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 시절을 선생과 함께 충주에서 살았다. 느닷없는 만남이었다. 이름난 작가지만 먼 발치에서라도 뵌 적이 없었고, 그이 또한 시골신부인 나를 알 리 없었다. 그런데 충주로 이사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몇몇이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내가 반응했다.
“그래요? 그러면 찾아가서 한 번 뵈어도 될까요?”
“글쎄요, 그게 좀….”
사람을 가리는 괴벽에 공연히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느냐고 소설가 안재성 선생이 슬며시 말렸다. 그렇기도 했다. 생면부지의 인연을 굳이 찾아가서 만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오시려거든 오시오’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싶었다. 날이 잡혔다. 2021년 5월 2일 오후 임종헌 한의원장(이태준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함께 그의 ‘절 아닌 절’ 비사란야(非舍蘭若)가 있는 양평으로 갔다. 막상 인사를 나누고 보니 데면데면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초면의 서먹함이란 아예 없었다. 그제도 어제도 만났던 사이처럼 하다만 이야기를 이어가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자주 간다는 보리밥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걸리 ‘지평’이 나왔다. 곡주로만 곡기를 채운 선생은 불쑥 ‘환영사’를 발표했다.
“아,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여. 난 당신들이 참 좋아!”
한 달 후 김성동 선생은 양평의 거처를 충주로 옮겼다. 충주 유원1차아파트 4동 1206호. 한반도의 중심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늘 소외되었던 중원지방을 샅샅이 답사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금기에 갇힌 역사와 문학을 해방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역사연구모임 ‘해방동모’가 생겨났다. 동모(同侔)란 동무, 곧 벗이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사명을 나누며 같은 일을 도모하는 귀한 벗이 바로 동모다. 우리는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충주시 엄정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삼룡 생가, 진천군 진천읍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 정태식 생가, 충주시 대소원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류자명 생가, 그리고 충주시 살미면에 있는 고려시대 김윤후 장군의 대몽항쟁 유적지 대림산성도 찾아갔다.
그때마다 김성동 선생은 답사기 겸 역사 에세이를 썼다. “세 정씨(鄭氏)를 찾아서”, “대림산성, 세계최강 침략군을 물리친 충주사람들”, “한강토 위를 떠도는 중음신,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그밖에도 훗날 홍범도 장군 휘하의 주요 전력이 되는 용문산 포수들의 이야기인 “충주성 두려뺀 미륵뫼 총댕이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는 “멈춰버린 인연의 수레바퀴”를 썼다. 하나같이 남한사회가 지워버리거나 잊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이승의 마지막 과업이라고 생각했는지 선생은 해방동모를 아끼고 앞장서서 이끌었다. 충주 탄금대 답사를 계기로 답사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즈음 건강이 악화되었다. 부쩍 체중이 빠졌고 빠르게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선생은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 제하의 원고를 썼는데 그만 세상에 남기는 최후의 육필 원고가 되고 말았다.
충주성과 미륵뫼 총댕이들
주묵(朱墨), 붉은 빛깔의 먹을 가리키지만 검은 먹으로 쓴 기록을 붉은 먹으로 새롭게 고쳐 쓴다는 말이다. 선생의 말과 글은 하나같이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민서(民庶) 중심의 역사로 새로 쓰고 싶었던 주묵의 결실이었다. 만나던 첫날부터 들었던 ‘미륵뫼 총댕이들’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는 중이다.
광복 76주년이던 2021년 8월 15일 평민 출신 의병장이자 독립군 대장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선생은 <충주성 두려뺀 미륵뫼 총댕이들>이라는 제목의 원고 한 편을 보내주었다. 미륵뫼는 양평 용문산이고, 총댕이는 총을 댕기는 이, 포수를 말한다. 양평 출신 김백선 장군과 용문산 포수들이 충주성을 두려뺀(성이나 적진 따위를 공격하여 빼앗다) 통쾌한 역사를 거론하며 글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용문산에서 총을 댕기던 포수들은 의병이 되었다가 마침내 독립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할 때 그 주력부대가 경기도 양평 용문산 포수들이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라 신기했고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홍범도 장군의 귀환을 계기로 의병과 독립군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의지를 느꼈다. 한편 오랫동안 양평에서 살다가 이제 충주에서 살게 된 작가로서 일종의 굿바이 인사 겸 도착성명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1895년, 을미사변에다 을미개혁, 그리고 을미의병이 박차고 일어나던 그해 시월 왜놈들이 왕비 민씨를 시해하자 유생들이 격분했다. 곧 이은 단발령에 민중들까지 거의토적(擧義討賊)이라는 대의에 호응하고 나섰다. 백면서생은 경서를, 쑥대머리 농민들은 쟁기를 던지고 연합했는데 유림이 주도하고 평민이 가세하여 탄생한 을미의병이었다. 충청도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고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지휘했던 의암 유인석의 이름이 드높았다.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은 1896년 1월 강원도 영월에서 일어났다.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등을 임명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10월까지 제천을 거점으로 원주, 영월, 영춘, 단양, 풍기, 충주, 음성 등지에서 항쟁을 지속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호좌의병진’ 항목)
부연하자면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중 경기도 지평(양근과 지평이 합쳐져서 양평이다)에서 이춘영, 안승우 등이 제천으로 들어가자 유인석의 문하인 이필희, 주용규 등이 합류했다. 제천의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의 포군이 주축이 됐는데 제천을 근거지로 투쟁을 벌였으므로 제천의병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단양 일대에서 접전한 뒤 풍기, 영춘을 지나 영월로 갔다. 여기서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좌군장 원규상, 우군장 안성해, 참모 박주순 등으로 부서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2월 영월을 떠나 제천에 머물면서 단양군수 권축, 청풍군수 서상기를 붙잡아 참형한 뒤 호서의 중심지인 충주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고 15일간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1896년 5월 관군을 앞세운 일본군에게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8월 하순 류인석을 비롯한 핵심 지도자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같은 곳)
이런 정도가 관변의 기록이며 정리이다. 다분히 문화재청 입간판 같은 소개문이라서 감흥이 없다. 양반 귀족을 중심에 둔 서술이며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궂은 일 도맡는 평민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이에 작가 김성동이 지평의 총댕이들과 그 선봉인 김백선 장군의 존재를 알린다.
“지평의진(砥平義陳)은 충청도 영춘을 거쳐 강원도 영월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류인석을 제3대 대장으로 모시고 의진 얼개를 다시 넓혀 짜는데 선봉장은 여전히 김백선(金百先)이었다. 그들이 충주읍성에 다다른 것은 1896년 정월 초닷새였다. 충주읍성을 지키는 병력은 왜병 2백여 명, 경병(京兵) 4백여 명, 충주 테안(일원) 병대가 5백여 명이니 모두 1천1백여 명이었다. 의병 숫자는 좌군장인 전 승지 우기정이 그 땅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 가운데 뽑아온 발민군(拔民軍) 3천여 명에다 리조승이 모아온 5백여 명이 지평의진을 돕고 있어 얼핏 대단한 숫자로 보였으나, 총을 지닌 싸울아비들은 김백선이 거느리는 용문산에서 큰불놀이하던 총댕이 4백여 명이 모두였다.”
머릿수만 많았지 의병이 가진 총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왜병, 경병의 신무기에 비하면 사거리가 턱없이 짧았다. 그런데 어떻게 충주성을 두려뺐을까(빼앗아 차지)? 만다라의 작가가 뜻밖의 사실을 알려준다.
“의병들한테 유리한 점이 있다면 4백여 총바치 모두가 경기도에서 가장 큰 산인 용문산에서 범·곰 잡던 명포수들이라는 것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범·곰 같은 사나운 짐승들과 맞닥뜨렸을 때 한방에 그것들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포수가 죽게 되니, 백발백중일 수밖에 없는 총댕이들이었던 것이다.”
‘한 방에 보낸다’는 말이 ‘일방포수’ 용문산 총댕이들로부터 나왔을까? 놀랍다. 선생은 내친 김에 충주성 싸움 30여 년 전인 병인양요 당시 유장(儒將) 양헌수와 함께 강화 섬에서 프랑스 육전대 물리친 것도 다름 아닌 용문산 총댕이들이었음을 밝힌다. 교과서에도 실리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소개되기도 했던 현존 유일의 의병사진은 1907년 영국 기자 맥켄지가 양평 들머리 아신리 강가에서 산자락 등지고 박은 것이다. 사진 속 의병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혼자서만 군모와 군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은 그 사람. 병인양요 때 용문산 총댕이들이 빼앗은 프랑스 장교 복장이었다. 우리는 왜 이런 걸 모르고 살았을까. 미륵뫼 산포수들의 빛나는 전과는 거듭된다. 프랑스에 이어 치명타를 입고 퇴각한 외국군대가 또 있었다.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1896년 3월 27일 항일투쟁의 선봉장이었던 김백선이 양반에게 대들었다가 군기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전격 처형되고 만다. 그걸 본 용문산 총댕이들은 속속 부대를 이탈했고, 중심타선을 잃어버린 류인석 부대는 제천에서 퇴각한 이래 줄곧 밀리다 결국 소멸되고 만다. “적은 토벌하지 않고 장수를 죽여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린” 결과였다. 왜군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저항의 불씨들이 버티고 있는 용문산으로 토벌대를 보낸다. 최신식으로 무장한 최강군대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용문산 미륵삼사(彌勒三寺)를 지키던 승병들과 손잡은 일방포수들에게 궤멸하고 만다. 프랑스 육전대처럼 된통 당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절치부심, 반격을 준비해서 돌아온다.
“미륵뫼 총댕이들 잡고자 히로시마에서 된닥달(고강도 훈련) 받고 1907년 끝 무렵부터 다음 해 첫 때까지 다시 싸움을 건다. 결사항전하던 의승병들은 혜목산 고달사로 갔다가 견딜 수 없어 두물머리로 간다. 제천·충주 쪽으로 내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거지반 북쪽으로 올라간다. 여염집 문짝 떼고 솔가지 엮어 쪽배 띄운 그이들은 두물머리 벗어나고 임진나루 건너 예성강을 넘어가니, 경기도 지평 미륵뫼에서 몰록(갑자기) 사라진 의승병들이 아이오(느닷없이) 황해도에서 불꽃처럼 떨쳐 일어서게 되는 까닭일레라. 진득찰도깨비 같은 왜병 토벌대에 쫓긴 그들은 구월산 너머 평안도로 올라갔고, 왜노들이 갈겨대는 세계 최강의 불땀질에 쫓겨 압록강 넘어가니 만주였다. 그때부터 요동벌에서 말 달리던 미륵뫼 총댕이들이었구나. 봉오동싸움·청산리싸움 으뜸구실은 바로 그이들이었으니, 김백선 장군 떠올리게 하는 함경도 총댕이 도꼭지(제일인자)였던 홍범도 장군 요동벌 같은 어깨 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1920년 6월과 10월이니 미륵뫼 총댕이들이 두물머리 건넌 때로부터 12년 만이었고, 그때부터 그이들은 ‘의병’ 또는 ‘의승’에서 ‘독립군’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의 돌부처
선생은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때기 자손이로다” 하는 한탄을 자주 했다. “벼가 돼야 할 우리가 피가 됐으니 이를 어쩌느냐!”며 울기도 자주 울었다. 슬기롭고 용맹했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역사를 깡그리 지우고 대대로 남의 집 머슴살이로 만족하는 무지몽매가 원통해서 그러셨으리라. 약주에 안주도 좀 곁들이셨더라면 오래 사셨을 텐데 하며 너무나 짧았던 만남을 어제도 오늘도 아쉬워한다. 그래도 그분을 만난 것은 복이었고 운이었다. 선생으로부터 글씨 한 점을 받았다. ‘無窮東明’ 넉 자 옆에 ‘六十五前中 金聖東”이라고 적혀 있다. “어째서 전중이랍니까?” 했더니 돌아온 답. “전직 중이란 말이오!” 이력에 ’전직 승려‘가 자꾸 따라다니니까 호를 짓는다면 ’전중(前中)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고 한다. “前은 앞으로 올 시간, 그러니께 새로운 세상을 가리키는 시간 개념이고, 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게 아니라 둥그런 원을 만들자는, 서로 해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 하는 비원을 담은 거지.”
전중 선생이 떠나고서 그의 불교 에세이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를 구해 읽었다. 가슴을 쳤다. 살아계시는 동안 묻고 여쭐 일이 애달픈 역사뿐이 아니었는데, 생명과 진리의 문제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내가 오랫동안 듣고 싶고 알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거기 수두룩하게 담겨 있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아니라 좌구보리(左求菩提) 우화중생(右化衆生) 이어야 한다는 대목부터 무릎을 쳤다.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비로소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이분법적 수직 개념이 아니라 괴로움의 똥바다를 허우적거리며 헤쳐 나가는 시대의 이웃들과 함께 깨우치고, 더불어 힘을 합쳐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의 뿌리를 뽑아냄으로써 마침내 이 세상을 사람의 땅과 자유의 나라로 만드는 좌우의 수평 개념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초판본이 1990년에 나왔는데 당시 그 어떤 종교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참 나를 찾아내서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우뚝 세워나가자는 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다. 개인이 몸답고 있는 중생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 나가자는 것, 곧 밑 모를 고통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들을 건져 주자는 것이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얽어매고 있는 온갖 부자유로부터 해방시켜 사람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차별 없는 자유세계로 끌어올려 주자는 것이다. 상구보리는 따라서 불성(佛性)의 완성을 말하고, 하화중생은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을 말한다.”
선생은 당신의 책들을 건네면서 처음에는 “金仁國 神父 淸安(김인국 신부 청안)” 하고 써주시더니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부터는 “金仁國 道伴 淸安(김인국 도반 청안)”이라고 하셨다. 그런 ‘엄청난’ 자격으로 선생이 남긴 유품 가운데 ‘돌미륵부처’를 내가 모시게 되었다. 물난리에 원고 천매를 잃고 망연자실할 때 비몽사몽간에 “나 좀 꺼내 줘” 하는 소리가 들려서 뭐에 끌린 듯 개울을 따라가다가 진흙 속에서 만났다는 그 부처님이다. “미륵(彌勒)은 미래와 당대를 총괄하는 존재이자, 혁명의 부처야. 그러고 보니 내가 쓴 <신돈(辛旽)>과도 연결이 되는 거야. 그래서 잃어버린 원고를 아깝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어. 미륵불(彌勒佛)이 내가 <신돈>을 다시 쓸 수 있도록 기억을 복원해줄 테니까.” 가신 어른이 그리워 맡겠다고 했지만 이게 또 무슨 인연일까 하고 묻는다. 그 앞에 향을 사르면서 또 묻는다. 오늘 나의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어떠해야 본분을 다하게 되는가?
밤새 술자리를 함께 한 방문객이 일어설 때마다 “너 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너는 외롭지 않니?” 하셨다는 전중 선생. 당신이 가시면 우리를 어쩌라고 이렇게 빈자리를 크게 만들어놓으셨나. “슬프고 막막한 사람들도 고루 잘 사는 고루살이 꿈꾸고/ 우리말 우리글 갈고 닦아/ 밤하늘에 별 같은 분들 빛내어 드리던/ 글지 김성동”(묘비)은 멀리 가고 아니 계시니 늦가을이 서럽고 쓸쓸하다.
글쓴이 김인국 생극성당 주임신부
#김성동 #김인국 #안재성 #임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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