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2)

林 山 2019. 6. 25. 15:22

추사박물관 2층 전시실 초입에는 추사인보(秋史印譜)와 '金正喜印(김정희인)' 등 성명인(姓名印)과 '秋史(추사)', '阮堂(완당)', '三十六鷗草堂(삼십육구초당)' 등 자호인(字號印), '不計工拙(불계공졸)', '海棠花下戱兒孫(해당화하희아손)' 등 명구인(名句印)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는 무려 343개에 이르는 명호를 가지고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상징이요 지향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추사의 명호가 많았다는 것은 그의 지향점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추사인보(秋史印譜)


인장을 제작하는 예술을 전각(篆刻)이라고 한다. 조선 전각의 1인자는 미수(眉戒) 허목(許穆)으로 알려져 있다. 김상용(金尙容), 윤두서(尹斗緖), 추사와 그의 동생 김명희(金命喜), 추사의 제자 오경석(吳慶錫)과 이상적(李尙迪) 그리고 정학교(丁學敎),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吳世昌), 정대유(丁大有) 등도 직접 전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인장(秋史印章)


전각의 종류에는 성명을 새긴 성명인, 자(字)와 아호(雅號)를 새긴 자호인 또는 아호인((雅號印), 유명한 시문이나 좋아하는 문구를 새긴 명구인 또는 사구인(詞句印), 작품의 소장을 확인하기 위한 수장인(收藏印), 감식을 나타낸  심정인(審定印), 새나 기 등 동물 문양을 새긴 초형인(肖形印) 등이 있다. 성명인에는 백문인(白文印, 陰刻), 자호인에는 주문인(朱文印, 陽)이 주로 쓰인다. 인장을 찍었을 때 백문인은 글씨가 흰색, 주문인은 붉은색이 된다. 사구인에는 서화의 우측 상단에 찍는 두인(頭印)과 중간에 찍는 유인(遊印)이 쓰인다. 


추사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현판 탁본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은 두 번째 유배지 함경도 북청에서 쓴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황초령비) 비각의 현판 글씨다.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568년(진흥왕 29) 황초령에 세운 순수비다. 황초령비는 당시의 신라 영역과 관직제도, 명칭, 지명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진흥왕은 군사강국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를 기습 공격했다. 백제의 영토였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성왕(聖王)을 사로잡아 죽인 신라는 가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영토까지 침략했다.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창녕과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 등 네 군데에 자신이 다녀갔음을 기록한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북수고경'에서 문제가 되는 글자는 '古竟(고경)'이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황초령은 절대로 '고경'이 될 수 없다. 진흥왕 이전까지 황초령은 신라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판 글씨를 쓸 당시 추사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다. 또 '竟(경)'은 원래 '지경'을 뜻하는 '境(경)'으로 썼어야 한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한자는 같은 음의 글자는 서로 빌려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예가 김병기(전북대 교수)는 '眞興北狩古竟' 현판 글씨에 대해 '추사의 강건한 필력과 탁월한 조형 감각을 볼 수 있다. 자형은 평범하나 매우 우람한 필획으로 쓴 "眞"자도 아름답거니와 "興"자의 윗부분은 들쭉날쭉하게 변화를 준 다음 아랫부분은 굵은 가로획으로 정리하고 다시 두 점은 모양을 달리하여 좌우로 힘차게 삐침으로써 강한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다시 "北"자는 안온하게 썼다가 "狩"자는 왼편의 "犭(犬)"은 크고 굵게 쓰고 오른 편의 "守"는 작게 씀으로써 대소와 강약의 변화를 크게 주어 강한 대비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古"자는 탄탄한 필획과 좌우의 대칭을 잘 맞춘 결구를 갖춤으로써 앞서 "狩"자가 보여준 파격적인 분위기를 다시 안정적인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기는 또 '竟'자에 대해서도 '"竟"은 "일을 끝맺는다."는 의미의 "마침 경"자이고, "境"은 땅의 경계를 의미하는 "지경 경"자이기 때문에 이 비가 가진 경계비이자 순수비의 의미로 보자면 응당 "境"으로 써야 맞다. 그런데, 추사는 "竟"으로 썼다. 왜 그랬을까? 한자는 같은 음의 글자끼리는 서로 빌려 쓰곤 한다. 이른 바 "6書" 중의 가차(假借)가 바로 그것이며 가차의 의미를 흔히 "동음통가(同音通假)"라고 풀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추사는 아름다운 서예적 장법(章法, 포치)의 응용을 염두에 두고 "境"을 "竟"으로 동음통가를 하면서 "竟"의 맨 위 점 하나를 생략하였다. 바로 위에 있는 "古"자의 "十"자 부분에 위쪽으로 돌출한 획을 점으로 간주하고 그 점을 "竟"자의 점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획2용"의 시각적 효과를 노리고서 "境"으로 쓰지 않고 "竟"으로 쓴 것이다. 추사의 예술적 감각과 창의력을 실감하게 하는 부분이다.'라고 평했다. 


1816년 7월 31세의 추사는 친구인 동리(東籬)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삼각산(三角山, 837m) 비봉(碑峰)에 올라가 북한산비의 비문을 탁본했다. 이듬해에는 지기인 풍양 조씨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다시 비봉에 올라가 북한산비를 조사한 뒤, 종래 이성계(李成桂)의 왕사(王師) 무학 자초(無學自超)의 비라고 알려졌던 이 비가 진흥왕의 순수를 기념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북한산비는 세워진 이래 1,300여 년 동안이나 잊혀졌다가 추사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다. 추사는 북한산비를 고증하면서 황초령비의 탁본을 활용했다. 북한산비의 옆면에는 추사와 조인영이 답사하여 판독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정복하고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568년에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12행, 매행 35자씩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찬양하는 내용과 수행한 사람들의 관직,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황초령이 초방원(草坊院)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황초령비를 '초방원비(草坊院碑)'라고도 한다. 황초령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백겸(韓百謙, 1547~1629)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다. 비슷한 시기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북병사(北兵使) 신립(申砬, 1546~1592)이 탁본을 해왔다고 전한다. 황초령비는 탁본이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 1637~?)의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수록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제1석과 제3석만 남아 있었다. 이후 소재를 알 수 없었다. 


1790년 장진부(長津府) 설치를 계기로 유한돈(兪漢敦, 1742~?)이 황초령비 제1석을 다시 발견하였다. 추사는 이 비의 재발견자를 유척기(兪拓基, 1691~1767)라고 했다. 황초령비는 그 뒤 또다시 매몰되었다. 조정에서 자주 탁본을 요구하자 그곳 백성들이 황초령비를 뽑아서 벼랑 아래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게 수고비라도 지급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1832년 추사의 절친한 벗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추사의 부탁을 받은 권돈인은 황초령비 제1, 2석을 찾아내 관아로 옮겨 보존하였다. 1852년 추사가 제주도에 이어 북청에서 두 번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각별한 사이인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신라의 강역을 증명하는 황초령비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추사는 윤정현에게 이 비석을 원래의 위치로 복원할 것을 부탁했다. 윤정현은 추사의 지도를 받아 황초령 바로 아래 중령진(中嶺鎭)으로 황초령비를 옮겨 세운 뒤 비각(碑閣)을 지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지명도 진흥리(眞興里)로 고쳤다. 황초령비 제3석은 윤정현이 진흥리로 옮길 당시 소재 불명 상태로 탁본만 전해졌다. 윤정현은 1852년 8월 추사에게 비각의 편액 글씨와 이건기(移建記)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알려주는 '眞興北狩古境' 편액과 '황초령진흥왕순수비이건비문(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移建碑文)'을 써주었다. 이처럼 추사와 권돈인, 윤정현은 금석학 연구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00년 함경도의 재력가 김씨(金氏)가 비각을 세우고, 황초령비와 윤정현이 옮긴 사실을 적은 소비(小碑), 비각중건기비(碑閣重建記碑)를 보존하였다. 현재 이 비는 함흥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1931년 함흥군 하기천면 은봉리(隱峰里) 계곡에서 당시 18세의 엄재춘(嚴在春)이 황초령비 제3석을 발견하여 제1, 2석과 이어붙였다. 제3석의 발견으로 60자 정도의 글자가 보완되었다. 추사에 의하면 이 비석의 글씨는 중궈 난치(南齊)와 량대(梁代)의 비나 조상기(造像記)와 비슷하며, 어우양쉰(歐陽詢)의 서체를 따랐다고 한다. 황초령비는 마운령비와 더불어 진흥왕대 신라의 동북방 영토가 함흥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1938년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은 황초령비 탁본을 베이징(北京) 류리창(琉璃厂) 고서점에서 구입해 왔다. 위창(葦滄, 韙傖) 오세창(吳世昌)은 이 탁본의 내력을 아래쪽 여백에 적어 놓았다. 이 탁본은 조선과 칭나라 금석 교류의 징표가 되는 유물이다. 


박영철은 일제의 밀정으로 유명한 배정자(裵貞子, 1870~1952)와 결혼하여 5년 동안 같이 살다가 이혼했다. 박영철도 다양한 친일반민족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중추원, 관료, 도지사, 도 참여관, 친일단체, 군 등 여러 분야에 중복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윤정현은 추사에게 자신의 호 '梣溪(침계)'를 글씨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윤정현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우(季愚),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이조 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성균관(成均館)에서 행한 황감응제(黃柑應製)에 뽑힌 윤정현은 18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급제하였다. 51세의 나이로 출사하였으나 이듬해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에 선발된 뒤 학문의 조예와 가문의 배경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1846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듬해 정월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1849년 2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함경도 관찰사에서 돌아온 윤정현은 이조, 예조, 형조 판서를 거쳐 1856년 9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직하였으며, 11월에는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1858년 이후 그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 명예직에 올랐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碑文)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침계유고(梣溪遺稿)'가 있다. 


허련(許鍊)의 서첩(書帖)


추사를 진정 흠모한 사람은 '호남화단의 종조(宗祖)'로 일컬어지는 진도 출신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이었다. 허련은 1808년 2월 7일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련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자는 정일(精一), 정일(晶一), 마힐(摩詰)이다. 호는 소치(小癡), 소치거사(小癡居士), 노치(老癡), 석치(石癡), 매수(梅叟), 승산(升山), 이봉(二峰), 죽창(竹傖), 혜전(蕙顚) 등 상당히 많다. 허련은 몰락한 양반가의 후예로서 조선시대 화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과 기록을 남긴 화가이다. 그는 또 다채로운 여행 편력으로도 유명하다. 


'홍길동전'을 쓴 작가이자 시대의 혁명가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승려와 무사들을 조직하여 조선왕조를 뒤집어엎으려 한 죄목으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허균은 조선왕조를 백성들 위에 군림해서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시대의 유물로 보고 이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해군 정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허균을 심문도 없이 죽인 다음 시체를 토막내서 조리를 돌렸다. 허균의 아들 허대(許垈, 1586~1662)는 화를 피해 진도 고군면으로 들어와 양천 허씨의 입도조(入島祖)가 되었다. 허대는 허득생과 허득민, 허득홍 등 삼형제를 두었고, 허득생의 차남 허순(許珣)의 7세손이 바로 허련이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에는 허련에 대해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31세손으로 양평공(襄平公) 광파(礦派)에 속한다. 허련의 선대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사대부가의 하나로 꼽히는 가문이었으나 진도로 이주한 후로 가세가 몰락하여 허련의 대에는 거의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양천 허씨의 진도 이주는 23세 허대에 의해 비롯되었다. 입도조 허대가 진도로 이주한 것은 그가 선조(宣祖)의 서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의 처조카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역모죄로 몰려 진도에 유배된 임해군을 찾아간 허대가 임해군이 강화로 이배될 때 함께 가지 않고 그대로 진도에 정착한 것이 양천 허씨의 진도 이주 원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허련의 초명은 연만(鍊萬)이었다. 추사의 제자가 된 32세 이후에는 유(維)라는 이름을 썼고, 대략 1850년 이후부터는 련(鍊)으로 바꿨다. 유는 남종화의 비조 탕(唐)나라 왕웨이(王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왕웨이의 자는 모지에(摩詰)다. 왕웨이의 이름 웨이와 자 모지에는 '웨이모징(維摩經)'에 나오는 웨이모지에(維摩詰)란 거사(居士)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웨이를 흠모한 나머지 허련도 자신의 이름을 유, 자를 마힐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홀로 모사하면서 그림을 익혔다. 초년에 허련은 해남 연동의 윤선도(尹善道) 고택 녹우당(綠雨堂)을 찾아가 윤두서(尹斗緖)의 후손 윤종민(尹鍾敏)을 만나 '공재화첩(恭齋畵帖)'을 빌렸다. 해남 윤씨 가문의 가보를 빌린 것은 초의선사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단청을 할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허련은 화첩을 두륜산 대흥사로 가져와 모사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허련에게 초의선사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1839년 봄 초의선사는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두릉(杜陵, 마재)으로 가는 길에 허련의 그림을 가지고 가서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절친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허련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추사는 허련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해 8월 한양으로 올라간 32살의 허련은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머물며 여항문인화가(閭巷文人畵家) 김수철(金秀哲), 이한철(李漢喆), 유재소(劉在韶), 전기(田琦) 등과 함께 추사에게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받았다. 그는 추사로부터 베이숭(北宋)의 화가이자 명필 미푸(米芾), 위안(元) 말기 문인화의 대가 따치(大癡) 황궁왕(黃公望), 일획론(一劃論)의 완성자 밍(明) 말 칭(淸) 초의 싀타오(石濤) 등을 배웠다. 또 추사의 서풍(書風)을 전수받는 한편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허련의 호 소치는 추사가 지어준 것이다. 추사는 격조 있는 남종문인화의 세계를 추구했던 허련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소치라는 호는 황궁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중국 10대 명화 중 하나인 '푸춘산주투(富春山居圖)'를 그린 황궁왕은 우젠(吳鎭), 니잔(倪瓚), 왕멍(王蒙)과 더불어 위안 사대가(四大家) 중 한 사람이다. 추사는 허련을 조선의 황궁왕이라 보았던 것이다. 


허련의 질박하고 순수한 자질을 알아본 추사는 그를 일러 '鴨水以東無此作矣(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했다. 허련의 소박한 심성과 그림 솜씨를 높이 평가한 추사는 그에게 해남 우수사 신관호(申觀浩)와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權敦仁) 등을 소개하여 든든한 후원자가 되도록 했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허련은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서화 수업을 받았다. 1843년 제주 목사 이용현(李容鉉)의 도움으로 추사의 적거지를 왕래하며 서화를 익혔다. 1846년 허련은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며 헌종에게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를 그려 바쳐 극찬을 받았다. 이처럼 추사의 지기들은 궁중과의 인연을 맺게 해주는 등 허련이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 그가 대궐을 드나들 수 있도록 관직도 주선해 주었다. 1847년 허련은 세 번째 제주도를 방문하여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허련은 헌종의 배려로 1848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하했다. 허련은 특히 지두화(指頭畵)를 잘 그렸다. 그가 42세 때 헌종 앞에서 지두화를 그린 일화는 유명하다.       


허련은 안동 김씨의 좌장이자 당대의 권세가 김흥근(金興根), 민승호(閔升鎬), 윤정현(尹定鉉), 정원용(鄭元容)과 정기세(鄭基世) 부자와도 교유하였다. 허련은 여러 고관대작를 사겼지만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정약용의 장남 정학연(丁學淵)이었다. 허련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과도 교분을 쌓았다. 허련은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장수현감을 지낸 김영문(金永文)과 능주목사를 지낸 이교영(李喬榮) 등 지방 수령, 중인, 여항문인들과도 교유하였다. 


허련의 작품은 수묵산수화, 사군자, 묵모란도(墨牡丹圖) 등이 주류를 이루며 소품이 많다. 허련은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허련은 49세 때인 1856년 스승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진도로 귀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경영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서 그의 산수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산수화의 경우는 남종화가 대부분이다. 허련의 작품은 역대 화가들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허련의 작품이 많이 전해지는 것은 그림을 많이 그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작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련은 인물화를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圖)'은 조선 말기 초상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완당난화(阮堂蘭話)'에는 스승 추사의 말년 모습을 그린 그림이 실려 있다. 


1866년 허련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남겼다. 60세 때인 1867년에는 자서전 '몽연록(夢緣錄)'을 썼고, 1869년에는 '채씨효행도(蔡氏孝行圖)' 삽화를 그렸다. 허련의 사군자 그림은 당시에도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특히 묵모란도는 그가 '허모란(許牡丹)'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묵모란도 외에도 파초, 괴석, 노송, 연화 그림도 개성적으로 잘 그렸다.


1877년 70세의 허련은 흥선대원군을 만났다.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其臭如蘭)'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해부터 허련은 남원과 전주에서 추사의 글씨를 판각하는 한편 스승의 서첩을 모사하여 만들었다. 허련이 추사 글씨를 탁본해서 만든 '완당탁묵(阮堂拓墨)'에는 1934년에 발간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에도 없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72세 때에는 '몽연록'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속연록(續緣錄)'을 썼다. 흔히 '소치실록(小癡實錄)'으로 통칭되는 '몽연록'과 '속연록'은 조선시대 화가의 유일한 자서전이다. '소치실록'에는 허련의 회화 활동은 물론 당시의 생활상과 대궐의 모습, 헌종의 수랏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1887년 허련의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는 1893년 9월 6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허련은 추사의 충직한 제자로서 스승의 예술세계를 후대에 널리 알린 가장 큰 공로자였다. 전국각지를 주유하느라 허련은 스승 추사처럼 많은 후진을 양성하지는 못했다. 허련에게 그림을 직접 배운 사람도 진도 출신 김익로(金益魯), 임삼현(任三鉉) 등을 꼽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아들 허형(許瀅), 손자 허건(許楗)과 허림(許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에게 전해졌고, 이들은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호남을 예향(藝鄕)이라고들 한다. 호남에 예향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바로 허련이라고 할 수 있다. 


허련의 작품으로는 '선면산수도'를 비롯해서 '산수도첩(山水圖帖)', '오백장군암도(五百將軍巖圖)', '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 '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김정희초상(金正喜肖像)',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茆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극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추사가 부인 예안 이씨에게 쓴 한글 편지


추사가 아내 예안 이씨(禮安李氏)에게 쓴 한글 편지도 전시되어 있다. 추사는 생전에 40통의 한글 편지를 남겼다. 그중 2통은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고, 나머지 38통은 모두 예안 이씨에게 쓴 것이다. 


추사는 첫 번째 결혼한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가 5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19살의 예안 이씨와 재혼하여 20년을 살았다. 추사는 예안 이씨를 매우 사랑했고, 또 부부 사이의 금슬도 무척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노경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서 병이 들자 43살의 추사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평양 감영으로 올라갔다. 평양에는 시를 잘 짓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죽향(竹香)이란 기녀가 있었다. 당시 양반 한량들은 죽향의 시와 그림에 찬사를 보냈고, 추사도 그녀에게 반하여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때 이실(李室,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누이)가 그 일을 예안 이씨에게 일러바쳤다. 추사는 아내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 부랴부랴 '그 사이에 다들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고 없으신지요? 어린 것도 탈 없이 있는지 염려되옵니다. 여기는 아버님께서 병환이 있어 나도 3일경에 가다가 돌아와 약시중을 들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억지로 세수까지 해보려고 하시니 천만 다행이옵니다. 나는 편안하오며 집안일을 잊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선 다른 의심을 하실 듯하오나, 이실의 편지는 다 거짓말이오니 곧이듣지 마옵소서. 참말이라고 해도 이제 다 늙은 나이에 그런 일에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변명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혹시라도 의심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누이의 말은 다 거짓말이니 곧이듣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는 편지다. 평양 명기에게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 아내에게 들켜 전전긍긍하는 보통 남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추사가 안동 김씨 세도정권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자 두 사람은 8년 3개월 동안이나 서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당시 벼슬아치들이 귀양을 가면 현지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첩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약용도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첩을 들여 딸까지 낳았다. 하지만 추사는 오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끝내 첩을 들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갈 경우 유일한 소통 수단은 편지뿐이었다. 당시 제주도에서 추사가 보낸 편지는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려 예안 이씨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예안 이씨는 병약했음에도 집안을 잘 건사했다. 추사는 그런 아내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추사가 1841년 10월 1일 예산에 있는 아내 앞으로 '매양 잘 있노라 하시오나 말씀이 미덥지 아니하오니 염려만 무궁하오며 부디 당신 한 몸으로만 알지 마옵시고 이천리 바다 밖에 있는 마음을 생각해서 십분 섭생을 잘하여 가시기 바라오며.....'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사대부의 근엄함은 찾아볼 수 없고, 병약한 부인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는 편지다. 또 문체도 높임말을 쓰는 등 사뭇 정중하다. 오랫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리라.


병을 앓던 예안 이씨는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기 전인 1842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죽은 사실도 모르고 추사는 11월 14일과 18일 연이어 '이 동안은 무슨 약을 드시며 아주 몸져 누워 지냅니까? 간절한 심려로 갈수록 걱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예안 이씨의 부고는 다음 해인 1843년 1월 15일이 되어서야 제주도에 도착했다(1842년 12월 15일에 부고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아내의 부고를 받자 추사는 추도문 '夫人禮安李氏哀逝文(부인 예안 이씨를 슬피 보내며 쓰다)'과 추도시 '도망처가(悼亡妻歌)'을 지어 망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도문과 추도시에는 사랑하는 지어미를 잃은 지아비의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곡진하게 담겨 있다. 


夫人禮安李氏哀逝文(부인 예안 이씨를 슬피 보내며 쓰다)


壬寅十一月乙巳朔十三日丁巳, 夫人示終於禮山之楸舍. 粤一月乙亥朔十五日己丑夕, 始傳訃到海上. 夫金正喜具位哭之, 慘生離而死別, 感永逝之莫追, 綴數行文, 寄與家中. 文到之日, 因其饋奠而告之靈几之前曰: 嗟嗟乎! 吾桁楊在前, 嶺海隨後, 而未甞動吾心也. 今於一婦人之喪也, 驚越遁剝, 無以把捉其心, 此曷故焉? 嗟嗟乎! 凡人之皆有死, 而獨夫人之不可有死. 以不可有死而死焉, 故死而含至悲茹奇寃, 將噴而爲虹, 結而爲雹, 有足以動夫子之心, 有甚於桁楊乎嶺海乎! 嗟嗟乎! 三十年孝德, 宗黨稱之, 以至朋舊外人, 皆無不感誦之. 然人道之常, 而夫人所不肎受者也. 然俾也可忘? 昔甞戲言, 夫人若死, 不如吾之先死, 反復勝焉, 夫人大驚此言之出此口, 直欲掩耳遠去而不欲聞也. 此固世俗婦女所大忌者, 其實狀有如是者, 吾言不盡出於戲也. 今竟夫人先死焉, 先死之有何快足, 使吾兩目鰥鰥獨生, 碧海長天, 恨無窮已!(임인년 즉 1842년 11월 을사삭 13일 정사에 부인이 예산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다음 달 을해삭 15일 기축 저녁에 비로소 부고가 전해져 제주 바닷가에 이르렀다. 남편 나 김정희는 신위를 갖추고 곡을 하니 살아서도 떨어져 있었고 죽어서도 떨어져 있음을 비참히 여긴다. 영원히 떠났지만 추모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몇 줄의 문장을 엮어 집으로 부친다. 문장이 도착하는 날엔 그 궤전을 신위의 앞에 바쳐 다음과 같은 나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유배란 형벌보다 아내를 잃은 아픔이 더 크다. 아아! 나의 족쇄가 앞에 있고 영해가 뒤에 따를 때에도 일찍이 나의 마음은 요동치지 않았지만 이제 한 부인의 상에 이르러선 놀라고 혼란스럽고 넋을 잃고 괴로워하여 그 마음을 잡질 못하니, 어떠한 까닭인가? 아아!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홀로 부인만은 죽지 않았어야 했도다. 그러나 죽지 않았어야 했음에도 죽었으니, 죽어서도 지극한 비통함을 머금고 기이한 원통함을 품어 장차 내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삼키면 우박이 되어 족히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니, 이것은 족쇄보다 심하고 영해보다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부인보다 내가 먼저 죽었어야 했다. 아아! 30년 효성스러운 덕은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에게 칭송되었고, 오래된 벗과 외지인들에게 이르러선 다 감탄하며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부인은 인간 도리의 떳떳함이라 여겨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러한 부인을 내 잊을 수 있으리오? 옛적에 일찍이 농담으로 '부인이 만약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 게 도리어 나은 것만도 못하오'라고 말하니, 부인은 이런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에 크게 놀라며, 곧바로 귀를 손으로 가려 멀리 도망가 듣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참으로 세속에서 부녀자가 크게 꺼리는 것이지만, 그 실상은 이와 같으니 내 말이 다 농담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제 마침내 부인이 먼저 죽었그려. 먼저 죽은 것이 어찌 상쾌하고 만족스럽기에 나에게 두 눈만 뜬 채 외롭게 홀로 살게 하는가! 푸른 바다와 가없는 하늘같은 한스러움이 끝없을 뿐이다.)


도망처가(悼亡妻歌)


那將月姥訟冥司(월하노인을 모시고 명부에 하소연하여)/來世夫妻易地爲(내세에는 부부가 처지를 바꿔서)/我死君生千里外(내가 죽고 그대는 천리 밖에 살아남아)/使君知我此心悲(그대로 하여금 나의 이런 슬픔을 알게 하리)


추사의 한문 서체는 천하의 명필이었지만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의 한글 서체는 어떤가? 잘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휘갈겨 쓴 추사의 한글 서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이 낸 보도자료를 보면 '추사의 한글은 자모의 점획이 고전체와는 달리 양식적으로 궁체의 범주에 속하고 흘림체가 주류를 이루고있다. 필획의 태세(太細, 굵고 가늠)와 곡직(曲直, 굽음과 곧음)의 대비, 방필(方筆, 모난 획)과 원필(圓筆, 두리뭉실한 획)의 조화, 용묵(用墨)에 있어서 필속(筆速)에 따른 윤갈(潤渴, 먹의 퍼짐에 있어 진하고 마른 정도)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측면은 추사의 한자 필법과도 동일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추사의 한글 편지에는 한 개인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당시의 풍속이나 사회상, 의식주와 풍토병 같은 것도 나타난다. 편지에 등장하는 병명을 보면 학질, 감기, 치통, 가려움증, 회충 등이 있다. 또 입맛 까다로운 추사를 위해 육지에서 보내온 먹거리에는 민어, 석어, 어란, 간장, 진간장, 잣, 호두, 곶감, 김치, 젓무, 쇠고기, 약식, 인절미, 새우젓, 조기젓, 장볶이, 산포, 장육, 건포, 오이장, 무장, 겨자 등이 있다. 제주도 현지에서 구한 먹거리에는 생복, 산채, 고사리, 소로장이, 두릅 등이 있다. 추사가 보내달라고 한 천문동(天門冬), 길경(桔梗), 백합(白蛤), 계피(桂皮), 굴피(橘皮) 등의 약재를 통해서 그의 체질을 파악할 수 있다. 태음인약(太陰人藥)과 소음인약(少陰人藥)이 반반 정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는 양인(陽人)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편지를 통해서 추사는 유배지에서도 손자의 출생이나 혼사와 회갑, 가족의 죽음이나 제사 등 종손으로서 본가와 처가 집안 대소사를 일일이 챙겼음을 알 수 있다. 한글 편지에는 아내의 소식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기는 내용도 있고, 의복문제나 질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다. 또 평양 기생과의 염문을 해명하는 내용도 있고,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한양에서 제주까지 먹거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다. 며느리에게 제사 지내는 방법을 가르치도록 당부하는 내용도 있다. 이처럼 추사의 한글 편지에는 19세기 조선 사대부의 진솔하고 소박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추사도 사대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다시는 혼인을 하지 않고 오로지 서화에만 몰두한 채 세월을 보냈다. 


2019.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