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 조지훈 시, 김성장 서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낙화(落花)'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 조지훈이 고향인 경북 영양에 낙향해서 지은 시다. 그는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지려고 하는 꽃을 바라보고 있다. 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인에게 지는 모든 것은 슬프다. 자신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으리라.
꽃이 지는 것은 숙명이다. 꽃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이 소멸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숙명을, 자연의 섭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별도 하나 둘 사라지고, 소쩍새 울던 밤도 기울면서 새벽이 가까와 온다. 꽃 지는 그림자를 보기 위해 촛불을 끈다. 순간, 꽃이 지면서 하이얀 미닫이에 보일 듯 말 듯 붉은색이 언뜻 비친다. 시인은 밤새 기다려 꽃 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삶의 무상함과 서글픔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시인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낙향하여 숨어서 시를 썼다. 지는 꽃을 바라보는 서글픈 시선 속에서 시인은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인의 자각이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이라는 시구에 담겨 있다.
세상을 피해 은일자(隱逸者)로 살아가는 이의 고운 마음은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누가 알까 두렵다. 남에게 그런 마음을 보여주기 싫다. 그래서 꽃이 지는 아침은 슬프고 무상해서 울고 싶은 것이다.
붓글씨는 김성장의 작품이다. 글씨체는 신영복 민체다. 글씨의 흐름이 마치 꽃잎이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날아가는 듯하다. 글자 한 획 한 획이 꽃잎 같다. 조지훈의 시가 김성장의 글씨를 통해서 아주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201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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