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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3)

林 山 2019. 6. 26. 16:10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종이에 담채, 51.0×24.0㎝)'은 허련이 추사의 제주도 유배 시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의 화제 '阮堂先生海天一笠像'은 '완당 선생이 하늘이 닿은 바다에서 삿갓을 쓴 모습'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닿은 바다'는 바로 제주를 가리킨다. 추사는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유배객의 허름하고 처연한 모습이지만 표정만은 모든 것을 초탈한 듯 평온하다. 그림 왼쪽에는 '許小痴筆'라고 적혀 있다. 허소치가 그렸다는 뜻이다. 소치는 허련의 호다. 당시 허련은 목숨 걸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 세 번이나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고 한다. 이런 제자를 둔 추사는 참 행복했을 것 같다. 허련은 추사가 가장 아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허련(許鍊) 작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은 추사가 그린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를 본떠서 그린 것이다. 웡팡깡(翁方綱)은 탕숭(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인 쑤둥포(蘇東坡)를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부처)과 동일시할 정도로 흠모했던 (淸)나라의 대학자였다. 그는 쑤둥포의 초상 세 폭을 자신의 서재 빠오쑤짜이(寶蘇齋)에 봉안하고, 스승의 탄신일에는 '둥포수티에(東坡書帖)'를 진설하고 제를 지냈다. 빠오쑤짜이에는 숭나라의 리룽옌(李龍眼)이 그린 '둥포진산상(東坡金山像)'과 자오쯔구(趙子固)가 그린 '둥포옌베이리지샤오상(東坡研背笠屐小像)', 밍(明)대의 탕인(唐寅)이 그린 '쑤원쭝궁리지투(蘇文忠公笠屐圖)' 등 세 폭의 쑤둥포 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옌징(燕京, 베이징)에 들어간 추사는 웡팡깡을 방문했을 때 빠오쑤짜이에 봉안된 쑤둥포의 초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추사는 우리(吳歷)가 1864년에 그린 '둥포리지투(東坡笠屐圖)'를 얻어 직접 모사(模寫)하고 상단에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혜주에 유배되었을 때 갓 쓰고 나막신 신은 평복 차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소동파가 담주 사람 여씨가 자운을 방문한 뒤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소식은 늘 그들의 집을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시며 같이 시를 짓거나 학문을 토론하곤 했다.'는 내용의 제찬(題贊)을 써 붙였다. 글씨는 원필인 웡팡깡의 글씨체로 쓴 것이다. 


'치비푸(赤壁賦)'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시인 쑤둥포는 정치적인 이유로 바다 멀리 떨어진 섬 하이난따오(海南島)로 유배되었다. 쑤둥포는 평복 차림에 비를 피하기 위해 갓을 쓰고, 진창과 수렁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다. '동파입극도'에는 하이난따오에서 힘들고 궁핍한 유배 생활을 견디는 쑤둥포의 처연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싼 배소에서 궁핍하게 지내는 스승 추사를 본 허련은 마음이 아팠다. 허련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탄압으로 먼 바다 제주도로 유배된 스승과 쑤둥포의 처지가 같다고 보았다. 이에 착안한 허련은 '동파입극도'에서 얼굴만 바꿔 먼 바닷길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스승의 처연한 모습을 '완당선생해천일립상'으로 남겼던 것이다. 웡팡깡의 스승 쑤둥포는 추사에게도 스승이었다. 실제로 추사는 쑤둥포의 문장과 글씨를 흠모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된 자신의 처지가 말년의 쑤둥포와 닮았다는 생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추사의 스승은 허련에게도 스승이었다. 허련은 스승 추사를 쑤둥포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쑤둥포, 웡펑깡, 롼위안과 추사, 허련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유대감은 이처럼 시대와 국경을 초월했던 것이다. 


허련은 스승 추사의 '동파입극도'를 모사한 '동파입극상'도 남겼다. 허련의 '동파입극도'에는 추사의 벗 권돈인의 제찬이 적혀 있다. 허련 이후 후대 화가들에게 쑤둥포를 흠모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추사가 우리의 '둥포리지투'를 모사한 것처럼 후대 화가들도 추사의 '동파입극도'를 모사한 작품이 많다.

중봉(中峰) 혜호(慧皓)가 모사한 '동파입극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용림(李用霖)이 모사한 '동파입극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봉은사(奉恩寺)의 화승(畵僧)이었던 중봉(中峰) 혜호(慧皓)의 '소문충공입극상(蘇文忠公笠屐像)'도 '동파입극도'를 모사한 그림이다. 이용림(李用霖)도 '동파입극도'를 모사한 직품을 남겼다. 


'소문충공입극상' 상단에는 '生平計得公像 凡爲數十本. 顴頰與鬚眉 種種卽相反 杳杳千載上 無怪乎眞影不可挽. 至夫金精玉潤之氣 經術文章之姿 大都不相遠. 如是我聞 觀世音以千億化身 各具淸淨寶相 與日月常鮮.(평생에 동파공의 초상화를 접한 것을 헤아려보니 모두 수십 본이다. 광대와 뺨, 수염과 눈썹이 종종 상반되는데 멀리 천 년 전이니 진영을 붙잡아둘 수 없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무릇 금같이 정교하고 옥같이 윤택한 기운에 있어서나 학술과 문장의 뛰어난 자태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거리가 멀지는 않다. 이렇게 나는 들었노라. 관세음보살의 천억화신은 각각 청정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구현하고 있으니, 해와 달과 더불어 항상 빛난다고 말이다.)'라고 쓴 과암(果巖) 홍진유(洪晉裕)의 제찬이 있다. 


추사가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추사가 고모의 손자인 민태호에게 쓴 것이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말년을 보낼 때 조카 민태호에게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과천에서 민태호에게 쓴 편지는 모두 5통이다.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사는 종종 '일흔 먹은 추한 몰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말년을 맞이한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토로한 것이다. 추사는 조카의 초시 합격을 축하하며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오랜 지기 김백련의 아들을 소개하면서 그가 문리(文理)가 있으니 함께 어울려 공부하라는 당부도 보인다. 공부의 순서를 일러주며 '예운(隸韻)'은 쉽게 덤벼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경고한다. 그것은 '백가성(百家姓)'도 익히지 못한 사람이 '주역(周易)'을 읽으려 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백가성'은 옛날 중국에서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학습서 중 하나이다. 이처럼 추사의 편지를 통해서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주변 친척에 대한 그의 세심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추사 필사본 '동몽선습(童蒙先習)'


추사는 35세 때인 1820년 서자인 김상우(金商祐, 1817~1884)를 위해 해서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썼다. 추사는 동몽선습을 필사하면서 '너는 열심히 읽고 가르침에 따르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면 곧 사람의 도에 이를 것이니 열심히 공부하거라’라는 구절을 넣었다. '동몽선습'은 자식을 가르칠 교과서였기 때문에 추사는 글씨를 정자체인 해서체로 또박또박 썼다. 글씨처럼 자식이 반듯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이 담겨 있는 책이다. 


암행어사 김정희 별단(別單)


'암행어사(暗行御史) 김정희 별단(別單)'은 1826년 (순조 26년) 추사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서산, 태안, 안면도 등지를 살피고 돌아와 바친 문서다. 조선시대 왕명을 받은 관원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서계(書啓)와 함께 별단(別單)을 올려야만 했다. 서계는 보고서이고, 별단은 첨부하는 문서나 인명부다. 이 별단에는 각 고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폐단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암행어사 김정희 별단(別單)


[전정(田政, 토지 정책)은 나라를 가진 이가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 진기(陳起, 묵히거나 부치는 논밭)들이 허모(虛冒, 헛되이 차지함)하고 있어 실제로는 민국(民國, 백성과 나라)의 해충으로 변질되었으며, 탐욕스럽고 교활한 서리들의 주머니만 채우고 있습니다. 전제(田制, 토지 제도)의 붕괴에 대해서는 차라리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입니다. 도내 전답 중 현재 시기(時起, 농사를 짓고 있는 땅)는 120,128결(1결은 약 300두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며, 구진(舊陳, 여러 해 묵힌 논밭)과 잡탈(雜頉, 여러 가지 이유로 면세가 되는 토지)은 69,387결입니다. 시기와 잡탈 면적은 시총(時摠,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의 총수)과 비교해 보면 이미 삼분의 일을 넘어버렸습니다. 이른바 잡탈 명색은 원속진(元續陳, 원래부터 해마다 계속하여 묵힘)과 강속진(降續陳, 계속하여 묵히는 논밭으로 강등된 것), 낙잉진(落仍陳, 포락으로 인해 계속 묵히게 된 논밭) 등인데 매년 발생하지만 탈환(還)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속진잉성천(續陳仍成川), 잉포락(仍浦落)은 명목이 다종다양한데 사기(詐欺)와 모법(冒法, 법을 범하는 것)이 연이어져 가깝게는 10년에서부터 멀리는 100년까지 그 기간이 다양합니다. 한번 감탈(減)을 받은 후 다시 환기지결(還起之結, 다시 경작하는 토지)을 없앴으니 여러 사물의 이치에 비춰보더라도 결단코 이런 사례는 없습니다. 다만 신이 가서 겪은 대로 말씀드린다면 평전(平田)과 광야(曠野) 사이에는 유리(遺利)한 땅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궁산(窮山), 절협(絶峽) 안에서 기간(起墾, 전지를 개간하는 것) 과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장외(帳外, 장부 외)의 은루(隱漏, 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논밭이나 소유하고 있는 노비를 숨기어 대장에 올리지 않고 숨기거나 빼버림)라는 폐단에 대해서는 번거로이 조사해 보지 않더라도 앉아서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장내(帳內) 구탈(舊) 근 70,000결 중 어찌 기진환실처(起陳還實處起陳-논밭을 일구고 묵힘, 還實-재해를 입지 않은 實結로 다시 돌림)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잉폐(仍廢)와 훼기(毁棄헐거나 깨뜨려 버림)의 경우에는 한 번도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은결(隱結, 탈세를 목적으로 전세의 부과 대상에서 부정, 불법으로 누락시킨 토지)이 되어버렸습니다. 관리가 훔치고 서리가 도둑질하여도 고유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관례가 만연되어도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관용(官用)은 몇 결, 이식(吏食)은 몇 결과 같이 정수(定數)화 되자, 허다한 고막(痼瘼, 오랫동안 굳어져서 바로잡기 어려운 폐단)들이 모두 여기에서 발생되었습니다. 시기(時起)가 감축되면 매번 상정미(詳定, 용도와 수량을 자세히 밝히고 정해 놓은 국가 소용의 쌀)의 부족을 걱정하게 됩니다. 상정미가 부족하면 마침내 환곡에서 가져다 쓰게 됩니다.


결국 조세와 조적(糶糴, 환곡을 꾸어 주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일)이 서로 섞여 이간(吏奸, 아전들의 농간)이 낭자합니다. 원인을 따져본다면, 첫 번째도 구진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舊陳之未査)이고, 두 번째도 구진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모(欺冒, 詐欺와 冒法)는 관례가 되었고, 수법은 더욱 더 교묘해졌습니다. 작년(1825) 재결(災結)은 29,693결령(結零)인데, 기사년(1809)과 갑술년(1814) 등 큰 흉년(大無之年)과 비교해도 허시(許施원하는 대로 베풀어 줌)한 내용은 서로 차이가 없습니다. 작년 농형(農形, 농사가 잘되고 못된 형편)은 우도(右道, 충청우도)가 우심(尤甚)입니다. 우도 중 바닷가 고을은 최우심(最尤甚)입니다. 제가 목격한 바로 서산과 태안 등 여러 곳은 곤궁한 봄철에 씨앗을 뿌리고도 오히려 곡식이 남아돌아서 촌려(村閭, 마을)는 안도했으며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작년 가을걷이 초는 '전도대무(全道大無, 도 전체에 큰 흉년이 듦)', '전읍참겸(全邑慘歉, 읍 전체가 참혹한 흉년이 듦)'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해졌단 말입니까? 우심한 읍이 이와 같이 잘못되었으므로, 우심한 곳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재해를 입은 여러 곳을 '혈농(穴農, 작황이 고르지 못하여 지역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엇갈린 농사)'이라 규정하면 괜찮으나 '전겸(全)'이라 규정한다면 불가합니다.


저의 견해만 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와 같은 의견입니다. 대체로 열읍은 간활(奸猾,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에게 사기를 당해 곧바로 시끄럽게 되었으며, 순영(巡營, 감영)은 휼민(恤民, 백성을 구제함)이 치나쳐 구재(救災)가 시급했는데, 마침내 조가(朝家, 조정)가 영실(寧失, 죄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 차라리 법을 집행하지 않음)과 준청(準請, 청원하는 대로 따름)에서 나온 이후에야 그치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회계는 크게 축났으며, 혜택은 쉽게 고갈되어 버렸는데, 이 두 가지가 허모(虛冒)에서 유래되었고, 이 때문에 잘못된 관례가 된 것은 오늘의 지방관의 전적인 책임은 실제로 아닙니다. 작년의 재총(災摠, 재결의 총수)도 과분(過分)을 지났는데 대목(大牧, 큰 고을), 소현(小縣,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좋은 수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보다는 오히려 개혁하려는 조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빨리 진전에 대한 조사(査陳)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따로 염찰관(廉察)을 파견하여 그 좋음과 나쁨을 살피되, 혹 숨기고 묵힌 논을 개간하지 않는 폐단이 있을 경우 당해 수령에 대해서는 법전에 비추어 처벌해야 하며, 규찰하지 못한 감사(관찰사)도 아울러 논감(論勘, 죄의 경중을 따져서 판정함)해야 하며, 결단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묘당에 영하시어 품지(旨, 특정 사안을 보고하여 임금의 결재를 받음) 시행(施行)하도록 하십시오.


전정(田政)에서 표재(俵災, 흉년이 든 때에 조세를 감함)보다 엄중한 것은 없으며, 투재(偸災, 표재를 훔쳐내는 행위)는 근년보다 더 심한 해가 없기 때문에, 그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구재(舊災)가 신재(新災)에 혼입(混入)되는 것이 실제로는 투롱(偸弄, 훔침과 농간)의 원천이 되어, 조가(朝家)가 견면(蠲免, 면제)해 주는 은혜가 막혀 실행되지 못하므로, 억울한 세금으로 인한 민간의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현재의 이른바 구재(舊災)란 곧 구초불(舊初不, 여러 해 전부터 경작하지 아니하고 묵히는 논밭), 잉미앙(仍未移, 어떤 재해로 인해 이앙을 하지 못함), 잉복사(仍覆沙, 어떤 재해로 인해 논밭에 모래가 덮여 쌓임) 등 거짓으로 탈이 난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당년에는 재해가 되지만, 다음해에는 모두 환기(還起)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법에 따라 세금을 거두면 수확량은 점점 늘어나고, 백성들은 유망(流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앙(未移), 복사(覆沙)가 영기(永棄)가 되어도 전혀 기간(起墾)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번 탈을 현록(懸錄, 문부에 기록하는 것이나 기록한 문부)하여 고례(故例)로 등작(謄作)해 놓으면, 각 읍은 보개(報改)할 때마다 전례에 따라 성책에 모록(冒錄,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양 적음)합니다. 그런 다음 영문(營門)에서는 붉은 글씨로 권점을 표시하고, 정해진 수에 따라 신재(新災)로 이록(移錄)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구재(舊災)는 법적으로는 이미 영탈(永)이 아니지만 조가(朝家)에서는 불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두 당년지재(當年之災)로 이록(移錄)하여 구탈의 수(舊之數)에서 준충(準充)하려고 형편에 따라 분급(推移分給)하게 합니다. 그리고 획하(劃下, 劃給,주어야 할 것을 한 번에 다 주지 않고 나누어서 줌 )한 후에는 이른바 '이록한 구재(移錄之舊災)’는 전수(全數)가 서리에게 귀속(歸屬)되고, 민간에는 하나도 파급(派給)되지 않습니다. 해마다 이렇게 된다면 응식(應食, 직무에 따라서 일을 하고 받는 대가)의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작년 표재(俵災)의 경우, 일도 재총(一道災摠)의 총량은 합 29,690여 결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구재가 형편에 따라 분급된 조(舊災之推移分給條)가 몇 천여 결이나 되었는데, 당년 신재 중 마땅히 감세되어야 할 부분(當年新災之當俵者)이 이 때문에 삭제되고, 구재에서 마땅히 삭제되어야 할 부분(舊災之當削者)이 건몰(乾沒, 법에 위반된 물건을 관청에서 빼앗음)로 귀결되었으니 법의(法意)에 비춰보면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대개 이것은 적폐가 상인(相因)하는데도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알 수 없지만 미래는 오히려 예측할 수 있습니다(往雖莫追 來猶可及). 위 항에서 말씀드린 구재명색이 신재명색으로 혼입될 경우(舊災名色之混入新災名色者) 금년부터 하나하나 조사하여 다시는 예전과 같이 신재로 이록혼입(移錄混入)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혹 모금(冒禁, 違犯禁令, 금령을 어기는 것)과 천개(擅改, 變易)가 발생할 경우 도신(道臣, 관찰사)과 수령이 엄히 논감(論勘)하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근래 전세(田稅), 대동(大同, 조선 중기 이후 여러 가지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은 고가로 집전(執錢, 곡식으로 징수할 세금을 돈으로 환산하여 받는 일)하고, 헐가로 무미(貿米, 이익을 보고 팔려고 쌀을 몰아서 사들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환곡(還穀, 각 고을에서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는 제도)을 유용하여 세미로 충납하고선(充納稅米) 다시 이것을 전환하여 이익을 도모하고서도 전혀 삼갈 줄을 모릅니다. 이 사례는 공주(公州)의 성향(城餉, 군량미)을 세미(稅米)로 환작(換作)함에 이르러 그 극치를 보여줍니다. 지금 이 세미를 환작(換作)하는 사례는 그 유래가 오래되어 이제는 상규(常規)가 되어버렸습니다. 또 각읍 상정미(詳定米, 상정법에 의하여 징수한 쌀) 중 여유가 있는 것을 부족한 읍으로 이획(移劃)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상례(常例)입니다. 그런데 근래 상정미 중 부족한 수를 보충하는 방법으로는 여미(餘米, 관아에서 분기별로 모든 지출 경비 예산을 확정하고 남은 쌀) 중 이획 가능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환미(還米)로 추이충급(推移充給)해 버리고, 그 여미(餘米)는 고가로 집전(執錢)합니다. '잘못된 관례(謬例)’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크게는 간폐(奸)에 관계됩니다.


상정부족조는 상진원곡(常賑元穀)에 획급하고, 각양 잡물가는 저치된 구미(儲置舊米者)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매번 세미(稅米)로는 고가를 기다려 상정부족조 및 잡물가(雜物價)에서 집전취용(執錢取用)합니다. 당분(當分)의 환미(還米)로 세미(稅米)에 충납(充納)하고, 상정(詳定)의 헐가(歇價)로 환미(還米)에 충대(充代)합니다. 그러나 상납하는 환미(還米) 1석은 세미(稅米) 1석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필경 찧는 과정에서 축이 나는 수에서 발생하는 해가 소민(小民)에게 미치게 됩니다. 환작하여 취잉하는 물건(換作取剩之物)에 대한 시각은 마치 그것이 고유한 것으로 여깁니다.


근래 세미(稅米)에 대한 환롱(幻弄, 교묘한 못된 꾀로 남을 농락함), 건체(愆滯, 耽誤)와 추열(麤劣, 粗糙拙劣), 흠축(欠縮, 본래의 양에서 부족분이 생김)은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왕 지나간 것은 밝혀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차후 세(稅)와 대동(大同)을 상납할 때, 무미(貿米)를 집전(執錢)하고 환미(還米)를 환작(換作)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엄히 규금(糾禁)을 가하고, 드러나는 대로 중형을 가해야 합니다. 상정미 통계(詳定米通計) 중 각 읍이 출입하고 난 후 남을 경우와 부족할 경우, 서로 이충(移充)할 것을 정례(定例)로 신명(申明)해야 합니다. 상정부족조(詳定不足條) 및 영읍잡물가(營邑雜物價)는 한결같이 정례(定例)에 따라야 합니다. 아울러 본곡(本穀)으로 용하(用下, 잡용으로 쓸 돈이나 물품을 내어줌)할 경우, 다시는 세미(稅米)를 모법(冒法, 법을 범함)·환용(換用)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일절 엄하게 금지한다는 뜻을 가지고 본도를 영칙(令飭)했습니다.


근래 환폐(還弊)는 하나가 아니며, 분류(分留, 환곡 따위의 分給量과 留置量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위법(違法)과 전환(錢還, 돈과 환곡)의 모작(冒作)이 더욱이 백성과 나라의 병폐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환향(還餉, 환곡과 군향)을 분류(分留)로 정하는 과정에서 그 법의(法意)가 매우 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응분(應分) 외에 응가분(應加分, 加分, 환곡을 일정한 분량 외에 더 꾸어주는 분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응가분(應加分) 외에 또 장청가분(狀請加分)이란 것이 있습니다. 더욱이 관(邑)이 제멋대로 하고 이(吏)가 농간하는 등 그 간작(作奸)이 다종다양합니다. 이른바 '개색(改色, 같은 소용의 물건에서 뜻에 맞는 것으로 바꿈)'은 전류(全留), 이류(二留), 반류(半留, 환곡의 절반은 큰 창고에 남겨두고 절반은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일) 식으로 단지 허구(虛具)적으로 베풀어버리기만 하면 저절로 진분(盡分, 창고에 있는 곡식이나 물건을 풀어서 죄다 나누어줌)으로 귀결됩니다.


일도의 환총(一道還摠)을 예로 들어보더라도 남아 있는 곡식(留儲之穀)은 거의 없습니다. 공주의 성향(公州之城餉), 수영의 군향(水營之軍餉)의 경우는 적폐가 고질화되어 실제로는 열읍의 가장 심한 폐단입니다. 또 전환(錢還)을 가지고 말한다면, 본래 대금(大禁, 법령)에 관계되지만, 근래 외읍에서 모범(冒犯)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매번 봉적(捧糴, 물건을 거두어 받아들이고 곡식을 사들이는 것)할 무렵엔 경영의 응작(京營之應作)을 빙자하여, 원곡(元穀, 원래의 곡식)과 아울러서 자의로 남작(恣意濫作)하여, 시치(市直,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를 따라 고가로 집전(高價執錢)하는데, 어떤 때는 헐가로 무추(貿推), 환입(換入)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상정(詳定)으로 입본(立本), 취잉(取剩)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각읍으로 이전하는 경우(各邑之移轉)도 있습니다. 겸세(?歲), 대전(代錢, 물건 대신으로 내는 돈)의 경우 간향(奸鄕), 활서(猾胥)들이 자신들이 득의했다고 간주할 때(視作得意之時)는 자의적으로 남작하여 그 한계와 절차가 없습니다. 관속(官屬)이 사환(私還, 수령이 사사로이 마련하여 백성들에게 꾸어주는 환자 곡식)을 제멋대로 모첨(冒添)하고, 이노(吏奴)가 입본(立本)을 충포(充逋)하는 경우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대추당봉(待秋當捧, 가을에 갚아야 하는 것)도 종귀수납(從貴收納)을 따른다는 관념이 해마다 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궁민(窮民)은 오로지 수탈만 당하고, 간활(奸猾)은 오로지 자기 밥그릇만을 챙깁니다.


대저 환(還, 환곡)·향(餉 , 군향 또는 군량) 등 각곡(各穀)은 오로지 예비적 수요(備豫之需)을 위한 것인데, 그 소재(所在)가 텅 비어 배순지자(排巡之資)는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본다면, 분류(分留)의 무절(無節)과 전환(錢還)의 모금(冒禁)이 똑같이 그 빌미이므로 속히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전부터 각곡(各穀) 중 가분(加分)과 응용(應用, 예산에서 정상적인 경비로 당연히 써야 함)이란 것은 깊이 논의하여 혁파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군향(軍餉)과 진곡(賑穀)의 경우는 법의(法意)가 매우 중하므로 지금부터라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분(加分)과 전환(錢還) 명색에 대해서는 엄히 신금(申禁)을 가하여 대봉(代捧,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바침)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상식(常式)을 신중히 준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청컨대 묘당에 영하여 엄칙시행(嚴飭施行)해야 합니다.


본도의 군정(軍政)은 생민의 뼈에 사무치는 병폐입니다. 군액(軍額)이 증가하지 않으면 백성들(生齒, 인구)은 점점 불어납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족 궐액을 메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까지 징집 영장을 보내고 있으며, 또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에까지 징집 영장(簽括)이 쥐어집니다. 이 밖에 한 사람이 여러 번 복역하는 경우(一身之疊役者), 나이가 들었는데도 제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年老而未除者) 등 허다한 폐원(弊源)들은 모두 실정(失丁)이 그 원인입니다.


어느 한 읍을 예로 들어 말씀드린다면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들이 존재합니다. 응역(應役)하는 민총(民摠) 중에는 이른바 제번군관(除番軍官)이 있으며, 교생(校生)이나 원생(院生) 등 원외로 남록(濫錄)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속(吏屬)이나 향임(鄕任), 보노(保奴, 助丁) 등이 사사로이 명색을 만드는 경우가 있으며, 유학(幼學)이 모칭(冒稱, 이름을 거짓으로 꾸며 댐)하는 경우가 있으며, 훈예(勳裔)들이 가탁(假托)하는 경우가 있으며, 군적 대장 밖(案付外)에 있는 수영(水營)의 주사(舟師)나 교졸(校卒), 별포(別砲), 보군(保軍)의 경우가 있으며, 각역 노속(各驛奴屬)이 투탁(投托)하는 경우가 있으며, 사부가 묘노(士夫家墓奴)들이 법외탈면(法外脫免)하는 경우가 있으며, 공주 별초군의 군관(公州別抄軍官)들이 근년에 가설(加設)된 경우가 있는 데, 이러한 유형들은 모두 포오의 소굴(逋伍之窟穴)입니다. 그 중에서 계방(契房, 백성들이 부역의 면제 또는 다른 도움을 얻으려고 관아의 아전들에게 뇌물로 줄 돈이나 곡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직한 계)이란 명색은 첨정(簽丁) 제도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일읍의 부호(富戶)나 대촌(大村, 105호 이상의 마을)들 모두는 관리(官吏)와 체결하여 공역(公役)에 불응합니다. 일촌(一村)이 봉납하는 돈은 많게는 몇천 냥에 가깝고 적게도 몇백 냥은 됩니다. 대읍(大邑)은 논외로 하고, 10실(室)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쇠잔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모두 거촌(巨村)이 스스로 만든 계(契)가 존재합니다. 호별로 돈을 납부하자(逐戶輸錢) 이속(吏屬)들은 이익을 더욱 불려 나갔으며, 전촌(全村)이 면역되자 간민(奸民)들은 스스로 그들의 근거지를 형성해 냈습니다. 한 무리(一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군액(軍額)에만 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망(藏亡), 익포(匿逋)의 무리가 발생되면 풍속을 해치거나(傷風) 완고한(梗化) 무리들이 모두 이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폐단이 제거되기 전에는 군액 문제가 바로잡히는 날이 없습니다.


일찍이 무진년(1808) 수행시(繡行時)도 이 문제를 조목별로 열거하며 교혁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실효(實效)는 없으며, 폐단의 근원은 더욱 깊어져만 갑니다. 조가(朝家)가 도신을 엄칙하여 따로 조사를 행한다면, 이른바 계방(契房)이란 명색은 즉시 탕파(蕩破)될 것입니다. 위 항에서 진술해 올린 여러 조목들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영하여 직접 사출(査出)하게 하여 여러 만정의 허록수(屢萬丁虛錄之額)를 보충하고, 몇만 명 백성들의 억울한 징집이라는 고통(屢萬民寃徵之苦)을 들어줘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가장 급한 일입니다.


증미(拯米, 물에 잠겼던 쌀)를 수봉(收捧, 세금이나 빌려준 돈을 거두어들임)하는 것은 백징(白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발생하는 가징(加徵)이나 재징(再徵)은 호민(湖民)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됩니다. 당초 분급(分給)할 때는 매석 집축(每石執縮)은 반드시 9두 1승 2합으로 분표(分俵, 몫몫이 별러서 나누어 줌), 환봉(還捧, 꾸어주었거나 빌려주었던 돈이나 곡식을 받아들임)합니다. 그런데 해당 읍은 축조(縮條, 줄어들어서 모자라는 몫)을 합쳐 가징(加徵)했습니다.


환봉(還捧) 과정에서 흉년을 당해 정퇴(停退, 기한을 물림)하거나, 대전(代錢) 과정에서 햇수를 계산하여 감봉하는 것(計年減捧)은 실제로 폐단을 걱정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본읍은 당년필봉(當年畢捧)으로 전수를 서리의 손으로 건몰(乾沒)했습니다. 정퇴(停退)가 오래 경과하여 상납(上納)해야 할 기한이 되었다면 10년, 20년 혹은 30년, 40년 후라고 하더라도 이미 납부한 백성(旣納之民)에게 재징(再徵)을 가하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호(不干之戶)에게도 체독(替督)을 가합니다. 결국 폐단을 걱정하는 뜻이란 다름 아닌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며, 준봉(準捧, 돈이나 물품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바침)하는 방법이란 저절로 건몰(乾沒)로 귀결됩니다. 차후 증미(拯米)를 분표(分俵)할 때는 곧바로 발매례(發賣例)를 기준으로 삼고, 상정수봉(詳定收捧)을 따라야 합니다. 흉년이 아닌 해(非大無之年)는 제하되 절대로 정퇴(停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햇수가 오래 되었는데도 재징하는 경우(年久再徵之擧)와 축조(縮條)를 가징(加徵)하는 폐단(縮條加徵之弊)이 발생하면 엄히 금단(禁斷)을 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식을 따라 시행하되 민폐를 혁파하고 상납(上納)을 바루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안면도(安眠島)의 송전(松田)은 국가의 수요를 위한 것이므로 그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의 재거사목(齎去事目)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송전(松田) 내의 모입(冒入, 승인 없이 함부로 들어감)이나 모경(冒耕)의 경우는 열성조(列聖朝) 때부터 여러 번 신금(申禁)을 가했고, 암행어사(持斧之臣, 암행어사로 지방에 나감을 이르는 말)로 하여금 따로 규찰(糾察)하게 했습니다. 신이 본도(本島)를 주찰(周察)하고 여러 번 돌아본 바로는 섬의 마을 수는 다섯 동(洞)이며, 인가 수는 1,000여 호입니다. 양전(良田), 옥토(沃土)는 곳곳이 개간되어 있고, 수전(水田)이나 한전(旱田)은 몇천 섬지기(石落, 한 섬의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라는 뜻으로 2천 평 내지 3천 평 정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인민은 모두 누정(漏丁, 호적에서 빠진 남정)이고, 토지는 대부분 세금이 없는 땅입니다. 전도(全島)의 크기가 70리쯤 되는데, 이제는 조가의 소유지가 아니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송정(松政)의 경우 오히려 본 섬의 두 번째 중요한 일인데도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송정 하나에만 얽매이니 발본색원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이입(已入), 이경(已耕)을 취금(驟禁)하기 어렵다고 여겨 인호가 날마다 증가하고 전토가 해마다 개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금송(禁松)만 하려고 하니 이것은 뜻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입니다(近於南行而北轅). 금입(禁入), 금경(禁耕)을 하기 전에 금송(禁松) 일관(一款)에 대해서는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모입(冒入), 모경(冒耕)을 일절 엄금한 연후에야 비로소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게 된다(然後始可爲國有常憲)'고 생각됩니다. 송정(松政)은 두 번째로 의논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또 금송(禁松)의 경우 금송하는 방법(禁松之方)은 요컨대 그 해송(害松)을 제거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해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만약 모입(冒入), 모경(冒耕)과 같은 것들이 이 섬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본래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년 이래 금양(禁養)에는 방법이 없고, 취용(取用)에도 절차가 없습니다. 예전에 빽빽하던 산이 지금은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삼가 국전(國典)을 살펴보니 봉산금송(封山禁松)에 대해서는 전함에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취용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해(公廨)를 영건하거나, 지토선(地土船, 지방 원주민이 소유하고 있는 배)을 만들 때 재목을 요청하면 일절 엄방(一切嚴防)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래 경외의 해우(廨宇)를 수리, 보수할 경우는 재목을 요청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습니다. 각양 재목 수요를 모두 한 섬에만 부담 지우고, 풍락(風落, 바람에 꺾인 나무)이나 자고(自枯, 저절로 시든 나무)를 핑계삼아 한번 난작을 허제(許題)할 경우 생송(生松) 한 그루의 허작이 미치는 해는 몇십 그루의 생송에 미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을 멈추지 않으면 얼마 되지 않아 온 섬에 한 그루의 소나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시골의 농부가 단순히 땔나무와 꼴을 베는 경우에도 반드시 한두 해의 생육 과정이 필요한데, 하물며 전함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경우 약간의 생육 시기도 주어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나무를 키우는 데 기본이 없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데도 한계가 없습니다. 결국 막중한 전함을 수조(修造)함에 기한에 맞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비상시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말씀드린다면, 더욱 한심합니다. 모든 금양방법(禁養之方)은 오로지 영곤(營閫, 감사, 병사, 수사), 읍진(邑鎭)이 떳떳한 법을 준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수신(帥臣, 병사, 수사)들은 관할(管轄)과 통령(統領)이 주임무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의적으로 법을 범하고선 위탁의 막중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법 기강의 엄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전후 수신(前後帥臣)의 죄상에 대해서는 이미 서계에 써서 보고 드렸습니다. 별다른 벌이나 징계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후 도송(島松), 육송(陸松)을 막론하고, 한 번이라도 모금(冒禁)이나 범작(犯斫)의 폐단이 관내 여러 산에서 발생할 경우 당해 수령·변장(邊將)을 조율논감(照律論勘)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한 수신(帥臣)도 우선 먼저 엄히 처분해야 합니다. 경외의 공해(公廨)나 객사(客舍)를 수리 또는 보수할 때 재목을 요청할 경우는 사목(事目)에 따라 일절 엄히 방지해야 합니다. 비록 전함을 수조한다고 하더라도 남작의 폐단(濫斫之蔽)이 있으면 적발될 때마다 배로 엄히 처분해야 합니다. 모든 수거(修擧, 恢復), 이혁(釐革) 방법의 경우는 도신이나 수신에게 영하여 난상토론하여 계문하도록 하되(爛商啓聞) 그 좋은 의논을 쫓아 품처하게 해야 합니다( 從長稟處).


안흥(安興) 관장(關障)의 목은 곧 삼남해구(三南海口) 중 가장 험악한 곳입니다. 암석 일맥이 갑자기 바다로 내달려 들어가 그 옆으로 놓인 형상이 마치 문지방과 같으며, 그 날카로움은 무기와도 같습니다. 서해 행선(西海行船)은 전례대로 조수의 진퇴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 않고, 반드시 조수가 가득하고 바람이 잘 때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배가 움직이는 비용과 시일은 적으나 혹 실수가 발생하면 바로 취재(臭載, 배에 짐을 썩게 함)되어 버립니다. 또 이때부터 암초(暗礁)가 많아져 험난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공사(公私)의 곡물만 파몰될 뿐만 아니라 인명도 손상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신이 지세의 형편을 상찰하고 늙은이들의 전문을 들어본 결과 서산(瑞山)과 태안(泰安) 사이에는 창포(倉浦)가 있으며, 양계(兩界)가 연륙(連陸)한 곳에는 흔진포(欣津浦)가 있습니다. 창포와 흔진포는 서로 간의 거리가 3리를 넘지 않습니다. 옛날에 관장의 험함(關障之險)을 피하기 위해 창포에서 흔진포까지 굴착하여 선로(船路)를 소통시키고자 했으나 준공할 무렵에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굴항’(掘項)이라는 명칭은 지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옛날에 파놓은 땅은 포갱(浦坑, 포구의 구덩이)이 되어 깊이는 2장여(丈餘)이며, 넓이는 10여파(餘把) 혹은 8,9파이며, 길이는 1리쯤 됩니다.


굴항(掘項) 이하의 지역은 곧 지세가 점점 내려가 높은 언덕이나 높은 층암(高岡而層巖之阻)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창포로부터 옛 땅을 소통시켜 새로운 길을 열면 해운으로 왕래하는 길이 평지나 다름없게 될 것입니다. 관장의 길(關障之路)과 비교하여 그 험함의 정도를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확 트이어 사통팔달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그 해로의 원근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지금의 조로(漕路)는 안면외양(安眠外洋)을 경유하고, 관장(關障)을 비스듬히 우회하여 평신외양(平薪外洋)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거리는 거의 4, 500리 이상입니다. 만약 흔진(欣津)이나 굴포(掘浦)를 통과할 경우는 안면 내양(安眠內洋)을 경유하고, 흔진(欣津)을 곧바로 지나 평신외양(平薪外洋)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거리는 100여 리에 불과합니다.


만일 당장의 공력이 크기 때문에 어렵게 여긴다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서 예전에 전인들이 이미 시작한 모범(前人已始之規)을 따라 단지 몇 리의 점점 내려가는 지반(數里漸下之地)을 파는 데 불과합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잠시 수고롭지만 영원히 편안할 뿐만이 아닙니다. 또 수고는 반이나 공은 배가 되기 때문에 민력(民力)이 크지 않고, 공비(工費)도 작게 든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처리와 조치방법(區處措劃之方)에 대해서는 묘당에 영하여 난상품지(爛商稟旨), 양의시행(量宜施行)하게 하십시오.


어(漁), 염(鹽), 선세(船稅)의 수기(搜起), 보탈(補)과 비총(比摠, 합한 수량이나 분량), 정수(定數)는 사목(事目)이 매우 엄격하고, 법의(法意)가 매우 엄중합니다. 그러나 연해 여러 읍의 어장, 미역 밭, 선척(船隻), 염분(鹽盆) 등 진폐(陳廢, 陳荒)시 백징(白徵)에 대해 한결같이 탈급(給, 탈면을 허락하여 줌)해 주지 않아 그 침해가 인족(隣族)에게 미쳐 해민의 뼈에 사무치는 고통(海民切骨之苦)이 되고 있습니다. 가현자(加現者, 추가로 드러나는 것)는 모두 토호(土豪)와 읍속(邑屬)의 모점(冒占, 강제 점유)와 횡침(橫侵, 불법 침해)이기 때문에 하나도 조사되는 것이 없습니다. 은루(隱漏)는 3년마다 점검하게 되어 있는데, 단지 문구만을 따르면 그만입니다. 도신과 수령도 교혁(矯革)할 의사가 별로 없습니다. 만약 예전과 같이 그대로 둔다면, 해포(海浦)의 잔맹(殘氓)들이 살 수 없습니다. 속히 도신에게 영하어 엄히 조사하고 실질적으로 바로잡게 해야 합니다. 균세를 납부할 때(均稅所納)는 일읍의 정총(定摠, 原臺帳에 기재된 結稅의 總數)에 구애받지 말고, 열읍의 다과를 비교하여 일도의 분배 정총(定摠) 안에서 백성들의 억울한 징납이 없도록 하면 세금의 총수는 줄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균역(均役)을 실시한 후에는 궁방(房宮), 각사(各司)가 어세(漁稅)를 절수(折受, 논밭이나 결세 따위를 나라로부터 떼어 받음)하는 경우도 아울러 혁파해야 합니다. 이미 사목이 있으므로 부당한 절수는 진고(陳告, 사실을 죽 이야기하여 알림)로 처리해야 합니다. 간민을 결장, 정배하는 조항(奸民決杖定配)은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근래에는 경외의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사패절수(賜牌折受)를 이유로 모점하고 횡침하는 폐단(冒占而橫侵之弊)이 많습니다. 연해의 읍진은 구폐(救弊), 보용(補用, 부족한 것을 보태어 씀)을 이유로 어세(漁稅)나 장세(場稅) 외에 분세(分稅), 지세(地稅) 등의 명색을 창출하여 선주인(船主人), 염상(鹽商), 미상(米商) 및 장시상고(場市商賈) 등 처에서 자의적으로 늑봉(勒捧, 강제징수)하고 있습니다. 또 혹 관용어물(官用魚物) 명목으로 포민(浦民)에게 감가늑봉(減價勒捧)하는 등 갈취함이 끝이 없고 침징(侵徵, 불법징수)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喝取無藝侵徵多端).


신은 이번에 암행하는 중 한두 곳의 폐단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대로 금혁(禁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기타 다른 읍도 (그 실정을)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경사(京司), 외읍(外邑), 각궁방(各宮房)을 막론하고, 모점(冒占)이나 횡침(橫侵), 창세, 늑봉(勒捧) 등과 관계될 경우 도신에게 영하여 하나하나 핵출(覈出)하여 즉각 혁파하게 하시되 결코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재를 찾고, 효열을 포양하는 조항은 반포하신 사목에 실려 있는데도 신의 이목이 두루 살피지를 못했고, 또 겸하여 사체도 신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논열하지 못하고 실직한 신의 죄(不得循例論列失職之罪)는 진실로 송구스럽습니다.]


'암행어사 김정희 별단'을 보면 조선 후기 지방관과 아전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왕실과 조정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은 훨씬 더 심각했다.   


2019.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