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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5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1)

林 山 2019. 11. 30. 20:05

미지의 세계를 처음 찾아갈 때는 언제나 가슴이 설레곤 한다. 팔공산(八公山, 1,192.3m) 은해사(銀海寺)를 찾아갈 때도 그랬다. 팔공산은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은해사는 초행길이었다. 은해사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현판 글씨가 있다고 해서 그의 묵향(墨香)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치일천(治日川)을 따라서 서쪽으로 팔공산 계곡을 향해 오르다 보면 은해능선의 끝자락쯤에서 은해사를 만나게 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팔공산은 옛날에는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이라고도 불렀다. 팔공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양쪽에 동봉(東峰)과 서봉(西峰)이 있으며, 그 산줄기는 칠곡군, 군위군, 영천시, 경산시, 구미시까지 뻗어간다. 


은해봉에서 바라본 팔공산맥


팔공산의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관련이 있다. 후삼국시대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 왕건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를 당하였다. 그때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왕건은 겨우 목숨을 구했다. 당시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의 북쪽에는 위천(渭川)의 상류인 남천(南川)과 여러 계류(溪流)가 흐르고, 동쪽에는 신녕천(新寧川)이 흐른다. 위천은 흘러서 낙동강으로 합류하고, 치일천과 신녕천은 흘러서 금호강으로 합류한다. 산의 남쪽은 완만하여 구릉성 산지가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 하천이 남류하여 동화천(桐華川)에 모인 후 금호강(琴湖江)으로 흘러든다. 금호강은 다시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팔공산은 산세가 웅장해서 예로부터 은해사를 비롯해서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寺), 선본사(禪本寺), 수도사(修道寺), 북지장사(北地藏寺), 관암사(冠巖寺), 송림사(松林寺), 부인사(符印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거조암(居祖庵), 백흥암(百興庵), 묘봉암(妙峰庵), 중암암(中巖庵), 운부암(雲浮庵), 기기암(奇奇庵), 서운암(瑞雲庵), 백련암(白蓮庵), 원효암(元曉庵), 염불암(念佛庵), 내원암(內院庵), 양진암(養眞庵), 부도암(浮屠庵), 비로암(毘盧庵), 성전암(聖殿庵) 등의 암자가 들어서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때는 유정(惟政)이 승군을 지휘하였던 곳이다. 


팔공산 기슭에는 영천시 청통면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 국보 제14호), 군위군 부계면의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국보 제109호),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 등 국보 2점, 보물 9점, 사적 2점, 명승지 30곳이 있다. 동화사 부근에는 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구세약수(求世藥水)가 있다.


팔공산은 160.1km에 이르는 팔공기맥(八公岐脈)의 주산이기도 하다. 태백 삼수령(피재)에서 백두대간과 이별한 낙동정맥은 남쪽을 향해 치달려 내려오다가 통점령과 가사령 사이의 가사봉(733.9m)에서 서쪽으로 팔공기맥의 가지를 친다. 가사봉을 떠난 팔공기맥은 고라산(744.6m), 베틀봉(934m), 면봉산(1,121m), 보현산(1,126m)을 지나 석심산(750.6m)에서 북쪽으로 보현지맥(普賢枝脈)의 가지를 친다. 팔공기맥은 다시 남쪽으로 방가산(755.8m), 화산(828.1m)을 지나 팔공산에 이른 다음 가산(901.6m), 좌베틀산(369.2m), 청화산(700.7m)을 거쳐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에 이른 다음 낙동강에 그 맥을 담근다. 팔공산 남동쪽은 환성산(811m)을 지나 초례봉(648m)으로 이어진다. 



은해사 천왕문


은해사로 올라가다가 처음 만나는 전각이 천왕문(天王門)이다. 천왕문은 은해사 일주문(一柱門) 역할을 하고 있다. 천왕문에 걸려 있는 '八公山銀海寺팔(팔공산은해사)' 편액 글씨는 동곡 일타(東谷日陀, 1929~1999)의 작품이다. 붓이 바람을 가르면서 운필한 듯 날렵하고 날씬한 필체다.   


은해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0교구 본사이다.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은해사는 본존불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 1) 적인 혜철(寂忍惠哲785~861)이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고 불렀다. 헌덕왕(憲德王, ?∼826)은 조카인 40대 애장왕(哀莊王, 788~809)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비명에 간 원혼을 달래고 참회하면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혜철국사로 하여금 해안사를 창건하게 했다.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사찰이 바로 해안사이다.


해안평은 은해사에서 운부골을 따라 2.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눈앞이 훤해지는 산중 평지가 나타난다. 바로 운부암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안개가 자욱이 낀 날은 산중 평지가 바다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해안평이다. 


1270년(고려 원종 11)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1228~1294)이 크게 확장한 이후 해안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이 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원참(元旵)이 중건했다. 1485년(조선 성종 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을 중창하고, 1543년(중종 38)에는 보주(寶珠) 등이 중수했다. 1545년(인종 1)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자, 1546년(명종 1) 천교(天敎)가 현재 위치로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仁宗, 1515~1545)의 태실(胎室)을 봉하면서 은해사라 부르게 되었다. 


사측에서는 '부처,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늘어서 있는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은해사는 또 신라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如海重重)'라고 표현한 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진표율사는 통일신라 때 승려이니 시대 차이가 너무 난다. 진표율사 생존시에는 해안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1563년(명종 18) 화재로 소실된 은해사를 다음해에 묘진대사(妙眞大師)가 중건했으며, 1589년(선조 22)에는 법영(法英)이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백흥암과 명부전(冥府殿)을 신축하였으며, 1667년(현종 8)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했다. 은해사는 1689년(숙종 15)에 법영(法英)과 의연(義演), 광심(廣心)이 중창하면서 대가람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숙종 40)에는 절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 천왕문에서 은해사 사이 금포정(禁捕町)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 당시에 심은 것이다. 1730년(영조 6)에는 백흥암의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다. 1737년(영조 13)에는 법당과 누각, 천왕문(天王門) 등을 단청하였고, 1750년(영조 26)에는 법당의 아미타후불탱화(阿彌陀後佛幀畵)를 조성하였다. 1759년(영조 35)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1761년(영조 37)에는 천왕문을 세웠다. 


1767년(영조 43)에는 백흥암의 영산전(靈山殿), 1772년(영조 48)에는 설화(雪華) 등이 백흥암의 동대(東臺)를 쌓았고, 자암(慈庵)은 대웅전(大雄殿)의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도봉(道峰)은 영산전과 시왕전(十王殿)의 불상을 개분(改粉)하였다. 영조(英祖, 1694~1776)는 왕자 시절에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完文)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이 어제수호완문(御製守護完文) 은해사를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1780년(정조 4)에는 혜옥(惠玉)과 서징(瑞澄), 덕윤(德玧), 체주(體周) 등이 묘봉암을 중창하였고, 1785년(정조 9)에는 쾌민(快敏)이 거조암을 중수했다. 1797년(정조 21)에는 경옥(璟玉)과 석린(碩麟), 해운(海雲), 유화(有和), 승수(勝修)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이때 운부암 조실(祖室) 지첨(知添)이 불사를 지휘하였다. 화엄학의 대강백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가 주석하면서 중창한 이후 은해사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1801년(순조 1)에는 기기암을 중창하였는데, 이 암자의 원래 이름은 안흥사(安興寺)였다. 1816년(순조 16)에는 비각(碑閣)을 세웠다. 1817년(순조 17)에는 기봉(箕峰)과 유성(宥性) 등이 서운암 등 30여 곳에 다리를 놓았다. 1823년에는 기기암을 중수하였다. 1833년에는 보봉(寶峯), 응암(應庵) 등이 서운암을 중창하였고, 1834년에는 우일(宇一), 유엽(有曄) 등이 중암암을 중수하였다. 


1847(헌종 13)년 창건 이래 가장 큰 화재로 극락전(極樂殿)을 제외하고 1,000여 칸에 이르는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자 영조의 어제수호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었기에 영천군수 김기철(金箕哲)이 300궤미의 돈을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한양 왕실에서도 시주를 보내왔다. 그해 혼허 지조(混虛智照),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중수를 시작해 사방 9칸의 법당과 향실(香室), 심검당(尋劍堂), 설현당(說玄堂), 청풍료(淸風寮) 등을 새로 지었다. 1849년(헌종 15)에는 옹호문(擁護門), 안양전(安養殿), 동별실(東別室), 만월당(滿月堂), 불광각(佛光), 향적각(香積閣) 등을 세웠다. 또, 백흥암의 중료(衆寮)를 중창하였고, 보화루 중수에 들어갔다. 


1850년(철종 1) 은해사 중수가 완료되자 당대 최고의 서화가 추사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주지 혼허의 부탁을 받고 일주문의 '銀海寺(은해사)' 현판을 비롯해서 금당(金堂)의 '大雄殿(대웅전)', 종루(鐘樓)의 '寶華樓(보화루)', 불광각의 '佛光(불광)', 노전(爐殿)의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 글씨를 써 주었다. 또, 은해사 산내암자인 백흥암 보화루의 '山海崇深(산해숭심)', 진영각(眞影閣)의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과 여섯 폭 주련(柱聯) 글씨를 썼다.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 등이 백흥암의 영산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철종 11)에는 운부암이 소실되었다. 그 해 응허(應虛)와 침운(枕雲) 등이 운부암을 중건하여 법전(法殿), 설선당(說禪堂), 조실(祖室), 영각(影閣), 노전 등을 세웠다. 1869년(고종 6)에는 백흥암의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고종 13)에는 백흥암에 나한전(羅漢殿), 석조(石槽) 등을 만들었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백흥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다.


1900년(고종 37)에는 운부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1920년(대한민국 임시정부 2년)에는 석담(石潭)이 대웅전, 단서각(單捿閣), 계삼당(洎三堂), 보화루, 창고를 수선하고, 주지실과 요사 4동 및 2대문(大門)을 지었다. 또한 구재(舊材)와 신재(新材)를 사용하여 옛 조실을 하지전(下持殿), 극락전(極樂殿)을 응접실로 바꿨다. 1999년에는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어 사내의 성보들을 관리하고 있다.


은해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는 사찰이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 은해사는 31본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은해사는 논 46만 4천여 평, 밭 2만 8천여 평, 임야 920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한국 불교 종단이 태고종(太古宗)과 조계종(曹溪宗)으로 양분될 때 은해사는 25교구 본사 중 제10교구 본사로 지정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 지장전(地藏殿), 조사전(祖師殿), 단서각, 산신각(山神閣), 독성각(獨聖閣), 설선당, 심검당, 보화루, 우향각(雨香閣), 호연당(浩然堂), 도선당(道禪堂), 청풍당(淸風堂), 불이문(不二門), 종각(鐘閣), 요사(寮舍), 성보박물관 등 24동이 있다. 은해사는 말사 39개 소, 포교당 5개 소, 부속암자 8개 소를 거느린 대본사이다. 은해사 부속 암자는 거조암, 백흥암, 묘봉암, 중암암, 운부암, 기기암, 서운암, 백련암 등이다. 


은해사와 부속 암자에는 국보 로 지정된 2점, 보물로 지정된 4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보물(寺中寶物)이 있다.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는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居祖庵 靈山殿, 국보 제14호), 은해사 괘불탱(銀海寺掛佛幀, 보물 제1270호), 백흥암 극락전(極樂殿, 보물 제790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極樂殿須彌壇, 보물 제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靑銅菩薩坐像, 보물 제514호), 은해사 청동금고(靑銅金鼓, 보물 1604호) 등이 있다.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로는 은해사 백흥암 감로왕도(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19호), 은해사 중암암 삼층 석탑(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32호), 은해사 거조암 삼층 석탑(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04호), 은해사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67호) 등이 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이 탱화는 수년 전 도난 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은해사 홈페이지에는 신라시대에 불교의 새 장을 연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원효(元曉, 617~686)와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 625~702)을 자사가 배출한 고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열반에 든 지 100년도 더 지나서야 해안사가 창건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원효의 시호 대성화쟁국사는 1101년 고려 숙종이 내린 시호다.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애석하게 여긴 숙종은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분황사(芬皇寺)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 후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 놓았다. 현재는 비석의 받침 부분만 남아 있어, 이를 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라 한다.


은해사가 배출했다는 고려시대 고승에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과 홍진국사 혜영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파 성규, 근현대에는 운봉(雲峰, 1889~1946), 향곡(香谷, 1912~1979), 성철(性徹, 1912~1993), 일타 등 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 운부암과 기기암에는 비구 선방, 백흥암에는 비구니 선방이 개설되어 있다. 또 은해사에는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經律論) 삼장법사(三藏法師) 과정인 대한불교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僧伽大學院)이 설립되어 강백(講伯)을 양성하고 있다. 


천왕문의 '八公山銀海寺(팔공산은해사)' 편액


추사의 '銀海寺(은해사)' 편액 글씨(출처 인터넷)


1850년에 은해사에 왔더라면 저 천왕문에는 추사가 쓴 '銀海寺(은해사)' 편액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銀海寺(은해사)' 편액은 현재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는 추사의 '銀海寺(은해사)' 글씨에 대해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 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銀海寺(은해사)' 편액 글씨에 대해서는 대구의 대표적 서화가인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의 글씨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현재 '銀海寺(은해사)' 작품이 석재 서병오의 글씨라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이 글씨에 대해서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추사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銀海寺(은해사)' 글씨는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2019.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