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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8)

林 山 2019. 8. 13. 14:22

'황칭징지에(皇淸經解)'는 칭나라 고전 연구의 총서(叢書)로, 1,408권으로 되어 있다. 정편(正編)과 속편(續編)이 있는데, 정편은 량광총독(兩廣總督) 롼위안(阮元)이 그의 문인 옌지에(嚴杰) 등에게 편집하게 하여 1825∼1829년에 출판하였다. 꾸옌우(顧炎武) 이하 73명의 칭나라 유학자의 경서 해석에 관한 서적 188종을 수록하고, 주해고증(注解考證)과·문자훈고(文字訓詁), 역산(曆算) 연구서까지 포함시켰다. 판본(版本)은 타이핑티엔궈(太平天國) 때에 병화(兵火)를 당했으나, 그 뒤 량광총독 라오총광(勞崇光)이 보각(補刻), 재간(再刊)하였다. 


롼위안(阮元) 편찬 '황칭징지에(皇淸經解)'


1888년 장쑤쉬에정(江苏學政) 왕셴쳰(王先謙)이 정편에서 빠진 것과 그 이후의 연구서 209종을 모아 '황칭징지에수삐엔(皇淸經解續編)' 1,430권을 출판하였다. 정편, 속편 모두 각서(各書)의 서발(序跋)이 빠진 경우가 많고, 또 그 내용을 생략한 것도 있지만 십삼경(十三經)의 신소류(新疏類)를 포함하며, 쳰롱(乾隆)으로부터 셴펑(咸豊)에 걸친 칭대 고증학의 정수를 수록하고 있다. 신소류는 한탕(漢唐) 경학(經學)의 주소(注疏)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해석을 말한다. 


롼위안의 정편은 왕셴쳰의 속편과 함께 칭대 고증학의 정수로 꼽히는 책이다. 추사는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매우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는 '황칭징지에'의 초판이 나온지 3년만에 이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디.  


추사의 '황청경해(皇淸經解)'에 대한 서간


추사박물관에는 추사의 '황칭징지에(皇淸經解)'에 대한 서간문도 전시되어 있다.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서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임 자리에서 잠시 뵌 뒤 시간이 지나서도 그리웠는데, 지금 보내신 편지를 받고 포근한 동지(冬至)에 편안하시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다만 부스럼의 고통에 대해서는 염려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기침이 줄곧 사그라들지 않아 걱정입니다.


말씀하신 아홉 사람의 글은 당연히 전집(全集)이 있을 듯합니다. 청쩡쥔(程徵君)의 '통이루(通藝錄)'는 고(故)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대감의 장서에서 본 적이 있고, 장수이공(江歲貢)의 책은 별도의 문집 없이 '징지에(經解, 皇淸經解)'에 모두 들어 있으며, 왕밍셩(王鳴盛), 쳰다신(錢大昕)의 저술은 사람 키만큼 많지만 '징지에'의 수록은 대략을 추렸을 뿐이고, 휘스치(惠士奇), 셴통(沈彤), 자오신(焦循), 짱용(臧庸)도 '징지에'에서 그 장점을 모두 수록하였고, 상서 왕인즈(王引之)의 글은 '장이수원(經義述聞)', '징쫜싀치(經傳釋詞)' 외에 다른 저서는 판각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짱밍징(臧明經)의 종조 짱위린(臧玉林)의 글도 '징지에'에 있는데, 이 사람은 밍나라 말기 사람으로, 근대에 경서를 논하는 이들은 모두 그를 개산조(開山祖)로 봅니다. 그럼.


편지 받은 날 아우 올림]


청주칭(程祖慶) 작 '먼푸투(捫腹圖)'


'먼푸투(捫腹圖)'는 1853년 칭나라 학자 청주칭(程祖慶)이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다. '먼푸(捫腹)'는 심신이 만족스러워 배를 쓰다듬는다는 뜻이다. 이 그림을 보면 추사가 칭나라 학자들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청주칭은 추사보다. 한 살 많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학식이 높은 노인에게 공손하게 손을 맞잡고 배움을 청하는 제자로 묘사했다. 관을 쓰고 후덕한 대학자의 모습을 한 노인은 추사다.  


청주칭은 그림에 덧붙인 글에 '완당 선생은 아직 뵙지 못했으나 문장과 학문을 오랫동안 경모해 왔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 보내니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기신다면 수염을 치켜 흔들며 한바탕 웃어 주십시오.'라고 썼다. 청주칭의 나이는 68세, 추사의 나이는 67세였다. 청주칭은 2년, 추사는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으면서 국경을 초월한 교유를 했다.


추사가 권돈인에게 쓴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 서간


이 편지는 추사가 말년에 벗 권돈인에게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는 저 유명한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내가 비록 글씨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추사의 예술혼이 단적으로 드러난 구절이다. 글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연습과 피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서운 말이다. 추사는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고 나서야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磨千十硏(마천십연), 禿盡千毫(독진천호)로 완성된 추사체는 그의 제자 이하응(李昰應)신헌(申櫶, 본명 申觀浩), 서상우(徐相雨), 조희룡(趙熙龍), 이상적(李尙迪), 허유(許維, 초명 許鍊), 전기(田琦), 오경석(吳慶錫)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편지 원문은 다음과 같다. 古人作書 別無簡札體 如淳化所刻 多晉人書 未嘗專主一簡札 是東俗之最惡習也 吾書雖不足言 七十年磨穿十硏 禿盡千毫 未嘗一習簡札法 實不知簡札別有一體式 來要者輒以簡札爲言 謝不敢耳 僧尤甚於簡一法 莫曉其義諦也[옛 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버릇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으면서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못 한다며 거절합니다. 스님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춘화거티에(淳化閣帖)'는 숭나라 타이중(太宗)이 춘화(淳化) 연간에 금중(禁中)에 춘화거(淳化閣)를 설립하고 한나라 짱즤(張芝)로부터 웨이(魏), 진(晉), 탕(唐)까지 여러 서예가의 필적을 골라 보관하고 한린싀수(翰林侍書) 왕주(王著)에게 모각(摹刻)하게 한 것이다. '춘화미거파티에(淳化秘閣法帖)'라고도 하고, 줄여서 '거티에(閣帖)'라고도 한다. 


1851년 예송 논쟁에서 패한 권돈인은 강원도 낭천(狼川, 지금의 화천), 추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1852년 67세의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권돈인은 아직도 낭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권돈인은 1859년 충남 연산(連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가 아직 낭천에 있던 권돈인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써 준 것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권돈인은 간찰체에 대해서 추사에게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답장에서 간찰체에 대해 조선의 병폐라고까지 하면서 경멸하고 있다. 공을 들여서 쓰는 서체와는 달리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리한 대로 자유분방하게 쓰는 간찰체가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사박물관에는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백파율사비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禪雲山, 兜率山) 기슭 선운사 입구 근처 부도전에 세워져 있는 조선 후기 기념비다.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탁본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인데, 추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백파율사비 앞면의 양기(陽記)에는 해서체로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 새겨져 있다. (碑)의 제목을 이렇게 단 까닭은 해서로 쓴 뒷면의 음기(陰記)에 나온다. 


我東近無律師 一宗, 惟白坡 可以當之, 故以律師書之. 大機大用, 是白坡八十年籍手着力處. 或有以機用殺活, 支離穿鑿, 是大不然. 凡對治凡夫者, 無處非殺活機用, 雖大藏八萬, 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 特人不知此義, 妄以殺活機用, 僞白坡拘執着相者, 是皆蜉蝣撼樹也. 是鳥足以智白坡也. 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 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 此個處, 惟坡與吾知之. 雖萬般苦說人, 皆不解悟者, 安得再起師來, 相對一笑也. 今作白坡碑面字, 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 不足爲白坡碑也. 書示雪竇白巖諸門徒, 果老記付, 貧無卓錐, 氣壓須彌. 事親如事佛, 家風最眞實. 厥名兮亘璇, 不可說轉轉. 阮堂學士金正喜撰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조선에는 근세에 율사(律師)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은 예외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大機), 대용(大用)은 백파가 80평생 가장 힘을 쏟은 분야다. 혹자는 기(機), 용(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한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무릇 평밤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든 살, 활, 기, 용 아닌 것이 없다.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르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이 백파를 옭아맸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격이니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논변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다. 비록 온갖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써서 설두(竇), 백암(白巖) 등 문도(門徒)들에게 보인다. 과천에 사는 노인(果老, 추사의 별호)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이름이 긍선(亘璇)이니 전전(転転)한다 말할 수 없도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음기에 따르면, 추사는 조선 근세에 율사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와 대용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라고 보았다. 그래서 비문의 제목을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한 것이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에 '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와 백암 등 백파의 여러 문도에게 보인다고 하였다.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문(白坡律師碑文) 탁본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중종(中宗)의 7남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이다. 12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시헌장로(詩憲長老)에게 출가하여 평안도 초산 용문암(龍門庵)을 거쳐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에서 상언(尙彦)에게 인가를 받고, 순창 영구산(靈龜山) 구암사(龜岩寺)에서 회정(懷情)의 법통을 이어 받아 백양산(白羊山)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였다.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법을 크게 떨쳐 호남선백(湖南禪伯)이라고 일컬어졌다. 순조 30년 구암사로 옮겨 사찰을 중건한 백파는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고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로 추앙받았다. 백파선사는 문장에도 뛰어나 유학자들과 서신을 통해 교류하면서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추사와의 교류 일화는 유명하다. 


백파선사는 이후 화엄사(華嚴寺)의 선사영당 옆 작은 암자에서 좌선하다가 입적했다. 제자들은 구암사에 탑을 세우고, 영정을 경기도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 봉안하였다. 백파는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화엄종주였다. 백파선사의 저서에는 '선문수경(禪文手鏡)', '5종강요기(五宗綱要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태고암가과석(太古庵歌科釋)', '식지설(識智說)',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鏡)', '선요기(禪要記)', '작법구감(作法龜鑑)', 문집 '백파집(白坡集)' 등이 있다.


차와 서신을 통해서 교유한 백파와 추사는 실제로는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 백파는 추사에게 자신이 만든 선운의 작설차를 보내주었고, 추사는 백파가 달마(達摩)를 닮았다 하여 자신이 받들어 오던 달마상을 보내주었다. 달마상을 백파에게 보내면서 추사는 찬(讚)을 지어 '기연도 기이하다. 달마는 서쪽으로 갔는데 그 보신이 동방에 나타났는가'라고 하였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갈 때 백파와 만날 뻔했던 적이 한번 있다. 백파는 약속한 날짜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추사의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다.


백파가 '선문수경'에서 6조(六祖) 이후의 5가(家) 종풍을 규정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제1의 조사선(祖師禪), 위앙종(潙仰宗)과 법안종(法眼宗), 조동종(曹洞宗)의 3종은 제2구인 여래선(如來禪), 제3구의 의리선(義理禪)은 변계망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자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일대 선(禪)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에서 초의는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이고, 입각처가 교면 여래선이 된다.'면서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백파와 초의의 논쟁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초의의 제자 우담 홍기(優曇洪基, 1822∼1881)가 '선문사변만어'를 보완하여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내놓자 백파의 제자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7)은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써서 백파의 설을 보완하였다. 이에 초의의 편에서는 축원 진하(竺源震河, 1861~1926)가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펴냈다. 한국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이처럼 치열한 논쟁은 일찌기 없었다. 이들 사이의 선논쟁은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1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불교에 박식하여 해동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 불린 추사도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주장을 반박했다. 추사는 선논쟁에 '개소리', '무식한 육조' 등 오만방자한 말투로 끼어들어 백파와 불꽃튀는 논쟁을 벌였다. 이런 추사에 대해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백파율사에게서 진정한 고수의 면모가 엿보인다. 치열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백파와 추사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였다. 백파율사비에는 백파에 대한 추사의 존경과 극찬이 가득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백파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은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했고, 추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백파율사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방정한 해서체로 쓴 비문의 글씨는 추사체의 진수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추사가 백파를 존경의 뜻이 담긴 선사(禪師)라 칭하지 않고, 율사로 칭한 까닭이 참으로 궁금하다.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90)의 법명은 봉기(奉琪), 설두는 법호다. 속성은 완산 이씨다. 전라도 곡성군 옥과면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장성 백양산으로 들어가 정관 쾌일(正觀快逸)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어 백암 도원(白岩道圓) 율사를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고, 침명 한성(枕溟翰醒, 1801~1876) 강주(講主)에게서 선참을 받았으며, 백암 계사의 당에서 향불을 지피고 전법제자가 되었다. 선암사 침명 강백의 강석을 찾아가 사교(四敎)의 의문점을 해소하고, 순창 영구산 구암사 백파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870년 모악산(母岳山) 불갑사(佛甲寺)로 주석처를 옮겨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각진국사(覺眞國師)의 주석도량이 폐허로 변해가는 것을 슬퍼하여 단신으로 백양사(白羊寺)에서 불갑사로 내려와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전각들을 보수하였으며, 고창(무장) 연기사터에 있던 사천왕상을 옮겨 모셔와 불갑사에 봉안하였다. 그는 '동사열전'에서 경담(鏡潭), 함명(涵溟)과 함께 조선 말기 불문(佛門)의 삼걸(三傑) 가운데 한분이라고 일컬어졌으며, 백파문하의 용상(龍象)이었다. 초의선사와 추사가 '사변만어'를 지어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을 비판하자 설두대사는 '선원소류'를 저술하여 스승 백파선사를 옹호하고 초의와 추사를 통박하고 나섬으로써 조선 후기 선논쟁(禪論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설두 문하에서는 설유(雪乳), 학명(鶴鳴), 석전(石顚, 박한영), 다륜, 금화 스님 등 근세의 뛰어난 용상들이 많이 나왔다. 1889년 환옹 환진(幻翁喚眞) 스님의 청에 의하여 양주 천마산(天摩山) 봉인사(奉印寺)에서 선문강회를 열고 이듬해 8월 입적하니 세수 66세였다. 백암 도원 율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네모난 받침대 위에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웠다. 이 비는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백파율사비는 1986년 9월 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부도전에 있던 백파율사비는 1998년 9월 10일 개관한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필자가 2019년 4월 28일 선운사에 갔을 때는 성보박물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종무소를 찾아 물어보니 백파율사비는 성보박물관에서 다시 부도전으로 옮겨 세웠다는 말을 직원으로부터 들었다. 


추사박물관 1층 로비


1층 전시실을 나오면 복도 벽에 추사의 대표적인 글씨와 탁본들이 걸려 있다. 추사박물관은 추사의 서화들이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작품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추사 연구의 개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의 기증본도 전시되어 있어 추사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