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감각으로 익숙하게 다루어 낯설게 하기-윤후영(독립큐레이터)
미술이라는 것이, 아름다움에 관계하는 것이 현실을 은폐하는 한낱 삶의 기교이거나 진리를 미혹하게 하는 기술이 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희로애락의 감정과 그 근저에 아름다움(존재론적)을 접속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시쳇말로 현대미술의 실용화 -공예를 비롯하여 삶의 환경개선을 위한 미술분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주의 미술을 말함-는 모더니즘 미학의 교조를 이탈한지 오래되었으며 예술 창작의 자유의지를 미술가의 상업적 욕망의 자유로 무한 확대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복샘에게 작품과 미술일반의 태도에 대하여 미술가로서의 시대적 책임 운운하며 질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러한 거대한 짐을 지울 까닭도 없고 당대의 담론도 아니다. 다만 확대·확장된 미술시장에서의 정열(passion)적인 유행(fashion)으로부터 또렷하게 소외되는 지대에서 오히려 그의 미술 경계가 분명함을 역설적으로 말하려니 그렇다. 그 경계에서의 활발함은 또 다른 이들에 의하여 결들이 나타날 진데 이결들을 확인하는 지대에서 복샘 작품세계의 당위성이 확보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패션(passion)은 있으되 패션(fashion)은 없다고 할 수 있는 지대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대의 불구이며 다소 불편한 장애이지만 복샘의 예술로써는 자초하는 필요조건이다.
이번의 작품도 예전의 작품들처럼 불쑥 불쑥 솟아나는 ‘사건’-이정우가 들뢰즈의 사건을 풀이한-으로써의 작품들임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지금의 작품과 함께 예전의 작품을 기억하며 아울러보지만 어떠한 일관성도 지속성도 없다. 미술사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최근의 유행사조와 견주어보아도, 볼(앎) 수 있고 이해하여 교감할 수 있는 근거를 친절하게 마련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 선명하게 작품이 자리하고 그 나름의 미학적 자태를 뽐내고 있건만 무엇이 그것과 최종적 불통을 하게 하는 것일까. 그 불통의 까닭과 이유를 각자 편한 데로 밝힐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불통의 지점을 예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통이 뻔하다면 왜 굳이 예술적 범위의 지대에서 활동하겠는가. 물론 이 말은 순수미술-지식계급의 클래식한-의 미학적 관점을 노출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최근 미술경향인 대중·다중·공공·참여·현장·디자인·상업미술에 대하여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한 흥미를 갖고 그 차이의 균형적 질서를 모색해 보고 있다.
다소 비약이지만, 생명의 속성처럼 예술의 지속적 당위인 영원성에 대하여 반응 해온 것이 예술이지 않느냐 하는 자의적 근거지우기를 하자니 그렇다. 결국 뻔한 소통은 소비(소멸)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나름대로 복샘을 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작품을 많이 보아왔다. 많은 전시를 함께 했고 수많은 작품들을 감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작품을 일관하는 어떤 비평적 논리나 자기맥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술의 내러티브라는 맥락을 지나 존재하는 즉, 당대미술이라는 시대적 맥락의 작품이라서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당대 미술이 응당 취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인 자기서사의 맥락-제 문화담론 가운데 어떤 요소나 주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작품을 몰아가는, 다시 말해 개념이든 논리이든 작품이 언어가 되는 것이라도 기저로 하는 작업을 생산하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도대체 그러한 맥락도 전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고도로 게임을 하는 작가들이 현대미술가라면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작품들 전체를 꿰어야 하는 것이 적어도 사십대 초반의 작가적 위상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불통하는 복샘의 작품이 발산하는 미적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것에 대한 그럴 듯한 단서를 스스로 발견하자면 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구사하는 재료와 방법들 기타 소재로 채집하는 오브제들의 특성 외에도 복샘 특유의 사유를 추적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데, 그 키워드를 ‘친숙한(익숙한) 것의 낯설게 발견하기’ 또는 낯설게 발견하고 낯설게 하기‘ 쯤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익숙한 것 또는 친숙하다는 것은 생의 소멸로써 순리이지만 한편, 생의 활발성 측면에서는 체념과 굴복, 회의를 내포하고 있다. 반면 낯섦이란 빛처럼 생의 자극이고 연장이며 소멸에 대한 저항이고 존재의 증명활동이다. 이들 간의 들끓는 변죽이 작품들 안에서 변주를 울리고 있다.
그가 작품을 할 때는 여느 작업실에서의 작가처럼 본이나 폼(form,형틀까지를 포함한 형상 )을 만들지 않는다. 그의 작업이 시작되는 곳은 작업실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깨어있는 모든 ~동안이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해 있는 모든 세상에서 그는 언제나 낯설게 반응하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사라지던-닳아서 지워지고 하찮아서 기억하지 않는- 물건이 사물인 동시에 존재로서 오브제로 탄생한다. 유전적 종자에 의하여 거듭 새로 태어나는 어떤 형상들처럼 예전의 작품과 유사하지만 그대로는 아닌 것이 실로 ‘마술’처럼 태어난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래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꼴뢰르(bricoleur)’의 적격자로서 복샘을 바라보게도 된다. 즉 ‘잡다하고 광범위하지만, 아무것이나 주어진 한정된 재료로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손재주 있는 사람’에 걸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작품들은 이미지와 개념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데, 이것이 ‘생생한 감각’을 갖고 있는 복샘의 특별함이라고 본다. 결국, 신화적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된 개념을 갖고 작품을 볼(앎)려고 하면 그 작업의 결들을 더 이상 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 그의 작품은 언뜻 보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법들이 많다. 따라서 그는 개별 작가지만 작가가 아니기도 하다. 거칠지만, 당대미술의 담론가운데 하나인 ‘작가의 해체‘까지도 확대하여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 모르겠다.-여기에 대해서는 작품을 더 많이 보고 대화도 더 지속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 당연한 문제지만 만들어진 작품이 내포하는 갖가지 맥락을 우리 스스로 짚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샘의 작품이 불친절한 불통의 지점이다.
자료제공-장수건강마을 http://cafe.daum.net/leemsan-ga
'그림 조형예술의 모든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Min Wae Aung(민 웨 응)의 그림세계 (0) | 2008.10.10 |
---|---|
Aung Kyaw Htet(응 콰우 테)의 그림세계 (0) | 2008.10.08 |
맛있는 현대미술 展-구삼뮤지엄 갤러리포커스 (0) | 2008.09.22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세계 (0) | 2008.01.29 |
[스크랩] 김명자도예전 관람후기 (0) | 2007.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