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 박두진 시, 김성장 서
해 - 박두진 시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뉘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박두진의 '해'라는 제목의 시다. 박두진은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일세를 풍미한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시인이다. '해'는 1946년에 발표된 시지만 1945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은 미군에 의해 일제로부터 한반도가 해방된 해다. 1946년은 아직 자주 독립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 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시기다. 미 군정 하에서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친미파로 변신한 우익 세력은 미국을 등에 업고 반공을 앞세워 좌익 세력을 탄압했다. 결국 동족상잔의 내전이 벌어졌고, 한반도는 남쪽의 대한민국(남한)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분단되었다.
시에서 세상은 캄캄한 밤중임을 알 수 있다. 어둠은 절망과 고통의 현실을 상징한다. 해방 전의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상징한다. 해방 후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한다. 해방은 되었지만 시인의 현실은 아직 어둠이 지배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는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어둠을 물리치려면 해가 솟아야 한다. 시인은 해가 이글이글 솟아올라 삽시간에 어둠을 살라버리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시인은 목이 터져라 외친다. 해야 솟아라! 어서 솟아올라 어둠을 몰아내라!
해는 기독교로 말하자면 혁명성을 띤 메시아(Messias), 불교로 말하자면 후천개벽(後天開闢) 미륵불(彌勒佛)을 상징한다. 메시아나 미륵불은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구원의 존재들이다. 해는 인간 사회로 말하자면 구시대의 압제와 착취를 혁파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을 열어줄 혁명가를 상징한다. 역동적인 사회 변혁 의지를 가진 민중을 상징한다.
달밤은 밤과 어둠의 연장선상에 있다. 달밤은 슬픔과 고통, 절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인은 달밤이 싫다고 외친다.
해가 솟아올라 어둠을 사른 세상은 광명이 넘치는 세상이다. 청산으로 상징되는 낙토다. 꿈에도 그리는 이상향이다. 억압과 착취, 고통과 절망, 분노와 슬픔이 사라진 세상이다.
광명 세상이 오면 사슴과도 놀고, 칡범(표범)과도 놀 수 있다. 또, 꽃도 새도 사람도 짐승도 모두 한자리에 앉아 평화롭고 행복한 날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세상이 바로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다. 기독교의 에덴 동산(Garden of Eden)이요, 불교의 용화세상(龍華世上)이다.
박두진에게는 과연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까? 2019년 지금은 과연 어둠이 물러간 세상일까?
김성장의 글씨는 신영복이 창안한 민체(民體)로 쓴 것이다. 민체를 연대체, 어깨동무체라고도 부른다. 이서가 창안하고 이광사가 완성한 동국진체(東國眞體), 김정희가 창안한 추사체(秋史體) 이후로 글씨체로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 바로 신영복이다. 김성장은 그의 제자이다.
신영복의 글씨 주제는 '더불어', '함께', '만남'이다. 그러니까 그의 글씨체는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민중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롯데주류애서 생산하는 소주 병의 글씨 '처음처럼'이다. 나는 롯데 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처럼'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신영복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문과 문재인 대통령의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의 글씨도 썼다. 서울시청의 '서울',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도 그의 작품이다.
2019. 10. 18.
'책 한 권 시 한 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화 - 조지훈 시, 김성장 서 (0) | 2019.10.23 |
---|---|
광야 - 이육사 시, 김성장 서 (0) | 2019.10.22 |
旗ㅅ발(깃발) - 유치환 시, 김성장 서 (0) | 2019.10.17 |
추억 - 조병화 시, 김성장 서 (0) | 2019.10.16 |
향수 - 정지용 시, 김성장 서 (0) | 2019.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