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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2 - 과천 과지초당

林 山 2019. 5. 14. 13:55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조선 후기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추사는 여기서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학문과 예술에 전념했다. 당시 아름다운 정원과 숲, 연못을 갖춘 과지초당은 청계산(淸溪山, 618m)과 관악산(冠岳山, 629m) 사이에 있다고 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렸다. 


2007년 과천시(果川市)는 주암동(注岩洞) 184번지 2,055㎡ 부지에 대청마루와 누마루를 깐 5칸 규모의 안채와 행랑채 등 한옥 2동(66㎡)을 지어 당시의 과지초당을 복원했다. 과지초당 인근에 있던 항아리로 만든 독우물(甕井)을 배치하고, 소규모 공원도 함께 조성하였다. 과지초당 바로 옆에는 2013년 7월에 개관한 추사박물관이 있다. 


과천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


과지초당은 1824년 추사의 생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과천에 마련한 별서이다. 김노경이 13년 동안 기거한 이 별서는 추사 가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837년(헌종 3)에 김노경이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부친의 묘를 이곳에서 가까운 옥녀봉(玉女峰, 375m) 중턱 검단(黔丹)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렀다. 3년상을 치른 뒤에도 추사는 과지초당을 자주 찾았다. 추사의 별호 즉과(卽果), 과노(果老), 과파(果坡), 노과(老果), 병과(病果),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은 그가 과천에 머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과지초당 행랑채


1840년(헌종 6) 조상 대대로 노론(老論) 벽파(僻派)였던 추사는 윤상도(尹尙度)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아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윤상도 옥사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추사 등 반 안동 김씨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벌인 정치공작이었다. 


벽파와 시파(時派)는 영조(英祖) 때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賜死)를 둘러싸고 분열된 파당이다. 무고를 받아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는 대부분 남인(南人)이었다. 반면에 세자를 공격해 자신들의 무고를 합리화하려고 꾀했던 벽파는 대부분 노론이었다. 하지만 노론 중에도 시파가 있었으며, 친족 간에도 시파와 벽파로 갈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4색당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붕당은 시파, 벽파 두 파로 갈라져 치열한 정권 쟁탈전을 벌였다. 1801년 순조(純祖) 즉위 후 일어난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계기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나 신도 중에는 시파가 많았다. 이를 기회로 정권을 잡은 벽파가 시파를 탄압하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를 정점으로 한 경주 김씨 세력은 노론의 벽파를 이끌었다. 그 중심에 추사 가문이 있었다. 경주 김씨 일족은 안동 김씨의 정점인 김조순(金祖淳)의 배경 세력인 시파를 약화시켰다. 하지만 순조가 즉위하고,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안동 김씨 일족은 경주 김씨 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하고 자기 일족을 조정의 요직에 포진시켰다. 


순조 집권 시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잠시 대리청정을 맡았다. 추사는 효명세자의 스승이었다. 효명세자는 김조순 계열의 안동 김씨 세력을 밀어내고 내척인 김노경과 추사 부자, 외척인 풍양 조씨 조인영(趙寅永) 등 자신의 사람들로 요직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안동 김씨 일족이 김노경 부자를 숙청하는 기회가 됐다. 결국 김노경은 고금도로 유배당했다.


독우물


순조 사후 헌종(憲)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우의정에 추사의 벗 조인영, 형조판서에 추사의 절친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병조참판에 추사 등 반 안동 김씨 인물들을 중용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동 김씨 세력은 이미 끝난 윤상도 상소를 다시 끄집어내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추사 등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는 데 이용했던 것이다.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한 안동 김씨 일족은 무소불위의 세도정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추사의 제자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도 안동 김씨 세도정권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상가집 개를 자처하는 등 미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다. 


추사는 수차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유배형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동양 문인화의 최고봉 '세한도(歲寒圖)'를 완성했던 것이다. '세한도'를 보면 추사가 처한 상황과 심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추사는 유배된 지 8년만인 1848년에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권돈인이 이끄는 반 안동 김씨 세력과 안동 김씨 세력 간의 예송(禮訟) 논쟁에 휘말려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 권돈인은 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이어받은 기호학파의 지도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이었다. 그는 스승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밍(明)나라 셴종(神宗)을 위해 만동묘(萬東廟)를 세웠고, 숙종(肅宗)의 뜻을 받들어 창덕궁(昌德宮) 금원(禁苑) 옆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1852년 6월 추사는 북청 유배지에서 '황초령진흥왕순수비이건비문(黃草嶺眞興王巡狩碑移建碑文)'을 썼다. 그해 8월 13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 주암리(注岩里)로 돌아와 과지초당에 은거(隱居)한 채 학문과 예술혼을 불태웠다. 


1853년 68세의 추사는 '여석파흥선대원군(與石坡興宣大院君)'과 '제석파난권(題石坡蘭券)'을 썼다. '題石坡蘭卷(제석파난권)'은 추사가 석파(石坡)에게 묵란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蘭(난) 치는 게 가장 어렵다(寫蘭最難)'고 썼다. 


1855년 봄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은 과지초당으로 70세의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그해 추사는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성담 의전(聖覃倚琠)의 진영을 찬한 '성담상게(聖覃像偈)', '정문공김수근묘표음기(正文公金洙根墓表陰記)', 전북 고창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전북 임실군 임실읍 효충서원(孝忠書院)의 '朝鮮孝子贈敎官金公箕鍾旌閭碑(조선효자증교관김공기종정려비)'와 '朝鮮孝子贈參判金公福奎旌閭碑(조선효자증참판김공복규정려비)' 등을 썼다. 


과지초당 안채


1856년 늦은 봄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은 몇 사람과 함께 한양의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던 71세의 추사를 찾아뵙고 그 정황을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로 남겼다. 그해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여손)' 예서 대련 글씨를 썼다. 


10월 7일 추사는 경기도 광주(廣州,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 경판전(經板殿)을 위한 '板殿(판전)' 편액 글씨를 썼다. 고졸미(古拙美)와 무심(無心)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 명작은 추사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추사는 봉은사에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님이 된 추사는 과천으로 돌아와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청계산 옥녀봉 기슭에 묻혔다. 1858년 추사가 찬(撰)하고 쓴 백파율사비가 선운사에 세워졌다.


1863년 철종(哲宗)이 후사가 없이 죽자 이하응은 안동 김씨와 반목하고 있던 조대비(趙大妃, 헌종의 어머니)와 결탁하여 세도정권이 손을 쓰기 전에 12살 난 자신의 아들 이재황(李載晃, 고종)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된 이하응은 10년 동안 고종의 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추사의 제자인 신헌(申櫶), 홍순목(洪淳穆, 추사의 조카사위 ), 박규수(朴珪壽, 박지원의 손자, 개화파의 비조), 오경석(吳慶錫, 역관, 개화파의 비조) 등을 중용했다. 추사는 제자 대원군을 통해서 마침내 자신의 권토중래와 왕실 강화의 꿈울 이뤘던 것이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그리면서 꾸었던 바로 그 꿈 말이다. 세찬 바람에 난초 잎이 휘어지고 스러져도 이에 굴하지 않는 꽃대, 꼿꼿이 선 꽃대 끝에 피어 대차게 맞서고 있는 한 송이 꽃을 기억하는가? 


청계산 옥녀봉 기슭에 있던 추사의 묘는 1937년 9월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로 이장되었다. 오석산 기슭에 있던 첫 부인 한산 이씨 묘에 추사 묘와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 묘를 이장하여 3위를 합장하였다. 


'瓜地草堂(과지초당)' 판액


안채 처마에 걸려 있는 '瓜地草堂(과지초당)'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로 알려진 서예가 가산(佳山) 최영환(崔泳煥)이 쓰고, 이조(里朝) 임만선(林萬善, 과천시국제친선협회 문화예술위원장))이 판각했다. '과지(瓜地)'라는 지명은 청계산 옥녀봉 아래 마을이 예로부터 오이를 많이 재배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 마을은 오이로 유명하여 오이골로 불리기도 했다. 과천은 고구려 시대 때 율목현(栗木縣)이었다. 과천에서 밤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과지초당 기둥에는 추사가 과천 시절에 쓴 주련(柱聯) 두 점이 걸려 있다. 오른쪽 주련은 '大烹高會(대팽고회)' 예서 대련이고, 왼쪽 누마루 기둥 주련은 '磨千禿盡(마천독진) 추사체 대련이다. 방안에는 추사가 벗 권돈인에게 보낸 '磨穿十硏 禿盡千毫(마천십연 독진천호)' 편지와 묵란(墨蘭) '인천안목(人天眼目)'이 걸려 있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주련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주련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세상에 으뜸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이며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세상에 으뜸 모임은 부부와 자녀 손자들 모임


추사는 출세가도를 달릴 때 천지사방 다니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보았던 사람이다.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육지의 본가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을 정도로 입맛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늙어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 등 소박한 반찬이 최고라는 것이다. 추사는 또 환로에 나아가 수많은 공식적, 비공식적 모임을 가져 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손자 등 내 가족이 최고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추사가 만년에 얻은 지극히 평범한 깨달음이었다. 


'대팽고회' 예서 대련은 1856년 추사가 71세 때 쓴 글씨다. 추사는 원본의 관지에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썼다. 71세 때 과천에서 썼다는 말이다. 원본의 협서에는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能享有此味者畿人爲.(이것은 촌부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한 큰 황금 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적혀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추사의 소박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대현약우(大賢若愚)라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는 뜻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통하는 말이다. 추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大烹(대팽)은 '진수성찬, 성대한 연회'란 뜻이다. '高會(고회)'는 성대한 모임이다.


'대팽고회' 대련 작품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추사의 작품을 모으고 있었다. 1940년대 전형필은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을 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 예정가는 100원이었는데, 한 일본인이 300원으로 올리자 전형필은 세 배 이상인 1,000원을 불러 낙찰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이 3원, 한양의 집 한 채 가격이 대략 100원이었다. 전형필은 한눈에 명작을 알아본 것이다. 원래 이 작품은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의 기둥에 걸려 있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2018년 보물 제1978호로 지정되었다. 


磨千十硏(마천십연) 주련


禿盡千毫(독진천호) 주련


磨千十硏(마천십연벼루 열 개를 갈아 없애고

禿盡千毫(독진천호) 붓 천 개 몽당붓 만들었네


磨千十硏(마천십연), 禿盡千毫(독진천호) 추사체 대련은 추사가 말년에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의 글귀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내가 비록 글씨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에서 뽑은 것이다. 추사의 예술혼이 단적으로 드러난 구절이다. 글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연습과 피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서운 말이다. 추사는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고 나서야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磨千十硏(마천십연), 禿盡千毫(독진천호)로 완성된 추사체는 그의 제자 이하응, 신헌, 서상우(徐相雨), 조희룡(趙熙龍), 이상적(李尙迪), 허유(許維), 전기(田琦), 오경석(吳慶錫)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추사가 벗 이재 권돈인에게 보낸 '磨穿十硏 禿盡千毫(마천십연 독진천호)' 편지


편지 원문은 다음과 같다. 古人作書 別無簡札體 如淳化所刻 多晉人書 未嘗專主一簡札 是東俗之最惡習也 吾書雖不足言 七十年磨穿十硏 禿盡千毫 未嘗一習簡札法 實不知簡札別有一體式 來要者輒以簡札爲言 謝不敢耳 僧尤甚於簡一法 莫曉其義諦也[옛 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버릇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여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으면서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못 한다며 거절합니다. 스님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춘화거티에(淳化閣帖)'는 숭(宋)나라 타이중(太宗)이 춘화(淳化) 연간에 금중(禁中)에 춘화거(淳化閣)를 설립하고 한(漢)나라 짱즤(張芝)로부터 웨이(魏), 진(晉), 탕(唐)까지 여러 서예가의 필적을 골라 보관하고 한린싀수(翰林侍書) 왕주(王著)에게 모각(摹刻)하게 한 것이다. '춘화미거파티에(淳化秘閣法帖)'라고도 하고, 줄여서 '거티에(閣帖)'라고도 한다. 


1851년 예송 논쟁에서 패한 권돈인은 강원도 낭천(狼川, 지금의 화천), 추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1852년 67세의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권돈인은 아직도 낭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권돈인은 1859년 충남 연산(連山)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편지는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가 아직 낭천에 있던 권돈인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써 준 것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권돈인은 간찰체에 대해서 추사에게 물었다. 추사는 간찰체에 대해 조선의 병폐라고까지 하면서 경멸하고 있다. 공을 들여서 쓰는 서체와는 달리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리한 대로 자유분방하게 쓰는 간찰체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추사의  '人天眼目(인천안목)' 난초 그림


'인천안목(人天眼目)'은 혜란(蕙蘭)을 친 묵란이다. 일경다화(一莖多花)를 혜(蕙)라고 한다. '人天眼目'은 다섯 송이의 꽃이 핀 꽃대 하나가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였고, 장엽(長葉) 두 장이 화면을 길게 가르는 단출한 그림이다. 왼쪽 상단에는 '人天眼目(인천안목), 吉羊如意(길양여의) 居士(거사)'라는 화제가 있다. '사람과 하늘의 눈이 되고, 뜻대로 복 받기를.....'이란 뜻이다. 


'인천안목(人天眼目)'은 숭(宋)나라 승려 후이옌 즈자오(晦巖智昭)가 지은 책이름이기도 하다. '인간과 천상 일체가 중생의 안목이 된다'는 뜻이다. '안목(眼目)'은 지혜의 눈을 말한다. 탁현규(간송미술관 연구원)는 이 묵란에 대해 '난은 예서법으로 쳐야 한다던 추사는 팔분예서(八分隸書)로 글씨를 써넣어 난치는 법과 글씨 쓰는 법이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추사가 먹으로 맺은 인연이란 의미로 "추사묵연(秋史墨緣)" 인장을 찍었다.'고 설명했다. 


과지초당의 뒤로 돌아가면 벽의 끝부분에 '추사 가문과 치원 황상'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걸려 있다. 추사와 치원(巵園) 황상(黃裳, 1788~1870)의 인연을 이해하려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으로 거술러 올라가야 한다. 다산 가문은 남인이면서 천주교와 관련이 깊었다. 큰형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은 천주교도 이벽(李檗), 사위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이었다. 다산의 매형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승훈(李承薰)이었다.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丁若)은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아들 정철상(丁哲祥)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정약종, 황사영, 이승훈, 정철상 등은 참수되었다. 이벽은 유교와 천주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신유박해로 인해 다산 가문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


다산도 신유박해로 화를 입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 11월 다산은 전라도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가는 둘째형 자산(玆山) 정약전(丁若銓)과 헤어져 유배지 강진으로 들어갔다. 다산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1802년 10월부터 다산은 서당을 열어 강진 고을 아전들의 자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0월 10일 다산은 임시 거처인 주막집 앞에서 마을 아이들과 공차기를 하던 황상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양반이 아니어서 과거를 볼 수 없는 신분이었기에 다산은 황상에게 시를 가르쳤다. 


1803년 봄 황상은 지방관과 아전의 포악한 가렴주구로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현실에 분노하여 이를 고발하는 시를 지었다. 다산이 이 시를 보고 공분해서 지은 시가 바로 '애절양(哀絶陽)'이다. 당시 황상은 학질을 앓고 있었다. 이에 다산은 황상의 쾌유를 비는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황상도 화답시를 지어 다산에게 올렸다. 화답시를 본 다산은 중궈(中國) 셰휘롄(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못지 않은 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상이 지은 시는 흑산도에 유배된 다산의 둘째형 정약전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전도 그의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다산과 황상은 대둔사의 승려 아암 혜장(兒菴惠藏, 1772∼1811)과도 교류를 가졌다. 혜장은 다산이 '걸명시(乞茗詩)'와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보내며 차를 청했던 학승이었다. 황상은 이때 다산의 수발을 들기 위해 찾아온 장남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과 차남 정학유(丁學游) 1786∼1855)와도 사겼다. 


1804년 가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李鶴來)의 집 묵재에서 1년 반을 보냈다. 이학래는 다산을 끝까지 도왔지만 과거에 집착하여 끝내 뜻을 못 이루고 스승을 떠나 비극적 삶을 마감했다.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寶恩山房)과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던 다산은 1808년 3월 16일에 해남 윤씨 문거(文擧) 윤규노(尹奎魯)의 귤동(橘洞) 다산서옥(茶山書屋)에 들렀다. 때마침 윤규노의 아들 윤종하(尹鍾河)가 병 치료차 다산서옥에 머물고 있었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윤종하의 고조부였으므로 두 사람은 외가쪽으로 먼 친척이었다. 다산은 윤종하와 함께 열흘이 넘게 이 산정(山亭)에 묵었다. 다산서옥이 너무나 마음에 든 다산은 윤종하에게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윤종하가 흔쾌히 허락하자 다산은 다산서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서옥을 품고 있는 만덕산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의 호 다산도 바로 이 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산서옥에 다산이 머물면서 이 산정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다산초당은 다산학(茶山學)의 산실로 자리를 잡는다. 다산은 다산초당에서 살림을 도와 줄 후처를 들였다. 후처와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홍임 모녀라 불렸다. 


다산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자 황상은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백적동에 일속산방(一粟山房)이란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생계를 잇기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홀로 옛시를 읽으며 공부에 힘썼다. 


다산의 유배가 풀리지 않자 장남 정학연은 격쟁(擊錚)을 감행하였다. 격쟁은 궁궐에 난입하거나 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 꽹과리(錚), 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학연의 격쟁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유배는 정적들의 집요한 공작으로 인해 8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았다. 1818년 8월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면서 가까스로 다산의 해배(解配)가 이루어졌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고향 광주군(廣州郡) 마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여유당(與猶堂)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마재는 마현(馬峴)두릉(杜陵), 소내(苕川)라고도 불렀다. 다산이 해배되자 홍임 모녀도 마재 본가로 따라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강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사연이 다신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남당사(南塘詞)' 16수에 전한다. 다산은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 본가로 돌아가자 황상은 일속산방(一粟山房)에서 스승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시를 지었다. 황상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였다.


1823년 4월 강진 시절의 제자들이 여유당으로 다산을 찾아왔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다산초당 동암(東庵)의 이엉을 새로 이었는지, 홍도화는 죽지 않았는지, 우물가에 쌓은 축대는 무너지지 않았는지, 연지(蓮池)의 잉어는 잘 살고 있는지, 백련사(白蓮寺)로 넘어가는 길가의 동백나무는 잘 있는지 등을 물었다. 다산에게 다산초당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1828년 12월 황상은 다산으로부터 마재 여유당에 다녀가라는 편지를 받았다. 1836년 2월 중순 다산의 회혼연(回婚宴, 결혼 60주년 잔치)과 병환 소식을 듣고 전라도 강진에서 경기도 광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다산은 75세, 황상은 49세였다. 황상은 열흘 이상을 걸어서 마재 여유당에 도착했다. 정학연의 안내로 그는 병석에 누운 다산을 문병했다. 2월 19일 다산 부자와 작별한 황상은 한양에 잠깐 들렀다가 강진으로 내려가던 중 스승의 부고를 풍문으로 들었다. 황상은 다시 발길을 돌려 마재 여유당으로 가서 정학연과 함께 상복을 입고 스승의 장례를 치뤘다.  

 

그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845년 3월 황상은 두 번째 마재를 찾아가 정학연을 만났다. 정학연은 두 집안의 우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정황계(丁黃契)를 맺자고 제의했다. 정황계를 맺어 더욱 의의가 돈독해진 정학연과 황상은 함께 송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앴다. 정학연의 소개로 황상은 한양의 내노라하는 시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추사는 1848년 제주 유배지에서 황상의 시를 처음 접하고 '두보(杜甫)를 골수로 삼고, 한유(韓愈)를 골격으로 삼았다.'라고 극찬했다. 이처럼 황상의 시를 높이 평가한 사람은 추사였다. 추사는 이미 정학연을 통해서 황상의 시격을 알고 있던 터였다. 그해 12월 초 추사는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다가 강진의 백적동 일속산방으로 황상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상은 정학연을 만나기 위해 이미 마재로의 세 번째 여행을 떠난 뒤였다.


1849년 4월 고향 강진으로 돌아온 황상은 정학연의 편지를 전할 겸 해남의 대둔사로 초의선사를 방문했다. 황상은 초의선사의 방에서 추사의 명작 '茗禪(명선)'과 '竹爐之室(죽로지실)'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竹爐之室' 글씨는 추사가 황상에게 써 준 것이라는 설도 있다. '竹爐之室'은 초의든 황상이든 누가 가지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글씨다. 어쨌든 황상이 '竹爐之室'을 보고 매료된 것은 사실인 듯하다.


1853년 9월 가을걷이를 끝낸 황상은 네 번째 마재로의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추사를 꼭 만나리라 결심했다. 황상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자 정학연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했다. 황상이 정학연의 집으로 들어서던 정경은 '送黃處士園歸一粟山房序(송황처사치원귀일속산방서) - 일속산방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며'라는 시 초반부에 잘 나타나 있다. 


君之初來時(그대 처음 찾아왔을 때)/驚呼忘倒屣(놀라 소리치며 신 거꾸로 신고 맞았지)/握手無一言(손잡고 한마디 말도 못 하니)/骨肉來萬里(골육이 만리 먼 길에서 돌아온 듯해)/和泥解君襪(진흙 묻은 그대 버선 얼른 벗기고)/煖炕加君被(아랫묵에 이불을 덮어 주었지)/勸君軟脚酒(그대에게 발 녹일 술을 권하며)/繞君不離跬(그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지)/僮僕疲何知(하인들도 어찌 아는지)/走僵隨我喜(난 기뻐서 덩달아 분주하였지)/夜闌更秉燭(밤 깊어 등불 다시 밝히고)/問訊孫與子(자손들 안부 물어보았네)/農懋是天雄(농무는 다름아닌 천웅일러니)/吾林同年齒(내 아들 대림과는 동갑이라네)/四朋各幾齡(손주 넷은 각각 몇 살이던고)/福祿乃如此(복록이 다시금 이와 같구려)/而吾竟無孫(하지만 나는 아직도손자가 없으니)/秪可循天理(다만 천리를 따를 수밖에 없네)/早展先君墓(아침 일찍 선군 묘에 자리를 펴고)/揮涕再拜跪(눈물 흘리며 무릎 꿇고 두 번 절했지)           


1854년 3월까지 황상은 마재 정학연의 사랑채에서 머물렀다. 정학연의 사랑채에는 추사가 써 준 '지재로화(只在蘆花)'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갈대꽃뿐'이라는 뜻이었다. 이때 있었던 일들을 쓴 시가 황상의 '치원유고(巵園遺稿)'와 '북유록(北遊錄)'에 실려 있다. 


정학연과 황상은 날을 잡아 추사를 만나기 위해 마재에서 배를 띄웠다. 삼전도(三田渡)에서 하루 묵은 두 사람은 말죽거리를 거쳐 양재역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과천에 도착했다. 과지초당 안으로 들어서니 연못에는 피라미, 송사리 등 비늘이 하얀 작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마당에는 솔잎 무늬가 들어 있는 송문석(松文石)이 있었고, 한쪽에는 댓잎이 새겨진 비석(竹葉碑)이 세워져 있었다.


연못


정, 황 두 사람이 안채에 이르자 추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았다. 세 사람이 안방에 자리를 잡고 앉자 추사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6)와 기산(起山) 김상희(金相喜, 1794~1861)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과지초당에서 황상은 뜻밖에도 다산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이학래를 만났다.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실의의 찬 모습으로 추사의 식객으로 와 있었다. 추사는 황상에게 필묵을 내밀면서 시 한 수를 부탁했다. 정학연이 운자를 불렀다. 황상은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붓을 들어 시를 써 내려갔다.   


'추사 가문과 치원 황상' 안내판


荒山野老一笻枝(황산야노일공지) 황산에 촌늙은이가 지팡이 짚고 오니

白小魚遊万丈池(백소어유만장지) 피라미 송사리가 넓은 못에서 노니네

奇記屈沈博雅士(기기굴침박아사) 진기한 글 충직하고 고상한 선비시고

殊觀脗合初生兒(수관문합초생아) 갓 태어난 아이처럼 빼어난 모습일세

詩中强識松文石(시중강식송문석) 시에서 본 송문석 단번에 알아보는데

目下誰記竹葉碑(목하수기죽엽비) 그 누구라 눈앞의 죽엽비나 기억할까

細草名花煙柳岸(세초명화연류안) 풀꽃도 아름다운 안개 버드나무 언덕

何斯黃鳥惜聲時(하사황조석성시) 꾀꼬리 구슬피 울 때 풍경은 어떠할지


추사를 찾아갔을 때 과지초당의 정경을 읊은 시다. 내용으로 보아 황상은 추사의 시를 다 읽었음에 틀림없다. 꽃 피고 새 우는 계절에 오면 과지초당의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울 거라고 읊고 있다.  


'백소어(白小魚)'는 피라미 종류다. '굴침(屈沈)'은 추(楚)나라 충신 취옌(屈原)이 '죽어서 이 세상의 모범이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것을 가리킨다. 충절을 표현한 말이다. '박아(博雅)'는 학문이 넓고 행동이 바른 것을 말한다. 군자(君子)의 존칭에 쓰인다. '​죽엽비(竹葉碑)'는 산둥셩(山东省) 취푸셴(曲阜縣)에 있던 한(漢)나라 때의 비석이다. 취푸(曲阜)의 르푸(樂圃) 옌광민(顔光敏)이 소장하고 있는 이 비석에는 댓잎이 새겨져 있다.


추사는 또 황상에게 자신과 두 아우를 위해 시 한 수씩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황상은 추사와 그의 두 동생에게 각각 시를 남겼다. 추사에게 준 시의 미련(尾聯)은 다음과 같다.


大名籍籍藏難得(대명자자장난득) 크나큰 이름 자자해서 감출 수가 없나니

滿溢覺羅西蜀通(만일각라서촉통) 청나라에 가득 넘쳐 저 서촉까지 통했네


추사에 대한 최고의 헌시였다. '쥐에뤄(覺羅)'는 칭(淸)나라 셴주(顯祖) 쉬엔황띠(宣皇帝)의 백숙형제(伯叔兄弟)의 자손을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부락(部落)의 명칭이었던 '쥐에뤄'는 나중에 뜻이 변하여 성씨(姓氏)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씨수(西蜀)'는 지금의 쓰촨셩(四川省)으로 오지를 뜻한다. 


황상은 거의 반년 동안 마재와 과천을 오가며 추사, 정학연 형제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황상에게는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황상이 과지초당으로 추사를 찾아올 때마다 두 사람은 시와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황상이 쓴 '두릉에서 과천을 그리며'란 시에 그런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我在果川憶斗陵(과천에 있을 때는 두릉 생각나고)/斗陵還憶果川燈(두릉에선 또 과천 등불 떠오르네)/果川燈火長明夜(과천의 등불 빛이 밤새 밝던 그 밤엔)/斷臂立雪徑慧能(팔둑 잘라 눈 속에 선 혜능조차 우스웠네)/斗陵果川兩難忘(두릉과 과천 둘 다 잊기 어려우니)/自笑兩袒差不勝(양다리 걸침 웃으며 부끄러움 못 견디네)/往來懷中不自定(오갈 적에 마음속은 진정이 되질 않아)/歲暮鄕愁不敢乘(세모라도 향수에 젖을 겨를 없었지)/安得十方分形法(어찌하면 시방세계 분형법 얻어)/散在東西任騰騰(양쪽으로 흩어져 멋대로 다녀볼까)/已矣乎春已晩(아서라 봄날도 이미 이리 늦었는데)/靑山一路直如繩(푸른 산 한 가닥 길 곧기가 새끼줄 같네) 


황상은 추사를 만나는 가슴 벅찬 황홀감에 세모에도 집 생각을 잊은 채 마재와 과천을 오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황상의 황홀하고 행복한 심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추사를 찾아가는 황상의 심정은 바로 자신의 팔뚝을 잘라서 들고 푸띠따모(菩提達磨)에게 가르침을 구한 후이커(慧可)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재와 과천을 오가는 시간이 아까와 시방분형법(十方分形法)을 행하는 카샤파붓다(Kasyapa-Buddha, 迦葉佛)처럼 몸이 동시에 여러 개로 나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고백도 한다.       


'단비입설(斷臂立雪)'은 중궈 선종(禪宗)의 개조(開祖) 푸띠따모가 샤오린쓰(少林寺)에서 9년 간 면벽수행할 때 후이커가 찾아가 눈 속에 앉아 가르침을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왼팔을 끊어 그 뜻을 내보이고 마침내 허락을 얻어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한다. 후이커는 결국 푸띠따모에 이어 2조가 되었다. 황상은 후이커를 6조 후이능(慧能)으로 착각한 듯하다. '시방분형법(十方分形法)'은 카샤파붓다의 백억 육신이 시방세계로 형상을 나투자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은 듯했다는 설화를 가리킨다.


김명희는 이 시에 대해 '작품이 참 좋아 차운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는 평을 남겼다. 황상이 시를 지을 때마다 추사 형제는 일일이 평을 달아 주었다. 추사는 황상에 대한 이야기를 평생지기 절친 권돈인에게도 전했다. 어느 날 권돈인은 황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정승까지 지낸 권돈인의 집은 퇴촌에 자리잡고 있었다. 


황상은 정학연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퇴촌의 별서 사랑채로 들어서자 권돈인이 반갑게 맞았다. 권돈인과 정학연은 동갑이었다. 황상은 권돈인이 시골 아전의 자식인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 주자 감개무량했다. 황상은 황송함에 권돈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사랑채에는 대서(大書)로 기운차게 운필한 '无量壽閣(무량수각)' 예서 편액이 걸려 있었다. 탁자 위 수반에는 수선화가 막 싹을 틔워 올리고 있었고, 벽에는 황상이 생전 처음 보는 자명종(自鳴鐘)이 걸려 있었다. 권돈인은 황상에게 시 한 수를 부탁했다. 이에 황상은 '무량수각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라는 제목으로 오언율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品花伴水仙(꽃 품평을 수선화와 함께 하시니)/蕭灑古山前(말쑥한 옛산의 앞이로세)/不取繁華意(번화한 뜻 취하려 함이 아니고)/爲看造化天(하늘 조화를 보려 함일세)/自鳴知日影(자명종으로 해 그림자를 아니)/一念按朝鮮(오직 한마음 조선만을 생각하시네)/臨謝詩篇敎(물러나서는 시편으로 가르치시매)/終當欲泝沿(마침내 물가 따라 거슬러 가고저)              

황상이 지은 자신에 대한 헌시를 본 권돈인은 흐믓한 표정을 지었다. 수선화는 사행으로 칭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옌징(燕京, 베이징)에서 구해온 귀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수선화 붐이 일고 있었다. 수선화를 유난히 좋아하고 아꼈던 추사도 '수선화부(水僊花賦)'를 지었고, 자하(紫霞) 신위(申緯)도 '수선화(水仙花)'란 제목의 칠언절구를 지었다. 


이후 황상은 한 번 더 권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다. 언젠가 권돈인이 늙은 소에 올라타고 종일 걸려서 마재 정학연의 집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일국의 영상(領相)까지 지낸 권돈인이 가마를 타지 않고 늙은 소를 탄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가마를 타면 가마꾼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가마꾼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일은 훗날 미담으로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황상은 그 일을 적어 '권상공기우행(權相公騎牛行)'을 지었다.


相公騎牛奇又奇(상공께서 소 타신 일 기이하고 또 기이하네)/牛老垂胡兩眼垂垂欲落未落眵(늙은 소 멱미레 늘어지고 처진 눈에는 눈곱이 달랑달랑)/四蹄至重鞭不動(네 다리는 무거워 채찍에도 꼼짝하지 않아)/重如百斤相似商量移(무겁기가 백 근인 양 깊은 생각 잠긴 듯해)/乾坼糞滓被全體(온몸 가득 똥덩어리 말라붙어 있어)/妒花江風毛不吹(꽃샘하는 강바람에도 터럭조차 안 날리네)/鞍具百補千綴盡(안장은 백 번 천 번 깁고 또 기워)/三交藁索衰傔遠牽之(세 겹 꼰 새끼줄로 하인이 멀리 끌고 갔지)/相公據鞍安如地(상공께선 땅에 앉듯 안장에 기대)/嶷然山立白雪髭(산처럼 의연히 앉아 흰 수염을 날리시네)/滿帶岐毫雨暘氣(띠 가득한 몽당붓에 마른 기운 적심은)/風謠物俗欲廳知(풍요와 풍속을 들어 알려 하심일세)/十里斗陵盡日到(십리 두릉길 종일 걸려 당도하니)/藏金扺璧得無疑(간직한 금이 옥과 같음을 의심할 것 전혀 없네)/放牛霞室桃樹下(심하실 복사나무 아래 소를 풀어 놓으니)/堅臥桃陰齒+司復齝(복사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 되새김질만 하네)/人言借得耕餘雌(사람들 말이 노는 암소 빌려 올 수 있다면)/沿江家家擬圖畵(강가의 집들을 그림에다 견주리요)/滿城騷客爭題詩(한양의 모든 시인들이 다투어 시 지으니)/不忍時俗乘人如乘馬(세속에서 사람 타기를 말 타듯 함을 차마 못해서라네)/曾不讀書安有斯(일찍이 독서 없이 어찌 이리 할 수 있으리요)/相公騎牛奇又奇(상공께서 소 타신 일 기이하고 또 기이하네)         


묘사가 뛰어난 시다. 권돈인이 늙은 소의 등에 올라타고 터덜터덜 두릉(마재)을 찾아가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권돈인은 소를 타고 가면서도 풍요와 풍속을 살펴서 기록하거나 시를 지었던 모양이다. 심하실(心霞室)은 정학연의 또 다른 당호다. 정학연은 이 시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도 황상의 시를 보자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여 일필휘지로 글씨를 썼다. 황상의 이름은 장안에 두루 퍼져 나갔다. 황상에게는 생애 최고의 날들이었다. 다산의 애제자로서 추사와 정학연 형제뿐만 아니라 권돈인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1855년 다산의 차남 정학유가 죽었다. 8월 29일 정학연은 동생 정학유의 죽음을 황상에게 알리는 부고를 보냈다. 정학연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66세의 황상은 문상과 문병을 위해 길을 나섰다. 열흘 이상 걸어서 마재에 도착한 황상은 먼저 정학연과 함께 집 뒤편에 모신 스승 다산의 묘소를 찾아 절을 올리고, 정학유의 집으로 건너가 문상했다. 


황상은 1856년 봄까지 정학연의 집 사랑채에 묵었다. 추사와 김명희 형제는 황상의 시집 '치원유고'의 서문을 써 주었다. 서문을 받은 황상은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그해 추사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857년에는 추사의 동생 김명희가 세상을 떠났다. 1859년 2월에는 권돈인, 3월에는 정학연이 세상을 떠났다. 1866년 9월에는 초의선사마저 열반에 들었다. 지음(知音)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이제 더이상 황상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황상은 만년에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꾸준히 시를 짓고 글을 썼다. 만년의 황상이 10년 동안 지은 시는 무려 315제 365수나 된다고 한다. 


황상은 산문집 '치원소고(梔園小藁)'와 서간문 모음집 '치원진장(巵園珍藏)', '장자(莊子)'를 등초(謄抄)한 '치원총서(巵園叢書)', '치원총서'의 일부분인 '곽경순 이아주(郭景純 爾雅注)' 등을 남기고 1870년 12월 22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