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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6)

林 山 2019. 8. 8. 16:35

경기도 과천의 추사박물관은 2층 전시실부터 관람한 다음 1층 전시실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보통은 1층부터 본 다음에 2층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추사박물관은 역발상이다. 


과천 추사박물관 1층 전시실


칭(淸)나라 이팅(逸艇)이 유득공(柳得恭)에게 보낸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는 칭(淸)나라 이팅(逸艇)이 그린 산수도이다. 선면산수화란 부채에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언덕에는 텅 빈 정자와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잔잔한 수면에는 조각배 한 척이 떠 있다. 원경은 강 건너편으로 야트막한 산을 배치하였다. 이런 구도와 까칠한 필체는 위안(元)나라 니잔(倪瓚)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그림은 베이징(北京) 류리창(流璃廠) 쥐잉탕(聚瀛堂) 주인이 유득공(柳得恭)에게 보내려고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중궈(中國) 위안 말~밍(明) 초의 산수화가인 니잔은 우젠(吳鎭), 황궁왕(黃公望), 왕멍(王蒙) 등과 함께 위안 말 4대가의 한 사람이다. 간결한 필법 속에 높은 풍운(風韻)을 느끼게 하며, 구도와 묘법에 독특한 간원(簡遠)함을 가미하였다. 형태에 구애되지 않는 공활(空闊)하고 소조(蕭條)한 정취는 후세의 문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웡팡깡(翁方綱) 제(題) '아이롄수어(愛蓮說)'와 허루이슝(何瑞熊)의 '롄화투(蓮花圖)', 18.3×54.1cm


탄시(覃溪) 웡팡깡(翁方綱) 제(題) '아이롄수어(愛蓮說)'와 허루이슝(何瑞熊)의 '롄화투(蓮花圖)'는 웡팡깡이 쓴 쩌우둔이(周敦頤)의 '아이롄수어' 전문과 웡팡깡의 문인 난샨(南山) 짱웨이핑(張維屛)의 제시(題詩), 그리고 슌더렌(順德人, 광둥성) 허루이슝이 그린 연꽃 그림이다. 장쑤성(江苏省) 윈졘(雲間) 출신으로 쩌우둔이의 먼 후손인 쥐렌(菊人) 쩌우다(周達)가 1811년(가경 16) 베이징에 올라와 1816년(가경 21)에 웡팡깡의 제자가 되어 허루이슝에게 연꽃을 그리게 하고, 스승의 찬을 청했다.


웡팡깡(翁方綱)의 '讀書山房(뚜수샨팡)' 현판(懸板), 1813, 28.6×123.8cm


'讀書山房(뚜수샨팡)' 현판(懸板)은 웡팡깡이 1813년에 쓴 현판이다. 누군가를 위해 당호(堂號)를 써준 것으로 보인다. 독서산방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이한복(李漢福)이 '추사동귀도시(秋史東歸圖詩)'를 임모(臨模)한 '증추사동귀시권(贈秋史東歸詩卷)', 22×324cm


'증추사동귀시권(贈秋史東歸詩卷)'은 이한복(李漢福)이 '치우싀둥꾸이투싀(秋史東歸圖詩)'를 임모한 것이다. 1810년 2월 1일 주허녠(朱鶴年)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추사를 위해 옌징(燕京, 베이징)의 쉬안우먼(宣武门) 밖 파위안스(法源寺)에서 송별모임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롼위안(阮元)을 비롯하여 리린숭(李林松), 웡수쿤(翁樹崑) 등 9명의 칭나라 학자들이 모여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당시 주허녠이 그린 전별도와 리린숭의 전별시가 '쩡치우싀둥꾸이싀쥐안(贈秋史東歸詩卷)'으로 전한다. 이들은 추사의 초상과 함께 '쩡치우싀둥꾸이싀쥐안'을 선물했다. 


'증추사동귀시권'은 20세기 초 추사를 깊이 연구했던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유족이 과천시에 기증한 1만여 점의 자료 중 하나다. '증추사동귀시권'의 한가운데 군복을 입고 있는 인물이 바로 추사이다. 


우숭량(吳崇梁)의 칠언시, 107×30cm


이 칠언시는 1824년 웡팡깡의 문인 우숭량(吳嵩梁, 1766~1834)이 추사의 둘째 아우 김명희(金命喜)에게 보낸 작품이다. 매화와 관련하여 우숭량이 추사 일가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다.


이광사(李匡師) 서첩(書帖)


추사박물관은 이광사(李匡師)의 서첩(書帖)에 대해 쑤둥포(蘇東坡)의 시 '빠오바오지우(薄薄酒)'를 쓴 것이라면서 중간에 '운학유천 비연성장(雲鶴遊天 斐然成章,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글이 화려하고 아름답다)'이라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薄薄酒(빠오바오지우) - 텁텁하고 맛없는 술(쑤둥포)


薄薄酒 勝茶湯(빠오바오지우 셩차탕) 텁텁하고 맛없는 술일망정 차보다 낫고/皺皺布 勝無裳(쩌우저우부 셩우샹) 거친 옷일망정 없는 것보다 나으며/醜妻惡妾勝空房(처우치으치에셩콩팡) 못생긴 아내와 성질 고약한 첩일망정 없는 것보다는 났네/五更待漏靴滿霜(우껑따이러우쉬에만솽) 오경에 다루원에서 신발 가득 서리 맞아야 하는 벼슬살이는/不如三伏日高 睡足北窓凉(뿌루산푸르까오 수이주뻬이촹량삼복에 해가 높히 솟을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북창 아래서 시원한 바람 쐬는 야인의 삶보다 못하네/珠孺玉匣(주루위샤) 구슬로 장식한 수의 입고 옥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萬人祖送歸北邙(완렌주쏭꾸이뻬이망) 만인의 칭송 받으며 북망산 가는 것은/不如懸鶉百結 獨坐負朝陽(뿌루쉬안춘빠이지에 뚜쭈어푸짜오양) 덕지덕지 꿰맨 남루한 옷 입고 홀로 앉아 아침 햇볕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 못하네/生前富貴死後文章(셩치엔푸꾸이쓰허우원짱) 살아서는 부귀 누리고 죽으면 문장이 남겨지길 바라지만/百年瞬息萬世忙(빠이니엔슌씨완싀망) 백년도 순간이요 만년도 바삐 지나갈 뿐/夷齊盜蹠俱亡羊(이치따오즈쥐왕양) 백이와 숙제건 도척이건 죽어 없어지긴 마찬가지니/不如眼前一醉(뿌루옌치엔이쭈이) 지금 당장 취하여/是非憂樂都兩忘(싀페이여우러두량왕) 옳고 그름과 근심 즐거움을 모두 잊는 것만 못하네.


薄薄酒(빠오바오지우) - 텁텁하고 맛없는 술. 皺皺布(쩌우저우부) - 거친 마포, 서민들이 입는 옷. 醜妻惡妾(처우치으치에) - 못 생긴 아내와 성질 못된 첩. 五更(우껑) - 오경, 오전 3시~5시. 待淚(따이러우) - 대신들이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부터 대궐에 나와 기다리는 것. 靴滿霜(쉬에만솽) - 궁문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발이 서리에 흠뻑 젖음. 珠孺玉匣(주루위샤) - 구슬로 장식한 속옥과 옥으로 만든 상자. 祖送(주쏭) - 관을 묘지에 보냄, 北邙(뻬이망) - 北邙山(뻬이망산), 허난 성(河南省)의 뤄양(洛陽) 동북쪽에 있는 산. 한(漢)나라 이후 역대 제왕과 공경(公卿), 명사들이 이곳에 묻혔다. 이후 뻬이망산은 죽어서 가는 곳, 즉 무덤의 상징이 되었다. (쉬안춘) -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은 것을 가리킨다. '荀子(쉰쯔)' <大略篇(따뤼에피엔)>에 '子夏(쯔샤)는 가난하여 옷을 입은 것이 메추라기 같았다'는 구절이 있다. 百結(빠이지에) - 옷이 헤어져 너덜너들 기운 것. 獨坐負朝陽(뚜쭈어푸짜오양) - 홀로 앉아 아침 햇볕을 쬠. 瞬息(슌씨) - 눈 깜작할 사이, 순식간. 俱亡羊(쥐왕양) - 현자나 우자나 모두 죽고 없다는 뜻. 좡쯔(莊子)에 나오는 이야기로 짱(臧)은 책을 읽다가, 꾸(穀)는 놀이를 하다가 양을 잃어 버렸다. 두 사람이 양을 잃은 것은 같았다. 뽀이(伯夷)는 이름을 위하여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대도 따오즈(盜跖)는 이욕 때문에 두릉산에서 죽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은 곳은 달라도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했다는 점은 같다. 都兩忘(두량왕) - 是非憂樂(싀페이여우러)를 모두 잊는 것을 말한다.


'斐然成章(비연성장)'은 룬위((論語) <궁예창(公冶長)>편에 나오는 말이다. <궁예창>편에 '子在陳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 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는 구절이 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 고장의 아이들은 뜻이 크고 진취적이어서 찬란한 문장을 이루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듬을 줄은 모르는구나.'라는 뜻이다. 콩쯔(孔子)가 루(魯)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며 인정(仁政)을 전하다가 첸(陳)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야기다. 아이공(哀公) 3년(BC 492) 루나라의 정치를 전횡하던 지환즈(季桓子)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지캉즈(季康子)가 정권을 잡자 콩쯔의 제자 란치우(冉求)를 초빙했다. 지캉즈는 란치우의 권고로 당시 첸나라에 있던 콩쯔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콩쯔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상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기로 작정했다. 이로써 10여 년에 걸친 콩쯔의 유랑 생활이 끝났다.

 

'斐然(비연)'은 '문채(文彩)가 있는 모양', '成章(성장)'은 '문장을 이루다'의 뜻이다. 합쳐서 '斐然成章(비연성장)'은 '학문이나 수양이 성취되어 채색한 비단처럼 훌륭하다'는 뜻이다. 


'斐然成章(비연성장)'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쑤둥포다. 둥포 쑤싀(蘇軾)는 22세 되던 1057년 동생 쑤저(蘇轍)와 함께 고향을 떠나 숭(宋)나라 서울 카이펑(开封)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 당시 카오싀관(考試官)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탕숭(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인 어우양슈(歐陽修)였다. 이때 어우양슈의 수제자 쩡궁(曾鞏)도 쑤싀, 쑤저와 함께 과거를 보았다. 당시 과거시험은 누구 답안지인지 카오싀관이 알 수 없도록 관리들이 글씨를 옮겨 적었다. 어우양슈는 채점을 하던 중 斐然(비연)한 문장으로 가득 채워진 답안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우양슈는 그 답안지가 수제자 쩡궁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제자를 장원으로 뽑으면 구설수에 오를 것을 걱정한 어우양슈는 그 답안지를 차석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그 답안지는 바로 쑤둥포의 것이었다. 결국 쑤둥포는 장원을 놓치고 억울하게 차석으로 과거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다.  


'雲鶴遊天(운학유천) 群鴻戱海(군홍희해) - 구름 속의 학이 하늘을 나르는 듯, 기러기떼가 바다위에서 춤을 추는 듯' 구절은 중궈 난베이차오(南北朝) 시대 량(梁)나라 개국 군주인 우디(武帝) 샤오옌(蕭衍)이 웨이(魏)나라의 명필 쭝야오(锺繇)의 글씨를 보고 평했다는 말이다. 쭝야오는 류더셩(刘德升)에게 서법을 배워 팔분과 해서, 행서에 뛰어났다. 특히 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일종인 소해(小楷)를 창시했다. 해서비조(楷書鼻祖)로 불리며, 후자오(胡昭)와 더불어 후페이쭝셔우(胡肥鍾瘦)라 불린다. 짱즈(張芝)와 함께 쭝장(鍾張), 왕시즈(王羲之)와 함께 쭝왕(鍾王)이라 불렸다. 쭝야오의 서법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웡팡깡(翁方綱)이 추사에게 보낸 '담계수찰첩(覃溪手札帖)', 33.5 x 21.8cm


'담계수찰첩(覃溪手札帖)'은 85세의 웡팡깡이 32세의 추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첩이다. 추사의 스승 웡팡깡은 칭나라 후기 경학과 금석학의 대가이자 대수장가(大收藏家)였다. 25세에 중궈 옌징에 간 추사는 1810년 1월 29일 78세의 웡팡깡을 만나 그의 서재 싀모스러우(石墨書樓)에서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웡팡깡은 추사의 학식에 감탄하여 그를 '징수원짱하이동띠이(經術文章海東第一)'로 인정하였다. 추사는 귀국 후 스승의 호에서 첫자를 따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지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다. 


'임한경명첩(臨漢鏡銘帖)' 발문(跋文)


'임한경명(臨漢鏡銘)'은 '한(漢)나라 때의 거울에 새겨진 글씨(鏡銘)를 베끼다(臨書)'의 뜻이다. 예서(隸書)는 추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서체다. 추사의 예서는 다른 서체에도 두루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추사는 주로 세련된 둥한(東漢)대의 예서를 배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고졸한 고예(古隸)를 추구했다. 그는 특히 시한(西漢)대의 고예를 바탕으로 둥한대의 예서 가운데 동경(銅鏡)이나 마애명문(磨崖銘文)을 즐겨 임서(臨書)하였다. 60대 중반 작품으로 보이는 '임한경명첩'은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서첩에는 '阮堂依古隸帖(완당의고예첩)'이라고 써 있다. 


'임한경명' 발문(跋文)은 추사가 서체에 임했던 자세와 한대의 경문을 임서한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글이다. 행서(行書)로 쓴 이 발문은 40대 후반 또는 50대 초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隷之今存皆東京古碑西京槪不一見已自歐陽公時然矣如君銘東京之最古, 尙不大變於西京略有鼎鑑爐殘款斷識可溯於西京者, 纔數種而已今以其意仿之以塞史言之求. 禮堂.[한대(漢代)의 예서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둥한시대의 고비(古碑)이고 시한시대의 비석은 한 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미 숭(宋)의 어우양시우(欧阳修)가 살아 있었을 때도 그렇다. 추쥔밍(鄐君銘)은 둥한시대의 가장 오래된 비(碑)이지만 여전히 시한시대와 비교한다면 크게 변모한 것이 아니다. 대략 정(鼎), 감(鑑), 로(爐), 등(鐙)에 남아 있는 몇 글자를 가지고 시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겨우 몇 종류뿐이다. 지금 시한시대가 가지고 있는 서체의 의미를 모방하여 써서 사언(史言)의 요구에 응한다. 예당.]


'東京(둥징)'은 둥한의 수도 뤄양(洛阳), '西京(시징)'은 시한의 수도 시안(西安, 장안)을 말한다. 각각 둥한시대와 시한시대를 가리킨다. '歐陽公(어우양꿍)'은 숭나라의 학자 어우양슈(歐陽脩)를 이른다. 


허련 판각(許鍊) '완당필첩(阮堂筆帖)'


'완당필첩(阮堂筆帖)' 또는 '추사첩(秋史帖)'은 추사의 글씨를 목판에 새겨 간행한 서첩이다. 추사체를 익히는데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첩인 '추사첩'은 전본도 아주 많고, 제목도 제각각 다르다.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판각한 다수의 탁본서첩 글씨가 있는데, 이는 일반 사람들이 추사를 알고, 추사체(秋史體)를 익히는 매우 중요한 학습용 서첩이다. 다시 말해 추사 이후 추사체를 공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 이것이 소치가 만든 추사 글씨 탁본첩(拓本帖)이다. 


'추사첩'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그린 난초를 칭찬하는 글과 추사의 노우(老友) 이윤명(李允明)의 수계(修禊)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수계는 시계(詩禊)라고도 하는데, 요즈음의 시동인(詩同人)과 같은 것이다. 중궈 진대(晉代)의 왕시즈(王羲之)가 란팅시싀(蘭亭詩社)를 만든 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로회(耆老會), 죽림고회(竹林高會)나 16세기 조선시대에 성립된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 자각시사(紫閣詩社) 등이 수계에 해당한다. 

  

추사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습작기로 24세까지의 글씨, 2기는 25세 이후 칭나라 옌징에 다녀온 뒤 55세에 제주도로 유배될 때까지의 글씨, 3기는 제주도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글씨를 말한다. 3기에 해당하는 글씨를 보통 추사체라고 한다. 하지만 2기 중국에 다녀온 뒤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글씨부터 추사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2019.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