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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5)

林 山 2019. 7. 2. 17:46

2층 전시실 밖 복도에는 추사의 서명(署名)을 비롯해서 성명인(姓名印)과 자호인(字號印), 별호인(別號印), 수장인(收藏印), 심정인(審定印), 명구인(名句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인보에 의하면 편지에 쓰는 수결(手決, 사인), 편지 봉투에 찍는 봉함인(封緘印), 이름을 새긴 성명인, 호를 새긴 호인(號印), 책과 그림에 찍는 수장인 등 추사의 인장은 무려 180개나 된다고 한다. 


추사 서명(署名)과 수결(手決)


서명(署名)은 누군가의 이름, 가명, 또는 누군가가 문서에 기록했다는 증거, 자기 동일성을 위한 표시로 손으로 쓴 것을 말한다. 사인(sign)이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수촌(手寸)이라 하여 손의 외형에 따라 그림으로써 문맹자의 서명을 대신하였다. 수촌을 할 때 남자는 가운뎃손가락만 그리거나 여자는 새끼손가락만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수촌은 조선 시대 노비들의 수결(手決)이었다.


수결은 조선시대 관직에 있는 사람만 쓰던 부호다. 수결은 ‘一心’ 두 글자를 담고 있어야 한다. 수결의 방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해서 ‘一心’ 두 글자를 내포한다. 수결은 사안(事案) 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하는 공심(公心)에 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써 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일심결(一心決)의 수결제도는 없고 서압만 있다. 


'秋史金正喜'는 추사의 대표적인 서명이다. 추사가 한글 편지에 사용한 서명은 '뎡희(정희)', 한글 편지 봉투에 사용한 서명은 그의 자인 '元春'이다. 추사는 한글 편지에 수결도 사용했다. 


추사 성명인(姓名印)과 자호인(字號印)


추사의 성명인에는 '金正喜印(김정희인)' 외에 '正喜(정희)', '古鷄林人(고계림인)'이 있다. '고계림인'은 옛 경주(慶州) 사람이라는 뜻이다. 계림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추사의 관향(貫鄕)이 경주임을 알 수 있다.


추사의 자호인에는 '秋史(추사)', '阮堂(완당)', '三十六鷗草堂(36구초당)' 외에 '元春(원춘)', 老阮(노완)', '阮堂秋史(완당추사)', '寶覃齋印(보담재인)', '星秋霞碧之齋(성추하벽지재)' 등이 있다. '추사'라는 호의 연원과 뜻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은 없다. 하지만 웡팡깡(翁方綱)의 친구 쟝더량(江德量)의 호가 치우싀(秋史)였음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완당'은 칭(淸)나라의 대학자 롼위안(阮元)을 훔모한 나머지 자호한 것이다. '36구초당'은 36마리의 갈매기가 날아드는 초당이라는 뜻이다. 말년에 쓰던 호다. '원춘'은 추사의 자다. 추사가 20살이 되면서 성인식을 할 때 받은 이름이다. '원(元)'은 그가 장남이기에 쓴 것이고, '춘(春)'은 그의 이름 '정(正, 喜는 돌림자)'이 봄을 뜻하기에 쓴 것이다. 자의 끝자 춘(春)과 호의 첫자 추(秋)는 서로 어울려 역사를 나타내는 춘추(春秋)가 되는 의미가 있다. '노완'은 늙은 완당이라는 뜻이다. '완당추사'는 완당과 추사를 합친 호다. '보담재'는 스승 웡팡깡을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뜻이다. 


'성추하벽지재'는 웡팡깡의 6남 싱위안(星原) 웡수쿤(翁樹崑)과 추사(秋史), 자하(紫霞) 신위(申緯), 정벽(貞碧) 유최관(柳最寬)의 우정을 기리는 서재라는 뜻이다. 웡수쿤은 추사의 소개로 자하 신위와 정벽 유최관을 알게 되자, 자신의 서재에 ‘星秋霞碧之齋(싱치우샤삐즈짜이)’라는 편액을 걸기도 했다. '星秋霞碧(싱치우샤삐)'는 웡수쿤의 자 '星原', 김정희의 호 '秋史'에서 각각 앞글자, 신위의 호 '紫霞', 유최관의 호 '貞碧'에서 각각 끝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웡수쿤에게 추사와 신위, 유최관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추사 자호인(字號印)


'小蓬萊學人(소봉래학인)'은 추사가 옌징(燕京, 베이징)에 갔을 때 스승 웡팡깡의 서재 '石墨書樓(싀모수러우)'를 본 뒤부터 쓴 아호다. 웡팡깡은 '싀모수러우'에서 이상향인 '蓬萊(펑라이)'를 꿈꾸고 있었다. 웡팡깡의 '펑라이'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추사는 자신의 아호를 '소봉래학인'으로 지었다. 추사에게 칭(淸)의 웡팡깡위안(元)의 趙孟頫(짜오멍푸), 숭(宋)의 쑤둥포는 봉래의 신선(蓬萊神仙)이었다. 옌징에서 돌아온 추사는 예산 화암사(華巖寺) 뒤편 오석산(烏石山) 쉰질바위에 '小蓬萊(소봉래)' 암각문을 새겨놓고, 봉래를 꿈꾸며 '소봉래학인'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右史氏(우사씨)', '今文之家(금문지가)', '東夷之人(동이지인)', '東方有一士(동방유일사)', '東海循吏(동해순리)', '東海第一通儒(동해제일통유)', '丙午老人(병오노인)', '髥(염)'도 자호인이다. '우사씨'는 추사가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지낸 것과 연관된 아호다. 중궈에는 고대부터 주어싀(左史)와 여우싀(右史)라는 사관이 있었다. 주어싀는 군주의 말(言)을 기록하고, 여우싀는 군주의 행동(行)을 기록했다. 이것이 각각 '샹수(尚书)'와 '춘치우(春秋)'가 되었다. 조선시대 예문관 검열은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관원이었다. 


'금문지가'는 추사가 한대(漢代)에 통용되던 예서(隸書)에 능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아호다. '동이지인'은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콩치우(孔丘)의 후손 콩빈(孔斌)이 쓴 '뚱이리에쫜(東夷列傳)'에 '띠순(帝舜)은 지극한 효자로 띠야오(帝堯)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이 분이 바로 뚱이즈렌(東夷之人)이다'라고 했다. 추사 자신도 띠순 같은 인물이라는 자긍심이 엿보이는 아호다. '동방유일사'는 뚱진(东晋) 타오위안밍(陶渊明)의 연작시 '니구(擬古)'의 5번째 시 첫구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로부터 동쪽 나라에는 훌륭한 선비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東方有一士(뚱팡여우이싀)는 타오위안밍이 이상으로 삼은 선비였을 것이다. 추사는 그런 선비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해순리'는 조선의 선량한 관리라는 뜻이다. 순리(循吏)는 법을 잘 지켜 백성들을 위하는 관리, 순량한 벼슬아치를 말한다. '동해제일통유'는 조선 최고의 학자라는 뜻이다. 자긍심이 충만한 아호다. 통유(通儒)는 세상일에 통달(通達)하고 실행력(實行力)이 있는 유학자(儒學者), 여러 학문과 각종 경서에 널리 통달한 학자를 말한다. '병오노인'은 병오년생 노인, 병오년 회갑 노인이라는 뜻이다. 추사가 태어난 1786년, 회갑을 맞이한 1846년은 병오년이었다. '염'은 수염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추사 초상화를 보면 수염이 풍성하다. 


추사 별호인(別號印)과 수장인(收藏印), 심정인(審定印)


추사는 별호인(別號印)도 있다. 별호인은 어떤 사람의 별호를 인장에 새긴 것이다. 중궈나 조선에서는 호가 널리 쓰였으며, 여러 개의 별호를 가진 경우도 많았다. 추사의 대표적인 별호에는 '禮堂(예당)'이 있다. '예당'은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을 말한다. 조선시대 예조 당상관은 정2품 판서(判書), 종2품 참판(參判), 정3품 참의(參議) 등 3인이었다. 추사는 당상관인 예조 참의를 지냈다. 


추사에게는 '紅豆(홍두)'라는 특이한 별호가 있다. '홍두'는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5∼1849) 이환(李奐)과 관련이 있는 별호다. 헌종의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 향천(香泉)이다. 헌종은 호 외에도 매화계관(梅花溪館), 완향루(浣香樓), 홍두음관(紅豆吟館), 보소당(寶蘇堂), 소당(蘇堂) 등을 별호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의 별호 보소당과 소당은 쑤둥포를 숭상하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헌종도 쑤둥포의 광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두'는 헌종의 별호에도 들어 있다.   


헌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추사에게 글씨를 써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추산는 병환 중이라 글씨를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왕명인지라 거역하지 못하고 '木連理閣(목연리각)'과 '紅豆(홍두)' 두 편액을 써서 올렸다. '목연리'는 두 가지가 이어져 하나가 되는 나무를 말한다. 제왕의 덕이 천하에 넘쳐 흐르면 목연리가 생겨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를 잘하라는 뜻이었다. '홍두'는 상사수(想思樹)의 선홍색 열매다. 


예로부터 중궈에서 '紅豆(홍떠우)'는 이별할 때 잊지 말자는 징표로 주곤 했다. 홍떠우는 탕나라 왕웨이(王維)의 황띠(皇帝)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우언(寓言)에 담은 '샹시(相思)'라는 시에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밍말칭초의 정치가 쳰쳰이(錢謙益)는 망한 밍나라에 대한 심경을 읊은 시집에 '紅豆(홍떠우)'란 이름을 붙였다. 웡팡깡의 아들이자 추사의 동갑 벗인 웡수쿤의 호도 홍떠우였다. 헌종은 이를 자신의 인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웡팡깡은 추사나 신위 등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이별할 때는 홍떠우를 선물로 주곤 했다. 조선의 문인, 학자들은 옌징에 가서 칭의 대학자 웡팡깡으로부터 홍떠우를 받아오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다. 홍떠우를 받았다면 웡팡깡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추사의 소개로 웡팡깡을 만난 이조묵(李祖默, 1792∼1840)도 홍떠우를 받았다. 이처럼 추사가 쓴 '홍두'에는 헌종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마음, 그리고 큰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칭의 조정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한 스승 웡팡깡을 애석해 하는 마음, 그런 스승을 그리는 마음 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佛奴(불노)', '靜禪(정선)', '羼提居士(찬제거사)', '南撫三寶(나무삼보)', '龍丁(용정)', '惕闇(척암)' 등도 추사의 별호인이다. '불노'는 부처의 종이니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추사의 제자 조희룡(趙熙龍)도 '불노'를 별호로 썼다. 추사는 학문이나 사상, 인간관계에 있어서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유학자였던 그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추사는 서자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역관이나 화원 출신 중인들을 제자로 두었으며, 당시 천민에 속했던 승려들과도 스스럼없이 교유했다. 


추사는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능엄경(楞嚴經)' 등 대승경전은 물론이고 '아함경(阿含經)'과 들숨날숨 명상법을 위주로 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도 공부했다.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전등록(傳燈錄)'을 구하여 보내주기를 청한 바 있다. 그는 또 불교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종경록(宗鏡錄)' 100권을 구하여 읽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불교의 세계관에 심취하여 불경을 구하여 읽으면서 불교를 공부한 결과 추사는 쟁쟁한 선사들과 논변하고, 승려들을 평가할 정도까지 되었다. 추사와 백파선사(白坡禪師, 1767~1852) 사이에 오간 선(禪)에 대한 논변은 유명하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한 추사는 70세에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발우공양하고 자화참회(刺火懺悔)하면서 불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자의 삶을 살았다.


'정선'도 불교적인 별호다. 참선(參禪)에는 정선(靜禪)과 동선(動禪)이 있다. 정선은 고요하게 선정에 드는 것이다. 동선은 움직이면서 집중하는 선법이다. 기공(氣功)이나 선문태극권(禪門太極拳) 등은 동선이라고 할 수 있다. 


'찬제거사'도 불교와 관련된 별호다. '찬제(羼提)'란 범어 ksanti의 음역이다. 마음을 안정시켜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는 수행을 말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 이상경인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수행법이다. 육바라밀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선정바리밀(禪定波羅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육바라밀 가운데 찬제는 세 번째 바라밀에 해당된다.


'천제거사'란 별호는 추사가 한시 역사에서 신운설(神韻說)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한 칭나라 초의 시인 왕싀젠(王士禛)을 흠모해서 지은 것이다. 일본의 동양문고에 왕싀젠의 시를 추사가 수정(手訂)한 것을 구한말의 장서가 심의평(沈宜平)이 베낀 '정화선존(精華選存)'이란 책이 있다. 수정이란 손수 가려뽑고 원문의 글자에 오류가 있으면 정정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정화선존'은 추사가 왕싀젠의 시를 얼마나 사랑했고, 또 그의 감식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왕싀젠은 자가 이샹(貽上), 쯔젠(子眞)이고, 호는 롼팅(阮亭), 위양샨렌(漁洋山人)이다. 그는 또 찬티쥐싀(羼提居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왕싀젠이 죽은 후 칭나라 용정띠(雍正帝)의 이름인 인젠(胤禛)을 피하여 왕싀쩡(王士正) 또는 왕싀쩡(王士徵)이라고 고쳤다. 그 후 쳰롱띠(乾隆帝)가 왕싀젠(王士禎)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영조(英祖) 이금(李昑) 때 요절한 시인 이언진(李彦瑱, 1740~1766)도 찬제거사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언진도 왕싀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무삼보'도 불교 색채가 강한 별호다. 불교에 있어서 삼보(三寶)는 불(佛), 법(法), 승(僧)이다. 그러니까 불, 법, 승 삼보에 귀의(歸依)한다는 의미다. '용정'은 임금의 은총을 받은 신하라는 뜻이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자 추사는 그 기쁨을 헌종의 은총으로 돌리는 뜻에서 이 별호를 썼다. '척암'은 삼가 두려워하고(惕), 어두움(闇)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正喜校讀(정희교독)', '正喜讀本(정희독본)' 등은 추사의 수장인(收藏印)이다. 수장인은 글씨나 그림, 책 등의 수장을 확인하는 수장가의 인장이다. '정희교독'은 김정희가 교정을 보고 있는 책, '정희독본'은 김정희가 읽고 있는 책이란 뜻이다. 


'東卿秋史同審定印(동경추사동심정인)', '金正喜攷藏金石文字(김정희고장금석문자)' 등은 추사의 심정인(審定印)이다. 심정인은 감식을 해서 진위 여부를 밝힌 인장이다. 추사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궈의 회화사와 서예사를 통달하고 있었다. '동경추사동심정인'은 웡팡깡의 사후 싀모수러우의 뒷일을 맡은 둥칭(東卿) 예즈셴(葉志詵)과 함께 자세하게 감정하고 보증을 한다는 뜻으로 찍었던 인장이다. '김정희고장금석문자'는 김정희가 고찰하고 간직한 금석문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추사는 동아시아 미술사와 금석문에 있어서 당대의 석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 명구인(名句印)


추사는 자호인도 많았지만 명구인도 많았다. '家香牋記(가향전기)'는 '집안을 향기롭게 하는 편지', '吟自在詩(음자재시)'는 '나의 시를 읊다'는 뜻의 명구인이다. '吟自在詩(인쯔자이싀)'는 베이숭(北宋)의 학자 캉지에(康节) 샤오융(邵雍)의 '웡여우인(甕牖吟)'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샤오융의 시 '웡여우인'에 '當中和天, 同樂易友. 吟自在詩, 飲歡喜酒.(이 태평스러운 시절을 만나 편안한 벗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니 읇조림은 저절로 시를 이루고, 마시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술이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不計工拙(불계공졸)'은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 정교하고 아니고를 가리지않는다'는 뜻이다. '매우 정교한 것은 겉으로 졸렬하게 보인다, 대현(大賢)은 우자(愚者)처럼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통하는 말이다. '불계공졸'은 추사가 작품 첫머리에 찍는 두인(頭印)으로 사용했던 명구인이다. 


'經經緯史(경경위사)'는 '경전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는다'는 뜻의 명구인이다. '경경위사'는 '前經後史(전경후사)'와도 뜻이 통한다. 즉, 고전을 읽을 때는 경전을 먼저 읽고, 역사책을 나중에 읽어야 균형 잡힌 사고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士大夫當有秋氣(사대부당유추기)'는 '사대부는 마땅히 가을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의 명구인이다. 추기(秋氣)는 숙살(肅殺)하는 기운이다. 사대부 또는 독서인은 추상(秋霜) 같은 기개, 가을 서리 같은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率眞(솔진)'은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정직하다', '我念梅花(아념매화)'는 '나는 매화를 생각한다', '沈思翰藻(침사한조)'는 '선현들의 시문(詩文)을 깊이 생각한다'는 뜻의 명구인이다. '한(翰)'은 '붓이나 글, 문서, 편지', '조(藻)'는 '문채가 있는 문장, 아름다운 표현'을 뜻한다. '해당화하희아손'은 대전(大篆)으로 새긴 명구인이다. '海棠花下戱兒孫(해당화하희아손)'은 '해당화 꽃 아래에서 손자와 노닐고 있다'는 뜻이다. 


추사 명구인(名句印)


'石人前石橋(석인전석교), 邊六角黃牛(변육각황우), 二頃田帶經(이경전대경), 躬耕三十年(궁경삼십년)'은 추사가 자신의 오언절구를 새긴 명구인이다. '돌다리 앞에는 돌장승, 옆에는 한 쌍의 누렁소, 두 이랑 밭 경전을 끼고, 몸소 갈아온 지 서른 해일세'로 풀이할 수 있다. '芙蓉秋水比隣居(부용추수비린거)'는 '부용꽃 핀 가을 물 근처의 집'이란 뜻이다. '아념매화'처럼 맑은 향취가 느껴지는 자연친화적인 명구인이다. '遊於藝(유어예)'는 콩쯔(孔子)의 '룬위(论语)' 제7편 '슈얼(述而)'에 나오는 구절이다. '슈얼'에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콩쯔가 말씀하시기를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닐어야 한다'고 했다. '유어예'는 육예(六藝)를 배운다는 뜻이다. 육예는 '저우리(周禮)'에서 말하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여섯 가지다. 예절, 음악, 국궁 또는 양궁(사격), 승마, 문학(글), 역학(천문학)에 두루 능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中鋒(중봉)'은 '붓을 반듯하게 잡아야 한다'는 필법을 새긴 명구인이다. '중봉'은 행필(行筆)에 있어 필봉(筆鋒)이 획의 정중간을 점하고 가는 필법, 즉 획의 진행 방향과 붓결이 일치하므로서 붓끝이 획의 중간에 위치하도록 하는 필법이다. 따라서 '중봉'은 서예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중봉'을 정봉(正鋒)이라고도 한다. '痛飮讀離騷(통음독이소)'는 '속이 쓰리도록 술을 마시고 이소를 읽는다'는 뜻이다. '리싸오(離騷)'는 중궈 짠궈싀다이(戰國時代) 때 추(楚)나라 취위안(屈原)이 쓴 푸(賦)다.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은 왕을 근심하고, 참소와 아첨이 난무하는 정치 현실에 비분강개한 취위안이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장편의 시가 바로 '리싸오'다. 


'壽如金石(수여금석)'은 '쇠나 돌처럼 장수를 누리리라'는 뜻, '長宜子孫(장의자손)'은 '자손들이 길이 번창하리라'의 뜻을 가진 명구인이다.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세 점의 청동거울이 발견되었다. 바로 '청동신수경(靑銅神獸鏡, 국보 제161호)',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국보 제161-2호)', '수대경(獸帶鏡, 국보 제161-3호)'이다. '청동신수경'에 '尙方佳竟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 飢食棗 壽如金石兮(상방의 아름다운 거울 참으로 크게 좋구나. 하늘의 신선은 늙지 않고 목마르면 맑은 샘물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어 쇠와 돌처럼 오래 살리라)'는 장생불사의 신선사상 명문(銘文)이 들어 있다. '청동신수경'은 한대(漢代) 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을 모방한 것이고, '의자손수대경'은 한대 수대경(獸帶鏡) 계통의 복제품이다. 추사는 한대 청동거울의 명문을 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제시대인 1915년경에는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 낙랑묘(樂浪墓) 제204호분에서 청동거울 '장의자손명내행화문경(長宜子孫銘内行花文鏡)'이 출토되었다. 이 청동거울의 내경(內徑)에는 '長宣子孫(오래도록 널리 자손이 번창하네), 외경(外徑)에는 '壽如金石 佳且好兮(금석처럼 오래 살고, 아름다워서 또한 좋으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청동거울에는 '장의자손'과 '수여금석'이 대를 이루면서 명문에 새겨진 경우가 많다.


'寸心千古(촌심천고)'는 '마음은 길이길이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려말선초의 은사(隱士)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우왕(禑王)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귀양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해서 쓴 시에 '寸心千古不遷移(마음만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란 구절이 있다. 탕나라 때의 대시인 뚜푸(杜甫)의 '어우티(偶題)'란 시에 '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문장은 천고에 남을 일, 그 득실은 마음만이 안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뚜푸가 역대 문장의 여러 가지 잘잘못을 하나하나 자세히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읊은 것이다. 


'子孫世寶(자손세보)'는 '자손 대대로 전해 줄 보배'라는 뜻이다. 자손 대대로 전해 줄 보배는 무엇일까? 바로 서적이다. 따라서 '자손세보'는 명구인이자 장서인(藏書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손세보'를 '자손은 대대로 보배'라고 풀이하면 명구인이다.


2019.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