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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7 - 추사기념관

林 山 2019. 4. 11. 12:11

추사 묘소 바로 남쪽 곁에는 추사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추사기념관 입구 좌우에는 추사의 좌상(坐像)과 입상(立像), 인장(印章)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북쪽 외벽에는 '吐爲丹菉芝英(토위단록지영)', '結成珠光劒氣(결성주광검기)' 대련과 '不二禪蘭圖(불이선란도)',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書勢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예서(隷書) 대련(對聯)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吐爲丹菉芝英(토위단록지영), 結成珠光劒氣(결성주광검기)'는 '붉고 푸른 지초 꽃봉오리가 터져서 옥빛 검기를 만들었네'로 풀이할 수 있다. 지초 꽃봉오리가 터질 때의 엄숙하고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표현한 대련이다. '劒氣(검기)'는 예리한 칼이 내뿜는 추상같이 예리하고 강한 기운을 말한다. 


추사기념관


기념관 입구 남쪽에는 추사의 인보(印譜) 200과 중 12과(顆)를 음각과 양각으로 새기고, 전면에 양각으로 '史野(사야)'라고 새긴 '추사와 인보'라는 제목의 인장탑(印章塔)이 세워져 있다. 추사 인장탑은 서예가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의 작품이라고 한다. 


추사기념관의 인장탑


'史野(사야)'는 추사가 예서로 쓴 대형 글씨다. '사야'는 '룬위(論語)' <융예피엔(雍也篇)>의 '文史野也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문은 사야다. 질박함이 꾸밈보다 많으면 야인이요, 구밈이 질박함보다 많으면 문사다. 꾸밈과 질박함이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에 나오는 말이다. '史(사)’는 잘 정리된 것, '野(야)'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와 ''가 잘 조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추사기념관의 글자탑


추사 인장탑 옆에는 원통형 위에 우물 정자(井字)를 올린 글자탑 조형물이 있다. 원통형 조형물에는 다양한 한자를 음각과 양각으로 새기고, 그 위 우물 정자 조형물에는 추사의 편지 글씨를 새겨 추사체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山崇海深(산숭해심)', '遊天戱海(유천희해)' 대련


츄사기념관 입구 북쪽의 추사 입상 대좌에는 '遊天戱海(유천희해)'라는 글씨가 예서로 새겨져 있다. 본래 '山崇海深(산숭해심)'과 한 작품이거나 대련의 쌍폭으로 쓴 것일 게다. 각각 주인을 달리하다가 호암미술관에서 다시 합쳐진 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두 작품은 폭 42㎝, 길이 207㎝로 크기가 같다. 기괴(奇怪)한 듯하지만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이 넘치는 글씨다. 


'山崇海深(산숭해심)', '遊天戱海(유천희해)는 '산은 높고 하늘은 높으니, 하늘에서 노닐고 바다를 희롱한다.'는 뜻이다. '山崇海深'은 칭(淸)나라 웡팡깡(翁方纲)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뜻을 풀이하는 글에 나오는 문구다. '遊天戱海'는 중궈(中國) 난차오(南朝) 량우디(梁武帝) 샤오옌(蕭衍)이 예서와 해서(楷書)에 뛰어났던 웨이(魏)나라 명필 쭝야오(鍾繇)의 글씨에 대해 '雲遊天, 群鴻戱海(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기러기 떼가 바다에서 노니는 듯하다)'고 평한 말에서 유래한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10여년에 가까운 귀양살이를 하면서 노호(怒虎)와도 같은 추사체를 완성했다. '山崇海深', '遊天戱海'는 예서를 바탕으로 행서풍(行書風)의 운필을 약간 곁들여서 쓴 글씨로 뛰어난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遊天戱海' 작품에는 '老完漫筆(노완만필)'이란 관지가 적혀 있고, '완당김정희인(阮堂金正熹印)'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추사 인보


전시실 입구 벽에는 203과의 인장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추사 인보가 걸려 있다. 전시실 안에는 추사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행서 대련과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書勢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예서 대련, '且呼明月成三友(차호명월성삼우)', '好共梅花住一山(호공매화주일산)' 예서 대련,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예서 대련 모사본과 추사 연보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전시실에는 또 추사고택과 제주도 유배지 모형, 인장 모형, 추사의 스승인 웡팡깡과 롼위안(阮元)의 편지, 추사와 숭(宋)나라 우양시우(歐陽修)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또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북한산비, 국보 제3호)와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황초령비, 북한 국보 제107호) 탁본도 있다. 


전시실


전시실에는 또 '無量壽閣(무량수각)', '谿山無盡(계산무진)', '梣溪(침계)', '묵소거사자찬(默笑居士自讚)', '추사첩(秋史帖)', '예서권(隸書卷)',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등이 전시되어 있다. 권돈인과 추사가 주고받은 편지도 두 점 있다. '임한경명(臨漢鏡銘)', '임한경명(臨漢鏡銘) 발문(跋文)'은 추사가 예서로 쓴 작품이다. '춘농로중(春濃露重)', '적설만산(積雪滿山)', '인천안목(人天眼目)', '염화취실(斂華就實)'은 난초 그림이고, '세외선향(世外僊香)'은 난초와 영지 그림이다. '소림모정(疏林茅亭)', '고사소요(高士逍遙)' 등의 산수화도 전시되어 있다. 부채그림 '지란병분(芝蘭竝芬)'과 증청람란(贈晴嵐蘭), 산수화 족자그림도 있다. 


추사기념관의 화암사 '无量壽閣(무량수각)' 현판


화암사 추수루(秋水樓) '无量壽閣(무량수각)' 현판


용산(龍山)의 남쪽 봉우리(오석산) 기슭에 있는 화암사(華巖寺) '无量壽閣(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추사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써 보낸 것이다. 무량수각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불전이다. 백제 때 창건된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중건하여 추사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되었을 때 이 절을 다시 한 차례 중수하였는데, 이때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써 보낸 것이다. 원본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에서 소장하고 있다. 


추사가 쓴 '量壽閣' 현판 글씨는 화암사 외에도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 竹原寺)에도 있다. 대흥사에 가면 조선 후기 3대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 추사의 글씨를 다 볼 수 있다. 대흥사 '枕溪樓(침계루)'는 이광사, '駕虛樓(가허루)'는 이삼만이 쓴 것이다  


화암사 '무량수각' 편액 글씨의 특징은 '無(무)'를 '无(무)로 쓴 것이다. 김병기는 "'量(량)'이나 '壽(수)'는 가로획이 많은 글자다. 만약 '无'를 '無'로 썼다면 가로획의 중첩에서 오는 매우 답답한 글씨가 되었을 것이다. 중첩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無'를 '无'로 쓴 데서 추사의 창의성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병기는 또 이 작품에 대해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 기도 한풀 꺾이고 고독 속에서 삶을 반추하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은 글씨가 매우 담담하다. 필획에 어떤 힘을 넣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넣을 만한 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좋게 보면 의도하는 바가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담(淡)'의 글씨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체념에 빠진 무기력한 글씨, 한 바탕 병을 앓고 난 후에 쓴 해쓱한 글씨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谿山無盡(계산무진)'


'谿山無盡(계산무진)'은 계산초로(谿山樵老) 김수근(金洙根, 1798∼1854)에게 써준 대형 글씨다. 대형 작품임에도 관기를 쓰지 않았고, 인장도 작은 크기의 두 과만 찍은 것이 다소 특이하다. 이로 인해 '茗禪(명선)'과 함께 위작(僞作) 논란이 일고 있는 작품이다. '계산무진'은 '시냇물도 산도 다함이 없어라.'의 뜻이다. 추사의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이 글씨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수근은 안동 김씨 세도가 출신으로 형조와 병조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동생 김문근(金汶根)은 철종(哲宗)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해졌고, 두 아들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김수근은 자신이 은자(隱者)인 양 자신의 호를 '시냇물 따라 산에 올라 나무하는 늙은이'라는 뜻의 '계산초로'라고 지었지만 사실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다. 김병기는 '추사는 그런 김수근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써달라는 글씨라서 맘에 내키지 않아 한 마디의 관기도 쓰지 않았고, 도장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자그맣게 찍은 건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谿山無盡' 글씨의 가장 큰 특징은 왼편 윗부분에 있어야할 '爪' 부분을 생략한 '谿'의 운필이다. '谿'를 보고 있노라면 계곡물이 이 골 저 골에서 모여들어 굽이쳐 흐르다가 때로는 여울을 이루고 소용돌이치기도 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모양만 보고도 그 의미를 단박에 알 수 있는 글씨다. 변형의 대가다운 천재적인 작품이다. 김병기는 이 글씨를 두고 '향상도하(香象渡河)'의 운필이라고 평했다. 물살이 급하고 센 강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발바닥을 강바닥에 붙이고서 당당하게 건너는 코끼리처럼 굳건한 기세로 쓴 글씨라는 것이다. 김병기는 '爪'를 생락한 이유에 대해 "'谿'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는 '谷'을 지금의 모습으로 오묘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변화시켰기 때문에 오묘한 결구의 '谷'자와 그렇게 정히 잘 어울리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글씨에 대해서도 김병기는 "'山'자는 자형은 전서(篆書)이면서 필획은 완전히 예서의 필획으로 썼다. '山'자 아래 부분에 과감하게 여백을 남긴 것도 빼어난 장법(章法)의 운용이다. '無'자는 괴석처럼 단단하게 뭉친 필획으로 '山'보다 약간 올려서 썼다. 아래에 '盡'자를 놓기 위한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盡'을 '無'아래에 튼실하게 배치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안정된 분위기로 이끌었다. 가히 귀신같은 솜씨라고 할 만하다."고 평했다. 


북한산비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553~554년 백제의 한강 중류지역과 고구려의 함주(咸州), 이원(利原) 근방까지 정복한 뒤 국경지대를 순시한 기념으로 568년 이후에 세운 것이다. 북한산비는 원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있었으나 보존을 위해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197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북한산비는 많은 부분이 절단 또는 손상되어 있고, 비신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자욱이 남아 있다.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탁본


1816년 7월 31세의 추사는 친구인 동리(東籬)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비봉에 올라가 북한산비의 비문을 탁본했다. 이듬해에는 지기인 풍양 조씨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다시 비봉에 올라가 북한산비를 조사한 뒤, 종래 이성계(李成桂)의 왕사(王師) 무학 자초(無學自超)의 비라고 알려졌던 이 비가 진흥왕의 순수를 기념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비문은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북한산비는 세운 이래 1,200여 년 동안이나 잊혀졌다가 추사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다. 추사는 북한산비를 고증하면서 황초령비의 탁본을 활용했다. 북한산비의 옆면에는 추사와 조인영이 답사하여 판독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정복하고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568년에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黃草嶺)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12행, 매행 35자씩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수행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황초령이 초방원(草坊院)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황초령비를 '초방원비(草坊院碑)'라고도 한다. 황초령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백겸(韓百謙, 1547~1629)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다. 비슷한 시기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북병사(北兵使) 신립(申砬, 1546~1592)이 탁본을 해왔다고 전한다. 황초령비는 탁본이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 1637~?)의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수록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제1석과 제3석만 남아 있었다. 이후 소재를 알 수 없었다.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탁본


1790년 장진부(長津府) 설치를 계기로 유한돈(兪漢敦, 1742~?)이 제1석을 다시 발견하였다. 추사는 이 비의 재발견자를 유척기(兪拓基, 1691~1767)라고 했다. 황초령비는 그 뒤 또다시 매몰되었다. 조정에서 자주 탁본을 요구하자 그곳 백성들이 황초령비를 벼랑 아래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眞興北狩古境(진흥북수고경)' 현판 글씨


1832년 추사의 절친한 벗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추사의 부탁을 받은 권돈인은 제1, 2석을 찾아내 관아로 옮겨 보존하였다. 1852년 추사가 제주도에 이어 북청에서 두 번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각별한 사이인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신라의 강역을 증명하는 황초령비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추사는 윤정현에게 이 비석을 원래의 위치로 복원할 것을 부탁했다. 윤정현은 추사의 지도를 받아 황초령 바로 아래 중령진(中嶺鎭)으로 황초령비를 옮겨 세운 뒤 비각(碑閣)을 지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지명도 진흥리(眞興里)로 고쳤다. 제3석은 윤정현이 진흥리로 옮길 당시 소재 불명 상태로 탁본만이 전해졌다. 윤정현은 1852년 8월 추사에게 비각의 편액 글씨와 이건기(移建記)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알려주는 '眞興北狩古境(진흥북수고경)' 편액과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이건비문(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移建碑文)'을 써주었다. 이처럼 추사와 권돈인, 윤정현은 금석학 연구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00년 함경도의 재력가 김씨(金氏)가 비각을 세우고, 황초령비와 윤정현이 옮긴 사실을 적은 소비(小碑), 비각중건기비(碑閣重建記碑)를 보존하였다. 현재 이 비는 함흥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1931년 함흥군 하기천면 은봉리(隱峰里) 계곡에서 당시 18세의 엄재춘(嚴在春)이 제3석을 발견하여 제1, 2석과 이어붙였다. 제3석의 발견으로 60자 정도의 글자가 보완되었다. 추사에 의하면 이 비석의 글씨는 중궈 난치(南齊)와 량대(梁代)의 비나 조상기(造像記)와 비슷하며, 우양쉰(歐陽詢)의 서체를 따랐다고 한다. 황초령비는 마운령비(摩雲嶺碑)와 더불어 진흥왕대 신라의 동북방 영토가 함흥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1938년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은 황초령비 탁본을 베이징(北京) 류리창(琉璃厂) 고서점에서 구입해 왔다. 위창(葦滄, 韙傖) 오세창(吳世昌)은 이 탁본의 내력을 아래쪽 여백에 적어 놓았다. 이 탁본은 조선과 칭나라 금석 교류의 징표가 되는 유물이다. 


박영철은 친일반민족 밀정으로 유명한 배정자(裵貞子, 1870~1952)와 결혼하여 5년 동안 같이 살다가 이혼했다. 박영철도 다양한 친일반민족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중추원, 관료, 도지사, 도 참여관, 친일단체, 군 등 여러 분야에 중복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윤정현은 추사에게 자신의 호 '梣溪(침계)'를 글씨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윤정현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우(季愚),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이조 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성균관(成均館)에서 행한 황감응제(黃柑應製)에 뽑힌 윤정현은 18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되어 급제하였다. 51세의 나이로 출사하였으나 이듬해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에 선발된 뒤 학문의 조예와 가문의 배경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1846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듬해 정월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1849년 2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함경도 관찰사에서 돌아온 윤정현은 이조, 예조, 형조 판서를 거쳐 1856년 9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직하였으며, 11월에는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1858년 이후 그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 명예직에 올랐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碑文)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침계유고(梣溪遺稿)'가 있다. 


'梣溪(침계)' 모사본


'梣溪(침계, 보물 제1980호)' 작품은 화면 오른쪽에 치우쳐 해서와 예서 합체로 두 글자를 쓰고, 왼쪽에는 행서로 8행에 걸쳐 발문(跋文)을 쓴 다음 두 과의 인장을 찍었다. 이 작품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추사의 작품 중 명품으로 꼽히는 글씨다. 이 작품에는 추사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구성과 필법에 있어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글씨다.  

 

윤정현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써주리라 마음먹었다. 추사는 질박하면서도 호탕한 예서로 쓰려고 했지만, 30년 동안 아무리 찾아봐도 '梣'자의 예서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추사는 해서와 예서 합체로 윤정현의 호를 써주었다. 그런 과정이 발문에 모두 담겨 있다.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今頗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 陳思王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仿其意寫就. 今可以報命而快酬夙志也. 阮堂幷書.[(바로 잡아주시려고 이 두 글자의 글씨를 부탁하셨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서로 쓰려고 했는데, 한나라 때의 비석에는 첫 번째 글자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쓸 수가 없어서 마음에 두고 잊지 않은 채 이미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공부한 뻬이차오(北朝) 시대의 금석문은 거의 다 해서와 예서를 합쳐서 쓴 서체였습니다. 수이탕(隋唐) 시대에 쓴 첸쓰왕베이(陳思王碑)나 멍파싀베이(孟法師碑)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러한 뻬이차오와 수이, 탕의 비에 새겨진 글씨를 모방하여 마침내 '溪' 두 글자를 완성하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글씨를 쓰라고 하신 분부에 보답함과 동시에 가슴 속에 두고 있던 오랜 뜻을 시원하게 갚은 것 같습니다. 완당이 쓰고 아울러 글을 지어 붙입니다.] 발문에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30년이나 고심한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인품을 엿볼 수 있다. 30년이나 기다려 준 윤정현의 인내심도 대단하다. 그만큼 두 사람의 우정은 깊고 각별했다. 


첸쓰왕베이는 수이(隨)나라 카이황(開皇) 13년(593) 산둥셩(山東省) 둥아(東阿)에 세운 웨이(魏)나라 첸쓰왕(陳思王) 차오즈(曹植)의 비석이다. 비문의 글씨는 해서와 예서, 전서의 합체로 썼다. 멍파싀베이(孟法師碑)는 탕나라 쩡꽌(貞觀) 16년(642) 추수이량(褚遂良)이 해서와 예서 합체로 글씨를 쓴 비석이다. 현재 비석은 사라지고 탁본만 전한다. 


황초령비와 북한산비 탁본 곁에는 경주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慶州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보물 제12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기(附記) 탁본도 전시되어 있다. 추사는 북한산비를 조사하고 나서 1817년 4월 29일 경주에서 무장사비 파편 2개를 찾아냈다.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는 통일신라 소성왕(昭聖王)의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왕이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고 세운 조성기 비석이다.  


경주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慶州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부기(附記) 탁본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는 당시 경주부 윤(慶州府尹)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사람을 보내 탁본을 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세기 실학파의 거두이자 학자였던 홍양호는 이 비문을 신라의 대아찬(大阿湌) 김육진(金陸珍)이 왕시즈(王羲之)체로 썼다고 판단했다. 추사도 무장사비 탁본을 구해 웡팡깡에게 보냈고, 웡팡깡은 김육진이 쓴 것이 아니라 왕시즈의 '란팅수(欄亭書)' 등을 집자한 가치 있는 비문이라고 감정했다. 이에 추사는 직접 가서 파편 2개를 찾은 뒤 옆면에 비석을 발견한 경위와 감회를 새겼는데, 특히 세상을 떠난 웡팡깡의 아들 웡수쿤(翁樹崑)과 이 비문의 글씨를 함께 보지 못해 아쉽다는 기록을 남겼다.


'묵소거사자찬(默笑居士自讚)' 모사본


'默笑居士自讚(묵소거사자찬)'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이 지은 글이다. 묵소거사(默笑居士)는 김유근의 별호다. 추사와 김유근은 젊어서부터 우정을 나눈 벗이었다. 추사는 붉은 바탕의 냉금지(冷金紙)에 행간(行間)과 자간(字間)을 맞추기 위해 줄을 친 뒤 단정한 해서로 써서 서축(書軸)을 만들었다. '默笑居士自讚(묵소거사자찬)'은 추사 해서의 백미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서축은 보물 제1685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의 자는 경선(景先),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10년(순조 10) 부사과(副司果)로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곧 홍문록회권(弘文錄會圈)에 올라 사서를 거쳐 검상(檢詳)이 되었다. 1817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고, 2년 뒤에는 대사성을 지낸 뒤 곧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었다. 1822년 이조 참판에 오르고, 3년 뒤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1827년 평안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평양으로 가는 도중 면회를 거절당한 전직 덕천군(德川郡) 아전에 의해 일행 중 5명이 살해되자 부임하지 않고 돌아와 병조 판서에 올랐으며, 곧이어 이조 판서로 전직했다. 1832년(순조 32) 아버지 김조순이 죽은 뒤 군사의 실권을 잡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나, 1837년 중풍에 걸려 4년 간 말을 못하는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김유근은 시와 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갈필(渴筆)을 사용하여 지극히 간일(簡逸)하면서도 문기(文氣)가 넘치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잘 그렸다. 유작으로 '오주고목도(五株枯木圖)'와 '괴석도(怪石圖, 이상 개인 소장)', '연산도(硏山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문집에는 '황산유고(黃山遺稿)'가 있다. '묵소거사자찬'도 '황산유고'에 실려 있다. 


當默而墨近乎時 當笑而笑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默笑之義大矣哉 不言而喩何傷乎默 得中而發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而知基 免夫矣. 笑居士自讚(마땅히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면 시류에 맞는 처신이라 할 수 있고, 마땅히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조절해야 할 때도 있고, 몸을 굽혀야 할 때와 활짝 펴야 할 때가 있으며, 무엇을 없애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북돋아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또 조용히 있으면서도 인정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어떤 경우에도 말없이 빙그레 웃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웃음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말하지 않고 상대를 깨우칠 수 있다면 침묵한다고 해서 어찌 해를 당하고, 중용의 미소를 보인다면 그 웃음으로 해서 어찌 봉변을 당하겠는가? 그러니 묵소에 힘써야 한다. 나를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묵소거사 쓰다.) 


중풍 발병으로 실어증에 걸린 상황에서 얻은 수신(修身)과 처세의 깨달음이 담겨 있는 명문이다.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김유근은 죽기 4년 전인 1837년에 중풍으로 실어증에 걸렸다. 그러니까 '묵소거사자찬'은 김유근이 1837년 이후에 썼다고 보아야 한다. 추사는 그의 나이 51세~54세 사이에 '묵소거사자찬'를 서축으로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글도 명문장이고, 글씨도 해서체 명필이다. 글과 글씨가 이처럼 잘 어울린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다. 김병기는 이 작품을 두고 '필획에서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았을 때 용쓰는 물고기의 힘과 같은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추사기념관에는 '예서권(隸書卷)'과 '추사첩(秋史帖)'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예서권(隸書卷)'은 추사의 제자인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의 예서 10쪽, 추사가 초의 의순(草衣意恂)에게 준 예서 6쪽, 추사의 아우 김명희(金命喜)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에게 써준 예서 7쪽을 허련이 모은 필첩이다. '추사첩(秋史帖)'은 추사의 글씨를 목판에 새겨 간행한 서첩이다. 추사체를 익히는데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첩인 '추사첩'은 전본도 아주 많고, 제목도 제각각 다르다.    


'추사첩(秋史帖)'과 '예서권(隸書卷)'


'추사첩(秋史帖)' 진본


'예서권'에 예서 10쪽을 쓴 신헌은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전권대신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허련은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추사는 허련에 대해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면서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 허형(灐)과 손자 허건(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서권(隸書卷)' 진본


'추사첩'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그린 난초를 칭찬하는 글과 추사의 노우(老友) 이윤명(李允明)의 수계(修禊)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수계는 시계(詩禊)라고도 하는데, 요즈음의 시동인(詩同人)과 같은 것이다. 중궈 진대(晉代)의 왕시즈가 란팅시싀(蘭亭詩社)를 만든 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로회(耆老會), 죽림고회(竹林高會)나 조선시대 16세기에 성립된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 자각시사(紫閣詩社) 등이 수계에 해당한다. 

  

추사의 글씨는 일반적으로 세 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습작기로 24세까지의 글씨, 2기는 25세 이후 칭나라 옌징(燕京)에 다녀온 뒤 55세에 제주도로 유배될 때까지의 글씨, 3기는 제주도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글씨를 말한다. 3기에 해당하는 글씨를 보통 추사체라고 한다. 하지만 2기 중국에 다녀온 뒤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글씨부터 추사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추사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진본


추사기념관에는 추사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진품도 전시되어 있다. 이 편지는 경주 김씨 용산참판공(龍山參判公) 직손종회장 김광호가 기증한 것이다. 추사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진품은 이 편지와 '추사첩(秋史帖)', '예서권(隸書卷)' 등 단 세 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