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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 조병화 시, 김성장 서

林 山 2019. 10. 16. 23:05


추억 - 조병화 시, 김성장 서


추억 - 조병화 시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시인 조병화가 1949년에 쓴 시다. 무언가 짠하고 애잔한 시다.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는 존재가 잊어 버리자고 한들 죽을 때까지 그게 잊혀질 리가 있겠는가!


작곡가 최영섭을 빼놓고 '추억'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은 인천이 고향이다. 조병화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최영섭은 서울대학교 음대에 다니고 있었다. 나이차는 많았지만 두 사람은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열차에서 만나 곧 친구처럼 동지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인천 송도에 자주 갔다. 거기서 두 사람은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면서 문학과 음악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조병화는 특히 술을 좋아했다.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며 자작시를 낭독하곤 했다.


어느 날 R이라는 여류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독주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인 표관(瓢館)에서 열렸다. 두 사람도 R의 연주회를 보러 갔다. R의 독특한 터치와 표현, 화려한 의상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조병화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의 가슴에는 R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번 만난 적도 없고, 이야기도 나눈 적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1949년 초겨울이었다. 두 사람은 송도에 갔다. 조병화는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더니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회한과 그리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로 시작되는 자작시를 읊기 시작했다.  


최영섭은 재빨리 종이와 연필을 꺼내 그 시를 받아 적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최영섭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곡 '추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병화에게 R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여인이었기에 그리움은 그만큼 더 절실한 것이었다. 그 여인으로 인해 조병화는 수많은 그리움의 시를 쓰게 되었다.


김성장의 글씨는 한글 전서체(篆書體)라고 할 수 있다. 대전(大篆)은 다소 복잡해서 보통 소전(小篆)을 전서라고 한다. 전서는 일반적으로 서선이 일정하고, 운필은 수평과 수직으로 하며, 글꼴은 사각형을 이룬다.


2019.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