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외출 돼지꿈 핸드폰을 든 남자 여행 옥수수 여름 파랑새 기다림 곰인형을 가진 남자 전화를 기다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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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월하정인>이란 작품이 있다. 초승달이 뜬 한밤에 큰 집 담곁에서 남녀가 밀회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쓰개 치마를 머리에 쓴 여인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시선을 사내에게 주면서 볼이 발그래하게 달아 올랐다. 한량으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는 왼손은 허리춤에 넣고 오른손은 호롱불을 든 채 ,조심스레 여인을 곁눈질하며 앞장서고 있다. 의습이나 신발 , 표정과 몸짓의 섬세하고 능숙한 처리는 가슴뛰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나는 최석운의 93년작 (새마을호)를 힐끗 보면서 상기한 작품을 떠올렸다. 새마을호에 우연히 같은 좌석에 앉게 된 두 남녀의 표정이나 감도는 분위기는 현대판 "월하정인"에 다름아니다. 째진 눈으로 서로를 힐끔힐끔 훔쳐 보는 두 남녀 의 모습 - 다소곳이 여자의 곁눈질과 왼손을 가랭이쪽에 대고 있는 남자의 눈길은 차창 밖의 꽃들과 함께 춘정을 한껏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석운의 그림이 우리 내부에 미묘한 정서를 건드리는 요인은, 그 조형어법이 단원이나 혜원을 비롯한 조선후기 풍속화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세항은 (표암유고)에서 단원이 "우리나라의 풍속과 인물 을 묘사하기를 잘하여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규방,누에치는 여자,이중으로 된 가옥,겹으로 난 문, 거친 산,들의 나무에 이르기 까지" 일상적인 주변풍경을 탁월하게 묘사했음을 적고 있다.
최석운 역시 담배 피우는 여자, 파리 잡는 남자, 에어로빅 하는 여자들,오줌 누는 남자,시골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남녀,기차안의 사람들, 복날의 개 잡는 광경, 홍수로 물 난리를 겪는 모습, 이발소에서 머리 깍는 풍경 등 우리 삶의 가장 통속적인 단면을 그려왔다. 단원이나 혜원처럼, 최석운은 자기 그림에서 내용 못지 않게 형식을 매우 중요 시 한다.인물의 모습이나 표정, 화면을 구성하는 부차적인 소재들을 극히 세심하게 계산하여 포치한다. 그것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에서 오줌누는 세 사람의 뒷 모습은 그 각각의 포즈에서 일상을 아주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 다. 화장실 벽의 흰색 타일과 옅은 청색조의 페인트 색상, 그리고 위쪽의 작은 창문 하나의 배치는 휑한 분위기를 더 썰렁하게 하고 있다.
풍속화의 계승
최근 그의 작품에서는 조선시대 풍속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이 더욱 절실한 형태로 반영되고 있다. "씨름" "복날" "나무에 오줌누는 남자" "옥수수"등의 작품은 이와 같은 관심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화면속의 구도는 일관된 시점이나 통일성을 지향하지 않고 화면 밖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각 인물들의 행위 또한 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발이나 처절한 투쟁보다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통해 냉철한 관찰자 혹은 기록자로서의 시점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속에 깃들어 있는 그 놀라운 해학정신을 목격할 때가 많다. 단원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작품속에 당대의 삶의 풍속을 가장 정직하게 그려내었던 거장이다. 특히 "씨름"을 보면 씨름에 열중하고 있는 두 장정과 그들의 경기를 응원하고 있는 관중과는 아랑곳없이 엿판을 메고 있는 천진한 총각을 통해 비속한 일상을 넘쳐나는 재치와 활달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중심은 지금 막 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장정에게 집중되고 있으나 그에 못지않게 화면은 둘러앉은 관중들이 화면 밖으로 확장되므로써 단원 다운 면의 자율성과 해학적 정신의 깊이를 보여 주고 있는데 최석운은 이 그림이 볼 수 있는 공간의 깊이와 정신의 자유로움에 매료된 것 같다. "복날"처럼 비속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괜스래 젠 체하는 예술의 세계에 야만적인 식욕을 충족시키는 풍속을 담아 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항간에 흠씬 두둘겨 죽인 개의 살코기가 맛있다는 통념이 유포되고 있으며 실제로 삼복더위마다 그런 일이 되풀이 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의 관심은 이러한 풍속의 재현이 아니라 그 공간 구조의 설정에 있다. 나무에 매단 개를 연신 구타하고 있는 야만적인 사람들과 그것을 군침을 흘려가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도회지에서 온 듯한 사람, 인간의 도륙행위를 마치 조소하기라도 하듯 막 도살된 동족이 삶길 솥에 오줌을 갈기고 있는 또 다른 개의 모습이 흡사 무대위에서 이루어지는 한바탕 연극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개별 대상은 제각기 중요성을 지니면서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으며, 복날의 정경을 필림 위에 정착된 이미지처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어차피 허구이며 연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적인 분위기의 연출을 위해 그는 반어적인 수사와 해학적 장치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네 변으로 분산되고 있는 구도에 의해 그림의 공간은 더욱 확장되고 있으나 화면은 꽉 차 있는 듯 하다. 인간의 행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의 형상은 단원의 그림에서 씨름경기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생업에 열중인 엿장수의 무표정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자유로운 구도 위에 이루어지는 넉넉함은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깊이 각인돼 있는 휴머니즘과 낙천적인 정신까지 담아내고 있어 그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게 만든다. 현대미술의 저 세련된 첨예한 이론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구축하고 있는 배짱과 고졸한 표현과 상투형에 대한 경고에 의해 전혀 요지부동인 그 단단한 자존심을 재산으로 여기고 있는 그는 오늘도 화가로서의 자신의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장인적 기질을 화폭 속에 그대로 드려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가 우리시대의 진정한 환쟁이 - 세속적 평가에 구에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꾸려가는 -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최 태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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