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판

[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 4차 답사] 김윤후 장군 대몽항쟁 유적지 대림산성

林 山 2022. 4. 27. 17:57

[공지] 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 4차 답사 

김윤후 장군 대몽항쟁 유적지 충주산성

 

답사 일시 : 2022년 4월 30일(토요일) 오전 9시

모이는 장소 :  천주교 연수성당 앞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대림산성 마을 창골

충주의 진산 대림산(大林山)은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국도변에 솟아 있다. 대림산성(大林山城)은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창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대림산에 쌓은 산성이다. 대림산성이라는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이고 있어 조선 초기에도 대림산이 봉수대(烽燧臺)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12월 31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대림산성은 험준하고 가파른 대림산의 지연지형을 이용하여 계곡을 포함한 산 정상을 둘러싼 포곡형(包谷形)으로 쌓은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다. 부산(釜山)의 동래(東萊)에서 조령(鳥嶺)과 계립령(鷄立嶺)을 거쳐 한양(漢陽)으로 통하는 영남대로(嶺南大路)를 제압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영남대로는 물론이고, 산성의 서남북쪽과 달천(達川)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림산성은 둘레가 약 5km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4~6m이다. 자연지형을 따라 경사가 심하고 곳곳에 암벽이 형성된 능선에 축성되어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요새이다. 비교적 접근이 쉬운 서문과 남문, 동문터 근처에는 2중, 3중의 방어벽을 별도로 설치하여 산성을 요새화하였다. 산성 곳곳에는 치성(雉城), 망루(望樓) 등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입구가 터져 있는 서문터 부근은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창골 입구에서 성문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길 뿐만 아니라 곳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마치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대림산성 안에는 우물터와 건물터, 절터 등이 남아 있다. 대림산 정상에는 봉수대 터가 있다. 봉수대는 조선 시대에 동쪽으로 수안보면 주정산(周井山)과 서쪽의 대소원면 마산(馬山)을 연결하던 곳이다. 

 

산성 주변에서는 무문(無紋), 어골문(魚骨紋), 격자문(格子紋)의 와편(瓦片), 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 병형토기편(甁形土器), 청자편(靑磁紋)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주류를 이룬 것은 백제의 연질토기편(軟質土器片)이다. 것으로 보아 대림산성은 백제의 옛 성으로 추정된다. 대림산에 주둔한 백제군이 남산성(南山城)의 신라군과 격전을 치렀다는 전설도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대림산성은 삼국시대의 성곽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림산성은 김윤후(金允侯) 장군이 노비군(奴婢軍)을 이끌고 몽골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충주산성(忠州山城)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어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김윤후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고 백현원(白峴院)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김윤후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살리타이(撒禮塔)의 대대적인 남하를 막으면서부터다.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끈 김윤후가 화살로 살리타이를 죽이자 결국 몽골군은 퇴각하고 말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포상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지만,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라면서 라고 사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그에게 섭랑장(攝郞將)을 제수했다.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 수령과 벼슬아치, 관군 지휘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분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되돌아온 충주군 수령과 벼슬아치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군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웠다. 이에 분노한 노비군은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21년 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남진하여 김윤후가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던 충주산성(忠州山城)에 이르러 70일간의 혈투가 벌어졌다.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김윤후는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면서 노비, 승려, 백성들로 구성된 노비군 격려하며 관청에 보관된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드높였다. 관군보다 용감하게 싸워 결국 몽골군을 패퇴시킨 충주산성 노비군은 관노, 백정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받았다. 김윤후도 공을 인정받아 정3품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임명되었다.

 

충주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김윤후가 제수받은 감문위는 2군6위 중 가장 한직(閑職)으로 개성의 성문을 지키는 부대였다. 다른 군·위와 달리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휴가병이나, 전투에 나서기 힘든 노병 또는 환자병 등 일종의 예비병력이 이 군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군사수도 단 1영으로 1천명에 불과했다. 

 

김윤후는 1259년 동북면(함경도) 병마사(兵馬使)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당시 동북면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된 몽골 땅이라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원종(元宗) 때인 1262년 정3품 벼슬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1263년 정2품 벼슬인 수사공겸우복야(守司空兼右僕射)까지 오른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윤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어릴 때의 기록처럼 거의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