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박물관은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瓜地草堂)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과지초당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자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마련한 별서(別墅)이다. 김노경의 친아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2차 유배지 함경도 북청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나기까지 여기서 4년 동안 거처하며 말년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추사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외에도 세 군데가 더 있다. 예산의 추사기념관과 제주의 추사관, 그리고 바로 이곳 과천의 추사박물관이다. 과천시는 추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3년 6월 3일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주암동)에 추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추사박물관은 추사를 종합적으로 연구, 전시, 체험할 수 있도록 추사의 생애실, 학예실, 후지츠카 기증실,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휴게공간, 뮤지엄숍, 교육실 등을 갖추고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
특히 추사박물관이 중요한 것은 추사 연구의 개척자인 일본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가 기증한 추사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는 자신의 부친이 평생 수집하고 연구한 추사 관련 자료 중 사진과 고서, 서신 23점을 2006년 과천시에 기증했다. 과천시는 후지츠카 아키나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와 추사의 친필 서간문, 금석학 자료 등 유물 1만 4천여 점을 모아 추사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추사박물관은 후지츠카 아키나오로부터 기증받은 사진과 고서가 전시된 기증실을 별도로 마련했다.
추사박물관은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추사 자료를 생애와 시대별 공간으로 나누어 전시해 놓았다. 생애와 시대별 순서에 따라 관람을 하다 보면 추사의 어린 시절, 칭(淸)나라 옌징(燕京, 베이징)에서 탄시(覃谿) 웡팡깡(翁方綱, 1733~1818), 윈타이(芸臺) 롼위안(阮元, 1764~1849) 등 대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던 시절, 금석학 연구와 예술을 꽃피우던 한양 시절,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의해 유배 생활을 겪고 나서 마지막 안착지 과천 과지초당 시절 등으로 이어지는 추사의 일생을 만날 수 있다.
추사박물관에 전시된 자료 중 진품과 복제품, 인화품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진품은 아무런 표식이 없다. 작품 설명글 중에 복제면 복제, 인화면 인화라고 적혀 있다. 아무런 표식이 없다면 진품이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벽화
추사박물관 옥상 북동쪽 벽에는 추사의 대표적인 묵란도(墨蘭圖) 가운데 하나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벽화가 그려져 있다. 원화(原畵)는 세로 55㎝, 가로 31.1㎝의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다. 이 묵란도는 추사의 제시(題詩)에 따라 제목을 '부작란도(不作蘭圖)'라고 했다. 요즘에는 이 묵란도의 주제를 고려해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라고 부르는 것이 대세다.
'불이선란도'는 원래 달준(達俊)이라는 사람에게 주려고 그렸지만 오대열(吳大熱)이라는 사람이 보고 먼저 가져갔다고 한다. 오대열은 단박에 추사 그림의 진면목을 알아본 것이다. 내가 오대열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추사박물관은 '불이선란도'에 대해 '김정희 회화세계의 정수는 묵란인데 그중에서도 이 그림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 20년 동안 불이선(不二禪)의 경지에서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난이 갑자기 득도하듯 눈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 그림은 문인화의 사의(寫意)와 문기(文氣)의 세계를 넘어 종교적 법열의 심오한 경지까지 느끼게 해준다. 붓질의 방향을 3번 바꾸며 이루어진 삼전지묘(三轉之妙)의 난엽들이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 농축된 강한 힘을 발산하고 있다. 꽃은 맨 좌측에서 꺾여 뻗어올라간 끝에 달려 있는데 2개의 짙은 먹점이 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난초의 밑과 위를 조화시켜 준다. 그리고 특유의 추사체로 여백을 가득 메우고 있는 화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 일치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필선미와 이념미가 극치를 이루며 융합된 이 그림은 김정희 예술세계의 뛰어난 격조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설명하고 있다.
추사박물관 2층 전시실
추사박물관은 2층 전시실부터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2층 전시실 입구 벽에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그린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과 추사가 8살 때 친부 김노경에게 쓴 편지가 걸려 있다.
소치(小癡) 허련(許鍊) 작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은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다. 크기는 51.9×24.7cm이다. '阮堂先生肖像'은 전서(篆書), 그 밑에는 행서(行書)로 '小痴許鍊寫本(소치허련사본)', 그 왼쪽에는 '先生騎鯨後七十八年甲子夏吳世昌恭題(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78년이 되는 갑자년 여름에 오세창이 삼가 씀)'이라고 적혀 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난 지 78년이면 1924년이다. 기경(騎鯨)은 차이싀쟝(采石江)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물에 빠져 죽은 탕(唐)나라 시선(詩仙) 리바이(李白)를 두고 사람들이 '李白騎鯨飛上天(리바이가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초상은 허련이 그리고, 글씨는 위창(葦滄, 韙傖)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허련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추시 말년의 풍모를 그렸다. 얼굴 주름과 수염은 마른 붓질을 여러 번 반복하여 세밀하게 묘사하였지만, 의관(衣冠)은 대조적으로 몇 개의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허련은 추사가 아꼈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사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격조 있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세계를 지향했던 허련을 매우 높이 평가한 추사는 위안(元) 말 사대가 중 한 사람인 따치(大痴) 황궁왕(黃公望)을 염두에 두고 제자에게 소치라는 호(號)를 지어 주었다. 스승을 몹시 존경한 허련은 추사의 유배지 제주도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 당시 제주도 뱃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다.
허련은 조선 말기의 선비 화가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자는 마힐(摩詰), 이명은 허유(許維)다. 호는 소치(小痴), 노치(老痴), 석치(石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등과 함께 추사파에 속한다. 허유라고 개명(改名)한 것은 탕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畫)의 효시인 왕웨이(王維)의 이름, 마힐은 왕웨이의 자를 따른 것이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허련은 헌종(憲宗) 이환(李奐)의 배려로 1848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親臨會試)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정2품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오세창은 일제강점기 서예가,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다.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韙傖)이다.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 수집가였던 오경석(吳慶錫)의 장남이다. 오세창은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 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畫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왼쪽의 발문(跋文)은 우당(于堂) 윤희구(尹喜求, 1867~1926)가 쓴 것이다. 발문은 '阮翁小照, 爲許小痴筆, 先生從孫韋堂公屬族人承烈藏之, 先生風骨 在海內 千秋 雖無丹靑可也, 藏者一辯香, 豈止爲七分之貌而已. 海平 尹喜求 拜觀(완당 어른의 초상화는 허소치가 그렸는데, 선생의 종손 위당공이 집안 사람인 승렬에게 모시도록 하였다. 선생의 풍골은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채색을 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초상화를 모시는 사람의 한결같은 존경심이 어찌 겉모습에 그치겠는가! 해평 윤희구 삼가 절하고 뵘)이라고 적혀 있다.
윤희구는 조선 말기 관료이자 유학자이다. 위당(韋堂)은 조선 말기의 문신 김문제(金文濟)다. 승렬(承烈)은 종인(宗人) 김승렬(金承烈)이다. 예산에 있는 추사 묘비명도 김승렬이 짓고 썼다.
추사가 8살 때 친부 김노경에게 쓴 편지
2층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추사가 8살 때 생부 김노경에게 쓴 편지부터 만나게 된다. 추사는 어린 나이에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러니 낳아준 친부모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伏不審潦炎 氣候若何伏慕區區 子侍讀 一安伏幸 伯父主行次今方離發而意味 己日熱如此伏悶伏悶命弟 幼妹亦好在否餘不備伏惟 下覽 上白是 癸丑流月初十日 子正喜 白是(엎드려 제대로 살피지 못한 가운데 더위가 심합니다. 어찌 지내시는지요? 소자 사모하는 마음 구구합니다. 저는 어르신 잘 모시고 열심히 책 읽으며 공부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큰아버님께서 이제 막 행차하시려 하는데 비는 내리려 하고, 날은 아직도 무더워서 참으로 염려됩니다. 동생 명희와 어린 여동생도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지 못합니다. 하람하십시요. 사뢰어 올립니다. 계축년 유월 십일 아들 정희 올림)
8살이라면 겨우 천자문 공부에 들어갔을 법할 꼬맹이인데 한문 서체가 저 정도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바로 추사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
'我生九夷(아생구이)' 칠언시
추사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칭나라 옌징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했다. 옌징에서 추사는 당대의 대학자 웡팡깡과 롼위안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웡팡깡과 롼위안은 추사의 해박한 지식과 높은 경지에 놀란 나머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당시 웡팡깡의 나이는 78세, 추사의 나이는 겨우 24세였다. 추사는 칭나라의 선진 고증학을 접한 이후 금석학, 역사학, 불교학 등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옌징에는 쑤둥포(蘇東坡)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숭(宋)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쑤둥포는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탕숭 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시서화에 능했던 웡팡깡은 쑤둥포를 사모한 나머지 자신의 서재 이름을 '쑤둥포를 보배로 여기는 집'이란 뜻의 빠오쑤짜이(寶蘇齋)로 지었다. 추사는 옌징에 오기 전부터 대학자 웡펑깡의 명성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웡펑깡을 사모한 나머지 자신의 처소 이름을 '담계(覃溪, 웡팡깡의 호)를 보배로 여기는 집'이란 뜻의 보담재(寶覃齋)로 지었다.
12월 19일은 쑤둥포가 태어난 날이었다. 당시 옌징에서는 웡팡깡을 중심으로 12월 19일 쑤둥포 탄신일을 맞아 둥포지(東坡祭)가 열리곤 했다. 둥포지는 조선에서 옌징으로 동지사(冬至使)를 보내는 시기와도 맞아 떨어졌다. 둥포지를 주최한 칭나라 문인들은 조선의 연행 사절들이 오면 행사에 초대하곤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朴齊家)도 둥포지에 참석했다.
1810년 1월 29일 추사는 웡팡깡의 빠오쑤짜이를 찾았다. 조선에서 온 청년 추사의 해박한 식견에 놀란 노학자 웡팡깡은 그 자리에서 '經術文章, 海東第一(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그는 또 자신이 소장한 비첩(碑帖), 탁본(拓本) 등 금석(金石)과 서화(書畵) 진적(眞迹)들을 보여 주며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웡팡깡을 비롯한 칭나라의 내노라하는 문인, 학자들과 만난 감격에 추사는 '我入京, 與諸公相交, 未曾以詩訂契. 臨歸不禁悵觸, 漫筆口號(내가 옌징에 들어가서 여러 인사들과 더불어 교유하였으나 일찍이 시로써 사귐을 맺지는 못했다. 돌아올 즈음 서글픈 마음을 금하지 못해 붓으로 읊조린다)'라는 제목의 칠언시를 지었다.
我生九夷眞可鄙(조선 땅에 태어난 나 참으로 초라한데)/多媿結交中原士(중원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럽기 짝이 없네)/樓前紅日夢裏明(누대 앞 붉은 해는 꿈속에 밝아 있고)/蘇齋門下瓣香呈(소재의 문하에서 향을 살라 올렸지)/後五百年唯是日(오백년이 지난 뒤 다만 바로 이날이요)/閱千萬人見先生(천만 사람 두루 거쳐 선생을 보았다네)/芸臺宛是畵中覩(운대는 간데없이 그림 속 광경이라)/經籍之海金石府(경적의 바다 금석의 창고로세)
'九夷'는 중궈런(中國人)이 동이족(東夷族)에게 붙인 9가지 종족의 명칭이다. 시를 보면 칭나라의 선진문물을 접한 추사는 그만 주눅이 들었고, 웡팡깡과의 만남도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듯하다. 함련(頷聯) 전구(前句)의 '樓前紅日'은 쑤둥포의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중의 한 구절이다. 웡팡깡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쑤둥포 초상화와 1768년부터 수장해 온 쑤둥포의 진적 '천제오운첩'등 진귀한 서적을 추사에게 보여 주었다. 당시에 본 '천제오운첩'의 필적이 눈에 선하다는 뜻이다. 웡팡깡이 소장한 엄청난 양의 금석문과 서화 진적들을 직접 목격한 추사가 압도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윈타이(芸臺)는 징쉬에따싀(經學大師) 롼위안의 호이기도 하고, 칭나라 미수거(祕書閣)의 별칭(別稱)이기도 하다. 롼위안은 타이화솽뻬이즈꽌(泰華雙碑之館)으로 찾아온 추사를 만나 사제의 의리를 맺고, 자신의 저서를 기증했다. 주허녠(朱鶴年)은 귀국하는 추사를 위해 전별연을 베풀고 치우싀시엔셩지엔비에옌투(秋史先生餞別宴圖)를 그려 주기까지 했다. 이들 사이에는 수많은 시문과 서화가 오갔다.
귀국 후에도 추사와 옌징 학계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1812년 추사는 웡팡깡이 지은 '빠이포꿍셩르싀(拜坡公生日詩)' 초고를 구해 책으로 묶어 쑤둥포와 웡팡깡의 상을 그린 뒤 옌징으로 보내 웡팡깡의 친필 제시(題詩)를 받기도 했다. 1813년 8월 16일 웡팡깡의 79회 생일을 맞아 추사는 향의 피워 장수를 송축(頌祝)하고, 손수 쓴 '무량수경(無量壽經)'과 '남극수성(南極壽星)' 편액을 선물하였다. 답례로 웡팡깡은 '싀안(詩盦)' 편액과 행서 대련, 그의 아들 웡수쿤(翁樹崑)은 '쩡싀티에(贈詩帖)'와 '홍떠우산좡(紅豆山莊)' 편액을 보내왔다.
웡팡깡(翁方纲)과 추사의 필담서
추사가 옌징에 갔을 때 웡팡깡을 만나 나눈 필담서(筆談書)다. 당시 추사는 중궈화(中国话)를 잘하지 못했던 듯하다. 추사는 어린 시절 옌징에 다녀온 북학파(北學派) 박제가(朴齊家)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칭나라의 신문물과 학문을 동경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주허녠(朱鶴年) 작 '추사전별도(秋史餞別圖)', 지본담채 30×26cm
40일 동안의 사행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추사를 위해 칭나라 학자들은 아쉬운 마음에 1810년 2월 1일 옌징의 파위안쓰(法源寺)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주허녠(朱鶴年)은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즉석에서 송별연 장면을 스케치한 '치우싀졘비에투(秋史餞別圖)'를 그리고 참석자 명단을 기록했다. 리린숭(李林松)은 전별시 '치우싀둥꾸이투싀(秋史東歸圖詩)'를 지었다. 이 시는 '쩡치우싀둥꾸이싀쥐안(贈秋史東歸詩卷)'으로 전한다.
추사의 신분은 자제군관, 즉 무관이었다. '치우싀졘비에투' 속 갓을 쓴 사람은 단번에 추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가 쓴 갓은 무관의 모자인 붉은색을 칠한 주립(朱笠)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문무관은 왕의 행차를 수행할 때나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국난을 당했을 때는 융복(戎服)을 입었다. 융복은 무관의 공복인 철릭을 입은 다음 전대를 차고, 붉은 칠을 한 갓(朱笠)을 쓰고, 수혜자(水鞋子)를 신은 차림이다. 철릭은 허리 아래를 넓게 하여 잗주름을 잡아 단 것이 특색이다. 융복은 무관의 편복이자 예복이지만, 전시나 왕의 행차를 수행할 때는 문관도 입었다.
나머지는 옷차림새로 알 수 있듯이 모두 칭나라 학자들이다. '치우싀졘비에투'를 보면 주빈인 추사를 중심으로 칭나라 학자들이 빙 둘러앉아 있다. 추사의 뛰어난 실력을 칭나라 학자들도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는 1809년(순조 9) 10월 28일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한양을 출발했다. 당시 한양에서 옌징까지는 대략 50일 정도 소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옌징에 도착한 때는 대략 12월 20일 전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추사는 언제 옌징을 떠났을까? 김노경이 옌징에서 일정을 끝내고 돌아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공(二玜)에게 귀국 보고를 한 때는 1810년 3월 17일이다. 귀국일에서 50일을 빼면 김노경 일행이 옌징을 떠난 때는 대략 2월 초순쯤으로 추정된다.
'치우싀졘비에투'는 추사의 옌징 인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제(題)에는 '쟈칭(嘉庆) 경오(1810) 2월 조선의 김추사 선생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면서 책을 내놓고 그림을 요구했다. 바빠서 많이 지을 수는 없으나 경치를 보고 그대로 그려 한때 멋진 모임을 기록하다. 함께 모인 사람은 양쩌우(揚州) 롼윈타이(阮芸臺), 빠이장(栢江) 리신안(李心庵), 이황(宜黃) 훙지에팅(洪介亭), 난펑(南豊) 탄투이짜이(譚退齋), 판위(番禹) 류싼산(劉三山), 따싱(大興) 웡싱위안(翁星原), 잉산(英山) 진진위안(金近園), 미엔쩌우(綿州) 리무쫭(李墨莊), 양쩌우(揚州) 주허녠이다.'라고 적혀 있다.
옌징 파위안쓰에서 열린 송별연에 추사의 스승 웡팡깡은 너무 고령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롼윈타이(阮芸臺)는 당대 칭나라 최고의 학자 롼위안(阮元)이다. 리신안(李心庵, 당시 41세)은 리린숭(李林松)이다. 그는 추사를 웡팡깡의 싀무수러우로 안내한 사람이다. 리신안은 항상 추사와 동행하면서 옌징의 명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추사는 그를 위해 '走題李心葊梅花小幅詩後(리신안의 메이화샤오푸싀 뒤에 제하다)'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지에팅(介亭)은 훙짠취안(洪占銓)의 호다. 훙짠취안은 웡팡깡이 인정한 제자다. 웡싱위안(翁星原)은 웡팡깡의 아들 웡수쿤이다.
리무쫭(李墨莊)은 싀주짜이(師竹齋) 리딩위안(李鼎元)이다. 리딩위안은 빠이러티엔(白樂天)의 시구인 '竹解虛心是吾師(마음 비울 줄 아는 대나무는 나의 스승이다)'라는 뜻을 빌려 호를 싀주짜이라 하였다. 리딩위안과 동갑이자 절친인 박제가는 리무쫭을 위해 '회묵장(懷墨莊)'이라는 시를 지었다.
주허녠은 주앙즈(朱昻之), 주번(朱本)과 함께 ‘싼주(三朱)’라 불린다. 추사는 옌징에 있을 때 펀팡지에(粉坊街)의 니타오싀우(擬陶詩屋)로 여러 차례 주허녠을 방문했다. 그는 중궈의 초상화를 많이 임모하여 추사에게 보내 주었다. 그의 작품으로 '둥포리지투(東坡笠屐圖)'가 전한다. 주허녠은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싀타오(石濤)의 화풍을 배워 산수화를 잘 그렸다. 옌징에서 추사는 주허녠과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었다. 추사는 '雅去客來(아거객래)' 행서 대련을 써서 인편으로 옌징의 주허녠에게 보내 주기도 했다.
윈징(惲敬)의 '따윈산팡원까오(大雲山房文藁)'
'따윈산팡원까오(大雲山房文藁)'는 칭나라 산문에 능했던 통청파(桐城派) 중에서도 양후파(陽湖派)였던 윈징(惲敬)의 저작이다. 양후파는 피엔원파(駢文派)에서 고문(古文)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어서 피엔리원(駢麗文)에도 능했다. 이들은 문장 규범을 육경(六經) 외에 잡가(雜家)에서도 취하였다. 양후파의 문세(文勢)는 거침이 없으면서도 심후(深厚)하다.
추사는 윈징의 '따윈산팡원까오'를 읽고 한두 가지 볼 만한 것은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이 책이 성운학(聲韻學)에는 정통하지만 고문의 궤칙(軌則)에는 뛰어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허장링(賀長齡), 웨이위안(魏源) 편찬 '황차오징싀원비엔(皇朝經世文編)'
'황차오징싀원비엔(皇朝經世文編)'은 장쑤부정싀(江蘇布政使)로 쭤중탕(左宗棠)을 키워준 허장링(賀長齡)과 칭나라 금문학파(今文學派)의 지도자였던 웨이위안(魏源, 1794∼1856)이 편찬한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 서적이다. 이 책은 추사의 문하에 출입한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의 소장본이다. 이 사실은 김병국(金炳國, 1825∼1905)이 쓴 것으로 전하는 '김수근묘표음기(金洙根墓表陰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김병학의 부탁으로 추사는 계산초로(溪山樵老) 김수근(金洙根, 1798∼1854)에게 '계산무진(溪山無盡)'글씨를 써 주기도 하였다. '황차오징싀원비엔'은 주자학과 고증학에 대항하여 공양학(公羊學)에 바탕을 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주창했다. 웨이위안은 영국과의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패배한 후 세계 정세와 해외 지리를 서술한 '하이궈투지(海國圖志)'를 지었다.
추사는 증조부가 영조의 부마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추사는 24살 되던 해인 1809년 칭나라 사절단의 부사(副使)가 된 아버지를 따라 옌징을 오가면서 칭나라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로 성장했다. 그의 금석학과 서화는 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추사가 45세 때인 1830년 정치 투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전라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고, 그 자신도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란 사람에게 귀양살이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반대파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가장 절친했던 벗 김유근(金逌根, 1785∼1840)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도 등을 돌리고,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지면서 추사는 오로지 독서로 유배 생활을 견뎠다.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그 누구보다 스승 추사의 처지와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칭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옌징에서 구한 최신 서적을 보내주었다. 1843년에는 옌징에서 어렵사리 구한 꾸이푸(桂馥)의 '완쉬에지(晩學集)'와 윈징의 '따윈산팡원까오'를 보내주었고, 이듬해에는 허장링과 웨이위안이 엮은 '황차오징싀원비엔'을 보내주었다. 모두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서적들이었다.
201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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