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역사(歷史, history)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승자(勝者)들이 꾸려가는 역사가 바로 오늘 이 현실인 것이라면, 역사의 패자(敗者)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패자의 남겨진 자식들은 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탄식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마침내는 그리하여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 되고 말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역사에서 밀려난 우리 할아버지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름답고 훌륭한 세상을 이루고자 어떻게 움직이다가 어떻게 그리고 왜 쓰러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진실'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자손된 자 도리가 아닐까요? 역사의 거친 바다에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 부릅뜬 눈 떠올려 보는 마음 애잡짤합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역사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방 잘못된 역사만을 알고 있습니다. 반쪽 역사는 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사왜곡죄는 당대로 끝나지 않으니 그 폐해가 후대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사람'을 한자로 '史覽'으로 쓰니, 역사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마침내 '사람'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먼저 김삼룡(金三龍)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으로부터 역사기행을 비롯하고자 합니다. 김삼룡은 충북 충주시 엄정면에서 출생했습니다. 1939년 김삼룡은 박헌영(朴憲永), 이현상(李鉉相), 이관술(李觀述) 등과 함께 제국주의 일본 통치하 비밀 공산주의운동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1940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김삼룡은 1945년 8월 16일 출감, 박헌영과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 8월 21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장안파를 흡수하여 재건한 조선공산당에서 박헌영은 총비서, 김삼룡은 조직국 간부를 맡았습니다. 1946년 9월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하자 서울지도부의 총책이 된 김삼룡은 1950년 3월 치안국 수사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한강 백사장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 다음이 궁예(弓裔)입니다. 역사에 가장 먼저 기록된 혁명가이기 때문이지요. 궁예의 활동무대는 북으로 강원도 철원에서 남으로 경기도 안성까지입니다. 뒤이을 인물은 묘청(妙淸)과 신돈(辛旽)입니다. 묘청과 신돈의 활동무대는 평양과 개성입니다. 방북 신청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김성동(金聖東)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박종철출판사)에 나오는 인물 75명의 자취입니다. 그 밖에도 찾아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먼저 떠오르는 곳이 충남 예산에 있는 봉수산(鳳首山, 483m) 임존성(任存城)입니다. 후백제(後百濟)를 세웠던 견훤(甄萱)의 사적이 있는 곳이지요.
2021년 8월 15일
해방동모(解放同侔) 충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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