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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4)

林 山 2019. 7. 1. 17:14

추사는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도 심취했기에 당시 여러 고승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추사가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贊)'을 썼다는 것은 해붕 전령(海鵬展翎, ?~1826)과의 인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1815년경 추사는 벗 정학연의 소개로 해붕대사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의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贊)'


해붕대사와 정학연의 인연은 18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산은 천주교도와 남인(南人) 세력에 대한 탄압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01년 2월 27일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해붕선사는 원래 전라남도 승주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승려였고, 초의선사는 두륜산 대둔사(大芚寺, 대흥사) 승려였다. 정학연은 부친의 수발을 들기 위해 강진에 내려왔다가 해붕대사와 초의선사를 만나 교유를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붕대사는 선암사를 떠나 수락산(水落山) 덕능고개에서 불암산(佛巖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암자인 학림암(鶴林菴)에 주석하고 있었다. 1815년 초의선사는 전라도 해남의 대둔사를 떠나 한양의 수종사(水鐘寺)에 머물렀다. 당시 수종사는 절이 퇴락해서 주거 환경이 좋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다. 초의선사의 딱한 처지를 정학연이 알게 되었다. 정학연은 해붕대사에게 부탁해 초의선사를 학림암에서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때 초의선사는 해붕대사로부터 불법과 다도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정학연의 소개로 그해 겨울 쌓인 눈을 헤치고 학림암으로 해붕대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추사는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논쟁도 불사하는 기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추사가 해붕대사를 찾아간 것은 법문을 주고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해붕대사의 경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해붕대사가 추사보다 30년 먼저 열반에 든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연령차는 꽤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861년 가을에 쓴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 발문에서 초의선사는 '昔在乙亥 陪老和尙結臘於水落山鶴林菴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能所生 經宿臨歸 書壹偈於老師 行軸曰君從宅外行 我向宅中坐 宅外何所有 宅中元無火 可想也龢和尙再傳之燈(지난 1815년 해붕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동안거에 들어가 있을 때 하루는 완당 김정희가 눈길을 헤치고 노스님을 찾아와 공각의 소생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갈 때 노스님께서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에 '그대는 집 밖을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다'라고 하셨다. 노스님이 거듭 전해주신 조화로운 가르침은 생각해 볼 만하다.'고 기록하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1815년이면 추사 나이 30세로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다. 학림암에서 추사와 해붕대사는 '공각능소생(空覺能所生) - 공각(空覺)이 생겨나는 법'에 관한 공안(公案)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였던 듯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해붕대사는 추사에게 '君從宅外行 我向宅中坐 宅外何所有 宅中元無火(그대는 집 밖을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 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다네.)'라고 일갈했다. 진리가 내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진리를 찾아 집 밖으로 허둥지둥 떠도는 추사의 정곡을 찌른 시다. 


해붕대사에게 추사는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매우 당돌하게 보였던 듯하다. 어디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새파란 선비가 와서 공각(空覺)이 어쩌고 저쩌고 달려드니 해붕대사로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해붕대사는 시를 통해서 추사에게 호쾌한 가르침을 준 것이다. 촌철살인의 저 시를 추사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붕대사의 경지는 추사에게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다가왔을 것이고, 호남 칠고붕(七高朋)이란 해붕대사의 명성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해붕대사를 비롯해서 노질(盧質), 이학전(李學傳), 김각(金珏), 심두영(沈斗永), 이삼만(李三晩), 초의선사는 당시 호남의 칠고붕이라 일컬어졌다.  


순천(順天) 출신의 해붕대사는 선암사(仙巖寺)로 출가하여 묵암 최눌(嘿庵最訥)선사의 전법제자가 되었다. 선교(禪敎) 양종에 깊은 식견을 갖고 있었던 해붕대사는 또 문장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덕망도 매우 높았다. 그는 선암사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 다맥(茶脈)의 제6세(弟六世) 전승자이기도 했다.       


해붕대사의 일갈은 추사의 인생에 있어서 큰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856년 5월 '해붕대사화상찬'을 쓴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추사는 해붕대사와 자신의 법담을 묵묵히 듣고 있던 동갑내기 초의선사와 그날부터 평생지기가 되었다. 이때 추사의 동생 김명희도 초의선사와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추사와 초의선사 두 사람은 도반처럼 평생 우의를 이어갔다.


학림암에서 해붕대사를 모시고 겨울을 난 초의선사는 다시 수종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그는 수종사와 학림암, 만향각(蔓香閣), 서성(西域)에서 지내면서 정학연과 김명희, 옥경산방(玉磬山房)의 이노영(李魯榮)과 함께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초의선사는 정학연과 함께 만향각에서 '만향각여유산공부(蔓香閣與酉山共賦)'라는 시를 지었다.  


冽水踰來便兩年(열수유래편양년) 한강에 온 지도 벌써 두 해째인데/忽驚芳艸翠芉眠(홀경방초취간면) 단잠 자던 예쁜 풀들 놀라서 깨네/南雲不礙重樓眼(남운불애중루안) 남쪽 구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누각/北極終次四度天(북극종차사도천) 북쪽 끝은 사방으로 이어졌네/粉蝶舞欄紅雨外(분첩무란홍우외) 흰나비 난간에서 춤추고 밖에는 붉은 꽃비 내리는데/黃鸝聲切綠陰邊(황리성절연음변) 우거진 숲 저편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 애처롭네/深思故壑鐘聲裏(탐사고학종성리) 옛 골짜기에서 둘리던 종소리 그립구나/靜有寒燈照淨禪(정유한등조정선) 싸늘한 등불 아래 고요히 선정에 들던 일도 


해붕대사의 직전제자(直傳弟子) 호운 스님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추제(秋祭)를 주관하는 소임을 맡아 대둔사에 올 적에 해붕대사의 영정첩을 가지고 와서 초의선사에게 보여 주었다. 영정첩에는 1856년 5월 추사가 성의를 다해서 쓴 '해붕대사화상찬'이 들어 있었다. 추사가 화상찬을 짓기 전 호운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평생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홀연 서신을 보내오니 심히 기이한 일이다. 해붕노사의 문하라 하니 인연이 될 만하다. 생소한 손님이 불쑥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해붕노사는 나의 옛 벗이다.'라고 한 것에서 그가 화상찬을 쓰게 연유를 알 수 있다. 추사는 이 화상찬을 쓴 뒤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초의선사가 쓴 ‘제해붕대사영정첩’ 발문 중 '有浩雲雨公 咸豊丙辰 乞受景贊於果川丙舍 越五年辛酉秋 雲師爲海表忠主管有司莅任之日 懷景贊來示恂 蓋和恂之素所懇款於老師而不暫忘之故也 余乃戀舊感 新莊潢求帖以歸(호운 우공이 1856년 과천의 묘막으로 추사를 찾아가 해붕화상찬을 부탁하였다. 5년이 지난 1861년 가을 호운 스님이 해남의 표충사 주관 유사로 부임하던 날, 해붕대사의 화상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었다. 아마 내가 평소 노스님에게 성의를 다하고 잠시도 잊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에 옛날을 연모하여 새로 이 첩을 장황해서 보낸다.)' 부분에는 추사가 '해붕대사화상찬'를 쓰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 작 '추사김공상(秋史金公像)'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 1808 ~1889)이 1857년에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추사김공상(秋史金公像, 대한민국 보물 제547-5호)'은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로 131.5㎝, 가로 57.7㎝인 이 초상화는 추사의 종가인 김성기(金聲基)가 소장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소장하고 있다. 이한철은 추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추사김공상'은 머리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쌍학문자수흉배(雙鶴紋刺繡胸背)가 있는 관복을 입은 좌안7분면(左顔 七分面)의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에 따른 위엄을 나타내고자 한 상용형식(像容形式)을 따른 그림이다. 추사는 호랑이 가죽을 깐 서양식 의자에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두 손은 소매 속에서 마주잡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두 발은 받침대 위에 바깥을 향해 약간 벌려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추사김공상'은 당시 강세황(姜世晃)의 영정에서도 보듯이 서양화 기법인 태서법(泰西法)이 도입되어 있었음에도 전래기법인 선조기조(線條基調) 화법으로 그렸다. 얼굴은 단순히 기복만을 표현하고, 명암이나 질감 표현은 시도하지 않았다. 옷주름 역시 촉감 묘출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초상화 기법은 추사와 동시대인의 초상인 '조인영 영정(趙寅永影幀)'이나 '조병기 영정(趙秉夔影幀)'과 같은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19세기 중엽의 복고적 표현 형식으로 그린 '추사김공상'에는 조선 후기 사대부상의 단아한 분위기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특히 '추사김공상'은 조선조 후기 이후 최고조에 이른 화원(畵員) 계통의 대표적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화원들은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초상화론인 전신사조론(傳神寫照論)에 입각해서 의복과 흉배, 의자, 발받침대, 호피(虎皮), 화문석(花紋席) 등 세밀한 부분까지 극사실적(極寫實的)으로 그렸다. 


추사의 초상 위에는 당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제찬(題贊)이 있다. 권돈인은 추사와 평생지기 절친이었으며, 두 사람의 글씨도 서로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흡사하였다. 아래 왼쪽 귀퉁이에 적혀 있는 '8년 정사 전감목관 이한철 모(八年丁巳前監牧官李漢喆摹)'라는 관기(款記)로 보아 추사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이미 있었던 초상을 보고 다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 이한철은 추사의 제자였기에 스승의 특징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 작 '추사김공상(秋史金公像)'


이한철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희원(希園, 喜園) 또는 송석(松石)이다.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일본에 통신사 사행을 다녀온 화원 이의양(李義養)의 아들이다. 이한철은 19세기에 오랫동안 도화서에 몸담은 중심적 화원화가이다.


이한철은 김수철(金秀哲), 전기(田琦), 유숙(劉淑), 유재소(劉在韶), 조중묵(趙重默), 허련(許鍊) 등과 함께 추사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추사는 이한철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구학(丘壑)의 형세에 전혀 힘을 쓰지 않는데, 이 그림에는 제법 재미있는 곳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붓을 쓰는 것은 구차해서는 안되고 경계도 좋은 곳을 골라야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팔 밑에 전생의 그림에 대한 인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평하였다. 


이한철은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에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참여하였다. 1852년에는 철종어진도사(哲宗御眞圖寫), 1861년에는 철종어진원유관본도사(哲宗御眞遠遊冠本圖寫), 1872년에는 고종어진도사(高宗御眞圖寫)에 참여하였다. 이때마다 그는 벼슬을 받아 종6품 현감을 세 번, 종5품 현령을 한 번 역임했다. 이한철은 조중목과 함께 당대 제일의 초상화가로 불렸다. 그는 화원 유숙, 백은배, 조중묵 등과 친하였다. 


이한철의 작품들은 산수, 인물, 화조(花鳥), 절지(折枝) 등 다양하다. 그는 주로 남종화법(南宗畵法)과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특히 바위, 인물, 나무 등의 표현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한철은 유연한 필선, 묵법(墨法)의 강약과 농담(濃淡) 등에 능했다. 


이한철의 대표작으로는 '추사김공상(김정희영정)'을 비롯해서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간송미술관 소장), '이유원상(李裕元像)'(개인소장), '흥선대원군이하응영정(興宣大院君李昰應影幀)' 등이 있다.  


추사 '세한도(歲寒圖)' 전시실(출처 경기도관광공사)


추사박물관 한켠에는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를 칭(淸)나라 명사 16명의 찬시를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 '세한도'의 전체 길이는 약 10m에 이른다. '세한도'는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 동양 남종문인화의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한도'를 본 칭나라 명사들도 기절초풍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세한도'에는 추사의 문인화(文人畵)에 대한 사상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그림은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으로 추사 내면세계의 농축된 문기(文氣)와 문인화가 지향하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한 추사의 예술세계가 이 그림 한 장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한도'는 추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이 변함없는 의리를 지킨 데 대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원래의 그림은 옆으로 긴 화면 오른쪽에 '歲寒圖(세한도)'라는 제목과 '藕船是賞(우선시상)', '阮堂(완당)'이라는 관서를 쓰고, '正喜(정희)'와 '완당'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다. 끝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쓴 추사의 발문과 짱위에쩬(章岳鎭), 짜오쩬쭈어(趙振祚) 등 16명의 칭나라 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함께 붙어 10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증조부가 영조의 부마였기 때문에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24살이던 1809년부터 매년 칭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부사(副使)가 된 아버지를 따라 옌징을 오가면서 칭나라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성장했다. 특히 금석학과 서화는 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추사가 45세 때인 1830년 정치 투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전라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고, 그 자신도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자란 사람에게 귀양살이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반대파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가장 절친했던 벗 김유근(金逌根, 1785∼1840)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도 등을 돌리고,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지면서 추사는 오로지 책을 읽는 것으로 유배 생활을 견뎠다. 제자 이상적은 그 누구보다 스승의 처지와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칭나라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 보내주었다. 1843년에는 옌징에서 어렵사리 구한 꾸이푸(桂馥)의 '완쉬에지(晩學集)'와 윈징(惲敬)의 '따윈산팡원까오(大雲山房文槀)'를 보내주었고, 이듬해에는 허장링(賀長齡)과 웨이위안(魏源)이 엮은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 '황차오징싀원삐엔(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었다. 모두 조선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서적들이었다.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빠진 뒤에도 제자의 변치 않는 의리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은 추사는 이상적이야말로 '룬위(論語)' <즈한(子罕)>편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에 나오는 송백(松柏)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는 후이저우(惠州)로 귀양 갔던 쑤둥포(蘇東坡, 1037 ~ 1101)가 자신을 찾아온 아들을 보고 기쁜 나머지 그려준 '이엔숭투(偃松圖)'를 떠올렸다. 추사는 쑤둥포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생각했다. 추사의 마음 속에 불현듯 벼락을 맞은 듯 줄기가 굽은 채 이파리도 거의 다 떨어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엄동설한에도 꼿꼿이 서 있는 세 그루의 잣나무가 떠올랐다. 추사는 능숙한 갈필(渴筆)과 건묵(乾墨)으로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주제와 격조 높은 문기를 소나무와 잣나무 그림에 쏟아부었다. 노송은 바로 정치적 박해를 받아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추사 자신, 노송 곁을 지키는 세 그루의 잣나무는 추사가 불우한 처지에 빠졌음에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지란지우(芝蘭之友)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비의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한 그림은 일찌기 없었다. 


그림을 다 그린 추사는 '藕船是賞(우선은 이것을 감상하게)'라고 쓴 다음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 '길이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이 말은 중궈 산시셩(陕西省) 순화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에 새겨진 것이었다. 추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었다.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달되었다. 이상적은 1844년 10월 칭나라 옌징에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지고 갔다. 이듬해 정월 22일 이상적은 그의 벗 우짠(吳贊)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이자 짱위에쩬(章岳鎭), 짜오쩬주어(趙振祚), 야오푸쩡(姚福增) 등 옌징의 명사 17명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다투어 제(題)와 찬(讚)을 붙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십육가(淸儒 十六家) 제찬(題讚)'이다. 


'柏(백)'은 측백나무란 뜻도 있고, 잣나무란 뜻도 있다. '세한도'의 '柏(백)'을 측백나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림의 나무 형태를 보면 전형적인 잣나무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로 시작되는 발문(跋文)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로 적혀 있다. 예서의 기미가 살짝 풍기는 이 글씨는 추사의 대표적인 해서체(楷書體) 작품이다. 반듯한 글씨에서 심금을 울리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발문에서 추사의 그런 화의(畵意)를 읽을 수 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畊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万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䟽.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無可稱 由後之君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지난해에 그대가 '완쉬에지'와 '따위산팡원까오'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또 어우껑(藕畊)의 '황차오징싀원삐엔)'을 보내 주었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라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세태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과 힘 쓰기를 이같이 하고서도 그대를 돌봐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권세도 힘도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 잇속을 좇듯이 하였다. 타이싀궁(司马迁, 쓰마치엔)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교류하는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소원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태를 초연히 벗어났다.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타이싀궁의 말이 잘못되었는가? 콩쯔 왈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소나무와 잣나무)이 더디 시듦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송백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송백이다. 그런데도 성인(孔子)은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에 그것을 가리켜 말했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한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지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해 따로 마음에 느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시한(西漢)시대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지안(汲黯)과 쩡당싀(鄭當時)처럼 어진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들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샤피시엔(下邳縣, 지금의 장쑤셩 피시엔)의 짜이궁(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샤피방먼(下邳榜門)'은 '먼치엔취에루어싀(門前雀羅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라 짜이궁(翟公, ?~?)이 팅웨이(廷尉)가 되었을 때 찾아오는 빈객이 많았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자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발길이 끊어졌다. 이후 다시 팅웨이가 되었는데, 빈객이 다시 몰려들자 짜이궁은 문 앞에 '一生一死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能, 一貴一賤 交情乃見(한 번 죽고 사니 사귐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하고 부유하니 사귐의 모양새를 알겠으며, 한 번 존귀하고 비천해지니 사귐의 정이 보이는구나.)'라는 글을 방문에 써붙였다고 한다.


칭나라에서 돌아온 이상적은 '세한도'를 추사의 벗 권돈인에게 보여 주었다. 감동을 받은 권돈인은 추사의 그림을 본받아 '세한도(歲寒圖)' 한 폭을 그려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가 '모질도'를 그려 보내 준 데 대한 답례였다. 화제 '歲寒圖' 글씨는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歲寒圖' 제목 왼쪽 맨 위에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인장이 찍혀 있다. '서로 오래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와 권돈인의 깊은 우정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도 대정의 추사 유배지 모형(출처 경기도관광공사)


추사박물관에는 서귀포시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 있던 추사 유배지 모형도 전시해 놓았다. 추사는 1840년(헌종 6)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옌징행을 앞두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추사의 유배 노정은 충청도 천안-전라도 완주를 거쳐 해남에서 화북포로 하여 제주도에 들어온 후 대정현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배 초기 추사는 포도청 부장 송계순(宋啓純)의 집에 머물렀다가 몇 년 뒤 지금의 유배지로 지정된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항쟁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추사는 강도순가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다. 또 51제 81수의 시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추사는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추사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사람에는 강기석(姜琦奭), 강도순, 강사공(姜師孔), 김구오(金九五), 김여추(金麗錐), 김좌겸(金左謙), 박계첨(朴季瞻), 이시형(李時亨), 이한우(李漢雨), 홍석호(洪錫祜), 박혜백(朴蕙百), 허숙(許琡) 등이 있다. 추사는 제자가 3천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 판전(版殿) 모형


추사박물관에는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 장경각(藏經閣)인 판전(板殿)을 그대로 본뜬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고졸미(古拙美)의 극치를 보여주는 글씨로 유명한 '板殿' 편액에는 '七十一老果病中作(칠십일노과병중작)'이라는 관지가 새겨져 있다. 추사 나이 71세 때 병환 중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板殿(판전)' 모사본 편액


추사는 이 글씨를 쓰고 난 뒤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板殿' 글씨는 추사 생전의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워낙 연로한 탓에 붓 끝에 채 힘을 모으지 못하여 글자의 끝이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택상(張澤相)이 보낸 '板殿(판전)' 현판 사진과 편지(출처 경기도관광공사)


이승만 정권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張澤相)이 찍어서 일본의 후지즈카에게 보냈다는 추사의 '板殿' 글씨 사진과 편지다. 편지의 내용은 '이 편액은 경기도 광주군 봉은사에 있습니다. 이는 완당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글씨입니다. 선생의 필력은 웅건하고 깊어 가히 추측할 수 없으니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엿보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감히 청하건대 후지 선생께서 감상하시고 제게 허물이 없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소생 장택상 무릎 꿇고 절을 올립니다.' 


2019.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