미 오지의 원주민 마을에 도착한 가브리엘 수사(제레미 아이언스 분)가 원주민들이 그를 공격하려고 다가오자 자신이 위험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보에를 꺼내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에 삽입된 곡이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인디언들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가브리엘 수사가 오보에를 연주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영혼 깊숙이 울리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주였다.
'The mission' - 'Gabriel's Oboe', live in Venice
'미션'은 1750년 경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 부근에서 일어난 인디언 학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원주민 과라니족(Guarani)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이던 두 선교사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서 종교와 사랑, 정의가 무엇인가를 심오하게 그렸다. 1986년 칸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미션'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기독교인들의 선교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기독교는 전투적인 종교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다른 종교를 적대시해 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지 않았던가! 야훼가 무엇인지, 지저스 크라이스트(예수)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어진 연주는 역시 '미션'의 메인 테마 '폭포(Falls)'. 악랄한 노예상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 분)가 자기 부인을 사랑하는 동생을 엉겹결에 죽인 뒤 자신의 몸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달고 수직 절벽의 과이라 폭포(Guaira Falls)를 오르내리며 속죄의 고행을 결행하는 장면에 삽입된 곡이다. 음악에 빠져 들자 거대한 물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지는 이구아수 폭포(Iguazu Falls, 영화 촬영 장소)가 눈앞에 떠오르는 듯 했다.
'The mission' - 'Falls', live in Venice
공연의 마지막 연주는 '미션'의 타이틀 테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다(On Earth As It Is in Heaven)'.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연주와 합창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천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The mission' - 'on Earth As It Is in Heaven', live in Venice
공연시간 2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았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직접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니...... 정말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엔니오 모리꼬네는 관객들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무대를 떠났다.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엔니오 모리꼬네와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잔나 리가치, 그리고 윤학원 코랄 합창단을 위해 손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박수를 보냈다. 관객들도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끊이지 않는 박수소리......
엔니오 모리꼬네가 무대로 걸어 나오자 박수소리는 더욱 커졌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모리꼬네는 지휘봉을 들었다. 앙콜 곡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1988)'의 메인 타이틀 곡이 연주되자 또 다시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주옥같은 '시네마 천국' 주제곡을 앙콜 곡으로 남겨 두다니!
'Cinema Paradiso' Main Titles theme, live in Venice
첫 번째 앙콜 곡을 마친 엔니오 모리꼬네는 무대 뒤로 나갔다. 관중들은 두 번째 앙콜 곡을 요청하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박수소리..... 무대로 나온 엔니오 모리꼬네는 '석양의 무법자' 메인 테마 'The Ecstasy Of Gold'를 두 번째 앙콜 곡으로 들려 주었다. 수잔나 리가치의 허밍 코러스 절창을 다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퇴장하자 관중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로 세 번째 앙콜 곡을 요청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무대로 나온 엔니오 모리꼬네는 '사코와 반제티(Sacco & Vanzetti, 줄리아노 몬탈도 감독, 1971)'에 삽입된 'Here's To You'를 들려 주었다. 'Here's To You'는 1920년대 미국에서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된 이탈리아계 이민인 사코(N. Sacco)와 반제티(B Vanzetti)에게 바치는 헌정음악이다.
'Sacco & Vanzetti' - 'Here's To You', live in Venice
후반부의 장중한 합창은 주인공들의 넋을 위로하는 장송곡이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또 다른 주제곡 ‘사코와 반제티를 위한 발라드(The ballad of Sacco and Vanzetti)’는 반전가수인 존 바에즈가 불러서 크게 히트했다.
세 번째 앙콜 곡도 끝났다. 지휘대의 악보를 모두 챙긴 엔니오 모리꼬네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를 대동하고 퇴장했다. 그것은 이제 앙콜 곡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뜻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무대 뒤로 사라진 엔니오 모리꼬네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엔니오 모리꼬네의 내한공연은 모두 끝이 났다.
두 시간 동안의 공연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이토록 뛰어난 영화음악의 거장이 어떻게 지금까지 아카데미 음악상을 한번도 받지 못했던 것일까? 2007년에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텅빈 무대를 뒤로 한 채 아쉬움을 안고 체조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공연장을 나온 뒤에도 감동의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오늘의 이 감동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2007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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