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1 - 오석산 화암사

林 山 2019. 5. 1. 14:17

추사고택(秋史古宅)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 용산(龍山, 74.3m)이 있다. 옛날에 용이 나온 용총(龍塚)이 있어 용산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산 모양이 앵무새처럼 생겼다고 하여 앵무봉(鸚鵡峰)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나온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에도 용산이 표시되어 있다. 용산에는 앵무봉과 오석산(烏石山) 등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추사고택 바로 뒤편에 있는 봉우리가 앵무봉, 화암사(華巖寺)가 있는 봉우리가 오석산이다.  


화암사는 용산의 남쪽 끝자락인 오석산 중턱,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202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화암사는 영조(英祖) 이금(李昑, 1694~1776)이 사위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를 위해 하사한 땅 안에 있어 추사 집안에 속한 절이었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 대로부터 추사 가문은 대대로 화암사를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래서 화암사를 비롯해서 그 주변의 병풍바위, 쉰질바위에는 지금도 추사의 발자취와 글씨가 남아 있다. 


예산 오석산 화암사 전경


1846년 6월 3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회갑을 맞았다. 회갑이 되도록 추사는 적장자(嫡長子)를 두지 못했고, 수산(須山) 김상우(金商佑, 1817~1884)는 서자(庶子)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서자는 대를 이을 수 없었다. 서자는 장남이라도 제주(祭主)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사는 관례에 따라 제주도 유배지에서 서농(書農) 김상무(金商懋, 1819~1865)를 양자로 들였다. 김상무의 생부는 추사의 12촌인 김태희(金泰喜)였다. 김상우와 김상무는 추사로부터 서체를 배워 글씨를 잘 썼다.


화암사 추수루와 원통보전


1848년 추사의 둘째 동생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짓고, 세째 동생 김상희(金相喜, 1794~1861)가 쓴 뒤 조석신(曹錫臣)이 새긴 '화암사중수건기(華巖寺重修建記)' 현판이 있어 화암사의 연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현판문에 따르면 화암사의 창건 연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백제 시대에 창건된 절이라는 말만 전한다. 1752년 월성위 김한신이 그의 아버지 김흥경(金興慶, 1667~1750)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절을 중건하였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난 김한신 부부가 용산 앵무봉에 합장되면서 김한신 가문과 화암사는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뒤 1846년 화암사가 허물어지고 퇴락하여 승려들이 기거할 수 없게 되자 김명희는 형 추사의 지시로 여러 문중과 더불어 무량수각(無量壽閣)시경루(詩境樓), 선실(禪室), 요사채, 창고 등을 중건하였다. 또 옛 법당터에 약사암(藥師庵)을 중건하고 삼존상(三尊像)을 봉안하였다. 그해 9월 화암사의 중창이 이루어지자 추사는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烏石山華嚴寺上樑文)'과 함께 '無量壽閣(무량수각)', '詩境樓(시경루)' 편액 글씨를 써서 화암사에 보냈다. 이처럼 화암사는 조선 후기 경주 김씨, 특히 추사 가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암사도 추사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烏石山華嚴寺上樑文(오석산 화엄사 상량문)


盖聞須達九千精舍。信心布祗苑之金。阿育百萬浮圖。神力攝天宮之匠。斯皆度衆生以沙算。龍象空門。超三界以岸登。金湯淨土。遂使星龕月殿。苞羅四部之區。綺桷雕甍。藻繪三韓之境。末流像法。崇飾弘多。有漏小乘。祖師悲憫。曷若因釋敎而稗世法。宏願力而恔人心。如龍山華巖寺哉。惟華巖寺烏石鍾靈。龍山標勝。片雲中起。慰四郊霖雨之望。層壁後環。宛九疊屛風之象。火宅超焚如之厄。石像點頭。塔輪現舍利之光。法醐灌頂。十笏維摩之室。世界差寬。三間廣嚴之居。家風具在。粤惟我曾王考貞孝公。爰就瑕邱之樂。爲營防墓之藏。地卜牛眠。吉宅奠萬年之兆。松無鹿觸。美陰環十里之封。丙舍菟裘。右軍有擔墓之志。午橋檀越。晉公占福先之基。於是招提仍作齋宮。楸柏近連祗樹。晨鍾瞙磬。警在樵蘇。春露秋霜。證成夏臘。素靈獻龍井之地。法界重修。緇侶灑鮫人之珠。中宸垂奬。非藉未來之報應。祗要外護之功行。第以年代屢遷。道塲寢毁。成住壞空之任運。非禪力之有虧。棟梁榱桷之垂顚。嗟法身之無庇。然而隨身樓閣。無法可頹。發願佈施。卽心是道。高曾遺矩。引之子子孫孫。塵刹報恩。擔以生生世世。銅山入槖。喜宰官廻向之心。鐵幹呈材。感昔日栽培之力。遂乃諏吉日選良工。奐輪開林壑之荒。般獿獻技。廈屋識幈幪之利。經象妥虔。寶座莊嚴。歡動失家之子。香厨功德。普供持鉢之人。碧窓納百里之坪。東張珠網。朱栱接千尋之巘。西振繡幡。奚徒淨界之重新。實幸佳城之愈鞏。夜摩忉利。長瞻雲漢之昭回。白足赤髭。亦戒甘棠之剪拜。南陽京兆吉阡。並須彌無騫。華表桓楹儀物。共金剛不壞。豈止於虎邱捨宅。珣珉求福田。廬阜入林。宗雷結淨社而已哉。恭成短引。助擧脩梁。


拋梁東。毫光普照十方同。遙山環作靑螺䯻。隱寂香泉指顧中。

拋梁南。峰頭玉露滴靑嵐。招招近浦行人渡。着處津梁佛力參。

拋梁西。層巘岧嶤象緯齊。膚寸雲能興雨足。老龍閒却鉢中棲。

拋梁北。豊碑遙對相輪直。定知佳氣歇無時。宸翰昭回雲五色。

拋梁上。慈意大雲常願仰。稽首耆婆尺五天。聖人之壽同無量。


拋梁下。桑麻黍稷開膏野。爾曹安得有貪嗔。自是煕煕耕鑿者。伏願上梁之後。風雨無灾。天龍護法。鐘魚肅穆。永奠大方丈禪居。松檜葱蘢。長糸+斬小蓬萊仙境。[대개 들으니 수달(須達)의 구천정사(九千精舍)는 신심(信心)이 기원(祇苑)의 성금을 보시(布施)하고, 아육(阿育)의 백만 부도(浮圖)는 신력(神力)이 천궁(天宮)의 공장(工匠)을 대행하도다. 이는 다 중생을 제도하여 모래로 헤아리니 용상(龍象)의 공문(空門)이요, 삼계(三界)를 뛰어나 피안에 오르니 금탕(金湯)의 정토(淨土)로다.


드디어 성감(星龕)과 월전(月殿)은 사부(四部)의 구역을 포라(苞羅)하고, 기각(綺桷)과 조맹(雕甍)은 삼한의 지경을 조회(藻繪)하도다. 말류(末流)의 상법(像法)은 숭식(崇飾)이 크고 많으며, 유루(有漏)의 소승(小乘)은 조사(祖師)가 비민(悲憫)히 여기는 바니, 어찌 석교(釋敎)를 인하여 세법(世法)을 돕고 원력(願力)을 키워 인심을 쾌하게 하는 것이 용산(龍山)의 화암사와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화암사는 오석(烏石)이 영(靈)을 모으고 용산이 승(勝)을 표하도다. 조각구름이 안에서 일어나니 네 들의 임우(霖雨)의 소망을 위로하고, 층벽(層壁)이 뒤로 둘렀으니 구첩병풍(九疊屛風)의 형상이 완연하도다. 화택(火宅)은 분여(焚如)의 액(厄)을 뛰어나니 석상(石像)이 머리를 끄덕이고, 탑륜(塔輪)은 사리(舍利)의 빛이 나타나니 법호(法醐)가 이마를 적시도다. 십홀(十笏)이라 유마(維摩)의 실(室)은 세계가 너그럽고, 삼간(三間)이라 광엄(廣嚴)의 거(居)는 가풍이 갖추어 있도다.


우리 증왕고(曾王考) 정효공(貞孝公 김한신(金漢藎))은 드디어 하구(瑕邱)의 낙지(樂地)에 나아가 방묘(防墓)의 장(藏)을 경영하였네. 땅은 우면(牛眠)을 가렸으니, 길택(吉宅)은 만년의 길조(吉兆)를 정하고, 솔은 녹촉(鹿觸)이 없으니, 미음(美陰)은 십 리의 봉역을 둘렀도다. 병사(丙舍)의 도구(菟裘)는 우군(右軍)의 묘를 담임할 뜻을 지녔고, 오교(午橋)의 단월(檀越)은 진공(晉公)이 조상을 복되게 하는 터를 점령하도다.


이에 초제(招提)에다 눌러 재궁(齋宮)을 만드니 추백(楸柏)은 가까이 기수(祇樹)에 연댔으며, 새벽종과 저문 경자는 깨우침이 초소(樵蘇)에 있고, 봄 이슬과 가을 서리는 증명하여 하랍(夏臘)을 이루도다. 소령(素靈)은 용정(龍井)의 땅을 헌상하니, 법계가 중수(重修)되고, 치려(緇侶)가 교인(鮫人)의 눈물을 뿌리니, 중신(中宸)에서 허락을 내리도다. 미래의 보응을 빙자한 게 아니요, 다만 외호(外護)의 공행(功行)을 요하도다.


다만 연대가 누차 변천하여 도량(道場)이 차츰 헐어지니,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운에 맡길 뿐 선력(禪力)의 이지러짐이 있는 게 아니요. 동량(棟樑)의 양각(欀桷)이 무너져 가니 법신(法身)의 비호 없음이 슬프도다.


그러나 몸에 따르는 누각은 법이 무너뜨릴 수 없고, 원해서 울어나는 보시는 곧 마음이 도(道)로다. 고ㆍ증(高曾)의 끼친 법규는 자자손손에게 내려가며, 진찰(塵刹)의 갚은 은혜는 생생세세(生生世世)에 짊어지도다. 동산(銅山)이 전대에 드니 재관(宰官)의 회향(廻向)한 마음을 기뻐하고, 철간(鐵幹)이 재목을 바치니, 옛날의 재배한 힘을 느끼도다.


이에 좋은 날짜를 받고 어진 공장을 뽑으니 환륜(奐輪)은 임학(林壑)의 황무를 개척함에 반요(般獿)가 재주를 바치고, 하옥(厦屋)은 병몽(帲幪)의 이점을 아니 경상(經像)이 정성에 편안하며, 보좌(寶座)는 장엄하니 환호는 집 잃은 자들이 즐거워 설레고, 향주(香廚)의 공덕은 발(鉢)을 가진 사람에게 널리 지공하도다. 푸른 창은 백리의 들을 받아들이니 동으로 주망(珠網)을 베풀고, 붉은 추녀는 천길의 뫼뿌리에 닿으니 서로 수번(繡幡)을 떨치도다. 어찌 정계(淨界)의 중신(重新)뿐이랴. 실로 다행은 가성(佳城)이 더욱 공고하여라. 야마(夜摩)와 도리(忉利)는 운한(雲漢)의 소회(昭回)를 우러르고, 백족(白足)과 적자(赤髭)는 역시 감당(甘棠)의 전배(剪拜)를 경계하도다. 남양(南陽) 경조(京兆)는 길천(吉阡)이 수미(須彌)와 아울러 넘어짐이 없고, 화표(華表)와 환영(桓楹)은 의물(儀物)이 금강(金剛)과 함께 무너지지 않도다. 어찌 호구(虎邱)에 집을 사시(捨施)하여, 순ㆍ민(珣珉)이 복전(福田)을 구하며, 여부(廬阜)가 숲에 들매 종ㆍ뇌(宗雷)가 정사(淨社)를 맺는 데 그칠 따름이겠는가. 삼가 짧은 가락을 이루어 긴 들보 들기를 도우노라.


들보 동쪽에 떡을 던져라(抛梁東)/호광이 널리 비치어 시방이 다 마찬가지(毫光普熙十方同)/먼 산이 감돌아서 청라계를 지었으니(遙山環作靑螺髻)/저 가운데 향천은 고요히 흐르누나(隱寂香泉指顧中)/들보 남쪽에 떡을 던져라(抛梁南)/봉우리 위 푸른 안개 흰 이슬이 떨어지네(峯頭玉露滴靑嵐)/포구라 불러불러 길손을 건너주니(招招近浦行人渡)/어디고 다 진량은 부처의 힘 참여하네(着處津梁佛力參)/들보 서쪽에 떡을 던져라(抛梁西)/층층의 뫼 높고 높아 상위가 나란하네(層巇岩嶢象緯齊)/부촌의 구름 능히 비를 잘 일으키니(膚寸雲能興雨足)/늙은 용은 한가로이 발 속에 깃들었네(老龍閒却鉢中棲)/들보 북쪽에 떡을 던져라(抛梁北)/풍비 멀리 마주쳐 윤번으로 수직(守直)하네(豐碑遙對相輪直)/알괘라 좋은 기운 멎은 적이 없으니(定知佳氣歇無時)/어필(御筆)은 찬란하여 오색구름 돌고 도네(宸翰昭回雲五色)/들보 위쪽에 떡을 던져라(抛梁上)/자의라 대운이라 늘 바라며 쳐다보네(慈意大雲常願仰)/머리를 조아리며 기파천(耆婆天)에 드리니(稽首耆婆尺五天)/성인의 수명이 무량과 함께 하네(聖人之壽同無量)/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져라(抛梁下)/상마라 서직이라 기름진 들녘 열렸구려(桑麻黍稷開膏野)/너희들은 어찌하여 탐진이 있을쏜가(爾曹安得有貪瞋)/밭 갈고 우물 파는 평화로운 세상일레(自是熙熙耕鑿者)


엎드려 바라옵니다. 상량(上粱)한 이후에 풍우는 해가 없고 천룡(天龍)은 법을 감싸며, 종어(鐘魚)는 엄숙하고 씩씩하여 길이 대방장(大方丈)의 선거(禪居)를 안정하고 송회(松檜)는 울창하고 무성하여 노상 소봉래(小蓬萊)의 선경(仙境)을 꾸며 주소서]


화암사의 북서쪽으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약 100여 평 정도의 평평한 지대가 있다. 스님의 전언에 의하면 원래 이 지대가 화암사 자리였다고 한다. 약 100여 평 정도의 절터는 산사면을 깍아서 동남향으로 사찰을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사지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화암사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무량수각과 시경루라는 전각이 실제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화암사는 앞에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추수루(秋水樓(추수루), 요사채 등이 있고, 뒤에 대웅전(大雄殿)과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원통보전과 추수루는 사찰의 전각보다는 요사채라는 느낌이 든다. 원통보전에는 '圓通寶殿' 편액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華巖寺' 편액과 '세한도(歲寒圖)' 모사본 액자가 걸려 있다.     

화암사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봉안한 사찰의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 (阿彌陀佛)의 현신(現身)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입적 이후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푼다고 한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 등으로도 불린다.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 관음(觀音)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남해관음(南海觀音), 남해고불(南海古佛)이라고도 부른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보고 추앙한다.


'花巖寺(화암사)' 편액


화암사 원통보전은 사찰 전각 같지 않고 요사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圓通寶殿(원통보전)' 편액 바로 옆에는 '花巖寺(화암사)' 편액이 걸려 있다. '화암사'라는 절의 이름은 영조가 명명한 것이고, '花巖寺' 편액 글씨는 김한신이 썼다. 지금 원통보전에 걸려 있는 '花巖寺' 행서(行書) 편액은 김한신의 글씨를 바탕으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圓通寶殿(원통보전)' 편액


'圓通寶殿(원통보전)' 편액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圓通寶殿' 글씨에서 추사체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낙관이 찍혀 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다.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화려하면서도 기개가 느껴지는 글씨다.   


'無量壽閣(무량수각)' 편액(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화암사 '無量壽閣(무량수각)' 편액 글씨의 특징은 '無(무)'를 '无(무)로 쓴 것이다. 김병기는 "'量(량)'이나 '壽(수)'는 가로획이 많은 글자다. 만약 '无'를 '無'로 썼다면 가로획의 중첩에서 오는 매우 답답한 글씨가 되었을 것이다. 중첩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無'를 '无'로 쓴 데서 추사의 창의성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병기는 또 이 작품에 대해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 기도 한풀 꺾이고 고독 속에서 삶을 반추하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은 글씨가 매우 담담하다. 필획에 어떤 힘을 넣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넣을 만한 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좋게 보면 의도하는 바가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담(淡)'의 글씨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체념에 빠진 무기력한 글씨, 한바탕 병을 앓고 난 후에 쓴 해쓱한 글씨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화암사 '詩境樓(시경루)' 예서 현판(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詩境樓(시경루)'는 추사가 글씨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시한(西汉) 시대 예서(隸書)로 쓴 것이다. 글씨가 아주 단정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글씨를 예서의 필의(筆意)로 쓴 해서(楷書)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 '無量壽閣', '詩境樓' 두 편액과 '화암사중수건기(華巖寺重修建記)' 현판은 화암사의 본사인 수덕사(修德寺)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 화암사는 수덕사의 말사이다.


'세한도' 모사본


'세한도'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2 - 추사고택 솟을대문과 사랑채'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글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에 싣는다. '세한도'는 추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이 변함없는 의리를 지킨 데 대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세한도'에는 추사의 문인화(文人畵)에 대한 사상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그림은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으로 추사 내면세계의 농축된 문기(文氣)와 문인화가 지향하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한 추사의 예술세계가 이 그림 한 장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상적은 1844년 10월 칭(淸)나라 옌징(燕京, 베이징)에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지고 갔다. 이듬해 정월 22일 이상적은 그의 벗 우짠(吳贊)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이자 짱위에쩬(章岳鎭), 자오쩬줘(趙振祚), 야오푸쩡(姚福增) 등 옌징의 명사 17명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다투어 제(題)와 찬(讚)을 붙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십육가(淸儒 十六家) 제찬(題讚)'이다. 


칭나라에서 돌아온 이상적은 '세한도'를 추사의 벗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보여 주었다. 감동을 받은 권돈인은 추사의 그림을 본받아 '세한도(歲寒圖)' 한 폭을 그려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가 '모질도'를 그려 보내준 데 대한 답례였다. 화제 '歲寒圖' 글씨는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歲寒圖' 제목 왼쪽 맨 위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인장이 찍혀 있다. '서로 오래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와 권돈인의 깊은 우정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그림은 옆으로 긴 화면 오른쪽에 '歲寒圖'라는 제목과 '藕船是賞(우선시상)', '阮堂(완당)'이라는 관서를 쓰고, '正喜(정희)'와 '阮堂'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다. 끝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담은 추사의 발문과 짱위에쩬, 자오쩬줘 등 16명의 칭나라 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함께 붙어 10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원통보전 마루 기둥에는 '昨夜寶陀觀自在(작야보타관자재)', '今日降赴道場中(금일강부도량중)'을 쓴 주련이 걸려 있다. '간밤에 보타산에 계셨던 관자재보살이 오늘 아침 이 도량에 강림하셨네'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원통보전에 어울리는 주련이다. 


'無量壽閣(무량수각)' 예서 모각본 편액


'無量壽閣' 모각본 편액은 원통보전 마루에서 추수루 툇마루로 통하는 입구 위 벽에 걸려 있다. 글씨를 보면 원본 그대로 모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각 처마에 걸려 있어야 할 편액, 그것도 모각본이 추수루와 원통보전 사이에 더부살이처럼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화암사는 이제 추사 가문과의 인연이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원통보전 오른쪽에는 툇마루를 갖춘 사랑방 느낌이 드는 추수루가 있다. 추수루에는 '秋水樓', '坐花醉月(좌와취월)' 편액이 걸려 있다. '秋水樓' 편액에는 세월의 흔적이 내려 앉아 있으나, '坐花醉月' 편액은 만든 지 아직 얼마 안되는 듯했다. '秋水樓' 편액은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판자에 글씨를 새겼다.  


화암사 추수루(秋水樓


추수루 툇마루 기둥에는 '一葉紅蓮在海中(일엽홍련재해중)', '碧波深處現神通(벽파심처현신통)'을 쓴 주련이 걸려 있다. '한 떨기 붉은 연꽃 바다 위에 떠 있네. 푸른 물결 깊은 곳에 신통으로 나타나시듯'이란 뜻이다. 


'秋水樓(추수루)' 판액


'秋水樓' 편액에는 완당(阮堂) 관지(款識)가 새겨져 있다. '秋水樓'는 추사가 평생지기 권돈인에게 써 준 글씨다. 추사가 권돈인에게 준 글씨는 '秋水樓'를 비롯해서 '万樹琪花千圃葯(만수기화천포약)', '一莊修竹半牀書(일장수죽반상서) 대련, '煙江疊嶂(연강첩장)', '贈樊上村庄蘭(증번상촌장란)', '退村(퇴촌)' 등이 있다. 두 사람은 더없이 막역한 관계였으니 서로 주고받은 글씨가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예서체 큰 글씨로 써 주었다는 '退村'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秋水樓'의 뜻은 무엇일까? 추사가 쓴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봄바람 같은 큰 아량은 만물을 포용하고, 가을 물처럼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대련이 있다. '秋水(추수)'는 '가을철의 맑은 물, 가을의 강이나 호수의 맑은 물'의 뜻이다. 중국어에서는 '(여자의) 맑은 눈매, 맑고 깨끗한 얼굴빛,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의 뜻도 있다. 바로 이 '춘풍추수(春風秋水)' 대련이 그 답이 아닌가 한다. 또 김정희가 자신의 호를 '秋史(추사)'라고 한 까닭도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고결한 선비의 얼굴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의 얼굴을 뜻한다.


노재준(서예가, 예산고 교사)은 '秋水樓'에 대해 '글씨는 예서체로 상황과 글씨의 변모 과정으로 볼 때 과천 시절의 글씨다.'라면서 '루(樓)' 자가 행서 필의를 곁들이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秋水樓'와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 '賜書樓(사서루)'의 '樓' 자를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추사의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


추사의 '賜書樓(사서루)'


'殘書頑石樓'는 추사의 서재 이름이다. 이 글씨는 추사가 한양의 강상(江上) 시절에 남긴 작품이다. '賜書樓'는 정조(正祖) 이산(李祘, 1752~1800)이 하사한 서적을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구자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서재이다.


권돈인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13편을 필사해 놓은 책인 '이완척사(彛阮尺辭, 일본 동양문고 소장)'에 '秋水樓'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권돈인이 자신의 정자에 걸 '秋水樓' 편액 글씨를 부탁하는 편지가 있다. 권돈인은 칭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역관으로부터 옌징의 명필 글씨를 얻었다. 하지만 글씨가 너무 커서 편액으로 걸 수가 없었다. 이에 권돈인은 추사에게 고급 종이 3장과 함께 편지를 보내 강가의 정자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秋水樓'나 '水明樓(수명루)'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추사는 3장의 종이에 '秋水樓'와 '水明樓' 외에 정자명을 하나 더 써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가 '秋水樓'를 써서 권돈인에게 보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水明樓'는 현재 전하지 않아서 추사가 썼는지 여부를 학인할 수는 없다. '秋水樓' 친필과 편액은 현재 그 행방이 묘연하다. 화암사에 걸려 있는 '秋水樓' 편액 글씨는 당시 추사가 써 준 글씨를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坐花醉月(좌화취월)' 초서 편액


'秋水樓' 편액 안쪽에는 '坐花醉月(좌화취월)' 초서 모사본 편액이 걸려 있다. '坐花醉月'은 탕(唐)나라 시선(詩仙) 리바이(李白)의 시 '春夜宴桃李園序(봄밤에 도리원에서 연회를 열면서)' 중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화려한 잔치 열고 꽃 속에 앉아 술잔 주고받으며 달빛 아래 취하네)'에서 따온 것이다. 꽃밭에서 달빛에 취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낭만적이다. 편액의 관지는 '老連(노련)'이라고 새겨져 있다. 추사의 별호 가운데 노련(老蓮)이라는 호는 있다. 모사하는 과정에서 '老蓮'을 '老連'으로 잘못 새긴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화암사 대웅전과 약사전


원통보전과 추수루 뒤편에는 대웅전(大雄殿)과 약사전(藥師殿)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은 1988년에 지어진 전각이다. 예전에는 대웅전에 관세음보살 동자상을 봉안하고 있었는데, 60여 년 전에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예산읍 향천리에 있는 향천사(香泉寺) 천불전(千佛殿)의 천불 가운데 한 부처를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大雄殿(대웅전)' 편액


'大雄殿' 편액 글씨는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 방장으로 있던 원담 진성(圓潭眞性, 1926~2008)대종사가 썼다. 원담 대종사는 뛰어난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화암사 '大雄殿' 편액을 비롯해서 수덕사 '德崇叢林', '禪之宗刹修德寺(선지종찰수덕사)', '黃河精樓(황하정루)', '梵鐘閣(범종각)', '祖印禪院(조인선원)', '槿域聖寶館(근역성보관)' 편액과 법주사(法住寺) 주련 등을 썼다. 


원담대종사는 1926년 전북 옥구에서 아버지 김낙관(金洛觀)과 어머니 나채봉(羅采鳳)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씨 부인의 꿈에 신승(神僧)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여 몽술(夢述)이라 하였다. 그는 7세 되던 1933년에 벽초(碧超)선사를 은사(恩師), 만공(滿空)선사를 계사(戒師)로 출가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았고, 1941년에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藥師殿(약사전)' 편액


'藥師殿(약사전)' 편액 글씨는 만공선사의 전법제자(傳法弟子) 고봉 경욱(高峰景煜, 1890~1961)선사가 쓴 것이다. 고봉선사는 숭산 행원(崇山行願, 1927∼2004)대종사의 스승으로 당대 최고의 선승 중 한 사람이다. 만공선사의 세계일화(世界一花) 사상은 고봉선사를 거쳐 숭산선사로 전해졌다.   


화암사 병풍바위


대웅전 바로 뒤쪽에는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너럭바위가 있다. 이름하여 병풍바위다. 병풍바위는 두 개의 암괴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바위에는 추사의 필적인 '詩境(시경,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예서 암각문과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해서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병풍바위 '詩境(시경)' 예서 암각문


'詩境'은 시의 경계' 또는 '시흥(詩興)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이다. 1809년 겨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옌징으로 떠나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했다. 


'詩境(시경)' 예서 암각문


1810년 1월 25세의 추사는 옌징에서 쟈칭띠(嘉慶帝)의 비서 차오쟝(曹江, 1781~?), 역사가 시숭(徐松, 1781~1848)과 사겼다. 추사는 차오쟝과 시숭을 통해서 옌징의 대학자 탄시(覃溪) 웡팡깡(翁方綱, 1733~1818)과 윈타이(芸臺) 롼위안(阮元, 1764~1849)을 만나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었다. 당시 롼위안의 나이는 47세, 웡팡깡의 나이는 78세였다. 


엉팡깡은 추사와 장시간 필담을 나눴다. 추사의 총명함과 박식함에 놀란 웡팡깡은 추사를 '經術文章海東第一(경술문장은 해동에서 최고)'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웡팡깡으로부터 책과 글씨, 탁본 등 많은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 김노경의 당호인 '酉當(유당)'의 친필도 받았다. 


웡팡깡의 추사 부친 김노경의 당호 '酉當(유당)', 출처 신웅순 블로그



추사는 웡팡깡으로부터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얻었으며, 귀국한 뒤에는 완당(阮堂)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유홍준은 추사가 롼위안으로부터 완당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는 칭대 문헌을 빌어 추사가 귀국한 뒤 롼위안을 존경하는 의미로 스스로 지은 당호라고 고증한 바 있다. 추사는 '阮堂' 편액을 자신의 서재 보담재에 걸었다. 웡팡깡을 흠모하고, 롼위안을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추사는 웡, 롼 두 사람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금석학(金石學)과 서체(書體) 등을 배웠다.  


옌징에서 추사는 웡팡깡으로부터 난숭(南宋)의 시인 루팡웡(陸放翁)이 쓴 '詩境' 탁본도 선물로 받았다. 루팡웡은 난숭의 우국시인 루여우(陸游, 1125~1210)를 말한다. 그의 호가 팡웡(放翁)이다. 그는 약 10,000수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난숭 때 팡신루(方信孺, 1177~1222)는 이 '詩境' 글씨를 무척 사랑하여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지내면서 부임지마다 방방곡곡 새겨 놓았다. 유홍준은 저서 '김정희'(학고재, 2011)에서 웡팡깡이 광둥(广东)과 구이린(桂林)에 있는 루여우의 '詩境' 글씨를 탁본해 두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추사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추사는 '詩境' 탁본 선물을 화암사 '詩境樓(시경루)' 편액과 병풍바위 암각문으로 남겼다. '詩境' 암각문과 '詩境樓' 편액은 스승 웡팡깡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詩境樓' 편액은 지금 수덕사 근역성보관 수장고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 수덕사 근역성보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관련 유물들은 추사기념관으로 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서세옥(徐世鈺, 전 서울대 미대 교수, 화가)은 1981년 12월 15일자 경향신문 '편편상(片片想)' 난에 쓴 '경(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추사가 그의 원찰이었던 화암사 산기슭에 '시경(詩境)'이란 두 글자를 석각(石刻)한 것이 있다. 지금은 황량한 산기슭에서 유별난 시경을 느낄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고촉예(古蜀隷)와 이묵경(伊墨卿)의 필의를 연상케 하는 추사의 이 '시경' 두 글자는 붓이 아닌 금강저(金剛杵)가 석면에 그어댄 경지다."라고 썼다. '詩境'을 추사의 글씨로 보고 매우 높게 평가한 글이다. 이무칭(伊墨卿)은 칭나라 때의 문인으로 특히 시(詩), 서(書)에 뛰어났던 이빙셔우(伊秉綬)다. 무칭(墨卿)은 그의 호이다. 이항복(전 예산문화원장)도 '땅과 사람이 만나 빛나는 곳! 예산(1999년)'에서 '詩境'을 추사의 글씨라고 주장했다. 노재준도 2017년 12월 4일자 '예산신문'에서 '詩境'이 '추사의 명작'이라고 단정했다. 이처럼 최근 일각에서는 '詩境'이 추사의 친필이라는 견해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1995년 최완수(전 간송미술관 연구실장)는 '간송문화(澗松文華)' 제48호에 실린 '추사묵연기(秋史墨緣記)'라는 글에서 '詩境' 암각문을 루여우의 글씨로 보았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은 '완당평전(2002년)'에서 '詩境'에 대해 "완당은 옹방강에게 선물 받은 육방옹의 '시경'이라는 예서 탁본을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겨놓았다. 육방옹의 이 글씨는 명작으로 이름 높아 남송 때 방신유라는 사람은 지방관으로 부임한 곳마다 이를 새겨두기도 했다. 옹방강은 광동에 있는 것을 탁본했다."고 썼다. 유홍준도 '詩境'을 루여우의 글씨라고 단정한 것이다. 


누구의 견해가 옳을까? 후지쓰카 치카시의 논문들을 그의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가 모아서 출판한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란 책이 있다. 후지쓰카 치카시는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를 지낸 바 있다.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세한도'를 찾아오기 전까지 이 그림을 소장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후지쓰카는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중 ‘陸放翁書詩境刻石拓本(육방옹서시경각석탁본)’이라는 논문에서 "추사는 옹방강의 시경헌에서 '시경'이라는 두 글자의 탁본을 감상하고, 옹방강의 시를 읊으며 특별한 감동을 했다.'고 하면서 '화암사의 암벽에 추사가 자각(自刻)한 것은 '시경루(詩境樓)' 석 자"라고 주장했다. 후지쓰카는 '詩境' 암각문을 화암사에 걸려 있다가 지금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이 소장하고 있는 '詩境樓' 편액으로 착각했음을 알 수 있다. 후지쓰카는 화암사 병풍바위 암각문을 확인하지도 않고 글을 쓴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중대한 실수였다. 물론 '詩境樓'도 추사가 쓴 글씨다.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한글 번역본에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1994년)과 '추사 김정희 연구'(과천문화원, 2009년) 등 두 권이 있다. '추사 김정희 연구'에서는 후지쓰카의 오류를 바로잡아 '詩境樓'를 '詩境'으로 고쳤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에서는 '詩境樓'를 '시경루' 그대로 번역했다. 노재준은 "그런데 '시경루'를 '시경'으로 바로잡으면, 추사가 자각(自刻)한 것이 추사 자신의 글씨인지 육유의 글씨인지는 애매한 면도 있다. 하지만 글의 흐름으로 본다면 육유에 더 가능성이 있겠다. 어떻든 추사가 남긴 글에서 후지쓰카의 논문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찾아지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면, 화암사의 '시경'이 육유의 글씨라는 분명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루여우의 글씨 '詩境'(출처 예산신문)


팡신루(方信孺)의 '詩境' 탁본(출처 예산신문)


노재준은 루여우의 '詩境' 글씨는 따로 있다면서 "화암사의 암각 글씨 '시경(詩境)'은 균질하면서 탄탄하고 묵직한 획, 어디 하나 허점을 허락하지 않는 결구는 참 당당하다. 추사의 명작이다. 육유는 이런 글씨를 몰랐고, 쓸 줄 몰랐다. 그간 책으로 인터넷으로 그리고 강연으로 오류를 퍼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경(詩境)은 동양의 문인들이 추구한 최고의 경지였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난숭의 팡신루가 루여우를 찾아가 시에 대해 물었다. 이에 루여우는 ‘詩境’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주었고, 팡신루는 이를 자신의 당호로 삼았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화도(畵道)와 시경을 병용했다.


웡팡깡도 시경이란 말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웡팡깡은 '詩境'을 새긴 인장과 '시경헌(詩境軒)'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웡팡깡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추사를 비롯해서 조수삼(趙秀三, 1762~1849), 신위(申緯, 1769~1845) 등의 문인들이 시경을 애용했다. 추사는 '詩境樓'라는 당호 외에 '시경재(詩境齋)'라는 당호를 사용했다. 또 추사는 '偶題尋詩圖(우제심시도)'란 제목의 시에서 '尋詩何處好, 詩境畵中深(시를 찾기 어디 좋을까, 시경은 그림 속에 깊어라.)라고 했고, 조수삼은 '畵妙入三昧, 詩境窺三來.(화묘는 삼매에 들고, 시경은 삼래 엿보네.)라고 했다. 신위의 문집에는 시경이란 말이 무려 50여 차례나 등장한다. 추사와 신위는 시경을 선(禪), 그림(畵)과의 관련 속에서 구사하기를 좋아했다. 신위는 아예 '시경도(詩經圖)'까지 그렸다.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의 시 '有情詩境界, 無事酒生涯.(유정한 시의 경계요, 무사한 술 인생일세.)',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의 시 '詩境自知恢朔漠, 邊勳敢望紀旂常.(시경이야 북방에서 커지겠지만, 변방의 공훈이야 어찌 바라리.)', 오광운(吳光運, 1689~1745)의 시 '羸馬似知詩境界, 偶逢佳景卽停行.(여윈 말도 시의 경계 알고 있는 듯, 아름다운 경치에선 걸음 멈추네.)'에도 시경이란 말이 나온다. 이처럼 시경을 모르면 조선의 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풍바위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해서 암각문


병풍바위에는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란 글씨가 뚜렷하다. 절을 일러 ‘천축의 옛 선생댁’이라고 표현한 글이다. 천축(天竺)은 인도, 고선생(古先生)은 석가모니 부처를 말한다. 댁(宅)은 집이니 곧 화암사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집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를 '선생'으로 표현한 것은 유교식 재치라고 할 수 있다.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해서 암각문


2017년도에 '天竺古先生宅' 암각문을 두고 대방가(大方家)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먼저 '竺'자 죽머리 ''의 점 유무를 두고 표윤명(소설가)과 노재준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표윤명은 '축(竺)자의 죽머리를 봐도 그렇다. 아래 점획 하나를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한 번에 그어 쓰기도 했다. 행서(또는 해행)이기에 가능한 일이다.'라면서 '화암사에 가서 직접 살펴보면 분명 점획이 생략되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빛에 의한 착시는 절대 아니다. 또한 탁본을 갖고 말하나 탁본은 뜨는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竺'자 탁본(출처 예산신문)


표윤명의 주장에 대해 노재준은 탁본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사진은 빛이 만들어주는 명암의 미묘한 낌새를 순간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빛에 의해 착시가 있을 수 있다. '축(竺)'자를 사진으로 보면 물론 점이 안 보인다. 금석문은 사진보다는 탁본을 뜨면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다. 탁본을 보면 추사는 점을 정확하게 찍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축(竺)'자 사진


2019년 4월 28일 필자는 화암사 병풍바위를 찾아가서 天竺古先生宅' 암각문을 직접 확인했다. '축(竺)'자를 몇 번이고 확인한 결과 죽머리에 확실히 점이 새겨져 있었다. 사진상으로는 빛 때문에 점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표윤명은 병풍바위 天竺古先生宅' 암각문을 확인하지도 않고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탁본 조작설도 전혀 근거가 없다. 만약 죽머리에 점이 없다면 '축(竺)'자는 매우 이상한 글씨가 되어 버릴 것이다.    


天竺古先生宅'의 서체에 대해서도 대방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먼저 박철상(고문헌연구가)은 天竺古先生宅'에 대해 '행서기가 있는 해서다.'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김영복(문우서림 대표)은 '해서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행서라고 하기에도 그렇다. 좀 애매하다.'면서 해행(楷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용수(모암문고 대표)는 '해서 기운도, 행서 기운도, 고(古)자 등을 보면 예서 기운도 있다.'고 생각된다면서 '해행서라 보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놨다. 박철상은 행서기가 있는 해서, 김영복과 이용수는 해행서라고 본 것이다.   


표윤명은 '축(竺)자 점획의 생략과 아래 二자의 둥근 맛을 보면 추사 서결의 천(天)자와 더불어 행서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천(天), 축(竺), 선(先)은 행서 내지는 해행, 최소한 행서기를 품은 해서라 할 수 있고, 고(古)자는 예서기 품은 해서, 생(生)자와 댁(宅)자는 해서임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철상, 김영복, 이용수의 견해를 종합해서 '이상과 같이 모두 다 온전한 해서체는 아니라는 얘기다. 행서기가 있는 해서, 또는 해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추사의 행서 대련

'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 


이들의 견해에 대해 노재준은 조목조목 예를 들어 반박했다. 먼저 그는 '천(天) 자의 내리긋는 획이 이 정도로 위로 솟구치게 쓰는 것은 행서만이 아니라 해서와 예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축(竺)'자에 대해서도 "점이 하나 생략되었다고 행서가 아니다. 만약 여기서 점이 없다면 추사는 오자(誤字)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점 하나로 인해 '대통령(大統領)'과 '견통령(犬統領)'을 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행서인 대련 글씨의 '축(竺)'자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여기서 ‘축(竺)’ 자는 행초, 초서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재준은 또 '고(古)'자가 "가로획의 기필(起筆)과 수필(收筆) 부분, 그리고 '口' 자의 전절(轉折)한 부분은 예서와는 전혀 다르다.'면서 "'축고(竺古)' 두 글자는 행서와 초서로도 가로로 얼마든지 넓게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선(先)'자에 대해 '첫 획을 보면 해행도 아니고 해서다.'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天竺古先生宅'에 대해 그는 '글씨는 두루뭉술하게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는 해서체이다.'라고 단정했다. 


행서는 허우한(後漢)에서 삼국시대 웨이(魏)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체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웨이나라의 쭝야오(锺繇)와 후자오(胡昭)가 류더셩(刘德升)에게 배워 행서를 썼다고 한다. 이후 행서는 둥진(東晉)의 왕시즈(王羲之), 왕셴즤(王獻之)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행서는 편하게 살짝 흘려 쓰는 필기체이기에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로 자리잡았다. 행서는 해서와 초서의 중간적인 서체라서 서체 중 가장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행서는 해서, 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고, 더 나아가 해서와 행서, 초서를 다 섞어 쓰는 경우도 있다. 섞어 쓰는 정도에 따라 행압서(行押書), 진행(眞行), 행해(行楷), 초행(草行), 행초(行草), 소행초(小行草), 반초행서(半草行書), 선서(扇書) 등이 있다. 


행압서란 행서의 초기 명칭이다. 쭝야오 삼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행압서, 즉 행서다. 현존하는 행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53년에 왕시즈가 쓴 '란팅수(兰亭序)'인데, 이는 탕(唐)대의 필사본이다. 진행은 진서(眞書, 완전히 규격적인 서체, 해서)에 가깝게 하되 흘린 것으로 해행(楷行) 또는 행해라고도 한다. 행해는 해서이면서 행서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초행은 초서(草書, 획수를 간략화한 가장 흘려 쓴 서체)에 가까운 행서로 행초라고도 한다. 소행초는 글자가 작은 행초, 반초행서는 초서도 아니고 행서도 아닌 중간적 서체이다. 선서도 반초행서식의 서체이다. 


해서는 탕나라 때 예서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해서라고 한다. 주로 공문서에 쓰이던 해서는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이다. 탕나라 때 전성기를 맞아 가장 중요한 서체가 되었다. 해서는 현재 표준서체와 인쇄체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해서는 웨이나라의 쭝야오가 쓴 법첩(法帖)이며, 탕대의 왕시즈에 이르러 일단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우양쉰(歐陽詢), 위싀난(虞世南), 옌쩐칭(颜真卿) 등이 있다. 조선에서는 추사의 '黙笑居士自讚(묵소거사자찬)', 안평대군의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 발문, 이이의 서간문 등이 대표적 해서체로 꼽힌다.


해서는 진서(眞書), 정서(正書), 금예(今隸)라고도 한다. 허우한 말기에 한예(漢隸)의 파책(波磔)을 변화시키고 여기에 점(點)과 탁(啄), 도(桃), 적(趯)을 더하여 만들어진 방정한 서체다. 해서는 베이웨이해(北魏楷, 일명 魏體)와 탕해(唐楷)로 분류된다. 베이웨이해는 북조시대의 해서체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서체이다. 그래서, 아직 예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방필(方筆) 위주의 방정하고 묵직한 필법을 보여준다. 이것은 베이웨이 시대의 비(碑), 석각(石刻), 마애·조상(造像) 등에 새겨진 문자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탕대는 해서의 성숙기로 글자체가 정련되어 표준 서체가 완성되었으며, 해서 전문 서예가들이 배출되었다.


쉽게 말해서 해서는 반듯한 정자체, 행서는 약간 흘려 쓰는 필기체라고 할 수 있다. 天竺古先生宅' 암각문은 누가 봐도 반듯한 정자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재준이 해서라고 한 견해가 타당하다. 


추사의 행서 대련 '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상견동파구거사 엄연천축고선생)'은 칭나라 학자 셴추(沈初)가 옛 시에서 찾아 만든 구절이다. '想見東坡舊居士'는 베이숭(北宋)의 시인이자 서예가 황팅지엔(黃庭堅)이 9살 연상의 쑤둥포(蘇東坡)에게 솽징차(雙井茶)를 선물로 보내면서 지은 시 '솽징차숭즈짠(雙井茶送子瞻)'의 함련(頷聯) 첫 구에서 따온 것이다. 


人間風日不到處(인간풍일부도처) 인간세상 바람 햇볕 닿지 않는 곳

天上玉堂森寶書(천상옥당삼보서) 하늘 궁전엔 귀한 책 가득도 하네

想見東坡舊居士(상견동파구거사) 그 옛날 동파 거사를 떠올려 보며

揮毫百斛瀉明珠(휘호백곡사명주) 붓 들어 아름다운 구슬 쏟아 내네

我家江南摘天腴(아가강남적천유) 내 고향 강남에서 딴 향그런 찻잎

落磑霏霏雪不如(낙애비비설불여) 하얗게 내리는 눈도 견줄 수 없네

爲君喚起黃州夢(위군환기황주몽) 님께 저 황주의 꿈 일깨워 드리려

獨載扁舟向五湖(독재편주향오호) 나 홀로 배에 올라 오호로 향하네


그렇다면 '儼然天竺古先生'은 어디서 유래한 구절일까? 이 구절은 탕나라의 시불(詩佛)이자 남종화의 시조 왕웨이(王維)가 쓴 시 '궈청루찬싀샤오쥐싀숭치우란뤄(過乘如禪師蕭居士嵩丘蘭若)'의 미련(未聯)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無著天親弟與兄(무착천친제여형) 무착과 세친 두 형제가 살고 있는

嵩丘蘭若一峰晴(숭구난야일봉청) 숭산 암자 있는 봉우리 활짝 갰네

食隨鳴磬巢烏下(식수명경소오하) 밥 때 경쇠 치면 까마귀 모여들고

行踏空林落葉聲(행답공림낙엽성) 빈 산골 밟아가면 낙엽 지는 소리

迸水定侵香案濕(병수정침향안습) 튀는 물이 번져 와서 향에 젖는데

雨花應共石床平(우화응공석상평) 꽃비 내려 석상 높이로 쌓여 있네

深洞長松何所有(심동장송하소유) 깊은 골 낙락장송 거기 뭐가 있나

儼然天竺古先生(엄연천축고선생) 엄연히 저 천축 나라 옛 선생일세


협서에서 알 수 있듯이 '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 대련은 웡팡깡이 만들어 쓴 말이 아니고, '天竺古先生'도 추사가 만든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이란 말을 만든 셴추는 칭나라 내각한학사를 지냈고, 박제가와 교유한 인물이다. 박제가의 문집 '정유각초집(貞蕤閣初集)'의 '희방왕어양세모회인육십수(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라는 시에 셴추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천축고선생'은 본디 라오쯔(老子)가 서역에 가서 부처가 됐다는 중국 전설에서 비롯된 성어다. 유홍준은 '천축고선생'이 추사의 호라고 주장한 바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글씨 '서결(書訣)'에 ‘天竺古先生’ 인장이 찍혀 있다. 이것을 보고 추사의 호라고 착각하기 쉽다. 


추사 '서결(書訣)'에 찍힌 '天竺古先生' 인장

출처 예산신문


'天竺古先生'은 아호인(雅號印)이 아니라 글씨의 여백에 멋이나 운치를 부리기 위해 찍은 한장(閑章)이다. 한장은 자신의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한다. 한장을 유인(遊印), 사구인(詞句印)이라고도 한다. '세한도'에 찍힌 ‘長毋相忘(장무상망)'도 별호가 아니고 사구인이다. 


추사는 자신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天竺古先生'이란 말을 참 좋아하였다. 이는 '천축고선생'이란 인장을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화암사 병풍바위에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라는 자신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화암사 병풍바위에서 필자


쉰질바위


화암사 병풍바위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m 정도 능선을 타고 가면 쉰질바위에 이른다. 쉰질바위에는 '小蓬萊秋史題(소봉래추사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봉래(蓬萊)는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궈(中國)의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봉래산은 동방의 해상에 있어서 선인이 사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이상향이라고 믿어져 왔다. 


오석산 쉰질바위 '小蓬萊(소봉래)' 암각서


'화암사중수건기'에도 '小蓬萊'가 등장한다. '小蓬萊'는 작은 봉래산이라는 뜻이다. 병풍바위 암각문 '詩境'과 함께 쉰질바위 암각문 '小蓬萊'에는 추사가 추사고택과 화암사를 안고 있는 오석산 일대를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한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오산노초(烏山老樵)라 하였고, 서재 이름을 오산독서루(烏山讀書樓)라 하였다.  


추사는 젊은 시절 소봉래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추사는 어린 시절 오석산 일대를 이상향 봉래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추사가 간직했던 유년의 꿈은 병풍바위의 '詩境'과 쉰질바위의 '小蓬萊' 암각문으로 남아 있다.


화암사 추수루 앞 수령 230년 느티나무 보호수


화암사 추수루 앞에는 수령 230년이라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230살이라면 추사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심은 것이다. 원 둥치는 죽었지만 곁가지는 살아남았다. 추사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느티나무다.  


화암사 주차장 앞 수령 228년 느티나무 보호수

 

화암사 주차장 앞에는 수령 228년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추사가 태어나기 전에 심은 이 느티나무도 원 둥치는 죽고, 곁가지만 살아남았다. 추사처럼 인고의 세월을 보낸 느티나무들이다.   


추사는 한양 통의동(通義洞)에 있던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자주 예산의 고향집과 화암사를 찾았다. 추사에게 고향집과 화암사는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추사가 가장 좋아한 곳도 예산 고향집과 화암사였다. 추사의 '禮山(예산)'이란 시가 있다. 이 시를 보면 예산이 얼마나 추사에게 남다른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禮山(예산) - 추사


禮山儼若拱(예산엄약공) 예산은 팔짱을 낀 듯 점잖고

仁山靜如眠(인산정여면) 인산은 조는 것 같이 고요해

衆人所同眺(중인소동조) 많은 사람들 보는 바 같지만

獨有神往邊(독유신왕변) 나홀로 마음 가는 곳 있다네


이처럼 추사는 예산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예산은 추사가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학문과 예술의 싹을 틔운 곳이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추사에게 고향 예산은 언제나 그리운 '詩境'이요, '小蓬萊'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