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0 - 화순옹주 홍문과 백송

林 山 2019. 4. 17. 11:11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秋史古宅)에서 북쪽으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는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 홍문(紅門남 유형문화재 제45호)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화순옹주 합장묘(충남 문화재자료 제189호)가 있다. 홍문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김한신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이다.  


화순옹주 홍문


화순옹주 홍문은 정면 8칸, 측면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이다. 홍문 안에는 원래 낮은 담장을 두른 200여 평(약 661㎟)의 대지에 53칸 규모의 묘막(재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불에 타 없어자고 주초(柱礎)만 남아 있다. 묘막터 주위에는 낮은 담장을 둘렀다.  


화순옹주 묘막터


화순옹주는 영조(英祖) 이금(李昑, 1694~1776)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정빈 이씨(靖嬪李氏)이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이던 시절에 첩으로 지내다가 화억옹주(和億翁主)와 경의군(敬義君, 훗날의 孝章世子, 眞宗), 화순옹주를 낳았다. 영조가 왕세제이던 시절에 종5품 소훈(昭訓)에 책봉되었으나, 영조가 즉위 전에 28살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소훈(昭訓)이 죽은 다음 해에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이 궁녀들과 공모해 그녀를 독살하였다는 발고가 있었고, 이 사건은 영조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권력투쟁인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번졌다. 영조가 왕으로 즉위한 해에 이소훈은 정4품 소원(昭媛), 그다음 해에 정1품 정빈(靖嬪)에 책봉되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연호궁(延祜宮)에 모셔졌다.


1732년(영조 8) 화순옹주는 김한신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동갑으로 부부 금슬도 아주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한신과 화순옹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김한신은 조카 김이주(金頤柱, ?~1797)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외조부 영조의 총애로 김이주는 승지, 광주부 윤, 대사간, 대사헌, 형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김이주는 장남 김노영(金魯永, 1747~?), 삼남 김노경(金魯敬, 1766~1837) 등 아들 넷을 두었다. 


김이주의 장남 김노영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1793년 김노영은 동생 김노경의 아들인 8살의 김정희(金正喜)를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었다. 그래서 추사는 김한신과 화순옹주 부부의 장증손자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계는 김홍욱(金弘郁)으로부터 김세진(金世珍)-김두성(金斗星)-김흥경-월성위 김한신-김이주-김노영-김정희로 이어진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세계는 김홍욱으로부터 김계진(金季珍)-김두광(金斗光)-김선경(金選慶)-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김귀주(金龜柱)-정순왕후로 이어진다. 세계를 보면 김이주와 김귀주가 10촌 형제 간이니 정순왕후는 추사에게 12촌 대고모뻘이었다. 이처럼 추사는 조선 왕실과 이중 외척 관계에 있었다. 


1758년 김한신이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말다툼 끝에 벼루를 머리에 맞고 죽었다. 김한신의 나이 38세였다. 이에 격분한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한 채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화순옹주는 월성위가 죽은 뒤로부터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4일 뒤 화순옹주 방에 거둥(擧動)하였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명을 따라 음식을 한입 먹다가 토하였고, 이를 본 영조는 한 번 먹은 마음을 돌리지 않으려는 딸의 뜻을 알고 탄식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화순옹주는 결국 곡기를 끊은 뒤 14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갸륵하게 여기면서도 부왕의 뜻을 뿌리친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정조(正祖) 이산(李祘, 1752∼1800)은 1783년 왕명을 내려 용궁리 어귀에 자신의 고모인 화순옹주의 정문(旌門)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 왕녀들 중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화순옹주 홍문 현판


홍문은 왼쪽에서 다섯 번째 칸에 자리잡고 있다. 문의 윗부분에는 홍살을 세우고, 붉은 칠을 한 현판을 걸었다. 대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약간 열려 있는데,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홍문 가운데 솟을대문 문틀 위에는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 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열녀유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 배화순옹주지문. 정조 즉위 7년 계묘-1783년 1월 12일 특명정려)'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유록대부(綏祿大夫)는 의빈계(儀賓階) 정1품 상계(上階)의 위호(位號)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는 추사고택과 화순옹주 홍문 사이 용산 기슭에 있다. 벽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봉분 앞에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등의 석물(石物)이 세워져 있다. 묘비에는 '有明朝鮮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和順翁主祔左 贈諡貞孝金公之墓(유명조선유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화순옹주부좌 증시정효김공지묘)'라고 쓴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 앞에는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김한신 화순옹주 합장묘 앞의 백송


1732년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김한신은 월성위에 봉해졌다. 김한신은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濟用監) 제조(提調) 등을 지냈다. 


김한신의 행서(출처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글씨를 잘 썼던 김한신은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다. 팔분체는 예서(隸書)의 이분(二分)과 전서(篆書)의 팔분을 취하여 개발한 서체다. 중궈(中國) 한(漢)나라 때 왕츠중(王次中)이 개발하였다. 왕츠중의 해서(楷書)는 단아한 서풍이며, 행서(行書)는 획의 비수(肥瘦)와 농담(濃淡)이 두드러지는 활달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백송조각공원


김한신 화순옹주 합장묘와 화순옹주 홍문 주위에는 백송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예산군은 2008년 3억원의 예산을 들여 약 3천평의 야산 백송 500여 그루를 심어 백송조각공원을 조성했다. 백송조각공원에는 백송들 사이로 추사의 서화(書畵) 세계를 표현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 작품은 초대작가 7점과 공모작가 10점 등 모두 17점이다. 추사의 서화를 임모(臨摸)한 작품에는 '세한도(歲寒圖', '茗禪(명선)'을 비롯해서 '적설만산(積雪滿山)'과 '畵法書勢(화법서세)''明月梅花(명월매화)''五畝半日(오무반일)' 예서 대련(對聯)'靜坐妙用(정좌묘용)'과 '松風山月(송풍산월)', '直聲秀句(직성수구)', '碧玉黃金(벽옥황금)' 행서 대련 등이 있다. 공원을 거닐면서 추사의 예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화순옹주 홍문에서 북쪽으로 약 300~400m쯤 올라가면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소가 있다. 김흥경의 묘에는 묘비가 없고, 봉분 앞에 상석과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물만 세워져 있다. 김흥경의 묘소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이 자라고 있다. 


김홍경 묘소


김흥경은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자유(子有), 숙기(叔起)이고, 호는 급류정(急流亭)이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의 증손, 김세진(金世珍)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김두성(金斗星), 어머니는 김영후(金榮後)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과 주서, 정언, 부교리, 집의, 승지, 대사간 등을 두루 지냈다. 경종(景宗) 이윤(李昀, 1688~1724) 때 한성부 우윤으로 있다가 신임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우참찬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칭(淸)나라에 다녀왔다.


김홍경의 글씨(출처 다음백과)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한성부 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으나,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되었다. 1730년 좌참찬에 복직되고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해 기로소에 들어가고,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김흥경 묘소의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은 1809년 10월 추사가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칭나라 옌징(燕京, 베이징)에 갔다가 돌아올 때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고 한다. 원래는 네 줄기로 자라다가 세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한 줄기만 남아서 자라고 있다. 김한신이 살던 한양의 통의동(通義洞) 월성위궁에도 영조가 하사한 백송(천연기념물 제4호)이 있었다. 이 백송은 1990년 7월 강풍을 동반한 벼락을 맞아 부러져 죽고 말았다. 이처럼 백송은 추사 가문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김흥경의 묘소, 김한신과 화순옹주 합장묘, 추사와 한산 이씨(韓山李氏), 예안 이씨(禮安李氏) 합장묘는 다 찾아보았다. 하지만,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의 묘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김노경의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에 있던 것을 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로 이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추사의 후손이 화장(火葬) 후 파묘해 갔다는 설과 예산으로 옮겼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김노경의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이다. 글씨를 잘 써서 아들 김정희에게 영향을 미쳤다. 승지, 평안도 관찰사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 1822년에는 동지사로 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아버지를 따라 옌징에 들어가 당대 칭나라 최고의 학자들인 탄시(覃溪) 웡팡깡(翁方綱), 윈타이(芸臺) 롼위안(阮元)을 비롯해서 주허니엔(朱鶴年), 웡팡깡의 아들 웡수쿤(翁樹崑), 셰쉬에총(謝學崇), 리린숭(李林松) 등 쟁쟁한 학자들을 만나 교유했다.


김노경의 글씨(출처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김노경은 익종(翼宗) 이영(李旲, 1809∼1830)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할 때 김로(金鏴), 홍기섭(洪起燮) 등과 함께 전권을 휘둘렀다는 죄와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죄로 1830년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4년만에 풀려나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노경의 사후 이 사건이 다시 불거져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857년(철종 8)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연명 차자(聯名箚子)로 신원(伸寃)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신의왕후탄강구묘비(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의 글씨가 전한다.


김명희(金命喜, 1788~1857)는 김노경의 아들이며 김정희의 동생이다. 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이다. 1810년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은 창녕현감(昌寧縣監), 강동현령(江東縣令, 공조 좌랑 등을 지냈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정사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으로 옌징에 들어가 칭나라의 금석학자 유시하이(劉喜海), 첸난수(陳南淑)·우숭량(吳嵩梁), 리장위(李璋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유시하이에게 조선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그가 '하이둥진싀위안(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명희의 글씨(출처 다음백과)


김명희는 경(經), 사(史)에 밝고 시문과 글씨에도 능했다. 그의 글씨는 우양쉰(歐陽詢)의 법을 따랐지만 형인 추사의 글씨를 익혔다. 그의 소해(小楷)는 추사의 글씨와 흡사하다. 김명희는 감식에도 상당히 뛰어났지만, 추사의 명성이 워낙 높아 빛을 보지 못한 느낌이 있다.


김상희(金相喜, 1794~1861)는 김정희의 막내 동생이다. 자는 기산(起山) 또는 기재(起哉), 호는 금미(琴糜)이다. 김상희는 1825년부터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년∼1866) 선사와 교유했다. 1844년 그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김상희는 영유현령(永柔令縣) 등을 지내고, 1851년 과천으로 방축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나 호조 별랑(戶曹別郞)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추사체를 배우고 따라 썼다.


김상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행서체 편지(출처 현대불교신문)


김상희와 초의선사가 처음 만난 시기는 대략 1825년경으로 보인다. 1825년 초의선사는 전라도 해남의 대둔사(大芚寺, 대흥사)를 떠나 한양의 수종사(水鐘寺)에 머물렀다. 당시 수종사는 절이 퇴락해서 주거 환경이 좋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가 어려웠다. 초의선사의 딱한 처지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이 알게 되었다. 정학연은 한양의 수락산(水落山) 덕능고개에서 불암산(佛巖山)으로 이어지는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암자인 학림암(鶴林庵)에 주석하던 호남의 칠고붕(七高朋) 해붕 전령(海鵬展翎, ?~1826) 선사에게 부탁해 초의선사가 그 암자에서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해붕선사와 정학연의 인연은 18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산은 천주교도와 남인(南人) 세력에 대한 탄압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01년 2월 27일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해붕선사는 원래 전라남도 승주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승려였고, 초의선사는 그의 제자였다. 정학연과 해붕선사, 초의선사의 교유는 다산의 강진 유배지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와 정학연은 친구였다. 추사는 벗 정학연의 소개로 학림암에서 평생지기 초의선사와 그의 스승 해붕선사를 만나게 된다. 초의선사가 쓴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 1861)' 발문에 당시 이들이 만났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때 해붕선사가 초면인 추사에게 화두를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昔在乙酉 陪老和尙結臘於水落山鶴林菴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能所生 經宿臨歸 書壹偈於老師 行軸曰君從宅外行 我向宅中坐 宅外何所有 宅中元無火 可想也龢和尙再傳之燈[지난 1815년 해붕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의 학림암에서 한 해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하루는 완당(추사)이 눈길을 헤치고 노스님을 찾아와 공(空)과 각(覺)의 소생(所生)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갈 때 노스님께서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에 ‘그대는 집 밖을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다'라고 하셨다. 노스님이 거듭해 전해 주신 조화로운 가르침은 생각해 볼 만하다.]


발문에는 또 '有浩雲雨公 咸豊丙辰 乞受景贊於果川丙舍 越五年辛酉秋 雲師爲海表忠主管有司莅任之日 懷景贊來示恂 蓋和恂之素所懇款於老師而不暫忘之故也 余乃戀舊感 新莊潢求帖以歸[호운 우공이 1856년 과천 병사(丙舍, 묘막, 추사를 지칭함)로 '해붕화상찬'을 부탁하였다. 1861년 가을 호운 스님이 해남의 표충사(表忠詞) 주관 유사로 부임하던 날, 해붕의 화상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 주었다. 내가 평소 노스님에게 성의를 다하고 잠시도 잊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에 옛날을 연모하여 새로 이 첩을 장황(莊潢, 표구)해서 보낸다.'는 내용도 있다. 표충사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을 모시는 사당이다. 호운 우공(浩雲雨公)은 해붕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직전 제자이다. 호운은 서산대사의 가을 제사를 주관하는 소임을 맡아 대둔사에 오면서 해붕선사의 영정을 가지고 와 초의선사에게 보여 준 것이다. 글의 내용으로 볼 때 추사는 1856년 5월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贊)'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그해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수종사와 학림암을 중심으로 초의선사는 정학연과 그의 동생 정학유(丁學游), 추사와 그의 동생들인 김명희, 김상희, 정조의 서차녀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남편 홍현주(洪顯周) 등과 절친한 지기가 되었다. 다산은 초의선사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아버지였다. 추사도 다산과는 스승과 제자격의 교유가 있었다. 초의선사는 다산에게 차를 배웠고,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과 추사를 통해서 초의선사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가 되었다. 초의선사는 추사로 인해 학문적인 지향이나 수행, 새로운 시대 조류를 체험할 수 있었다. 또 추사와 정학연을 통해서 그들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량 있는 사족들과 폭넓은 교유를 할 수 있었다. 정학연은 추사에게 초의선사를 소개했고, 초의선사는 추사에게 소치(小痴) 허련(許鍊)을 소개함으로써 조선 남종화(南宗畵)의 화맥이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상희도 그의 형 추사처럼 차 애호가였다. 초의선사가 쓴 '起山以謝茶長句見贈次韻奉和兼贈雙修道人'[기산(김상희)이 차를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장구의 시를 보냈기에 그 운에 따라 화답하고 아울러 쌍수도인(김정희의 별호)에게도 올린다.]라는 시가 있다. 시의 제목에서 김상희의 차에 대한 애호를 짐작할 수 있다. '一廻見面一廻歡 有甚情懷可更切'(한 번 얼굴을 돌려보고 하나 같이 기뻐하니, 무슨 정이 더 간절할 수 있으랴) 구절에서는 차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을 알 수 있다. 김상희에게 보낸 초의차는 '我從長者請下一轉語 法喜供禪悅食還將容'(내 그대에게 한마디 청하노니, 법희와 선열의 공양식을 탐욕스런 사람과도 나누리)라고 했다. 법희와 선열은 '동다송(東茶頌)'에서도 언급한 초의선사의 다도 세계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다선일치(茶禪一致)의 경지를 함께 추구했던 지기였음을 알 수 있다. 


김상희는 1844년 11월 11일 초의선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4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제주로 편지를 보내서 답장을 받으려면 수십 일이나 소요되었다. 김상희는 제주에서 훨씬 가까운 대둔사의 초의선사를 통해서 추사의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전해 듣고자 했다. 편지 봉투에 '초의선탑 회전(草衣禪榻回展)'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이 편지는 김상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與師阻 今幾日月矣 其阻也 以形器言 唯一段靈襟 何能障也 北陸冬深 氷雪塞地 此際禪居眞悅 復何如 溯注如海 俗人 齒髮俱危 非舊我 而憂思煎 雖强言笑中 未必然 海上信息 動阻數箇月 縱一得書 發已積屢旬 引領南天 只欲狂煎書卷詩筒 久已在籬外 回思時琴江亭子 與師輩拂談乘 是何等歡喜天也 新蓂已開 益覺流光難住 遠懷尤不自持 第以二件轉付 未知何時到得蓮座耳 臨紙 師當領之 姑不 何間欲一卓錫於冽上否 甲辰 雪臘 十一日 起山[스님과 막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 막힌 것을 형기(形器)로 말하자면 일단의 신령한 흉금이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북녘은 한겨울이라 눈과 얼음이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 스님은 선방에서의 진열(眞悅)이 또 어떠신지요. 몹시 궁금하네요. 저는 이빨과 머리털이 성글어져 옛날의 제가 아닙니다. 근심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고 졸아들어 설령 억지로 웃고 말하더라도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다(제주도)의 소식은 수개월 동안이나 막혀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는데도 수십 일이나 걸립니다. 스님 계신 남녘 하늘을 목 빼고 바라보면서 마음 졸이며 책이나 시를 볼 뿐입니다. 오랫동안 이미 울타리 밖에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지만, 지난 번 금강(琴江) 정자에서 스님들과 불법을 담론하던 일을 회상하니 참으로 환희천(大聖歡喜自在天)이 아니겠는지요. 새 달력을 펼치니 더욱 흐르는 세월을 머물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매 더욱 제 자신을 추스르기 어렵지만 두 가지만 전하니 언제 스님에게 도착할지 모르겠네요. 종이를 대하니 캄캄합니다. 스님께서 성불하시기를. 다 쓰지를 못했네요. 언제 한 번 열상(한양)에 오시려는지요. 1844년 눈 내리는 섣달 11일 기산 김상희]


김상희와 초의선사 사이에 소식이 끊어진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추사의 유배로 추사 가문은 침체되고 있었으며, 김상희는 지천명(知天命, 50)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50살이면 상당히 많은 나이였다. 김상희는 50살인 자신도 이빨과 머리털이 위태로운데 하물며 8살이나 위인 형 추사의 건강이 더욱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추사는 실제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1844년경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병이 깊고 심해져서 괴롭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도 김상희의 마음을 기쁘고 시원하게 터 준 것은 초의선사와 나눈 불법 담론이었다. 


그해 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 소치(小癡) 허련(許鍊) 편에 보낸 편지에도 추사의 어려운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편지에는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와서 둘째와 막내의 안부 편지와 스님의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인 편에 받은 그의 동생 김명희, 김상희와 초의선사의 안부 편지가 추사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던 듯하다. 또 추사가 편지에 '나는 괴로운 상황이 전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입병(구내염)과 콧병(비염, 축농증)을 앓고 있던 그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상희는 추사의 병세를 근심하면서 형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이다. 


추사가 1842년부터 1844년까지 보낸 편지에는 입병과 콧병을 치료하기 위해 초의선사에게 자주 신이(辛夷)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내용이 보인다. 신이는 백목련과 자목련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으로 한의학에서는 해표약(解表藥) 중 발산풍한약(發散風寒藥)에 속한다. 풍한사(風寒邪)를 몰아내고, 콧구멍을 통하게 하는 효능(通鼻竅)이 있어 바염, 축농증, 콧물, 코막힘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중요한 한약재다. 추사가 한의학에도 어느 정도 식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상무(金商懋, 1819~1865)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다음해에 입양한 양자(養子)다. 그의 자는 경득(景得), 호는 서농(書農)이다. 생부는 추사의 12촌 김태희(金泰喜)다. 김상무는 1858년에 생원(生員)이 된 뒤 참봉(參奉), 사과(司果) 등을 지냈다. 


김상우(金商佑, 1817~1884)는 추사의 서자(庶子)다. 그의 자는 천신(天申), 호는 수산(須山)이다. 김상우는 음관(蔭官)으로 승문원(承文院) 이문학관(吏文學官), 사과 등을 지냈다. 그는 서자였기에 추사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고, 양자 김상무가 대를 이었다. 


추사고택 사랑채 앞에 세워진 '石年(석년)' 돌기둥


추사고택의 사랑채 댓돌 앞에는 추사체로 '石年(석년)'이라고 새긴 육각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돌기둥이다. 돌기둥의 아래쪽에는 김상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추사가 썼다는 설도 있고, 김상우가 썼다는 설도 있다. 돌기둥은 김상우가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