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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5.18 광주민중항쟁과 그 후 1

林 山 2008. 10. 16. 18:44

1961년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른바 '10월 유신' 쿠데타로 종신대통령을 꿈꾸고 있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1차에 한하여 대통령직 중임을 허용하고 있었다. 1967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자신이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주장하며 3선에 도전하자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개헌을 해서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부정선거를 자행하고도 김대중을 가까스로 누르고 3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신안 앞바다에 그물을 던지면 투표함이 걸려 올라온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박정희는 위기를 느꼈다. 1971년 10월 27일 박정희는 한태연, 갈봉근 등의 어용학자들과 출세에 눈이 먼 김기춘 같은 검사들이 만든 일명 종신대통령법인 유신헌법안을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뒤 11월 21일 무지몽매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하여 투표율 91.9%에 찬성투표율 91.5%로 통과시켰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은 국민들이 어디 있는가! 12월 27일부터 박정희에게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이 발효되었다. 

 

역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박정희, 1978

노태우의 뒤는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이 전두환

 

민주인사들과 양심적 국민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헌정은 중단되고 국회는 해산되었다. 정당 및 정치활동도 금지됐다.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 목적의 집회와 시위를 일체 금지하고, 각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방송, 보도 등 언론과 출판은 사전 검열이 실시되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시행령, 12월 6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법과 시행령을 공포하여 총통제의 법적 준비절차를 마쳤다. 비상계엄령은 12월 14일이 되어서야 해제되었다. 12월 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2월 25일 1,630개 선거구에서 선출된 2,359명의 대의원은 제1차 회의를 열고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시대가 열린 것이다. 

 

6년 임기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유신정우회)을 선출하고, 국회의 헌법 개정안을 최종 의결하며, 통일정책을 심의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의장이자 대통령인 박정희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

 

1978년 12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온갖 불법적인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야당에 참패했다. 1979년 들어서 7년째로 접어든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은 그 폐해가 속속 드러나면서 한계점에 이르렀다. 시민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각성했고, 그 결과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자 파시스트 박정희는 반정부 민주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투옥 등 강경한 탄압을 일삼았다.

 

1979년 2월 말 국립 충북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 17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된 필자는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4개월간 초급 지휘관 교육을 받은 뒤 특전사령부에 배속되었다. 특전사에서 공수훈련과 특수전 교육을 마친 다음 전북 익산의 제7공수특전여단에 배치되었다. 동기들과 함께 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한 필자는 제32대대 1지대장에 임명되었다. 32대대는 막사를 비어놓고 특수전 부대원들의 필수과정인 천리행군을 나가 있었다. 필자는 야전에서 대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전입 첫날부터 한 달 동안 천리행군을 해야만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과 '오원춘사건'에 이어 1979년 8월 YH무역(주) 여성 노동자 172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YH 노조위원장은 후에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이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이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2천여 명을 신민당사에 투입한 경찰은 신민당 의원, 당직자 등의 육탄방어에도 불구하고 YH무역 노동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경찰의 집압과정에서 건물옥상으로 피신한 노동자들 중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했다.

 

김영삼은 경찰에 의해 상도동 자택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 김대중을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독재정권은 YH무역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마저 처리하기로 작정했다. 9월 8일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김영삼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10월 4일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로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가택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10월 13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에 반발한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집단사퇴서를 제출했다.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공수부대

 

김영삼의 제명은 부산과 경남 지역 시민,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촉발했다.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유신독재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선언문을 부산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 10월 16일 부산대생들을 비롯한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면서 대규모 반정부시위을 벌였다. 부산의 반정부 민주항쟁은 10월 18일 경남의 마산시, 10월 19일에는 창원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출동시켰다. 부마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특전사 예하 1, 3 여단도 파견되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부산에서 66명, 마산과 창원에서 59명의 시민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궁정동 안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으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62세였다.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뒤 귀경한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로 김재규,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과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 연극영화과 3학년의 대학생 모델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이었다.

 

이 날 밤 필자가 근무하고 있던 제7공수특전여단에 갑자기 데프콘(Defcon)이 발령되었다. 필자가 기억하기론 아마도 데프콘3이었을 것이다. 데프콘3은 아무런 사전 상황설명도 없이 내려졌다. 아무런 영문도 몰랐던 필자도 조선 인민군의 동향에 이상증후가 있는 줄로만 알았다.  

 

데프콘은 방어준비태세를 뜻하는 군사용어로 디펜스 레디니스 컨디션(Defense Readiness Condition)의 준말로 전투준비태세라고도 한다. 데프콘3은 준비태세 강화 태세로서 긴장상태가 발생하거나 군사개입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미국에서는 1973년 중동전이 발발했을 때, 한국에서는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 한번 데프콘3이 발령된 적이 있었다. 데프콘3이 발령되면서 전군에 휴가와 외출이 금지되고, 한국군의 작전권은 한미연합사령부(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ROK-US CFC)로 넘어갔다. 

 

한미연합사(ROK-US CFC)는 1975년 제30차 UN 총회에서 '1976년 1월 1일을 기해 UN군 사령부를 해체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지자 1978년 11월 7일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에 의해 창설되었다. 한미연합사의 창설로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지휘통제가 실질적으로 강화되었다. 사령관에는 미국의 4성 장군, 부사령관에는 한국의 4성 장군이 임명되어 한미연합사는 통합 참모진을 구성했다. 한미연합사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한미군의 합법성을 보장받으면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했다.

 

데프콘3이 발령되자 필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발발하면 공수부대는 적국의 후방 깊숙이 공수되어 유격전을 수행하는 부대였기 때문이다. 평소 도상으로만 기습작전 훈련을 하던 함경남도 함흥시 소재 흥남비료공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흥남비료공장은 유사시 화약공장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에 특수부대의 제1차 공격목표였다. 데프콘3가 발령된 이유는 다음날 박정희가 암살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재규의 현장검증                    현장검증을 받고 있는 김재규와 박선호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하자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사살했다. 중정부장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이던 박흥주와 박선호의 운전기사 유성옥, 궁정동 안가 경비과장 이기주, 경비원 김태원과 서영준 등은 대통령 경호원 김용섭과 운전기사 김용태를 사살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다.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재규는 남영동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심한 욕설은 물론 쇠파이프 구타와 전기의자 고문까지 당했다.

 

10. 26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내란목적 살인죄로 기소된 김재규 등 피고인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박정희를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일설에는 당시 박정희 부하들간의 암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차지철에게 밀리던 김재규가 분을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시도,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CIA를 통해서 박정희 암살공작을 했다는 설도 있다.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암살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1979년 11월 6일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김재규는 군법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0년 5월 24일 당시 서울 서대문에 있던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10.26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면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 왔다. 시민들은 유신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때부터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과 대학생, 시민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12월 6일 최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 12 군사반란의 주역들

 

하나회는 1963년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사조직이다. 이들은 각 기수별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 3~4명씩 회원을 계속 늘려 갔다. 하나회 회원들은 승진이나 보직 인사 때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다.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신군부 세력으로 발전하여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경진압을 주도하였다. 

 

하나회의 초창기 리더는 윤필용과 전두환이었다. 하나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서다. 하나회는 이 사건으로 한때 위기를 맞는 듯 했다.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이던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한 말이 불거지면서 하나회는 군부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하나회의 다른 리더 전두환은 박정희의 각별한 신뢰를 바탕으로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하였다. 그 결과 하나회는 윤필용 사건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12. 12 쿠데타에 동원된 군병력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12.12 쿠데타의 두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도 받지 않고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 혐의로 체포한 '12. 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12·12 사태' 또는 '12· 12 군사정변'이라고 부른다.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던 최규하는 노회하고 치밀한 정치적 계산으로 보안사령부가 중심이 된 군사반란을 묵인했다.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비밀사조직인 하나회 소속의 제9사단장 노태우 등 영남출신 고급장교들을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 국방장관 노재현,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 체포 구금한 뒤 국방부와 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등을 점령하여 군부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2. 12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전두환은 노태우를 수경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하였다.

 

12. 12 군사반란 직후 필자가 근무하던 7여단의 전 장교는 여단장 관사로 집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여단장은 현재 한국의 최고 실권자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이라고 밝혔다. 여단장은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지하며 7여단 전 장교들도 이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불법성과 음모를 간파하고 있던 필자는 이 날 차기 대통령은 전두환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제1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최규하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 대통령일 뿐이었다. 1980년 4월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정보부장에 전두환을 임명했다. 중정부장이 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사회혼란을 유발함으로써 군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느 날 7여단 전 장병에게 굵고 긴 진압봉과 굵은 철사를 석쇠처럼 엮은 방석모가 지급되었다. 진압봉은 급하게 만들었는지 갈라지거나 결이 터진 것이 많았다. 검은 페인트를 칠한 진압봉은 보기에도 삭막했다. 방석모는 철모에 부착하여 얼굴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장비였다. 시위대와의 투석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7여단 전 장병들은 일체의 휴가나 외박, 외출이 금지된 채 하루 8시간씩 폭동진압훈련에 동원되었다. 방석모를 쓴 채 열을 지어 진압봉으로 시위대의 머리와 어깨, 목을 가격하는 동작을 매일 똑같이 되풀이하는 폭동진압훈련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매일 야간에는 5분 대기조 비상출동훈련이 실시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폭동진압훈련과 비상출동훈련은 공수부대원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필자의 부하들도 시위를 진압하러 나가기만 하면 대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겠다고 별렀다. 공수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모두 대학생들의 시위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진압해야 할 대상은 전두환과 신군부였음에도.....

 

외출, 외박도 금지당한 채 폭동진압훈련을 해야만 했던 공수부대원들의 대학생들에 대한 적개심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시위 진압에 투입되기만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1980년 3월 1일 필자는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였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집회가 있었으나 자진 해산했다. 5월 17일 오전 광주에서는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을 면회하는 가족들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장악한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의결되었다. 23시에는 민주인사, 학생운동 지도부 등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신군부 반란군은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연행하였다. 이때 전국적으로 대학생, 교수, 민주인사 등 6백여명이 체포되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연금되었다.

 

5월 17일 전두환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의결했다. 비상계엄령은 이날 24시를 기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봉쇄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회원들

 

전두환이 장악한 합동수사본부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합수부는 김대중과 20여명에 이르는 민주인사들에게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로써 서울의 봄도 막을 내렸다.

 

김대중이 구속되자 국내외적으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1973년 8월 15일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가 가장 열성적으로 김대중의 구명운동을 펼쳤다.

 

한민통은 1989년에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在日韓國民主統一聯合, 韓統聯)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한통련은 유신독재 반대운동, 김대중 구명운동, 전두환 정권 규탄,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등 한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정부는 한통련을 반한단체로 규정하고 회원들의 입국 금지와 홈페이지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계엄령 해제와 민주회복 궐기대회, 전남도청 앞 광장, 1980.5.17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 날 밤 7여단 영내에 비상출동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필자가 속한 32대대 전 대대원들은 완전군장과 폭동진압장비를 갖추고 실탄을 지급받은 뒤 연병장으로 달려나갔다. 연병장에는 7여단 전 병력이 대대별로 집합해 있었다. 인원보고를 마치자 여단장은 '계엄군 출동이다. 33대대와 35대대 목표 광주, 31대대 목표 전주, 32대대 목표 대전! 이상 출동!'이라고 출동명령을 내렸다. 필자는 대원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어둠 속의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대전으로 향했다. 광주로 가게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긴 필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7여단 계엄군 33대대와 35대대는 광주 시내 각 대학에 진주했다.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7여단 31대대 계엄군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폭행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1명이 사망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반란세력들은 부마민중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하게 진압하면 가라앉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공수부대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32대대는 대전의 충남대학교를 점령했다. 충남대학교 캠퍼스는 대전 시내와 유성 두 곳에 있었다. 필자는 처음에는 시내에 배치되었다가 며칠 뒤 유성 캠퍼스로 이동했다. 상황을 모르고 등교했던 충남대생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운동장까지 끌려온 대학생들은 얼차려를 받으면서 영문도 모른 채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당시 중위였던 필자는 대원들에게 대학생들에 대한 폭력을 금지시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원들은 필자의 눈을 피해서 대학생들을 구타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구타를 면했던 대학생들은 참 운이 좋았다. 필자가 대학생들을 때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부대대장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부대대장은 나를 불러 'ㅇ 중위, 너 대학교 나왔다고 대학생들 봐주는 거야?'라고 경고까지 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남대생들의 시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9시 40분 전남대생 50여명은 교문 앞에서 계엄군에게 등교를 저지당했다. 전남대생들은 계엄군을 상대로 '계엄령을 해제하라', '휴교령를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곤봉에 맞은 대학생들 가운데 최초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궐기대회

 

대학생들이 광주 시내 금남로로 이동하여 시위를 벌였다.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특전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에 따라 일부 병력만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대학생들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광주 공용터미널에서는 청각과 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게 전신을 구타당했다.  

 

계엄령 해제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며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이는 시민들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에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낀 광주시민들은 10대 청소년들로부터 중장년층까지 거리로 나서 저항운동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령 철폐, 민주화를 요구하며 격렬한 저항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계엄사령부는 통금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기는 조치를 취했다.

 

'민족 민주화 성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는 광주 시민들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공수부대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광주 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투석전

 

주인을 잃은 신발들

 

5월 19일 새벽 3시 제11공수특전여단 증원군이 광주에 도착했다. 전날 공수부대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던 김경철 씨가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날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가담한 시민들의 수는 3천명 이상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과 누문동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11공수여단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했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공수부대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버스로 바리케이트를 친 시위대

 

19일 오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는 다시 광주 시내로 출동하여 잔인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광주의 기관장들은 회의를 열고 시위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했다. 오후 4시 반경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공수부대가 최초의 실탄사격을 개시하여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부상을 당했다. 저녁 8시경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면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전남도청 앞에는 2백대의 택시가 집결하여 차량시위가 벌어졌다.

 

전두환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주의 차량시위

 

김대중 석방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차량 경적시위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의 항의시위   

 

5월 20일 오전 8시를 기해 광주 시내의 모든 고등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 가톨릭 센터 앞에서는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공수부대원들에게 마구잡이로 구타당했다.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의 공방전이 하루종일 계속됐다. 
 

공수부대에 맞서 광주 금남로에 모여든 차량들의 경적시위, 1980.5.20

 

계엄군의 저지를 위해 시민들이 버스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죽이자 전두환'이라는 구호가 적힌 버스를 타고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

 

저녁 6시 40분경 택시와 버스 2백여대는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이동하면서 차량 경적시위를 벌였다. 차량 시위대는 도청으로 이동하여 금남로, 충장로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자 공수부대는 대검과 곤봉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찾아가서 항의를 가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밤 9시경 노동청 부근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했다.

 

불에 타버린 광주 MBC

 
밤 9시 50분경 시민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에 불을 질렀다. 전두환이 장악한 꼭두각시 정부는 신문과 방송을 동원해 광주 시민들의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민중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아부쳤다. 광주 MBC가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광주민중항쟁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자 광주 시민들은 격분했다.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에 불을 지른 뒤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밤 11시경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힌 시민들

  

 공수부대원들에게 체포된 시민들

  

 몽둥이와 군화발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공수부대원. M16 소총에는 대검을 착용했다 

  

공수부대의 금남로 살륙

 

진압군의 금남로의 살륙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구타

 

곤봉으로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는 공수부대 진압군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신혼부부

 

공수부댕원들에 의해 무릎이 꿇린 채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민들

 

진압군에 의해 상의가 벗겨진 채 끌려가는 시민들

 

팬티만 입힌 시민들을 트럭에 태우는 공수부대원들

 

짐짝처럼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시민들

  

 트럭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시민

 

5월 21일 새벽 1시경 2만여 명의 시민은 노동청 근처에서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계엄군은 시외전화를 두절시켰다. 새벽 4시경 시민들은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옮겼다. 30분 뒤 시민들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왜곡보도를 일삼던 광주 KBS 건물에 불을 질렀다. 오전 8시경 시위대는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했다.

 

부상자를 운반하는 시민들

 

부상자를 운반하는 시민들(위 사진과 동일인)

 

병원에 실려온 부상자들

 

 치료를 받는 부상자들

 

중상을 입은 부상자  

 

오전 10시 15분 계엄군과 시위대는 전남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대표가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되었다.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들은 맨 앞으로 전진배치되었다. 시위대는 광주세무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했다. 

 

시민들이 계속해서 몰려들면서 계엄군은 수세에 몰리는 듯 했다. 전남도지사는 경찰 헬기에서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은 청년들이 계속 쓰러졌다. 이날 계엄군의 총격으로 광주민중항쟁 기간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주 시내 120여개의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시민 저항군의 전남도청 접수

 

시민 저항군에게 접수된 무기들

 

  시민 저항군의 자위적 무장

  

무기를 분배하는 광주 시민군

 

 기관총으로 무장한 시민 저항군

 

군용차량을 타고 이동중인 시민군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군용차량을 접수한 시민군

 

장갑차를 접수한 시민군

  

군용 지프를 접수한 시민군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시민군

 

작전을 토의하고 있는 시민군

 

이날 오후부터 광주 시민들은 자위적 수단으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과 실탄, 폭약 등으로 무장하고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불렀다. 총을 든 시민들은 마침내 계엄군 공수부대에 저항하기 위해 '자유 민주화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다.

 

오후 2시 반경 시민군은 군수품을 제조하던 아시아자동차 공장 등 방위산업체에서 군용 트럭과 장갑차 등 260여대의 차량을 몰고 나와 나주와 화순 등 외부에 광주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시민군은 또 지원동 탄약고에서 다량의 TNT를 확보하였다. 

 

시민군이 무장을 하자 공수부대원들은 광주 시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민군과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하기 시작했다. 전남 화순과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은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에 맞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대학생 시민군들이 전남대 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를 설치하고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한바탕 교전을 벌인 뒤 공수부대는 광주시 외곽의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했다. 오후 6시경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이날 저녁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신군부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한 유감성명서를 발표했다.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해 계엄군이 설치한 철조망

 

5월 22일 이후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었고, 신군부와 계엄군, 수구보수세력들은 악질적인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시켰다. 오전 9시 광주 시민들이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집결하자 군용 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면서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제목의 전단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을 호소했다. 정오에는 전남도청 옥상에 검은 리본과 함께 태극기 반기가 내걸렸다.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시민 공동체

 

식사를 준비중인 시민 공동체

 

식사를 준비중인 시민 공동체

 

오후 1시 반경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서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은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고 계엄령 해제와 구속자 석방 등 7개항의 수습안을 전달했다. 광주 시민들은 18구의 희생자 시체를 도청 광장에 안치하고 시민대회를 열었다. 수습위 대표는 상무대 방문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시민 희생자 시체 23구가 도청 광장에 새로이 도착했다.

 

저녁 7시 동양방송 라디오(지금의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를 뉴스로 보도하였다. 신임 국무총리 박충훈은 방송에서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발표했다. 박충훈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간 뒤 시민군이 광주의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면서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다고 한다. 시민군은 대표를 선출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체적으로 광주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잘 지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