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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시, 김성장 서

林 山 2019. 10. 15. 14:32


향수 - 정지용 시, 김성장 서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는 충북 옥천 출신 정지용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 유학 시절에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다. 시인은 먼 타향에서 고향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며 향수를 달랜다. 


넓은 벌,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비인 밭, 늙으신 아버지, 짚베게, 화살, 어린 누이, 아내, 까마귀 등은 시인과 고향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베개는 요즘 구경하기도 힘든 것들이다. 


요즘 잘 쓰지 않는 시어들이 많이 나오지만 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각 연의 끝에서 반복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구절은 자칫 산문처럼 보일 수도 있는 시에 운율을 생겨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가수 이동원은 '향수'를 노래로 불렀다. 테너 박인수도 '향수'를 불렀다. 시도 좋지만 노래도 참 좋다. 하지만 내가 따라부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노래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초기에는 주로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노래했다. 정지용은 한때 남한에서 지워졌던 시인이다. 그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김성장 시인이 쓴 글씨가 참 재미있다. 처음에는 옹달샘에서 샘물이 솟아나듯 작고 가늘게 쓰기 시작한다. 실개천이 흘러서 내가 되고 강이 되듯이 글씨도 점점 커진다. 냇물이 구불구불 흐르듯 글씨도 그 흐름을 따라 구비친다. 글씨가 그림이 되어 완성되는 순간이다. 글씨에서 신영복체가 보인다. 


2019.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