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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8 - 추사기념관

林 山 2019. 4. 12. 11:27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서예 명문가이자 소론(少論) 가문 출신으로 종고조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증조부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 1616~1686), 부친 각리(角里) 이진검(李眞儉, 1671∼1727) 등이 모두 명필이었다. 그의 부친 이진검은 당시 소론 당경파였다. 당시 조선 서예계에서 이름이 높았던 원교는 양명학(陽明學)을 받아들인 진보적인 학자였다. 원교는 인품도 매우 관후했다. 


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벽서가 나붙은 이른바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은 소론을 몰살 직전까지 내몰렸다. 큰아버지이자 소론 강경파였던 북곡(北谷) 이진유(李眞儒, 1669∼1730)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할 때 이광사도 연좌제에 걸려 처형될 뻔했다. 이때 그는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목숨만은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여 영조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된 뒤 다시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22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가 9년, 정약용이 18년의 유배 생활을 했던 것에 비하면 이광사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귀양살이를 한 셈이었다. 유배 생활 중 이광사는 해남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구례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등 전라도 일대 사찰의 현판 글씨를 많이 남겼다. 


이광사는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60세 되던 해인 1764년(영조 40) 서법(書法)에 관한 책 '원교서결(圓嶠書訣)' 전편을 지었으며, 4년 뒤인 1768년에는 '원교서결' 후편을 지었다. 서결(書訣)은 서법의 비결이라는 뜻으로 필결(筆決)이라고도 한다. 서결에 관한 저서로는 중궈(中國) 밍(明)나라 펑팡(豊坊)의 '수쥐에(書訣)'와 조선 이광사의 '서결'이 알려져 있다.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모사본


펑팡의 '서결'은 필결과 서세(書勢), 필연기용(筆硯器用), 필법(筆法), 고문(古文), 대소전(大小篆), 예(隷), 현완용필법(懸腕用筆法) 등에 관해 논술한 책이다. 이 책은 지금은 사라진 고법첩(古法帖)이나 서적(書蹟)의 이름을 많이 인용하여 당시의 서법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펑팡의 '수쥐에'는 스쿠취안수뻔(四庫全書本)과 메이수총수뻔(美術叢書本)이 있다.


이광사의 '원교서결'의 원서명(原書名)은 '서결'이다. 하지만, 펑팡의 '수쥐에'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원교서결’로 부른다. 주로 웨이푸렌(衛夫人)의 삐젠투(筆陣圖)와 왕시즈의 삐젠투허우(筆陣圖後)에 입각하여 필법에 대한 설명과 글씨를 배우는 순서, 중궈 서예가들이 말한 서법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하지만 추사는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보물 제1982호, 간송미술관 소장)'에서 롼위안(阮元)의 '뻬이베이난티에룬(北碑南帖論)'에 입각해서 이광사의 필명이 세상에 울려 빛나고, 상좌하우(上左下右)나 신호필선(伸毫筆先) 같은 말들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한결같이 그릇된 속으로 빠져 미혹(迷惑)을 깨뜨릴 수 없으며, 망녕스러움을 헤아릴 수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 후기 추사와 더불어 서예의 양대 산맥이었던 이광사의 필법을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라 혹평했다. 


추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제주도에 유배 가는 길에 해남의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가 글씨를 쓴 대웅전 편액을 떼어내고 자신이 글씨를 쓴 편액을 대신 걸게 했다. 하지만, 유배가 끝나고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했다. 추사는 나중에서야 이광사 서체의 진수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반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원교 이광사 기념사업회 정태순 이사장은 이광사가 '16년간 신지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당시 중궈의 영향을 벗어나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자적인 조선의 서체를 완성하고도 추사 김정희에 비해 저평가'되었다면서 '추사 김정희의 대흥사 현판사건은 그만큼 이광사 선생의 서체 경지가 높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며, 추사의 이광사 비판은 그래야 자신을 높힐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書圓嶠筆訣後(阮堂先生全集六卷)


圓嶠筆訣云 吾東麗末來 皆偃筆書 畵之上與左 毫銳所抹 故墨濃而滑 下與右 毫腰所經 故墨淡而澁 畵皆便枯而不完. 其言似剖細析微 而最不成說.上但有左而無右 下但有右 而無左歟 毫銳所抹 不及於下. 毫腰所經 不及於上歟. 橫畫旣如是 垂畫又歟何. 濃淡滑澁 是在用墨之法 不可責之 於用筆之偃與直也. 


書家有筆法 又有墨法 而今於書訣中 無一影響於墨法者 盖但論筆法己 是偏枯 且論筆去 而不分於墨與筆 囫圇說去 無所區別 不知爲何者是墨 何者是筆是可成說乎. 


麗末來 至於國初 如李君侅 孔俯 姜希顔 成達生 諸名公 無不龍騰鳳翥 何嘗有一波一點之偃筆. 且如崇禮門 興仁之門 弘化門 大成殿篇額 豈偃筆所可書者也. 其所云偃筆 未知指何人書也. 


且如起畫 伸毫下之 利刀橫削者 恐又不成說. 若令伸毫 如利刀橫削 嘗另製一種筆 如畫工匾筆 糊匠糊箒樣子 然後可以中法 以今通行之棗心筆 無以下手矣. 其又云堅築筆者 是古今書家所未聞之訣也. 古有築筆一法 卽二水旁 如次者左邊 連點緊接 謂之築筆. 非如員嶠所云 曳筆作屈曲體 所以古今所未聞也. 


至於必先手後者 尤不可以示後者也. 書家所先 在於懸腕懸臂 乃至於一身之盡力 而筆不知者爲上庭未也. 今云筆先手後 又云盡一身而送之 筆旣先矣 何庸更籍於手與身也. 先後矛盾 自亂其例 轉沒巴鼻 寧不可歎也. 


點法云 形誰尖毫皆伸者 又何說乎. 欲以伸毫一法 偏施於戈波點畫 而最 不合於點法 故作此牽强之說. 夫尖者 聚以合之者也. 伸者散而放之去也 尖不可以爲伸也 伸不可以爲尖也. 尖伸異體 不可相入 何以伸毫作尖形也. 


結構者 筆陣圖 以爲謀略也. 誰刀甲精利 城池堅完 非謀略 無以施措. 所以書家最重結構 自鍾索以下 至於近日中國書家 有一定不敢易之結構法如左短上齊 右短下齊之類 不可枚擧. 今所云結構者 全無着落 古人相傳之 眞諦妙訣 一無相及 蓋其書於結構一法 尤以臆見 嚮壁虛造醜惡不可狀 反乃以歐顔爲方板一律 至以謂悉蹈右軍 不是書之科. 此何異於武叔毁聖 波旬謗佛也. 此尤先闢者也. 


詳準於右軍諸帖 可知吾言之有本者 未知指右軍何帖也. 其云東人固陋不知巧据者 秪是筆陣圖之爲僞而不能辨 至於右軍諸帖 果皆無可攷据者 而直證以吾言有本耶. 嘗試論之 樂毅論 己自唐時難得眞撫本 黃庭經 非右軍書 遺敎經 卽唐經生書 東方贊 曹娥碑 未知其出於何本 淳化諸帖 眞贋混淆 轉轉翻訛 最不可準. 外此又有右軍何帖可以詳準證以吾言之有本耶. 


其品第 漢隸以禮器碑爲最 以郭碑爲出 後世可稱具眼 忽以受禪竝擧於禮器至以孔龢孔宙衡方諸碑 皆不及受禪 不知其何據也. 


漢隸雖桓靈未造 與魏隸大不同 有若界限. 受禪卽魏隸也. 純取方整己開唐隸之漸 豈可與禮器竝稱 反居孔龢孔宙之上也. 若知若不知 殊不可測度耳. 


噫. 世皆震耀於圓嶠筆名 又其上左下右 伸毫筆先諸說 奉以金科玉條 一入其迷誤之中 不可破惑 不揆儧妄 大聲疾呼 極言不諱如是. 


此豈圓嶠過也. 其天稟超異 有其才而無其學. 無其學 又非其過也. 不得見古今法書善本 又不得就大方之家 但以天稟之超異 騁其貢高之傲見 不知裁量 此叔季以來 所不能免也. 其三致意於不學古 而緣情棄道者 殆似自道也. 若似得見善本 又就有道 以其天稟 豈局於是而己也.[원교의 필결에 '우리나라는 고려 말엽 이래로 다 언필(偃筆)의 글씨다. 그래서 획의 위와 왼편은 호(毫) 끝이 발라가기 때문에 먹이 짙고 미끄러우며, 아래와 바른편은 호의 중심이 지나가기 때문에 먹이 묽고 까끄러움과 동시에 획은 다 편고(偏枯)가 되어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 설이 하나의 횡획(橫劃)을 사분해서 벽파하여 세미한 데까지 분석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되지 않는다. 위에는 단지 왼편만 있고 바른편은 없으며, 아래에는 단지 바른편만 있고 왼편은 없단 말인가? 호 끝이 발라가는 것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호 중심이 지나가는 것은 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횡획이 이미 이와 같을진대 수획(竪)은 또 어떻다는 건가?


농담(濃淡)과 활삽(滑澁)이란 본시 먹 쓰는 법에 달린 것이요, 용필(用筆)의 언(偃)과 직(直)을 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가에는 필법이 있고 또 묵법(墨法)이 있는데, 이 필결 속에는 묵법에 영향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필법만 들어 논하면 이미 이것이 편고이며, 필법을 논하면서 먹과 필을 나누어 놓지 아니하고 두루뭉수리하게 말하여 구별한 바가 없으니 어느 것이 이 묵이며 어느 것이 이 필인지를 모를 지경인데 이러고서 말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원교의 글씨를 보니 현완(懸腕)하고서 쓴 게 아니다. 무릇 글자를 쓸 때 현완하고 현완하지 않은 것은 자획의 사이를 보면 그림자도 도망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속일 수 있으랴! 원교에게 친히 배운 여러 사람들도 역시 다 알지 못한다. 이랬기 때문에 필결 속에는 현완에 대한 한 글자도 미치지 않은 것이니, 현완을 한 연후에야 붓 쓰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현완을 안 하고서는 어떻게 붓을 씀에 있어 언이니 직이니 말할 수 있으랴! 그가 깊이 언필을 책한 것도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고려 말 이래로 조선 초엽에 이르러 이군해(李君侅), 공부(孔俯), 강희안(姜希顔), 성달생(成達生) 같은 여러 명공(名公)들이 용이 날고 봉이 나래하듯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들이 어찌 일찍이 한 파(波)나 한 점(點)의 언필이 있었으며, 또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 홍화문(弘化門), 대성전(大成殿)의 편액이 어찌 언필로써 쓸 수 있는 것이겠는가

! 그 이른바 언필이란 어느 사람의 글씨를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다.


또 이를테면 '획을 일으켜 호(毫)를 펴고 가면, 아래는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 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령 펴진 호가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같이 하려면 마땅히 일종의 필을 따로 만들어 마치 화공의 편필(匾筆)이나 도배장이의 풀비 모양처럼 되어야만 법에 맞게 할 수 있는데, 지금 유행하는 조심필(棗心筆)로서는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또 말한 '굳건히 붓을 다진다.(堅築筆)'라는 것은 고금 서예가들이 듣지 못한 비결이다. 축필(築筆)이란 것은 반드시 점을 연해 찍는 곳에 있어 긴히 다붙이는 의(義)로서 빙(冫)과 같은 것이 이것이며, 횡직과파(橫直戈波)의 여러 획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붓이 먼저 가고 손은 뒤에 간다(筆先手後)는 것은 더욱 뒷사람에게 보여줄 것이 못 된다. 서예가가 먼저 할 것은 현완과 현비(懸臂)에 있어 마침내는 온몸의 힘을 다 쓰는 데까지 이르는데 지금 '붓이 먼저요, 손은 뒤라.' 하고 또 '온몸의 힘을 다해 보낸다.'고 했으니 붓이 먼저 갔는데 어떻게 손과 몸에 의뢰할 수 있는가! 선후가 모순되어 스스로 그 예를 어지럽히며 조리가 닿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


점의 법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형체는 비록 뾰족하나 호는 다 편다.'라 한 것은 이 또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호를 펴는 한 법으로서 과파점획에 두루 다 쓰고 싶은데, 가장 점의 법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런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말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무릇 뾰족하다는 것은 모아서 합쳐놓은 것이요, 편다는 것은 흩어놓은 것이니, 뾰족한 것을 펴서 만들 수 없고, 펴진 것을 뾰족하게 만들 수 없다. 뾰족하고 편 것은 형체가 달라서 서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편호로써 뾰족한 형을 만든단 말인가! 결구(結構)라는 것은 필진도(筆陣圖)에서 이를 들어 모략(謀略)이라 했다. 아무리 칼과 갑옷이 정(精)하고 날래며 성지(城池)가 굳고 튼튼할지라도 모략이 아니면 손을 놀릴 수가 없게 되므로 이 때문에 서예가는 결구를 가장 중하게 여긴다.


쭝야오(鍾繇), 수어징(索靖)으로부터 근일에 이르기까지 중궈의 서예가는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결구법이 있으니, 이를테면 왼편이 짧을 경우에는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이 짧을 경우에는 아래를 가지런히 하는 유로서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이른바 결구라는 것은 전혀 착락(着落)이 없어 옛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진체(眞諦)와 묘결(妙訣)은 하나도 미친 바 없다. 대개 그 글씨가 결구의 한 법에 있어서는 더욱 억견(臆見)으로서 벽을 향하여 헛되이 만든 것이라 그 추악한 것은 형용할 수 없는데, 도리어 우(歐)와 옌(顔)으로서 방판(方板)의 일률(一律)이라 하여 심지어는 이들이 모두 왕여우쥔(王右軍, 왕시즈)을 글씨로 여기지 않은 과정을 밟았다 일렀으니 이는 어찌 우수(武叔)가 성인을 헐뜯고 뽀쉰(波旬)이 부처를 비방한 것과 다르리오! 이는 더욱 먼저 벽파(闢破)해야 할 것이다. '자상히 여우쥔의 제첩(諸帖)에 준해 보면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여우쥔의 어느 첩을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동쪽 사람은 고루하여 고거(考据)를 모른다.'는 것은 단지 필진도를 능히 분변하지 못한다는 말이며, 여우쥔의 제첩에 이르러서는 과연 다 고거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곧장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들어 증명할 수 있으랴!


시험삼아 논한다면 르이룬(樂毅論)은 이미 탕(唐)나라 때부터 진모본(眞模本)은 얻기 어려웠고, 황팅징(黃庭經)은 여우쥔의 글씨가 아니며, 이쟈오징(遺敎經)은 곧 탕나라 징셩(經生)의 글씨요, 둥팡수어잔(東方朔讚)과 차오으베이(曹娥碑)는 그것이 어느 본에서 나왔는지 모르니, 서예가로서 안목을 갖춘 자라면 곧장 유식자는 응당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춘화거(淳化閣)의 제첩은 진안(眞贋)이 혼잡한 동시에 무진 번와(翻訛)되어 가장 표준할 것이 못 되는데, 하물며 여우쥔이 고을을 잃고 선령(先靈)에 고한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않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을 두었는데, 세상에서 능히 구별을 못하고서 그 느리고 이상한 것을 보면 호칭하여 만년의 글씨로 삼으니, 이를 제외하고 또 여우쥔의 어느 첩이 있어서 내 말이 근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말인가!


그가 한예(漢隷)를 품제(品第)하면서 리치베이(禮器碑)를 들어 제일이라 했고, 꿔베이(郭碑)를 들어 후세에 나왔다 했으니 이는 구안(具眼)이라 일컬을 만한데 갑자기 수선(受禪)을 예기와 아울러 들었고, 심지어는 콩허(孔和), 콩저우(孔宙), 헝팡(衡方) 제비(諸碑)가 다 수선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인지 모르겠다.


한예는 비록 환(桓)과 영(靈) 시대 말조(末造)라도 웨이예(魏隷)와는 너무도 같지 아니하여 한계를 그어 놓은 것과 같은데, 수선은 바로 웨이예로서 순전히 방정(方整)을 취하여 이미 탕예(唐隷)의 조짐을 열어 놓았으니 어찌 예기와 더불어 병칭할 수 있으며, 도리어 콩허와 콩저우의 위에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아서 자못 측량을 못하겠다.


아,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진요(震耀)되어서 그의 상좌하우, 신호(伸毫), 필선(筆先) 제설(諸說)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한번 미혹되면 의혹을 타파할 수 없게 되므로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는 바다.


그러나 이 어찌 원교의 허물이랴! 그 천품이 남달리 뛰어나 그 재주는 지녔으나 그 학(學)이 없는 것이지 그 허물이 아니다. 고금의 법서(法書)와 선본(善本)을 얻어보지 못하고, 또 대방가(大方家)에게 나아가 취정을 못하고 다만 초이한 천품만 가지고서 그 고답적인 오견(傲見)만 세우며 재량을 할 줄 모르니, 이는 숙계(叔季) 이래의 사람으로서 면하지 못하는 바다. 그의 ‘옛을 배우지 아니하고 정(情)에 인연하여 도를 버리는 자들에게 뜻을 전한 것’은 사뭇 자신을 두고 이른 말인 것도 같다. 만약 선본을 얻어보고 또 유도(有道)에게 나아갔던들 그 천품(天品)으로써 이에 국한되고 말았겠는가!]


추사는 원교가 세상을 떠나고 9년이나 지나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추사도 만약 100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뻬이베이난티에룬'을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추사는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