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6 - 팔공산(八公山) 백흥암(百興庵) (1)

林 山 2019. 12. 9. 15:59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작품 '樓(보화루)' 편액 글씨를 감상한 다음 백흥암(百興庵)으로 향했다.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백흥암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팔공산(八公山) 기슭에 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은해사에서 치일천(治日川)을 따라 북서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신일지(新日池)가 나타난다. 신일지 제방 근처에 운부암(雲浮庵)과 백흥암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삼거리에서 절골을 따라 서쪽으로 1.5km 정도 올라가면 백흥암에 닿는다. 백흥암 북동쪽에는 태실봉(胎室峰, 466m)이 솟아 있다. 태실봉 동쪽 능선에는 조선 인종(仁宗) 이호(李峼, 1515~1545)의 태실(胎室)이 있다.     


신일지(新日池)


백흥암은 암자로서는 그 규모가 꽤 큰 편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백흥암은 적인 혜철(寂忍惠哲785~861)이 861년(경문왕 1)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861년은 혜철이 입적한 해이다. 입적을 앞둔 혜철이 과연 백흥암을 착공할 만한 여건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암자 주변에는 잣나무가 많아서 창건 당시에는 백지사(栢旨寺)라 불렀다. 송지사(松旨寺)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520년(중종 15) 백지사는 태실봉 동쪽 기슭에 인종의 태(胎)를 봉안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1546년(명종 1) 경상감사 안현(安絃)의 주청으로 인종의 태실을 새롭게 경영하면서 백지사를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정하여 크게 고쳤고, 천교대사(天敎大師)는 사명을 백흥암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극락전(極樂殿)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교대사는 팔공산의 산세가 마치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그는 운부골의 서운(瑞雲)이 더욱 세차게 일어나 그 여세를 타고 용이 수월하게 승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바램에서 암자 이름을 백흥암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 백흥암은 인종의 태실 수호처(守護處)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백흥암


1643년(인조 21)에는 극락전을 중건했다. 1651년(효종 2)에는 백흥암을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도 또 한번 중수가 있었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樓)를 중건했고,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이금(李昑)은 백흥암을 어압봉안소(御押奉安所)로 지정하여 경상감사의 특별한 보호를 명하였다. 1797년(정조 21) 백흥암을 수리하였고, 1798년(정조 22)에는 원문(完文)을 새긴 현판을 내걸어 관원들로 하여금 백흥암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이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했다. 백흥암은 한때 승려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보화루, 영산전, 선방인 심검당(尋劍堂), 진영각(眞影閣), 명부전(冥府殿), 산신각(山神閣), 원주실(院主室), 요사채 등이 있다. 백흥암에는 1531년(중종 26)에 간행된 법화경판(法華經板)과 이 암자에 주석했던 24 고승들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암자는 현재 비구니 수도 도량이다. 안거(安居) 때에는 수십 명의 비구니들이 용맹정진한다고 한다.


백흥암 보화루


'樓(보화루)' 편액


백흥암은 남서향으로 터를 잡고 앉아 있다. 백흥암으로 들어갈 때 맨처음 만나는 2층 누각이 보화루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보화루에는 해서체(楷書體)로 단정하고 수려하게 쓴 '樓(보화루)'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기성 쾌선(箕城快善, 1693~1764)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편액 글씨의 흰색 칠은 거의 다 벗겨진 상태이다. 옛날에는 이 보화루가 문루였을 것이다. 1층 가운데 칸이 통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성(箕城)은 경북 칠곡군(漆谷郡) 가산면 가산산성(架山山城)의 별칭이기도 하다. 칠곡이 고향인 쾌선은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법손(法孫)이다. 기성대사는 가산산성 총섭(總攝) 근화(謹華)와 함께 칠곡이 배출한 걸출한 선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755년 은해사 삼장탱(三藏幀)을 조성할 때 증명법사(證明法師)를 맡을 정도로 노대덕이었다. 삼장탱은 하늘과 땅, 지하 삼계(三界)를 제도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과 지지보살(地持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묘사한 불화이다. 쾌선은 글씨에도 능해서 동화사(桐華寺)에도 편액 글씨를 남겼다. 동화사의 '八公桐華寺鳳凰門(팔공산동화사봉황문)', '鳳棲樓(봉서루)' 편액이 그의 작품이다. 세로획을 굵게, 세로획을 가늘게, 오른쪽을 무겁게 눌러 쓰는 그의 필체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松林寺)에는 기성대사비(箕聖大師碑)가 세워져 있다. 


백흥암 극락전


백흥암의 중심 전각인 극락전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극락전 앞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선방인 심검당, 서쪽에는 진영각, 남쪽에는 새로 지은 보화루를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장방형 ㅁ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중정식(中庭式) 가람 배치라고 한다. 진영각 뒤 축대 위쪽에는 요사채와 명부전, 명부전 뒤 왼쪽에는 영산전과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심검당 바로 뒤쪽의 요사채와 2층 다락집은 새로 지은 것이다.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식(多包式) 단층건물이다. 불단 뒤쪽 모서리에는 내진주(內陣柱)를 세우고 불벽(佛壁) 을 만들어 내부 공간을 구성하였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건물 전면의 어간에는 네 쪽으로 된 문짝을 달았고, 좌우의 협간(夾間) 에는 각각 같은 무늬의 세쪽 문을 달았다. 단청은 안팎 모두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금단청(錦丹靑)을 올렸다. 조선 중기의 문양 및 색조가 잘 보존된 이 금단청은 벽화와 함께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백흥암 극락전은 1984년 7월 5일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상(三尊像)을 떠받치고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수미단은 높이 1.25m, 너비 4.13m에 5단으로 27등분하여 제작한 명품 목조 탁자이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 천녀(天女), 동자, 봉황, 공작, 학, 용, 코끼리, 사자, 사슴,·물고기, 개구리 등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불교 미술의 정수로 알려진 이 수미단은 한국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極樂殿(극락전)' 편액


해서체로 쓴 '極樂殿(극락전)' 편액 글씨는 날렵하면서도 단정한 필세가 느껴진다. 이 편액의 서체는 '樓(보화루)' 편액 글씨 서체와 동일하다. 즉, 같은 사람이 쓴 글씨다. '極樂殿(극락전)' 편액 글씨는 쾌선의 작품이다. 이 편액의 방서(傍書)에는 '聖上二十二年乙丑六月日書'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이 편액은 쾌선이 영조 즉위 22년, 영조 21년(1745) 6월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백흥암 진영각


진영각은 혼허 지조(混虛智照)의 영정과 판본, 현판 등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어간마루를 중심으로 그 우측은 전통칸(全通間)에 우물마루를 깔았고, 좌측에는 온돌방을 들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온돌방에는 十笏方丈(시홀방장)’과 ‘華嚴室(화엄실)’ 편액, 기둥에는 여섯 폭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백흥암의 ‘十忽方丈(시홀방장)' 편액


十笏方丈(시홀방장)’ 판액 글씨는 추사가 쓴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해서체로 굳건하고 힘차게 쓴 글씨가 당연히 추사의 작품이려니 하고 감상하는데, 무심코 편액 왼쪽 하단의 도서(圖書)에 눈길이 갔다. 거기엔 기대했던 '秋史(추사)'나 '완당(阮堂)'이 아니라 '卍波正法(만파정법)'이라는 도서가 새겨져 있었다. 만파(卍波)는 조선 후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서 수행했던 만파 석란(萬波錫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만파는 석란(錫蘭)이 아니다,


만파는 만파 의준(萬波誼俊, 1796~?)이다. 해인사 '解脫門(해탈문)'의 편액이 바로 만파의 작품이다. 또, 해인사 한 산내 암자에 있는 주련 형태의 서각(書刻) 작품 '隱居復何求(은거부하구)', '无言道心長(무언도심장)'도 만파가 쓴 것이다. 이 서각 작품은 추사체의 필의(筆意)가 농후하다고 알려져 있다. 만파의 이 글씨는 숭(宋)나라 때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시(朱熹)의 오언절구로 읊은 '우이징싀자용(武夷精舍雜詠)' 12수 가운데 세 번째 시 ‘인치우짜이(隱求齋)’의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를 쓴 것이다. 


晨窓林影開(새벽 창에 숲 그림자 열리고)/夜枕山泉響(밤중 베갯머리엔 샘물 소리 울리네)/隱居復何求(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無言道心長(말 없는 가운데 도심이 자라나네)


산사의 주련이나 편액은 불경의 구절이나 고승의 시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중국의 대표적 유학자인 주시의 시가 주련에 판각되어 있는 것은 다소 특이하다. 조선시대 불승들은 불경을 공부하는 틈틈이 탕숭(唐宋) 시인들의 시를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隱居復何求'는 '쭈즈따디엔(朱子大典)'에 '隱去復何求'로 되어 있다.


1963년 해인사에서 간행한 '해인사지(海印寺誌, 김설제 편, 법보원)' 고승 조에 '만파 의준. 1860년경의 인물. 글씨를 잘 썼으며..... 추사가 만파의 글씨를 항상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인사 대장경 이야기'를 쓴 성안은 추사가 스승 만파의 글씨를 공경해서 해인사에는 자신의 글씨를 남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추사는 1786년생이고 만파는 1796년생이다. 추사가 10년 연하인 만파를 스승의 예로 모셨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시홀방장은 홀(笏) 10개를 이은 크기, 사방 1장(10척) 되는 정도의 작은 방을 의미한다. 재가수행자인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머물던 방을 이른 말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의 청빈과 무소유를 상징한다. 홀은 옛날 관리들이 예복을 갖춰 입고 손에 쥐던 작은 판으로 길이 33㎝, 폭은 3.5~5㎝ 정도다. 시홀방장은 큰 산중의 어른인 방장이나 그가 쓰는 방을 가리킨다.


시홀방장 바로 남쪽 끝에 붙어 있는 방에는 해서체로 단정하게 쓴 '華嚴室(화엄실)' 판액이 걸려 있다. 방서에는 '影波沙門手額雲浮同題(영파 사문이 운부암과 똑같이 손수 써서 걸다)'라고 쓰여 있다. '手'자와 '同'자는 거의 다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방서에는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확실하게 적혀 있다. '華嚴室(화엄실)' 판액 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화엄학(華嚴學)의 대강백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이다.  


성규의 호는 영파(影波), 자는 회은(晦隱), 속성은 전씨(全氏)이다. 아버지는 만기(萬紀), 어머니는 박씨다.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 근처에서 태어났다. 화엄학과 선(禪), 염불 등에 모두 밝았던 그는 대흥사(大興寺) 13대강사(十三大講師)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던 성규는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15세되던 해인 1742년(영조 18) 청량암(淸凉庵)에서 승려들이 불공드리는 모습을 보고 출가할 결심을 하였고, 1747년(영조 23) 청도 용천사(湧泉寺) 환응(喚應) 장로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해봉(海峯),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虛) 등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돈오(頓悟)를 결심하고 금강대(金剛臺)에 머물면서 이포성공척결도량(伊蒲盛供滌潔道場)을 설하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법력을 구하였다. 이포성공척결도량은 간단한 삿자리만 깔고 4분 정근 하는 기도장을 말한다. 4분 정근은 새벽, 사시, 2시, 저녁 등 하루에 4번 정성을 다해서 예불을 하는 것을 말한다. 9년 뒤 황산(黃山)의 퇴은(退隱)으로부터 '화엄경' 전질(全帙)을 받아 30년 동안 연구하여 깊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성규는 선을 공부할 때도 '화엄경'을 탐독했고,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관세음보살을 '화엄경'에 입각하여 원불(願佛)로 삼았다. 상언(尙彦)과 해원(海源)을 찾아가 화엄의 종지(宗旨)와 선의 진수를 체득한 뒤, 해원으로부터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등단(登壇)하여 대흥사, 은해사 등에서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성규는 대비주(大悲呪)를 하루 일과로 삼았다. 그는 1777년(정조 1)부터 1781년까지 5년 동안 대비주를 무려 10만 번이나 염송하였다고 한다. 연담(蓮潭) 이후 다문(多聞)과 덕망(德望)이 가장 뛰어난 승려로 평가를 받았던 그는 결코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뜻을 일찍부터 정토(淨土)에 두어 세속에 물드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비로써 병든 자를 보면 지극히 간호하였고, 재력에 따라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용서하지 않았고, 몸단속을 단정히 하여 가부좌를 흩뜨리는 일이 없었다.


평생토록 남의 시비를 말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티끌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며, 불경 천 상자를 배에 싣고 동해와 남해의 명찰들을 편력하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저술이나 제자들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규는 1812년(순조 12) 7월 27일 입적하였다. 속세의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1816년(순조 16)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남공철(南公轍)이 글을 짓고 심의경(沈宜慶)이 글씨를 쓴 '유명조선국영파대사비(有明朝鮮國影波大師碑)'가 은해사에 세워졌다. 성규의 글씨는 동화사 비로암(毘盧庵) 대적광전(大寂光殿) 편액에도 남아 있다.


2019.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