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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9 - 추사기념관

林 山 2019. 4. 13. 11:47

추사기념관 전시실에는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 1836년, 간송미술관 소장)'에 실려 있는 추사와 권돈인(權敦仁)의 전별시(餞別詩)가 전시되어 있다. '신취미태사잠유시첩'은 1836년(헌종 2)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칭(淸)나라 옌징(燕京)으로 떠나는 취미(翠微) 신재식(申在植, 1770~1843)의 전별연(餞別宴)에서 추사, 권돈인, 김유근(金逌根), 조인영(趙寅永), 이헌위(李憲瑋), 홍치규(洪稚圭), 조만영(趙萬永), 이지연(李止淵) 등이 지은 10수의 전별시를 추사가 적은 시첩이다. 


신재식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립(仲立)이다. 신사건(申思健)의 증손, 신소(申韶)의 손자, 아버지는 판관 신광온(申光蘊), 어머니는 송익흠(宋益欽)의 딸이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1818년 대사간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와 이조 참의를 지내고, 1826년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칭(淸)나라에 다녀왔다. 1827년 이조 참판을 지내고 1831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 함경도 마천령(摩天嶺) 이북에서의 전화(錢貨) 사용의 금지를 상소하였다. 그 뒤 개성유수, 지경연사(知經筵事), 공조 판서, 우빈객(右賓客)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대제학에 오르고 1836년 익종(翼宗)의 태실가봉(胎室加封) 때 제조(提調) 겸 서표관(書標官)이 되었고, 10월 16일 동지정사가 되어 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 이조 판서,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취미집(翠微集)'이 있다.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 중 추사의 전별시


朱霞天末若爲情(주하천말약위정) 붉은 노을 하늘 끝에 이내 정을 어찌하리

歷歷鴻泥又此行(역력홍니우차행) 기러기 발톱 역력한데 또 다시 이 발걸음

萬里杯尊還浪跡(만리배준환랑적) 만 리라 술동인 외려 정처 없이 떠돌다가

十年琴曲只遺聲(십년금곡지유성) 십 년 동안 거문고 곡조 소리만 남겼다오

使星自與文星動(사성지여문성동) 사성은 절로 저 문성과 함께 어울려 돌고

妙理多從畫理生(묘리다종화리생) 묘한 이치는 화리에서 나오는 게 하 많아

噀酒東方添雅謔(손주동방첨아학) 술 마시는 동방삭 맑은 해학 또 더했는데

雄襟披拂四筵驚(웅금피불사연경) 힘찬 옷깃 펄럭 바람 일으켜 모두 놀라네


이 시 앞에는 '湊砌翠丈 與燕中諸名士 贈酬詩語談藪 而成好覺噴飯(취장이 옌징의 여러 명사와 더불어 주고받은 시어와 담수를 첩첩이 모았는데 좋이 한번 웃을 만하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湊砌(주체)'의 '주'는 취(聚), '체'는 첩(疊)의 뜻이다. 첩첩이 모인 것을 이른다. '翠丈(취장)'은 취미 신재식을 가리킨다. '談藪(담수)'는 뻬이치(北齊) 때 양지에숭(陽玠松)이 지은 지인소설(志人小說, 逸事小說) 가운데 하나다. '담수'는 문인 명사들의 일화를 중점적으로 수록하고 있으며, 다양한 묘사 수법을 구사하여 인물들을 형상화했다.  


1구에는 '張茶農(짱차농의 시어를 씀)'이라는 부기가 있다. 차농(茶農)은 칭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짱셴(張深)의 호다. 자는 수위안(叔淵), 별호는 랑커(浪客)다. 추사가 일찍이 차농에게 부탁하여 우숭량(吳嵩梁)의 푸춘메이인투(富春梅隱圖)를 그리게 한 일이 있다. 4구에는 '劉柏隣(류바이린)', 5구에는 '郭蘭石(꿔란싀) 淸心聯(칭신롄)', 6구에는 '공은 이번 걸음에 그림책만을 가져오겠다고 언약하였음', 7구에는 '王業友(왕예여우), 8구 '雄襟披拂' 뒤에는 '曹玉水(차오위수이)'라는 부기를 써놓았다. 차오위수이(曹玉水)는 차오쟝(曹江)의 자인데, 호는 싀치(石谿)이다. 


'使星(사성)'은 옛날 왕명을 받고 지방으로 출장가던 관원을 가리킨다. 허우한(後漢) 허디(和帝) 때 무먼허우리(幕門候吏)인 리허(李郃)가 천문(天文)을 보고서 사신(使臣)이 오는 것을 알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文星(문성)'은 문운(文運)을 주관(主管)하는 별, 문창성(文昌星) 혹은 문곡성(文曲星)을 가리킨다. 또는, 문운(文運)을 일으킨 훌륭한 사람을 말한다. '妙理(묘리)'는 묘한 이치(理致) 또는 그 도리(道理)다. '畫理(화리)'는 고전적인 회화(산수화)의 구도 원리다. '披拂(피불)'은 부채질하여 바람을 일으킴, 또는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燕中(연중)'은 베이징(北京)을 가리킨다.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 중 권돈인의 전별시

 

추사의 전별시 바로 옆에는 권돈인의 전별시가 전시되어 있다. 1836년 4월 6일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5월 25일에는 권돈인이 진하정사(進賀正使)가 되어 옌징으로 떠났다. 7월 9일 추사는 병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10월 16일 신재식이 동지정사로 옌징에 갈 때 추사, 권돈인, 김유근, 조인영, 이헌위, 홍치규, 조만영, 이지연 등이 전별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함께 전별시를 지었다. 추사는 이 전별시들을 모아 자필로 써서 남겼다. 11월 8일 추사는 병조 참판에서 다시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귀했다. 


'임한경명(臨漢鏡銘)'은 '한(漢)나라 때의 거울에 새겨진 글씨(鏡銘)를 베끼다(臨書)'의 뜻이다. 예서(隸書)는 추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서체다. 추사의 예서는 다른 서체에도 두루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추사는 주로 세련된 둥한(東漢)대의 예서를 배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고졸한 고예(古隸)를 추구했다. 그는 특히 시한(西漢)대의 고예를 바탕으로 둥한대의 예서 가운데 동경(銅鏡)이나 마애명문(磨崖銘文)을 즐겨 임서(臨書)하였다. 60대 중반 작품으로 보이는 '임한경명첩'은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서첩에는 '阮堂依古隸帖(완당의고예첩)'이라고 써 있다. 


'임한경명(臨漢鏡銘)'


'임한경명' 발문(跋文)은 추사가 서체에 임했던 자세와 한대의 경문을 임서한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글이다. 행서(行書)로 쓴 이 발문은 40대 후반 또는 50대 초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임한경명(臨漢鏡銘)' 발문(跋文)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隷之今存皆東京古碑西京槪不一見已自歐陽公時然矣如君銘東京之最古, 尙不大變於西京略有鼎鑑爐殘款斷識可溯於西京者, 纔數種而已今以其意仿之以塞史言之求. 禮堂.[한대(漢代)의 예서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둥한시대의 고비(古碑)이고 시한시대의 비석은 한 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미 숭(宋)의 우양시우(欧阳修)가 살아 있었을 때도 그렇다. 추쥔밍(鄐君銘)은 둥한시대의 가장 오래된 비(碑)이지만 여전히 시한시대와 비교한다면 크게 변모한 것이 아니다. 대략 정(鼎), 감(鑑), 로(爐), 등(鐙)에 남아 있는 몇 글자를 가지고 시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겨우 몇 종류뿐이다. 지금 시한시대가 가지고 있는 서체의 의미를 모방하여 써서 사언(史言)의 요구에 응한다. 예당.]


'東京(둥징)'은 둥한의 수도 뤄양(洛阳), '西京(시징)'은 시한의 수도 시안(西安, 장안)을 말한다. 각각 둥한시대와 시한시대를 가리킨다. '歐陽公(우양꿍)'은 숭나라의 학자 우양시우(歐陽脩)를 이른다. 


전시실에는 '난맹첩(蘭盟帖, 30.2×128.1cm, 간송미술관 소장)'에 실려 있는 '춘농로중(春濃露重)', '적설만산(積雪滿山)', '인천안목(人天眼目)', '염화취실(斂華就實)', '세외선향(世外僊香)'이 전시되어 있다. '난맹첩'은 상하 2권에 16점의 묵란화(墨蘭畵)와 글씨 7점이 수록된 서화첩이다. 추사의 전담 장황사(粧䌙師) 유명훈(劉命勳)에게 선물로 주려고 만든 것이다. 장황사는 표구 전문가다. 서예의 점과 삐침으로 난꽃을 표현하는 등 전체적으로 서예적 필법을 강조한 '난맹첩'은 추사가 추구했던 서화일치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추사는 그림을 그릴 때 기법보다 문기(文氣)와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따랐다.

 

'춘농로중(春濃露重)'


'난맹첩' 상권 둘째 폭에 실려 있는 '춘농로중(春濃露重)'은 초봄에 피어난 혜란(蕙蘭)을 친 그림이다. 혜란은 일경구화(一莖九花), 즉 한 꽃대에 여러 송이의 꽃이 피는 난초를 말한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하나의 꽃대에 일곱 송이의 난꽃이 피어 있고, 세 장의 장엽이 꽃대와 같은 방향으로 화면을 아름답게 가르고 있다. 난엽(蘭葉)은 누르고 떼기를 서너 번 반복하여 넓고 좁음을 조절하였다. 또, 추사가 강조하던 삼전법(三轉法)을 써서 난엽의 길이와 형태에 변화를 줌으로써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왼쪽 상단에는 4언절구 '춘농로중(春濃露重)'이 화제로 적혀 있다. '봄이 무르익어 맺힌 이슬이 무겁고'의 뜻이다. 난엽이 수그리고 있는 것은 내려앉은 이슬이 무거워졌기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다.  


春濃露重(춘농로중) 봄빛 무르익어 이슬 무겁고

地暖草生(지난초생) 땅이 풀리자 풀들 돋아나네

山深日長(산심일장) 산은 깊고 해는 길어지는데

人靜香透(인정향투) 인적은 없고 난향만 스미네


居士(거사) 숨어사는 선비


'적설만산(積雪滿山)'


'난맹첩' 상권 첫 폭에 실려 있는 '적설만산(積雪滿山)'은 추사 난법(蘭法)의 요체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난엽을 잔디처럼 짧게 그려 한겨울의 눈보라를 이겨낸 춘란의 강인한 기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4언절구 한 수가 화제로 적혀 있다. 


積雪滿山(적설만산) 쌓인 눈은 산을 뒤덮고

江氷闌干(강빙난간) 강 얼음은 난간 이루나

指下春風(지하춘풍) 손가락 끝 봄바람 이니

乃見天心(내견천심) 이에 하늘 뜻을 알겠네


居士題(거사제) 숨어사는 선비 적다


백인산(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적설만산'에 대해 '짧은 잎과 꽃대 하나에 한송이 꽃만 피는 춘란(春蘭)을 묘사했는데, 난의 모양이나 화면 구성이 기존의 묵란(墨蘭)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형 감각을 보여준다. 농묵(濃墨)을 써서 붓을 급히 눌러 나가다가 짧게 뽑은 난엽은 서예의 필획를 연상하게 한다. 강인한 필법에서 오는 당당한 기세는 추사의 글씨를 보는 것 같다. 난엽의 구성도 강인한 필치의 단엽을 산일하게 펼쳐 놓아 마치 들판의 억센 잡초 무더기에 가까워 보인다. 꽃의 모양 역시 잎과 마찬가지로 꽃대가 짧고 꽃잎의 모양도 매우 단조로워, 난꽃을 묘사했다기보다는 측이나 탁과 같은 서예의 점과 삐침을 무심히 찍어 놓은 듯하다. 화면의 상단을 순수한 여백으로 남겨 두어 밀집된 난 무더기와 대비시키며 조화를 이루어 냈다.'고 평했다. 


'인천안목(人天眼目)'


'인천안목(人天眼目)'도 혜란을 친 묵란이다. 다섯 송이의 꽃이 핀 꽃대 하나가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였고, 장엽(長葉) 두 장이 화면을 길게 가르는 단출한 그림이다. 왼쪽 상단에는 '人天眼目(인천안목), 吉羊如意(길양여의) 居士(거사)'라는 화제가 있다. '사람과 하늘의 눈이 되고, 뜻대로 복 받기를.....'이란 뜻이다. '인천안목(人天眼目)'은 숭나라 승려 후이옌 즈자오(晦巖智昭)가 지은 책이름이기도 하다. '인간과 천상 일체가 중생의 안목이 된다'는 뜻이다. '안목(眼目)'은 지혜의 눈을 말한다. 탁현규(간송미술관 연구원)는 이 묵란에 대해 '난은 예서법으로 쳐야 한다던 추사는 팔분예서(八分隸書)로 글씨를 써넣어 난치는 법과 글씨 쓰는 법이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추사가 먹으로 맺은 인연이란 의미로 "추사묵연(秋史墨緣)" 인장을 찍었다.'고 설명했다.  


'세외선향(世外僊香)'


'난맹첩' 11쪽에 실려 있는 '세외선향(世外僊香)'은 '세상 밖 신선의 향기'를 토해내고 있는 혜란과 지초(芝草)를 그린 묵란이다. '지란병분(芝蘭竝芬)'과 같은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화의(畵意)를 지닌 묵란이라고 할 수 있다. 관지는 居士(거사)라고 썼다. 여러 송이의 꽃이 핀 긴 꽃자루와 짧은 꽃자루가 좌하단에서 우상단을 향해 휘어진 그 아래로 넉장의 장엽이 화면을 가르고, 난초 바로 왼쪽에 굳건한 자세로 솟은 큰 지초 중간쯤에서 작은 지초 하나가 기대듯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세외선향' 묵란에는 추사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에 얽인 일화가 있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온 해였다. 추사 나이 64세였다. 당시 30세의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의해 이씨 왕족이 견제를 당하자 이들의 견제와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破落戶, 팔난봉) 행세를 하며 시장의 상인들이나 거리의 무뢰배들과 서슴없이 어울려 난봉꾼처럼 지냈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가를 찾아가 구걸까지 하여 궁(窮)도령이라는 비웃음까지 받았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하응이 추사를 찾아간 것은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척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이하응은 곤궁한 처지에 있던 추사에게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내주었다. 추사와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탄압과 견제를 받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또, 두 사람은 먼 친척뻘이기도 했다. 이하응은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아들,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추사의 11촌 대고모(大姑母)다. 


이하응은 추사에게 난초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니 난보(蘭譜) 하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받고 추사는 이하응에게 난화를 그린 그림책 한 권을 보내주었다. 이하응은 추사가 보내준 난화 중에서 '세외선향'을 똑같은 구도로 임모(臨摸)했다.

석파 이하응의 '난화(蘭花)' 

 

이하응의 난초 그림은 추사의 단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를 그대로 본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묵란뿐만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이하응은 추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이하응이 그림을 열심히 그려 대성하기를 바랐다. 난을 잘 쳤던 이하응은 추사로부터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추사가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되면서 이하응의 그림 공부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하응은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추사가 1852년 8월 13일 67세의 나이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준 사람도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은 유배에서 풀려나 추사가 머물던 과천의 과지초당을 여러 차례 찾아가 난화(蘭畵) 등 그림과 실학(實學)을 배웠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자문을 받기도 했다. 이처람 두 사람의 친밀한 교류는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고 이하응은 둘째 아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이희(李㷩, 1852∼1919)가 왕위에 오르자 조선 왕조 최초로 살아 있는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집권했다. 추사와 대원군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편액이 바로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雲峴宮)의 노안당(老安堂)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老安堂' 편액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 스승을 그리워한 대원군이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든 것이다. 편액 좌측 관지에는 '書爲 石坡先生 老玩(석파 선생을 위해 노완이 쓰다)'이라 적혀 있다. '老玩(노완)'은 추사가 노년에 사용한 별호다.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지만 대원군 같은 제자를 두었기에 추사는 참 행복했을 것 같다. 


'염화취실(斂華就實)'


'염화취실(斂華就實)'은 '난맹첩' 상권의 마지막 아홉째 폭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이 묵란도 혜란을 그린 그림이다. 긴 꽃자루 두 대와 일곱 장의 장엽이 유려하면서도 시원하게 펼쳐진 모습이다. 상단의 화제는 '此爲終幅也, 不作新法, 不作奇格. 所以斂華就實. 居士寫 贈茗薰(이것은 끝 폭이다. 새로운 방법으로도 기이한 격식으로도 그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게 되리라. 거사가 그려서 명훈에게 주다.)'이라고 적혀 있다. '명훈(茗薰)'은 추사의 전담 장황사 유명훈의 자이다. 


'증번상촌장란(贈樊上村庄蘭)', 55cm x 30.6cm, 개인 소장


'증번상촌장란(樊上村庄)'은 1848년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하면서 벗 권돈인을 위해 그려 준 묵란이다. '번상촌장(樊上村庄)'은 번리(樊里, 지금의 강북구 번동)에 있던 권돈인의 별서(別墅, 별장) 이름이다. 이 작품을 받아든 권돈인은 너무도 흡족한 나머지 '蘭香在山房(난향재산방)'이란 시를 지어 화면의 왼쪽 상단에 적었다  


蘭香在山房(난향재산방) - 난초 향기 산방에 가득하네(권돈인)


蘭花蘭葉在山房 (난화난엽재산방) 난초꽃과 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何處秋風人斷腹 (하처추풍인단복) 어디선가 가을바람 사람의 애를 태우네

若道風霜易斷折 (약도풍로이단절) 만약에 바람과 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山房那得長留香 (산방나득장유향) 어찌 오래도록 산방에 향기 남기겠는가


부채그림 '증청람란(贈晴嵐蘭)'


'증청람란(贈晴嵐蘭)'은 '芝蘭並芬(지란병분)'과 나란히 걸려 있다. '증청람란'은 칭나라 옌징으로 떠나는 청람(請嵐) 김시인(金蓍仁)에게 선물로 그려준 선면화(扇面畵, 부채그림)다. 바위틈에서 무성하게 자란 춘란을 그렸다. 상단의 화제에는 '晴嵐將北行矣. 北方無蘭, 特寫此贈之. 是西出陽關無故人之義耳. 阮堂(청람이 장차 북쪽으로 가려 한다. 북방에는 난초가 없으므로 특별히 이를 그려 준다. 이는 '서쪽으로 양꽌을 나서니 친구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 완당)'이라고 적혀 있다.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은 탕(唐)나라 왕웨이(王維)의 '送元二使安西(안시로 가는 위안얼을 보내다)'라는 제목의 시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웨이청의 아침에 비 내리려 먼지를 적시고, 르고 푸른 객사에 버들잎 새로워라. 그대에게 권하여 또 한잔 술을 올리노니, 서쪽으로 양꽌을 떠나면 옛 친구 아무도 없으리)'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위안씨 성을 가진 친구가 안시 지방으로 떠나는 것을 웨이청에서 송별하는 내용이다. 양꽌(陽關)은 중궈(中國) 깐수셩(甘肅省) 뚠황시엔(敦煌縣) 서남쪽에 있는 관문 이름이다. 고대에 서역(西域)으로 통했던 험한 길이다. 이 시는 예로부터 벗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읊은 이별곡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양꽌취(陽關曲)'라고도 한다. 


'소림모정(疏林茅亭)'


'소림모정(疏林茅亭)'은 강변의 산기슭 성긴 숲 속에 띠풀로 지붕을 인 정자를 그린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그림이다. 추사의 '고사소요(高士逍遙)'와 함께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소림모정'은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서화가라면 누구나 즐겨 그린 소재가 바로 '소림모정'이었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을 위해 '소림모정'을 그려 주었고, 허련은 스승인 추사의 남종문인화풍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서 '소림모정'을 그렸다. 청류(淸流) 이의성 李義聲(1775~1883)가 그린 '소림모정'도 있다. 중궈 밍(明)대의 둥치창(董其昌1555~1636), 밍말 칭초의 첸치(沈祁), 칭대의 첸허(陳和)와 팡총(方琮), 왕쉬에하오(王學浩), 첸주융(陳祖永), 화승 훙렌(弘仁), 빠웨이주(巴慰祖)도 '수린마오우(疏林茅屋)' 또는 '수린마오팅(疏林茅亭)'을 그렸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24.9㎝×29.7㎝, 간송미술관 소장


'고사소요도(高士逍遙)'는 추사가 그린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고담하고 아름다운 필선을 사용하여 고상한 기품을 드러낸 작품이다. 마른 붓질로 그리는 갈필법(渴筆法)을 사용한 이 그림에서는 위안(元)나라 문인화풍 이래의 간일(簡逸)한 필치와 원쩡밍(文徵明, 1470~1559), 셴저우(沈周, 1427~1509), 둥치창 등이 즐겨 쓴 수지법(樹枝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고, 별다른 특징도 없다. 고사소요(高士逍遙)란 '뜻이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이다. 화제에서 화가의 인간적 고뇌와 학문적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제주도 또는 북청에서 귀양살이 할 때 추사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추사의 '고사소요도'에 대해 강우방은 '전체적으로 획이 날림이라 너무 가볍다. 나뭇잎의 표현이 난잡하고 억지가 많아 법도에 조금도 맞지 않는다. 나무 네 그루가 유난히 길게 뻗어 오르며 모두 평행을 이룬 것은 졸렬한 구도다. 바위들의 획이 너무 가볍고, 태점(胎占)도 졸렬해 그림 전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선비도 키가 너무 커 허전하다.'라면서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와 함께 위작으로 판정했다. 그는 또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두 점을 제외한 난초 그림이나 산수화도 '그림으로서 기본이 안 돼 있고 엉성하며 필획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거의 다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산수도(山水圖)'


추사의 '산수도(山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고림산수도(枯林山水圖)' 또는 '심산고림도(深山枯林圖)'라고도 한다. 높고 깊은 산속 나뭇잎이 죄다 떨어진 숲을 그린 그림이라 다소 메마르고 거친 느낌을 준다. 갈필법으로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화제는 탕나라 왕웨이(王維)가 지은 오언율시 '過香積寺(꿔샹지스)'의 함련(頷聯) '古木無人逕, 深山何處鐘(고목 사이로 인적도 없는 길, 깊은 산 종소리는 어디서 울리는가)'을 인용했다. 왕웨이의 시에 이어 '탕렌(唐人)의 시의(詩意)를 빌어 등불 아래서 그렸다'는 글이 적혀 있다. 탕렌의 시의를 빌렸다면 낭만적인 기풍이 넘쳐나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화의가 화제를 따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림이다.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 23.5 × 38cm


'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는 1844년 추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이다. 그림의 오른쪽 여백의 '題秋樹白雲圖(제추수백운도)'는 김유근이 쓴 것이다. 1840년 12월 17일에 죽은 김유근이 어떻게 4년 뒤에 그린 그림에 자신의 시를 적을 수 있었을까? 이는 모순이다. '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기 전인 1933~1936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과 예술의 동지였던 추사와 김유근은 한때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추사의 그림에 그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에서 두 사람의 우정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題秋樹白雲圖(제추수백운도) - 추수백운도를 보고 짓다(김유근)


英英白雲(영영백운) 뭉게뭉게 이는 흰 구름

繞彼秋樹(요피추수) 저 가을 나무를 감싸네

從子衡門(종자형문) 누추한 집 그대 따르니

伊誰之故(이수지고) 과연 그 누구 때문인가

山川悠邈(산천유막) 산은 멀고 내는 아득해

昔不我顧(석불아고) 전엔 나 보지도 않더니

何如今者(여하금자) 허나 이제 와서 어떤가

庶幾朝暮(서기조모) 아침 저녁 자주 만나세


'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에 대해 유홍준은 제주도 유배 시절 추사가 살던 '귤중옥(橘中屋)'을 그렸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지만 강우방은 구도에 질서가 없고, 획도 날림이기 때문에 분명한 위작이라고 주장하면서 '문인화라는 것은 서화의 세계에서 함께 가는 것이므로 이 위작 그림으로 위작 글씨가 더욱 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짜임새 없는 그림을 추사가 그렸을 리 만무하다. 유 교수는 새로 발굴한 작품을 다수 추가했다고 하는데, 이 모두가 분명한 위작이다.'라고 강조했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글씨와 그림에 일대 큰 바람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의 바람은 이후 조선의 서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완당 바람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한국 회화사의 대가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였다. 그는 '조선 말기 풍속화와 진경산수 같은 한국적 예술이 흥기하려 할 때, 완당의 출현으로 중국을 모델로 삼은 복고풍이 다시 이는 바람에 우리 민족예술의 불꽃을 꺼버렸다.'고 비판했다. 완당 바람을 부정적 의미로 바라본 이용희와는 달리 유홍준은 완당 바람이 조선의 서화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강우방은 이에 대해 '유 교수는 이를 잘못 이해해 완당 바람이 우리 문단과 예단에 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결국 추사로 인해 다시 중궈를 사대(事大)하게 된 셈이니 불행한 일이었고, 동주 선생은 바로 그 현상을 말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조눌인(曺訥人)에게 보내는 간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눌인(曺訥人)에게 보내는 간찰'은 1838년 서법의 대가인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이 편지는 196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837년 3월 30일 추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의 상중(喪中)이어서 자신을 죄인이라 칭하면서 슬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편지 봉투의 '장동(壯洞)' 이라는 지명은 추사가 유배되기 전에 살았던 한양의 월성위궁(月城尉宮)을 가리킨다.


稽顙 舊臘書存, 尙作新年慰開, 卽惟新正, 靜候迓吉增禧, 不任遠祝, 罪人逢新哀廓如欲無生, 此頑何極, 近連風崇委苦, 運腕甚艱, 悶然, 自入新年, 又作幾幅石庵書, 漢隸字耶? 來紙益見老而彌健, 甚盛, 幸以新年字如干紙, 從方君更寄, 春暢, 卽圖東上, 是禱, 臂疼偏苦,略此不次. 戊戌元月七日 罪人正喜 謝上. 曺訥人 靜史. 壯洞 答疏上.[머리를 조아리며 글을 올립니다. 작년 섣달에 보내신 편지는 그대로 새해의 위문으로 여겨집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를 멀리서 축원합니다. 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슬픈 심정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질긴 목숨이 언제가 다할까요? 근래에는 풍이 와서 팔을 놀리기가 매우 어려우니 답답합니다. 새해 들어 또 석암체(石庵體)의 글씨와 한(漢)나라의 예서체를 몇 장이나 쓰셨는지요? 보낸 글씨를 보니, 나이가 늘수록 더욱 힘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바라건대 새해 들어 쓰신 것 몇 장을 방(方)군 편에 보내주십시오. 봄날이 화창하거든 곧 한양에 올라오도록 하십시오. 기대하겠습니다. 팔이 매우 아파서 이만 줄입니다. 무술(1838) 정월 7일 죄인 정희 올림. 조눌인 선생에게. 장동에서 답장 올림]


조광진의 본관은 용담(龍潭), 자는 정보(正甫)다. 평양에 살았고 벼슬에는 오르지 못했다. '조눌인묘지(曺訥人墓誌)'에 의하면 그는 집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다니며 글씨를 배웠다. 처음에는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고, 만년에는 옌젠칭(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칭나라의 류융(劉墉), 지예(指隷)는 짱따워(張道渥)를 따랐다.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금석기(金石氣)가 보이며 고법(古法)의 임모에 뛰어났다. 조광진은 추사, 신위(申緯)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의 글씨에 대해 추사는 '창아기발(蒼雅奇拔)하고 괴위정특(怪偉挺特)하니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없었다.'고까지 극찬했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눌인서첩(訥人書帖)' 등이 전하며, '근묵(槿墨)', '근역서휘(槿域書彙)' 등에 그의 진적이 보인다.


1817년 웡팡깡이 추사에게 보낸 간찰


1809년(순조 9) 10월 28일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을 떠나 칭나라 서울 옌징으로 향했다. 당시 한양에서 옌징까지는 대략 5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추사 일행은 12월 16일 이후에나 옌징에 도착했을 것이다. 추사는 옌징에서 대학자 웡팡깡(翁方綱), 롼위안(阮元)을 비롯한 여러 학자, 문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인 1810년 2월 1일 추사의 송별연이 옌징의 파위안쓰(法源寺)에서 열렸다. 이때 옹방강의 문인으로 화가였던 주허니엔(朱鶴年)이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그린 '치우싀졘비에투(秋史餞別圖)'가 있어 당시 추사의 옌징 인맥을 확인할 수 있다.   


주허니엔(朱鶴年)이 그린 '추사전별도(秋史餞別圖, 출처 難勝)'

 

주허니엔은 '치우싀졘비에투'를 그린 뒤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와 참석자 이름을 모두 기록해 놓았다. 그림 왼쪽에는 '쟈칭(嘉慶) 경오(1810) 2월 조선 김추사 선생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면서 책을 내놓고 그림을 요구했다. 바빠서 많이 지을 수는 없으나 경치를 보고 그대로 그려 한때 멋진 모임을 기록하다. 함께 모인 사람은 양쩌우(揚州) 롼윈타이(阮芸臺), 빠이쟝(栢江) 리신안(李心庵), 이황(宜黃) 훙지에팅(洪介亭), 난펑(南豊) 탄투이짜이(譚退齋), 판위(番禹) 류싼산(劉三山), 따싱(大興) 웡싱위안(翁星原), 잉산(英山) 진진위안(金近園), 미엔쩌우(綿州) 리무쫭(李墨莊), 양쩌우 주허니엔 등이다.'라는 내용의 화제가 적혀 있다. 추사는 군복을 입고 전립(戰笠)을 쓴 모습이다. 추사는 동지부사로 옌징에 파견된 부친 김노경을 수행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었기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군복을 입어야만 했다. 


롼윈타이는 당대 칭나라 최고의 학자 롼위안(阮元)이다. 웡팡깡(翁方綱)은 송별연에 불참했다. 웡팡깡과 롼위안은 추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칭나라 스승들이었다. 웡팡깡은 추사를 '經術文章海東第一(유학 경전과 문장은 조선에서 최고봉)'이라고 극찬했고, 롼위안을 흠모한 추사는 자신의 호를 완당(阮堂)이라고 지었다


리신안(당시 41세)은 리린숭(李林松)이다. 그는 당시 25세의 추사를 웡팡깡(당시 78세)의 싀무수러우(石墨書樓)로 안내한 사람이다. 리신안은 항상 추사와 동행하면서 옌징의 명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추사는 그를 위해 '走題李心葊梅花小幅詩後(리신안의 메이화샤오푸싀 뒤에 제하다)'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지에팅(介亭)은 훙짠취안(洪占銓)의 호다. 훙짠취안은 웡팡깡이 인정한 제자다. 웡싱위안은 웡팡깡의 아들 웡수쿤이다. 리무쫭은 싀주자이(師竹齋) 리딩위안(李鼎元)이다. 리딩위안은 빠이러티엔(白樂天)의 시구인 '竹解虛心是吾師(마음 비울 줄 아는 대나무는 나의 스승이다)'라는 뜻을 빌려 호를 싀주자이라 하였다. 리딩위안과 동갑이자 절친인 박제가는 리무쫭을 위해 '회묵장(懷墨莊)'이라는 시를 지었다. 주허니엔은 주앙즈(朱昻之), 주번(朱本)과 함께 ‘싼주(三朱)’라 불린다. 추사는 옌징에 있을 때 펀팡지에(粉坊街)의 니타오싀우(擬陶詩屋)로 여러 차례 주허니엔을 방문했다. 그는 중궈의 초상화를 많이 임모하여 추사에게 보내 주었다. 그의 작품으로 '둥포리지투(東坡笠屐圖)'가 전한다.


주허니엔은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싀타오(石濤)의 화풍을 배워 산수화를 잘 그렸다. 옌징에서 추사는 주허니엔과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었다. 추사는 '雅去客來(아거객래)' 행서 대련을 써서 인편으로 옌징의 주허니엔에게 보내 주었다


'雅去客來(아거객래)' 행서 대련, 135 x 32.5cm, 개인 소장


古木曾嶸雅去後(고목증영아거후) 우뚝 솟은 고목 위에 까마귀 떠나가자

夕陽迢遞客來初(석양초체객래초) 아스라한 석양 속에 손님 막 찾아오네


'雅去客來(아거객래)' 대련은 추사가 40대 말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의 큰 글자는 예서에 우양쉰(歐陽詢) 해서체(楷書體)를 가미해서 쓴 행서체(行書體) 글씨다. 이 시기에 이미 웡팡깡체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협서(脇書)의 작은 글씨도 행서체다. 추사체(秋史體) 형성 직전의 글씨체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서체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野雲先生愛此詩意, 屢發於畫藁. 仍以書寄, 爲涵秋閣楹聯. 復宣其義, 作一絶句, 並求指謬.(예윈 주허니엔 선생께서 이 시의 의미를 사랑하여 여러 차례 화실에서 언급하셨습니다. 글씨를 써서 보내니 한치우거 기둥의 대련으로 삼도록 하십시오. 그 의미를 다시 펼치고자 칠언절구 한 편을 지으니 잘못을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寄野雲居士(기야운거사) - 예윈 거사에게(김정희)


古木寒雅客到時(고목한아객도시) 고목에 겨울 까마귀 손님 오려는가

詩情借與畫情移(시정차여화정이) 시정을 빌려 그림정에 옮겨 놓았네

煙雲供養知無盡(연운공양지무진) 연운 공양은 끝이 없음을 알았으니

笏外秋光滿硯池(홀외추광만연지) 홀 밖의 가을빛 벼루못에 가득하네


연운공양(煙雲供養)은 본래 도가(道家)에서 음식물을 멀리하고 기(氣)를 섭취하여 장생불사를 기원하는 뜻으로 쓰였다. 후대에는 산수화를 감상함으로써 성정(性情)을 도야하고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先生藏有古牙笏宋蘭亭硯, 硯背刻蘇齋玉枕小字. 較之陳香泉本, 更佳, 酷肖定武. 天東金正喜懸臂學書.[선생은 꾸야후(古牙笏)와 숭나라 란팅옌(蘭亭硯)을 가지고 있다. 벼루 뒷면에는 쑤자이(蘇齋, 웡팡깡의 호)가 '위젠(玉枕)'이라고 쓴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샹취안(香泉) 첸이시(陳奕禧)가 쓴 글씨와 비교해 보면 더욱 좋다. 우양쉰(歐陽詢)의 띵우번(定武本) 란팅수(蘭亭序)글씨와 흡사하다. 조선의 김정희가 현비법(懸臂法)으로 글씨를 쓰다.)


인장은 '秋史(추사), 朝鮮國人(조선국인), 金正喜印(김정희인), 內閣學士(내각학사)' 등 모두 6과가 찍혀 있다. 첸이시(陳奕禧)는 칭대 서예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진싀이원루(金石遺文錄)', '춘우탕지(春霧堂集)'가 있다. 현비법(懸臂法)은 팔을 크게 휘둘러 글씨를 쓰는 집필법(執筆法)이다. 


1810년 2월 초 옌징을 떠난 추사 일행은 3월 17일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공(李玜, 1790∼1834)에게 귀국 보고를 했다. 추사는 귀국한 뒤에도 칭나라 학자들과 편지를 통해서 교류를 계속 이어갔다. 인편을 통해서도 책이나 서화, 탁본, 붓, 먹, 종이 등의 선물들이 오갔다. 1811년 웡팡깡의 둘째 아들 웡수뻬이(翁樹培)가 죽었다. 웡수뻬이는 고전학(古學)에 밝아서 '취안비후이카오(泉幣彙攷)' 12권을 저술하였는데, 추사에게 자신의 저서를 기증하는 한편 고전(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전해 주었다. 


추사는 1812년에도 왕세자의 책봉을 주청하는 사신으로 옌징에 갔다가 웡팡깡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해 6월 3일 웡팡깡은 추사의 생일을 기리며 제자 주허니엔을 시켜 추사와 생일이 같은 숭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인 우양시우(歐陽, 1007~1072)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우양시우 초상화


우양시우는 유교 원리를 통해 정계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탕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위(韩愈)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평이하고 간결한 고문체(古文體) 부흥에 힘썼다. 그는 '우다이싀지(五代史記)'와 '신탕수(新唐書)'를 통해 전통 역사서의 형태와 범위를 확충했다. 탕나라 한위, 류중위안(柳宗元), 숭나라 쑤쉰(蘇洵), 쑤둥포(蘇東坡), 쑤쩌(蘇轍), 쩡궁(曾鞏), 왕안싀(王安石)와 함께 탕숭(唐宋) 팔대가(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1813년은 웡팡깡이 79세 되는 해였다. 추사는 웡팡깡의 80수를 미리 축하하며, 인삼이 든 보약재와 함께 '무량수경(無量壽經)'과 '남극수성(南極壽星)'을 써서 선물로 보냈다. 이에 웡팡깡은 '如松柏之有心 而忠信以爲寶(루숭바이즈여우신 얼쭝신이웨이바오)' 행서 대련과 '싀안(詩盫)' 글씨를 답례로 보내왔다. 송백처럼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변치 않는 추사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뜻이었다. 


1815년 웡팡깡의 여섯째 아들 웡수쿤(翁樹崑)이 죽었다. 웡수쿤은 추사와 동갑으로 서로 깊은 친교를 맺고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금석문을 매우 좋아했던 웡수쿤은 추사의 '치우(秋)'자와 자신의 자 싱위안(星原)에서 '싱(星)'자를 따서 별호를 '싱치우(星秋)'라고 지었다. 신위와도 교류했던 웡수쿤은 서재 이름을 자신의 별호에 신위의 호 자하의 '하(霞)'자와 유최관(柳最寬)의 호 정벽(貞碧)의 '삐(碧)'자를 더해 '싱치우샤비짜이(星秋霞碧齋)'라고 지었다. 추사와 절친했던 신위와 유최관은 함께 1812년 옌징에 갔을 때 추사의 소개로 웡팡깡과 웡수쿤을 만났다. 이들은 귀국해서도 웡수쿤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웡수쿤의 아들 웡인따(翁引達)는 17세 때 추사를 의부로 삼고 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추사는 웡인따가 마약에 빠져 웡팡깡의 보물창고인 싀무수러우의 진품들을 옌징 류리창(琉璃廠)의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끼던 웡수쿤이 죽고, 웡인따가 마약에 빠지자 웡팡깡은 자식에게 못다한 정을 추사에게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16년 추사 나이 31세 때 웡팡깡은 장문의 편지와 함께 자신의 '푸추짜이원지(復初齋文集)' 초인본 12책과 '싀저우싀화(石洲詩話)' 2권을 비롯해서 '쑤자이삐지(蘇齋筆記)' 2권, 짜오멍푸(趙孟頫)의 '티엔꽌산티융(天冠山題詠)' 진적 석본 등 많은 책과 금석문 탁본을 선물로 보내왔다. 추사는 이에 감사하며 답례의 선물로 '퇴계집(退溪集)', '율곡집(栗谷集)'과각종 탁본, 인삼 등을 웡팡깡에게 보내주었다. 


웡팡깡은 추사가 귀국하자 편지로 학문을 지도했다. 웡팡깡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1815년 1월 발송된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모두 5통이 확인되었다. 


제1봉은 추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1815년 10월 11일자와 14일자 두 통의 편지다. 제1봉에는 경학과 훈고학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어 한숭절충론(漢宋折衝論)을 견지한 웡팡깡의 학술 경향이 추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웡팡깡은 83세, 추사는 30세였다. 제1봉의 내용은 웡팡깡의 문집인 '푸추짜이원지' 제22권에 '따진치우싀(答金秋史)'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2봉은 1816년 1월 25일 84세의 웡팡깡이 31세의 추사에게 보낸 1,800자에 이르는 장문의 서찰이다. 추사는 스승의 편지를 감격스럽게 읽고 나서 곱게 표구한 다음 웡팡깡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4언절구로 표현한 글귀를 써 붙였다.


覈實在書(핵실재서)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窮理在心(궁리재심) 이치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攷古證今(고고증금) 옛 것을 살펴 현재를 증명하니
山海崇(산해숭심) 산처럼 높고 또 바다처럼 깊네

별봉 편지(別封簡札)라는 것도 있다.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는 제2봉과 제3봉 사이인 1817년 10월경에 웡팡깡이 추사에게 별봉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했다. 별봉 편지에는 경학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정성어린 가르침이 들어 있다. 교감을 마친 '쑤자이삐지(蘇齋筆記)'를 보낸다는 내용과 함께 보내준 인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저시치파이(折西詞派)의 창시자 주이준(朱彛尊)의 '까오리산거(高麗葠歌)'를 본딴 시를 지어 보내겠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금석문을 주고받은 구체적 내용도 적혀 있다.

제3봉(서울대학교 도서관 귀중본실)은 1817년 10월 27일 웡팡깡이 추사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웡팡깡의 나이 85세, 추사 나이 32세 때였다. 웡팡깡의 제자가 만든 시전지(詩箋紙)에 쓰여 있는 이 편지는 추사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경학에 대한 고증학적 논증은 정밀하고도 심오하다. 추사에게 자신의 미간 저서를 정서해서 보냈음을 알려주는 내용, 추사가 보내준 고려인삼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들어 있다. 이처럼 웡팡깡의 편지에는 학문과 예술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한 스승의 두터운 정이 담겨 있다. 

제3봉 편지를 쓴 이듬해인 1818냔 웡팡깡은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들은 추사는 남산에 올라 잠두봉 쪽에 머리를 두고 스승을 기리며 통곡했다. 당대 최고의 스승을 잃은 추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사는 또 다른 스승 롼위안으로부터도 경학과 금석학, 서화에 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가 옌징에 간 것은 어쩌면 롼위안을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추사는 옌징에 가기 전에 중궈 쟝난(江南) 양쩌우 명문가 출신으로 칭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은 정치가이자 대학자 롼위안을 잘 알고 있었다. 롼위안도 추사를 만나자마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추사가 귀국한 뒤 롼위안은 추사의 제자 이상적이 옌징에 사신으로 오자 자신의 아들 롼창셩(阮常生)을 통해 칭나라 고증학을 방대하게 정리한 '황칭징지에(淸經解)' 1,400여 권을 추사에게 보내 주었다. '황칭징지에'는 뒤에 나온 왕셴치엔(王先謙)의 속편과 함께 칭대 고증학의 정수로 꼽힌다. 

롼위안이 추사와 가까운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천 권이 넘는 책을 보내려고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일천 권이 넘는 책'은 '황칭징지에'를 가리킨 것이다. 이 편지에는 추사체에 지대한 영향을 준 '타이화뻬이(泰華碑)', '티엔파션첸베이(天發神讖碑)'도 동봉하니 추사에게 전해달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롼창셩도 1829년 추사와 '황칭징지에'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롼위안과 롼창셩 부자와의 인연으로 추사는 중궈 쟝난 롼위안 문하의 저명인사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김정희가 완당이라는 호를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라고 볼 수 있다. 김정희는 22세 연상의 롼위안으로부터 경학과 금석학, 서화를 배우고 조선에서 칭차오쉬에(淸朝學)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스승 롼위안을 존경하고 추종하는 뜻에서 김정희는 자신의 호를 롼위안(阮元)의 '완(阮)'자를 따서 완당(阮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추사보다 완당이란 호를 더 사랑하였다.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의 관지에도 완당이란 호를 쓴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롼위안은 추사에게 실사구시와 평실정상(平實精詳)의 자세로 학문을 닦으라는 간곡한 가르침을 주었다. 왕씨순(汪喜孫)은 롼위안에게 '황칭징지에'에 관한 글 한 편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롼위안은 '쉬에하이탕(學海堂)에서 "황칭징지에"의 판각이 이미 완성되어 관찰사 하수서가 서문을 써서 내게 보내며 바로잡아줄 것을 청하므로 약간 첨삭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 "더욱 평실정상(平實精詳)함을 본다"라는 말을 덧붙였다.'라고 글머리를 썼다. 평실정상은 경전을 해설함에 있어 평이하고 실질적이며,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는 것이 요체라는 뜻이다.  

추사는 옌징에서 예즈셴(葉志詵)을 비롯해서 우숭량, 왕씨순, 류시하이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오숭량은 웡팡깡의 문인으로 금석문 연구에 정통하였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는 웡수쿤과 예즈셴을 통해서 추사의 인물됨과 학예를 흠모했다. 예즈셴은 웡팡깡이 특히 아꼈던 제자다. 웡팡깡 사후에도 싀무수러우를 홀로 지키면서 사제간의 인연을 변함없이 이어갔던 예즈셴은 옌징에서 추사의 부친 김노경, 아우 김명희, 친구 권돈인을 환대하고 깊은 학연을 맺기도 했다. 금석문에 대한 취미도 대단하여 추사를 비롯한 지우들에게서 금석자료를 구해 '까오리뻬이취안원(高麗碑 全文)' 4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왕씨순은 추사와 교유했던 옌징학계의 일원 중 한 사람이다. '황칭징지에'가 1828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왕씨순이 권돈인에게 보낸 글에서 확인된다. 유시하이는 예즈셴, 리장위(李璋煜)과와 친밀하였으며, 조선의 고비(古碑) 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추사와 돈독한 교유를 가졌다. 그는 금석을 좋아하여 훗날 추사가 보낸 금석문을 모아 우리나라 금석문집인 '하이둥진싀위안(海東金石苑)'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