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3 - 과천 추사박물관 (7)

林 山 2019. 8. 9. 16:17

'완당탁묵(阮堂拓墨)'은 추사의 사후에 허련이 스승을 기리고자 만든 탁본첩이다. 허련 외에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좋아한 사람들이 만든 '완당탁묵'도 있다. 허련은 1877년 3월부터 전라도 남원의 선원사(禪院寺)에서 추사의 서화를 목판에 판각했다. 탑본첩의 앞머리에는 추사를 쑤스(蘇軾)에 빗댄 초상이 실려 있다. 이는 제주에 유배되었던 스승 추사를 하이난따오(海南岛)에 유배되었던 탕숭 팔대가 중 한 사람인 쑤스와 동일시한 것이다. 허련은 그만큼 스승 추사를 존경하고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완당탁묵(阮堂拓墨)


'완당탁묵'에는 칭나라의 '수이셴화푸(水仙花賦)'와 함께 '몽당붓으로 아무렇게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여기에 실려 있다. 한겨울의 추위를 견뎌내고 12월에서 3월 사이에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 빼어나다’고 추사는 찬탄했다. 추사는 바로 그런 수선화의 모습을 사랑했다. 


후징(胡敬)의 水仙花(수이셴화푸)와 수선화 그림

 

水仙花(수이셴화푸) - 후징(胡敬)


一點冬心朶朶圓 (이티엔뚱신뚸둬위안) 하나의 점 겨울 마음은 송이송이 둥글어라/品於幽澹冷雋邊 (핀위여우딴렁쥔삐엔)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 냉철하고 또 빼어나/梅高猶未離庭砌 (메이까오여우웨이리팅치) 매화 고상하다지만 뜨락 아직 못 면했는데/淸水眞看解脫仙 (칭수이쩬칸지에투어셴) 맑은 물에 해탈한 신선을 정말로 보는구나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수선화를 보면서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을 지녔다고 찬탄하는 시다. 매화는 뜨락 안에 머물지만 해탈한 신선처럼 보이는 수선화는 맑은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란다고 읊고 있다.


수선화는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수선화를 금잔옥대(金盞玉臺), 여사화(女史花), 설중화(雪中花) 등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금잔옥대는 금으로 만든 술잔과 옥으로 만든 잔대란 뜻이다. 수선화의 생김새가 노란 꽃은 금잔 같고, 하얀 꽃잎은 옥잔대 같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설중화는 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도에서는 수선화를 몰마농꽃이라고 부른다.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궈에서는 수선화를 링보셴(凌波仙)이라고도 한다. '싼궈즈(三國志)'에 나오는 차오차오(曹操)의 아들 차오즈(曹植)가 사모한 절세미인 쩬지(甄姬)의 일화가 있다. 차오즈는 형인 차오피(曹丕)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쩬지를 황후로 삼는 바람에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황후가 된 쩬지는 잠을 잘 때 늘 옥베개를 베고 잤다. 쩬지가 죽자 차오피는 그 옥베개를 아우인 차오즈를 조롱하기 위해 주었다. 차오즈는 그 베개를 가지고 물결이 일렁이는 뤄촨(洛川)을 지나면서 쩬지를 수신(水神) 링보셴에 빗대어 '뤄셴푸(洛神賦)'를 지었다. 이후 사람들은 수선화를 링보셴이라고 불렀다.  


수선화의 속명(屬名) 나르키소스(Narcissus)는 고대 그리스어 'narkau'(최면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나온다. 그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물속에 빠져 죽었다. 그 자리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바로 수선화였다. 수선화의 꽃말은 그래서 ‘자존’, ‘자아도취’이다. 


조선시대 때는 수선화가 무척 귀해서 선비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던 꽃이었다. 수선화는 중궈 장난(江南)과 제주도에서는 흔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선비들은 옌징에 사신 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그 뿌리를 어렵게 얻어다 키웠다. 추사도 24세 때 옌징에 가서 수선화를 처음 보고는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43세 때 평안감사로 있던 부친을 뵈러 갔을 때도 옌징에 다녀오던 사신이 부친에게 수선화를 선물했다. 추사는 수선화를 달라고 청해서 당시 남양주에 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냈다. 추사로부터 수선화를 받은 다산은 흡족해서 시를 지었다. 


55세 때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된 추사는 섬 전체에 수선화가 많이 자라고 있음을 보았다. 조선에는 없는 것으로 여겼던 수선화가 제주에서는 농부들이 소 먹이로 줄 정도로 흔하디 흔했다. 농부들은 논밭에 자라는 수선화를 마구 뽑아서 버리기도 했다. 추사는 마구 뽑히고 버려지는 수선화를 보고 귀한 사물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처럼 천대를 받는다는 뜻을 담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림에서 수선화는 알뿌리가 거의 땅 위에 드러나 있다. 뿌리가 드러나 있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 흔들림을 의미한다.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도 한양에서 뿌리가 뽑혀 제주도로 내던져진 신세였다. 추사는 알뿌리가 드러난 수선화와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생각했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있던 추사는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내야겠다고 다짐했으리라. 허련은 추사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완당탁묵'에 수선화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탁본에는 '자오멍지엔(趙孟堅)이 쌍구(雙鉤)로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몽당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법도는 한가지다.'라는 글과 함께 마지막에 감옹(憨翁)이라는 호가 찍혀 있다. 감옹은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조희룡(趙熙龍)의 호다. 조희룡은 추사의 서화 제자이다. 그는 감옹(敢翁, 憨翁) 외에 우봉(又峰), 석감(石憨), 철적(鐵笛), 호산(壺山) 등의 호를 썼다. 추사의 수선화 그림에 조희룡이 후징의 '수선화부'와 방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종이 바탕에 수묵, 55㎝ x 31.1㎝, 개인 소장.


'불이선란도(不二禪蘭)'는 추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묵란이다. 이 묵란은 20년 동안 불이선(不二禪)의 경지에서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난이 갑자기 득도하듯 눈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인화의 사의(寫意)와 문기(文氣)의 세계를 넘어 심오한 종교적 법열(法悅)의 경지까지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선란불이(禪蘭不二) 나아가 선란일체(禪蘭一體)와 같은 말이다. 선(禪)과 난(蘭)을 동격으로 본 것이다. 추사의 벗 초의선사(艸衣禪師)가 다법(茶法)과 선법(禪法)이 하나라는 다선일체(茶禪一體), 다선불이(茶禪不二)를 부르짖은 맥락과도 같다. 원래의 제목은 '不作蘭畵.....'로 시작되는 화제에 따라 '부작란(不作蘭)'이라고 불렀지만 최근 화제의 내용에 따라 '불이선란'으로 바꼈다.  


그림은 꽃대 하나에 꽃 한 송이, 장엽 하나에 중엽 여섯, 단엽 예닐곱 장이 전부다. 오른쪽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뻗었다가 수직으로 올라간 다음 직각으로 목을 꺾은 꽃대 끝에 화심(花心)만 농묵(濃墨)으로 강조한 꽃 한 송이를 그렸다. 장엽은 장타원형을 이루면서 뻗어올라가다가 꽃대가 꺾인 지점에서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져 휘었다. 화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담묵(淡墨)으로 처리했다. 매우 단출하고 조야한 듯하지만, 탁 터진 꽃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꽃은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개와 지조라고나 할까!  


추사는 이 그림에 아주 만족했던 듯 낙관(落款)을 무려 열다섯 개나 찍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 그림의 이상(理想)을 이 그림에서 실현했다고 본 것이다. 추사의 그런 고조된 감정이 제시(題詩) 칠언절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판교식(鄭板橋式) 역행법(逆行法)으로 쓴 제시도 파격적이고, 글씨체도 매우 특이하다. 

              

不作蘭畵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고 스무해나 지났는데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을 닫아걸고 찾아헤매고 또 찾았는데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 아니던가


추사의 희열은 파격적인 제시 바로 오른쪽의 화제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만약 누가 강요한다면 구실을 만들고 또 응당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만향)'으로 다시 이어진다. '毘耶(비야)'는 비야리성(毘耶離城)을 말한다. 비야리 성은 인도의 고대 도시 바이샬리(Vaisali), 팔리어로 베살리(Vesali, 毗舍離)를 가리킨다. 비야리 성에 살았던 유마힐(維摩詰) 거사(居士)는 샤카무니(釋迦牟尼)의 교화를 도왔다. 비야리 성의 장자(長者)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자신도 병이 들었다고 자리에 누운 뒤 병문안하러 온 여러 보살들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였다고 한다. '유마경(維摩經)'의 핵심인 '불이법문'은 분별과 대립. 차별, 언어를 떠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曼香(만향)'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장엽이 꺾인 그 아래 여백에 화제를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글씨를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라고 썼다. 자긍심이 가득한 화제다. '漚竟(구경)'은 추사의 별호다.  


난초 꽃대 왼쪽 여백의 화제는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선객노인.)'이라고 적혀 있다. '불이선란'은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준은 추사가 함경도 북청 귀양 시절에 만난 시동이다. 추사는 먹을 갈아 주는 시동이라고 해서 그를 '먹동이'라고도 불렀다. 달준은 추사가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은거할 때도 따라와 모셨다. '仙客老人(선객노인)'은 추사의 별호다. 


'선객노인' 명의로 쓴 화제와 난초 꽃대 사이에는 '吳小山見而豪奪. 可笑.(오소산이 보고 얼른 빼앗아가니 가소롭다.)'는 화제를 달았다. 이 화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쓴 것으로 보인다. '吳小山(오소산)'은 추사의 제자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다. 오규일은 추사의 낙관과 도인(圖印)을 도맡아 새겼던 전문 전각가였다. 화제의 내용을 종합하면 원래 '불이선란도'는 달준에게 주려고 했는데, 마침 집을 방문한 전각가 오규일이 보고 좋다고 하며 잽싸게 빼앗아갔다는 이야기다.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불이선란'에 대해 '글자를 변형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림이건 글씨건 법도를 지키지 않은 획이 없다. 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기세(氣勢)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자유의 세계요, 무애의 세계다.'라면서 '유마경'에 나오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유마거사의 '불이문답(不二問答)'처럼 '이런 고도의 추상적 세계를 다룬 작품이 불이선란도다.'라고 극찬했다.  


'直聲秀句(직성수구)' 행서 대련


'直聲秀句(직성수구)' 행서 대련은 추사가 35세 때인 1820년 칭나라 학자 꾸춘(顧蒓, 1765~1835)에게 협서와 함께 써서 보낸 것이다. 이 대련은 그가 칭나라 학자들과 깊이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직성수구' 대련 글씨는 일제시대 박석윤이 베이징(北京)의 수장가에게 구입해서 들여왔는데,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直聲留闕下(직성유궐하곧은 말씀으로 대궐 아래 머무르게 되었지만

秀句滿天東(수구만천동빼어난 싯구는 하늘 동쪽 나라에 가득합니다


칭나라 관리였던 꾸춘은 서법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곧고 정직했던 그는 정치에도 밝아 직언을 잘하였다. 꾸춘에 대해서는 '칭싀리에쫜(淸士列傳)' <숭쥔탸오(松筠條)>에 그 일화가 나온다. 숭쥔(松筠, 1744~1835)은 청렴하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방관에 임명되자 꾸춘은 '숭쥔 같은 사람은 마땅히 곁에 두고 중용해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황띠(皇帝)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추사는 이 대련을 통해서 꾸춘의 충직함과 빼어난 글씨를 칭송하고 있다. 


추사는 꾸춘에게 보낸 대련 협서에 '顧南雅先生文章風裁, 天下皆知之, 向爲湘浦一言, 尤爲東人所傳誦而盛道之. 萬里海外, 無緣梯接, 近閱復初齋集, 多有南疋唱酬之什, 因是而敢託於墨緣之末, 集句寄呈, 以伸夙昔憬慕之微私. 海東秋史金正喜具草'라고 썼다. 풀이하자면 '난야(南雅, 꾸춘의 호)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모두 다 압니다. 저번에 샹푸(湘浦, 숭쥔의 자)를 위한 한 말씀은 더욱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외우는 바 되어 크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만리 해외에 서로 만날 길이 없더니 요즈음 푸추짜이지(復初齋集)를 보는데, 꾸춘 선생과 주고받은 싯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학문과 예술로 맺은 인연의 끝에 부탁하여 글귀를 모아 보내드림으로써 일찍부터 동경하고 사모하던 작은 뜻을 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씁니다.'라는 뜻이다.


전련 '直聲留闕下'는 탕나라 주칭위(朱慶餘)의 오언율시 '孔尙書致仕, 因而有寄贈(콩 상서가 벼슬에서 물러났기에 부쳐주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련 '秀句滿天東'은 출처를 알 수 없다. 추사가 전련에 맞춰서 창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탄생한 이 대련의 명구는 추사의 30대 후반 글씨체의 기준작이 된다. 거침없는 필치에서 중년 시절 대가의 기개가 엿보이는 글씨다. 박규수(朴珪壽)는 이런 글씨를 보고 추사의 중년 글씨가 기름졌다고 말한 것이리라.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은 10권 5책 납활자본으로 간행한 추사의 시문집이다. 1867년(고종 4)에 문인 남상길(南相吉)이 추사의 고금체(古今體) 시집 '담연재시집(覃揅齋詩集)'과 '완당척독(阮堂尺牘)' 2편을 간행한 이듬해인 1868년 가을에 남상길, 남병길(南秉吉), 민규호(閔奎鎬) 등이 산정하여 '완당집' 5권을 간행하였다. '완당집'에는 소(疏), 서(書), 문답, 서(序), 기(記), 제문(祭文), 상량문(上樑文), 고(攷), 변(辨), 설(說), 명(銘), 서후(書後) 등이 실려 있다.


이후 1934년 추사의 종현손(從玄孫)인 김익환(金翊煥)이 유일(遺逸)된 것을 수습하고 중복된 것을 산정하여 서울 영생당(永生堂)에서 '완당선생전집'을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는 남상길의 서문과 민규호의 소전(小傳)이 있고, 권수(卷首)에는 서(序), 구서(舊序), 소전, 초상(肖像), 유묵이 있다. 권1∼5에 고(攷) 5편, 설(說) 6편, 변(辨) 3편, 소(疏) 5편, 서독(書牘) 108편, 권6∼8에 서(序) 2편, 기(記) 3편, 제발(題跋) 7편, 전(箋) 1편, 명(銘) 1편, 송(頌) 1편, 잠(箴) 1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표(墓表) 2편, 잡저(雜著) 17편, 잡지(雜識) 1편, 권9~10에 시(詩) 240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완당선생전집' 가운데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는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는 별책으로 나온 바 있다. 이 글은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 연구에 있어서 최초의 논설이다.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실학의 지도 이념으로서 추사의 사상성을 보여주는 논설이다. 24세에 옌징에 건너가 당대의 석학인 웡팡깡과 롼위안으로부터 칭대 학술의 진수인 고증학을 받아들인 추사는 귀납법을 통해서 금석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북한산비(北漢山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를 대조하여 북한산비가 무학(無學)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했다. 추사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금석이 역사를 기록한 사승(史乘)보다 낫다고 하였다. 사료로서 금석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서독을 보면 추사의 서화가, 비평가, 감상가(鑑賞家)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서화 이론에서는 집필법(執筆法), 운필법(運筆法) 등 정확한 서법을 설명하였다. '대역방통소식(大易旁通消息)'과 '항역호역(項易胡易)'은 주역에 관한 연구다. 주역의 소식(消息)에 대해 설명하고, 항역과 호역의 동이점(同異點)을 논하고 있다. 

 

'완당척독(阮堂尺牘)' 상권, 19.5cm x 26.7cm


'완당척독(阮堂尺牘)'은 1867년 추사의 문인 남병길이 스승의 척독(尺牘)을 모아 2권 2책의 활자본(活字本, 全史字)으로 간행한 책이다. 척독은 작품성을 의식하고 짧게 쓴 편지를 말한다. 책의 구성은 10행 20열로 되어 있다. '완당척독'에는 이하응(李昰應) 외 16인에게 보낸 척독이 수록되어 있다.  


'완당척독'의 첫머리에는 '歲在丁卯南至日宜山南秉吉序'라고 쓴 서(序)가 있다. 이하응에게 보낸 편지를 가장 앞에 놓고, 이어 권돈인(權敦仁, 1783~1859), 남병철(南秉哲), 조면호(趙冕鎬, 1803~1887), 심희순(沈熙淳, 1819~?), 장인식(張寅植), 오규일(吳圭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홍현보(洪顯普, 1815~1896), 김석준(金奭準, 1831~1915),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오창렬(吳昌烈), 백파상인(白波上人), 초의상인(草衣上人) 등에게 보낸 편지를 실었다. 끝에는 편지 외에 '牘外餘言',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수록했다. 척독은 수신인의 신분에 따라 편차해 두었고, 학문과 예술에 관한 견해를 담고 있는 척독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상권에는 '阮堂尺牘序', '上石坡(興宣大院君)', '答石坡', '上權彝齋(敦仁)', '答權彝齋相國', '與南圭齋(秉哲)', '答趙怡堂(冕鎬)' 등이 실려 있다. 하권에는 '答沈桐庵(熙淳)', '答張兵使(寅植)', '答人', '答李知樞(尙迪)', '答洪生顯普', '答金生奭準', '答吳生慶錫', '答吳昌烈', '答白波上人', '答草衣上人', '牘外餘言', '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 등이 실려 있다. 


'완당척독'은 추사 척독의 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당전집'과의 대조 및 교감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 책에는 '완당전집'에는 보이지 않는 편지들이 여러 편 포함되어 있다. '완당척독'이 각 척독들을 독립적인 편지로 간주하여 편차했다면, '완당전집'에서는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한 편의 서독으로 편집·배열했다. 예를 들면 '완당척독'에서는 권돈인에게 보낸 척독 5편을 각각 독립된 편지로 인식하여 여러 페이지에 걸쳐 실어 놓았다. 하지만 '완당전집'에서는 '여권이재, 돈인(與權彝齋, 敦仁)'의 제목 아래 하나의 편지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하응, 남규철, 심희순 등의 척독 편차에서도 보인다. 


남병길은 서문에서 ‘해타(咳唾)의 나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던 추사의 척독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경사(經史), 백가(百家), 고문(古文), 시사(詩詞), 노불(老佛), 금석(金石), 해예(楷隷), 명물(名物) 등 다양한 내용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문장의 전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척독의 대부분은 추사가 지인들과 문학, 예술, 학문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들이다. 추사는 금석학과 예술에 관한 견해를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완성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편지의 대상 인물을 보면 '완당전집'의 ‘서독(書牘)’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낸 편지까지 아우르고 있는 반면, '완당척독'은 학문과 예술 방면에서 교유한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를 위주로 수록하였다. 편지 수신인도 이하응과 권돈인 등 사대부뿐만 아니라, 이상적과 오창렬, 홍현보 등의 중인, 백파상인과 초의상인 등 승려까지 아우르고 있다. 추사의 교유 관계가 매우 폭넓었으며, 사상도 개방적이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완당척독' 하권의 '독외여언(牘外餘言)'에는 ‘난정첩’에 관한 글 3편, '오경(五經)', '참동계(參同契)'에 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남병길은 추사의 일상적인 모습보다는 그의 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에 대한 생각까지 보여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사상에 대한 관점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당척독'은 당시 문인들에게 편지글의 전범이 됨으로써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2019.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