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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 이육사 시, 김성장 서

林 山 2019. 10. 22. 13:59


광야 - 이육사 시, 김성장 서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해지던 시다. 이 시는 1945년 12월 17일 동생 이원조(李源朝)가 자유신문에 자신의 시 '꽃'과 함께 발표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시는 이육사의 문학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1연~3연은 마치 바이블의 천지창조를 연상케 한다. 까마득한 옛날 닭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던 시대다. 산맥과 강과 바다가 생기던 시대다. 큰 강물이 길을 열고, 모든 산맥이 바다를 향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는 못했다. '이곳'은 이육사의 조국 한반도다. 그만큼 한반도는 거룩한 땅이요, 신성한 땅이다.


'광야'의 시공간은 그 규모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길고 크다. 이는 이육사가 광활한 중국 대륙을 왕래하면서 체득한 시공간의 개념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이 눈은 상서로운 눈이 아니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엄동설한의(嚴冬雪寒)눈이다. 모든 것을 싹쓸이하는 눈이다. 눈은 바로 간악한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 침략자(侵略者) 일본(日本, Japan)을 상징한다. 그리고 일제 침략자들에게 붙어 독립지사(獨立志士)들을 탄압하면서 호의호식하는 매국노(賣國奴), 친일민족반역자(親日民族反逆者)들이 득세한 세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온 세상을 한설(寒雪)이 뒤덮었어도 매화(梅花) 향기 홀로 가득하다. 한설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는 지조(志操)와 절개(節介)를 상징하는 꽃이다. 여기서 매화는 조국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상징한다. 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를 몰아내고 친일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 동토의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씨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품은 존재다.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는 것은 시 한 수를 무기 삼아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일제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씨를 뿌린 다음!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린다. 백마는 행운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 줄 영웅을 상징한다. 나아가 그 영웅과 함께 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시인은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노래의 씨가 동토를 뚫고 자라나 화려한 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국 광복이 되는 바로 그날 영웅과 민중이 함께 광야에서 목 놓아 노래를 부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이다. 엄숙하고 비장미가 넘치는 저항시다.


1945년 8월 15일 미군에 의해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프랑스처럼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했다.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일본 대신 미국을 등에 업고 다시 남한의 정치 권력을 장악한 조국은 이육사가 바란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웅이나 민중에게는 절반의 해방, 절반의 광복, 절반의 독립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바로 그 증거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으로 경북 안동 출신이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갇혔던 형무소 수인 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이육사는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시풍으로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비극과 저항 의지를 노래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절정’, ‘광야’, ‘꽃’, ‘청포도’ 등이 있다. 유고 시집으로 '육사 시집'(1946)이 있다. 안동댐 입구에는 '광야'를 새긴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져 있다.


글씨는 김성장의 작품이다. 글씨체는 신영복 민체(民體)다. 민중을 지향하는 글씨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민중들은 이 글씨체를 구사하기는 힘들다.


2019.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