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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5.18 광주민중항쟁과 그 후 2

林 山 2008. 10. 16. 18:49

광주 시민들의 도청 광장 집회

 

5월 23일 10시경 5만여 명의 시민이 전남도청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학생수습위는 자체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류 회수작업을 시작했다. 전남도청과 광장 주변에는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가 게시되었다. 오후 1시경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17명이 사망했다. 광주 시민들이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자 계엄사는 경고문 전단을 시내 전역에 살포했다. 저녁이 되자 계엄군에 체포되었다가 최초로 석방된 33명의 시민이 도청 광장에 도착했다.

 

 시민들이 사용하던 피켓을 수거하는 계엄군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군(외신 보도)

 

고등학생을 검문하고 있는 계엄군

  

계엄군에 체포되어 꿇어앉아 있는 청년들

 

5월 24일 오후 1시 20분경 공수부대원들이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송암동에서는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가 서로 오인하여 총격전이 발생했다. 오후에는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두환과 신군부를 규탄하는 전남도청 앞 광장 궐기대회 

 

5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을 전달했다. 오후에는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재야 민주인사들은 만장일치로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을 채택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범죄의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을 논의했다.

 

5월 26일 새벽 5시 20분경 계엄군은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오전 10시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오후 학생수습위원회는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했다. 오후 3시에는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은 광주 상황을 외신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저녁 7시 10분부터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했다. 계엄군은 자정을 기해 광주 시내전화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 5월 18일부터 5월 26일까지는 '해방광주'라고 부른 기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1871년 프랑스 정부에 저항한 파리 시민들의 자치가 이루어진 '파리 코뮌'에 비유하여 해방광주를 '광주 코뮌'으로 부르기도 했다. 해방광주 기간 동안 시민군 온건파는 자진해서 무기를 반납했으나 강경파는 무장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군은 여러 차례 내부 대책회의를 열고 무장투쟁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적 시위를 계속했다.

 

 

광주로 진입하는 계엄군 탱크부대

 

5월 27일 새벽 2시 계엄군은 2만5천명의 군인을 투입하여 광주 시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한 여성이 애절한 목소리로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시내 가두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 전남도청 주변은 공수부대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금남로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체포된 시민군

  

체포된 시민군

  

체포된 시민군

 

체포된 시민군

 

 공수부대원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시민군

 

계엄군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시민군

  

머리를 숙인 채 끌려가는 시민군

 

새벽 4시 10분부터 계엄군 공수부대 특공대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청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였다. 약 1시간에 걸친 공격 끝에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했다. 계엄군은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들을 체포하여 연행한 뒤 진압작전을 종료했다. 날이 밝자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 것을 알리는 선무방송을 했다. 7시경 공수부대는 20사단 병력에 도청을 인계했다. 오전 8시 50분경 시내전화 통화가 재개되었다.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시민군(외신 보도)

 

 

계엄군에 사살된 시민군 희생자들

  

 시민군 희생자들의 주검

  

 시민군 희생자들의 주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9일 동안 계엄군에 의해 광주 시민 191명이 학살되었으며, 852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광주광역시가 5∙18 광주민중항쟁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 155명, 행방불명자 76명,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 101명, 부상자 2277명, 연고자 미확인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되었다. 행방불명자는 대부분 계엄군에 사살된 뒤 아무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군 희생자 유가족

  

 시민군 희생자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시민군 희생자들의 관

 

희생자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희생자 유가족

 

오열하는 희생자 유가족

 

희생자의 관을 운구하는 유가족

 

 희생자들의 관을 망월동 공동묘지로 운구하는 행렬

 

매장을 기다리는 희생자들의 관

 

희생자의 관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인

 

희생자의 관 앞에 서 있는 어린 남매

  

희생자들을 위한 무덤자리

  

 희생된 아버지의 영정을 든 채 울고 있는 어린이

 

민중항쟁 희생자 가족과 친지들은 공포와 분노에 떨면서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북구 운정동 산46번지에 위치한 광주 시립공원묘지에 묻었다.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이곳에는 민중항쟁 관련 희생자들의 묘 137기와 그 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영령들의 묘 30기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망월동 묘지'로 불려왔다. 망월동 묘역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민주화 성지'가 되자 신군부 반란집단은 희생자들의 묘를 파내게 하는 등 묘지 자체를 없애려 획책하기도 했다.

 

 희생자의 빈자리

  

희생자의 빈자리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이후 이 사건 발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5명은 광주 5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광주 5적은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20사단장 박준병,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다. 대통령 최규하와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John Wickam)을 포함하여 광주 7적이라고도 한다. 존 위컴은 전두환 신군부와 이들의 광주 학살을 묵인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 그 맥을 이은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높은 편이다. 이로 인해 한나라당 지지세력인 영남지역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지역감정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 1980.6.5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과 악수하는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의 신군부 반란세력은 안보체제의 강화, 경제난국의 타개, 정치발전,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 등을 구실로 대통령 최규하를 위원장으로 한 임시 행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국보위의 실제 목표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잔혹한 유혈 진압, 김대중과 김종필의 체포, 김영삼의 강제 정계 은퇴, 소위 구정치인에 대한 정치 활동 규제, 언론계와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대 등 공포정치로 정재계를 개편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지배구조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보위 당연직 위원은 위원장인 대통령 최규하를 비롯해서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원기, 외무부장관 박동진, 내무부장관 김종환, 법무부장관 오탁근, 국방부장관 주영복, 문교부장관 이규호, 문공부장관 이광표, 대통령비서실장 최광수,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합동참모회의 의장 류병현, 해군참모총장 김종곤, 공군참모총장 윤자중 등이었다. 임명직 위원은 육군 대장 백석주, 대통령 특보 김경원, 육군 중장 진종채, 유학성, 윤성민, 황영시, 차규헌, 해병 중장 김정호, 육군 소장 노태우, 정호용 등이었다.

 

1980년 6월 5일 전두환의 각본대로 대통령 최규하는 18인의 장성과 12인의 공무원 등 30인을 당시 한국의 최고권력기구인 국보위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 상임위원회 위원 30인 가운데 18인이 전두환의 신군부 계열 인물이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은 전두환은 본격적으로 권력 인수 작업에 착수했다. 
 
국보위 상임위원회 임명직 위원은 위원장인 전두환을 비롯하여 공군 중장 이희근, 육군 중장 신현수, 해군 중장 정원민, 육군 중장 강영식, 박노영, 김윤호, 육군 소장 권영각, 김홍한, 노태우, 공군 소장 김인기, 대통령 정무비서관 안치순, 대통령 경제비서관 민해영, 민정비서관 최재호, 사정비서관 신현수 등 16인이었다.   

 

당연직 위원은 분과위원장 등 14인이었다. 당연직 위원은 국방위원장 육군 소장 이기백, 법사위원장 대검찰청 검사 문상익, 외무위원장 외무부 기획관리실장 노재원, 내무위원장 육군 소장 이광노, 경과위원장 기획원 기획국장 김재익, 재무위원장 육군 소장 심유선, 문공위원장 육군 소장 오자복, 농수산위원장 농수산부 차관보 김주호, 보사위원장 해군 준장 조영길, 교통위원장 육군 준장 이우재, 건설위원장 건설부 기획관리실장 이규효, 상공자원위원장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금진호, 정화위원장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김만기, 사무처장 공무원교육원 부원장 정관용 등이었다. 

 

6월 17일 신군부가 장악한 국보위는 부정축재, 국기문란, 시위주도, 배후조종 등의 혐의로 정치인, 교수, 목사, 언론인, 학생 등 329명을 전국에 지명수배하였다. 6월 24일 국보위의 강요로 김종필, 이후락, 김진만, 박종규 등 유신독재 핵심인물들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하였다. 국보위는 7월 9일 2급 이상 고급공무원 232명, 7월 15일 3급 이하 행정부공무원 4,760명, 7월 19일 금융기관 임직원 1,819명, 7월 31일 농협과 수협 임직원 1,212명, 교육공무원 611명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국보위는 또 7월 31일 '창작과 비평' 등 172개에 이르는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하는 등 언론탄압을 자행하였다. 유언비어를 보도한 혐의를 뒤집어 씌워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과 지지(時事)통신 서울지국, 산케이(産經)신문 등을 폐쇄시키고 기자들도 국외로 추방했다.

 

계엄군 임무를 수행하던 필자는 특전사 정훈참모부 파견근무 명령을 받았다. 특전사령부 정훈참모부에 근무하면서 필자는 1주일에 한번 발행되는 '검은 베레'를 창간했다. 계급이 중령이었던 정훈참모는 가끔 언론사 관계자들과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필자를 수행비서로 데리고 다녔다. 언론사 관계자와 정훈참모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탄압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훈참모는 필자에게 상당한 권한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삼청교육대 교육 모습, 1980.

 

1980년 8월 4일 전두환과 신군부는 사회악일소특별조치와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악명 높은 군대식 기관인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민간인들을 군부대에 가둔 채 소위 순화교육이란 명목하에 잔인한 폭력과 조직적인 인권유린을 저질렀다. 삼청교육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전과자나 불량배들의 명단이 미리 작성된 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일선 경찰서 형사들 사이의 경쟁으로 나중에는 머릿수 채우기식으로 체포가 진행되었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도 없이 체포된 시민들의 수는 6만명을 넘었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도 없이 체포된 시민들의 수는 전국적으로 6만명을 넘었다. 전국각지에서 인간도살장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깡패, 조직폭력배, 사기꾼, 전과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민주인사를 비롯한 대학교수, 공무원, 의사, 약사, 언론인, 부녀자, 지체장애인, 심지어는 중고생, 넝마주이, 행려자까지 마구잡이로 끌려왔다. 중고생들을 경찰에 넘긴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 학교의 생활지도부 주임교사들이었다. 

 

필자의 고향에서도 여러 명이 잡혀갔다. 그중 3명은 필자도 잘 아는 범죄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필자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돼지장사를 하던 최ㅇ갑(지금은 고인이 됨)이란 사람은 술을 마시면 주정만 좀 부렸을 뿐 본성은 착했다. 고향 후배들인 윤ㅇ갑과 이ㅇ구는 고등학교 다닐 때 좀 건들거렸을 뿐 깡패나 조직폭력배와는 거리가 멀었다. 형사들의 머릿수 채우기식 검거의 희생자들이었던 이들을 밀고한 사람들은 소위 면내 유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삼청교육대에서 빠졌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공수부대는 일년에 한번씩 1주일간 최전방 철책선으로 견적지 훈련을 나가게 되어 있었다. 필자도 강원도 최전방 ㅇㅇ사단으로 견적지 훈련을 나갔다. ㅇㅇ사단에도 삼청교육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에 식판을 닦으러 수돗가로 나온 삼청교육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머리를 박박 깎은 삼청교육생들은 하나같이 누렇게 뜬 얼굴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색이 바랜 군복에 후줄근한 모자, 너덜너덜한 훈련화를 신은 삼청교육생들의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조폭 행동대원을 하다가 끌려왔다는 덩치가 제법 큰 20대 초반의 교육생에게 '자네 두목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로 그는 '회장님은 미리 알고 피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에게 몸조심해서 삼청교육대를 무사히 마치라고 일러 주었다. 그가 삼청교육대를 살아서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체포된 삼청교육생들은 A, B, C, D의 네 등급으로 나뉘었다. 조직폭력배나 공갈치기패의 두목급과 중간간부, 상습폭력배, 실형 2범이상자, 흉기소지자, 강도 절도 밀수 마약 현행범으로 분류된 A급은 군사재판을 받았다. B급은 조직폭력배나 공갈치기패의 행동대원, 기타 정치 경제 폭력배, 상습도박자, 사기꾼, 폭력우범자, 강도 절도 밀수 마약 범죄 재범 우려가 있는 전과자, C급은 폭력 사실이 가볍고 우발적이거나 B급중 정상이 참작된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삼청교육대 대상은 바로 B, C급이었다. B급은 4주 순화교육을 받은 뒤 근로봉사에 처해졌으며, C급은 4주의 순화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초범이거나 사안이 경미한 학생, 개전의 가능성이 있는 뚜렷한 사람은 D급으로 분류되어 훈방되었다.   

경찰은 최종 체포자 39,786명 가운데 44명을 제외한 39,742명을 군에 인계했다. 군대에 수용된 삼청교육대 교육생들에게는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무차별적인 구타와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 생지옥 같은 삼청교육대에서의 구타와 가혹행위로 많은 교육생들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시범 케이스로 걸린 교육생에게는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잔혹행위가 가해졌다. 군인들은 교육생들을 개처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죽이는 삼청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교육생들은 무수히 구타당하다가 개처럼 죽어도 그만이었다. 교육생을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일도 있었다. 삼청교육대는 그야말로 인간도살장이나 다름없었다.

 

삼청교육대가 설치된 사단의 사단장과 장교들은 삼청교육생들의 입소 초기에 4주 후에는 집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4주가 지나도 교육생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4주 교육을 마친 B급 10,016명은 20여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봉사라는 미명하에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근로봉사는 훈련생들이 자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요에 의해 자원서를 강제로 쓴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국민적 저항이 두려웠다. 전두환 일당은 국민들을 순치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삼청학살을 계획했던 것이다. 사회정화라는 미명하에 전두환과 신군부 파시스트들은 천인공노할 삼청학살을 저질렀다. 전두환과 신군부 치하의 한국은 이미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삼청교육대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1980년 8월 5일 대통령 최규하는 중장 전두환을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3월 1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불과 5개월만에 대장 계급을 달았다.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8월 13일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군사재판에 회부된 광주민중항쟁 관련자들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1980.8.16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 반란세력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로 김대중을 지목하여 내란혐의로 기소하였다. 8월 14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8월 16일에는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듯 물러남으로써 국보위의 정치적 정지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8월 22일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국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전두환, 1980.9.1

뒤에 있는 사람은 강제로 퇴임당한 전 대통령 최규하  

 

1980년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9월 17일 육군 계엄사령부 보통군법회의는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혐의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은 이에 불복해 고등군법회의에 항소했다. 김영삼과 김종필을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시킨 전두환 정권과 신군부는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정치적 도전세력들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다.

 

전두환 군부학살정권은 10월 23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에게 비상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등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보장하는 개정 헌법을 통과시켰다. 개정 헌법의 가장 큰 독소조항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여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선택권을 봉쇄하고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협박과 회유 속에 한국 국민들은 또 한번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10월 27일 국무총리 남덕우는 대통령 전두환을 대리하여 주재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회의에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국회와 정당,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해산되었고 국보위는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되었다. 제3, 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은 자동적으로 해산되었다. 

 

신군부의 어용기관이었던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과 신군부의 원활한 민정이양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10월 28일부터 이듬해 제11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날인 1981년 4월 10일까지 존속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국가보안법 개정안, 노동법 개정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대통령 간선제 선거법안 등 수많은 악법들을 통과시켰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는 대통령이 임명한 신군부, 공무원, 종교계, 학계, 전몰군경 유가족 등 81명이 참여했다. 의장은 변호사 이호가 맡았다. 입법의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계 참여자는 정래혁(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박명근(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남재희(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정석모(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장승태(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채문식(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한영수(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고재청(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유한열(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오세응(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손세일(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권중돈(전 국방부 장관, 신민당), 유옥우(전 신민당 의원), 김윤환(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신상초(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이종률(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김철(구 통일사회당), 이태구(구 통일당), 조종호(윤보선 전 대통령 비서실장), 진의종(전 보건사회부 장관) 등 20명이다. 
 

경제계는 정수창(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유기정(중소기협 회장), 박태준(한국철강협회 회장) 등 3명, 학계는 김상협(고려대 총장), 정의숙(이화여대 총장), 권이혁(서울대 총장), 서명원(충남대 총장), 안세희(연세대 총장), 박봉식(서울대 교수, 국제정치학), 박승재(한양대 교수, 정치학), 김대환(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나창주(안보연구원장, 정치학), 김만제(한국개발원장, 경제학), 한기춘(전 연세대 교수, 경제학), 박일경(명지대 교수, 헌법), 윤근식(성균관대 교수, 정치학) 등 13명이다. 

법조계는 변호사 정희택, 이태청, 이진우, 윤길중, 김사룡, 이병호, 이범렬, 임영득 등 8명이 참여했다. 종교계에서는 강신명(목사), 이병주(성균관 재단이사장), 이영복(천도교 교령), 서경보(불교, 철학박사), 조향록(목사), 전달출(신부, 매일신문 사장), 김봉학(YMCA 이사장), 이종흥(신부) 등이 들어갔다. 여성계는 김정례(여성유권자연맹 회장), 김행자(이화여대 교수, 정치학), 안목단(군경미망인회 회장), 이경숙(숙명여대 교수, 정치학) 등 4명, 노동계는 정한주(노총 위원장) 1명이다.

 

문화사회계는 이호(대한적십자사 총재), 송지영(문예진흥원장), 정범석(대한교련 회장), 박인각(이북5도 대표), 김준(새마을연수원장), 권정달(예비역 장성), 박윤종(전 광주시장), 이정식(실업인), 이종찬(전 주영참사관) 등 9명이다. 언론계는 방우영(조선일보사 사장), 이원경(합동통신사 회장), 이진희 (문화 경향 사장) 등 3명이고, 향군대표는 이맹기(재향군인회 회장), 이형근(반공연맹 이사장) 등이 참여했다. 국보위 대표로 이광노(전 내무위원장), 이기백(전 운영위원장), 심유선(전 재무위원장), 조영길(전 보사위원장), 이우재(전 교통위원장), 김영균(전 법사위원장), 노재원(전 외무위원장), 박종문(전 농수산위원장), 정태수(전 문공위원장), 서동렬(전 국방연락실장) 등 10명이 들어갔다.

 

11월3일 고등군법회의는 김대중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판결에 불복한 김대중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11월 12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치인 8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다. 재심을 청구한 569명 가운데 268명은 구제됐다. 정치인들이 재심을 청구해 규제대상에서 풀린다는 것은 곧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협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신군부의 정치규제 조치는 관제야당이 출현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981년 1월 15일 신군부와 구 민주공화당 인물들은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에 전두환을 추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체제 확보에 다당구도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의 개정을 통해 정당의 창당과 존속을 용이하게 만든 이들은 야당 창당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을 했다.

 

신군부의 방조 아래 정치규제에서 제외된 구 신민당 의원들이 주축이 된 민주한국당(민한당, 총재 유치송), 공화당과 유정회 출신들이 주도한 한국국민당(국민당, 총재 김종철)을 비롯해서 민권당, 민주사회당, 신정당, 안민당, 민주농민당 등이 급조되었다. 이들 어용야당들은 정권획득이 목표가 아니라 5공 집권세력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위성정당에 지나지 않았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함으로써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사법부도 전두환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사형이 확정되자 국내외적으로 김대중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두환에게 서한을 보내 감형을 요청했고,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전두환 정권의 사법살인을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 중단 압력이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4일 24시부로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해제하였다.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7,478명은 1년에서 5년 사이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국방부는 삼청교육대 사망자가 병사 36명, 구타사 10명, 총기사고 3명, 안전사고 2명, 미상 1명 등 총 57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는 거짓 투성이였다. 독재자 전두환에 충성하는 국방부는 이미 국민을 위한 국방부가 아니라 범죄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는 전두환, 1981.3.3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90.1%의 지지를 얻어 7년 단임제의 1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이었다. 3월 25일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2명씩 선출하는 지역구 의원과 정당별 득표율 및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간접 선출하는 전국구 의원 등 276명을 선출하는 11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 선거의 제1당에 전국구 의원정수의 2/3를 무조건 배정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1/3은 제2당 이하의 정당들이 의석비율에 따라 나누도록 하여 제1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였다. 

 

신군부는 국회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다른 정당의 공천과정에도 개입을 했다. 이들은 허울뿐인 혁신정당을 의회에 진출시키려고 전략지역구를 선정하기도 했다. 민정당의 2중대와 3중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민한당과 국민당은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 강남구에서 출마한 민주사회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았다.

 

민정당은 90개 지역에서 당선되어 전국구 의석의 2/3인 61석을 합쳐 151석으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민한당은 지역구 57석 당선에 전국구 24석을 합쳐 81석으로 제1야당, 국민당은 지역구 18석에 전국구 7석을 합쳐 25석으로 제2야당이 되었다. 민주사회당과 민권당, 신정당은 각각 2석을 얻었다. 그외 안민당과 민주농민당은 각각 1석을 건졌다. 무소속은 11석을 얻었다.

 

국난극복기장 

 

1981년 3월 어느 날 전군 장병들에게 국난극복기장이 수여되었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권력을 잡은 기념으로 준 것이었다. 이 기장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 아무 의미도 없이 남발된 기장일 것이다. 국난이란 광주민중항쟁을 뜻했다. 그러니 이 기장은 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된 시민군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주받을 이 기장을 받아야만 했던 필자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소집해제 송별연, 가운데는 필자와 여단장, 1981.6 

 

1981년 6월 30일 필자는 7공수특전여단 32대대 1중대 부중대장을 마지막으로 2년 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군생활중 매일 아침 1시간의 무술단련과 일주일에 두 번의 10km 무장구보, 1년에 한번의 천리행군, 1년에 4회의 낙하산 강하훈련으로 필자의 체력과 담력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체력과 담력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감을 주었다. 한마디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제대 3개월 뒤에는 결혼도 했다. 연말에는 첫 딸이 태어났다. 필자는 충청북도 교육위원회(지금의 교육청)로부터 중등학교 발령을 기다렸다. 당시 국립 사범대학 출신은 지금처럼 교원임용고시를 치르지 않아도 우선적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1982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대중은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김대중은 뉴스위크지 등 각종 언론과의 회견을 통해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하는 한편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또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점차 악화되어가는 한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대중은 귀국을 결심하였다. 

 

1983년 3월 1일 필자는 충북 괴산군 감물면에 신설된 목도중학교 감물분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담당은 국어과목이었다. 처음에 감물분교는 감물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병설로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에 교사를 신축하고 감물중학교로 독립하였다. 

 

1983년이 되자 김대중은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측근은 물론 미국 정부까지 나서서 김대중의 귀국을 만류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잔여형기 집행을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 현장, 1983.10.9

 

1983년 10월 9일 전두환이 서남아시아와 대양주 6개국 공식 방문중 첫 방문국인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버마의 전 대통령 아웅산의 묘소 참배가 예정된 전두환을 암살하기 위해 조선 비밀공작원들이 자행한 테러였다. 전두환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서 도열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동력자원부장관 서상철, 대통령비서실장 함병춘, 경제담당 대통령 수석비서관 김재익 등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은 6개국 순방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버마 당국은 이 사건이 조선인민군 정찰국 특공대 소좌 진모, 상위 김민철, 상위 신기철이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버마 정부는 11월 4일 조선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양곤에 있는 조선대사관 직원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당시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는 전두환의 6개국 순방에 맞춰 기념우표 6종을 발행했다.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체신부는 기념우표를 회수했다. 우표수집이 취미였던 필자는 회수하기 전에 6종 기념우표 전지 1장, 시트 2장씩을 사두었다. 버마 방문 기념우표를 제외한 나머지 5종 기념우표는 이상하고도 특별한 우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발행된 우표를 만날 확률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였다. 수집가들은 바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발행된 특이한 우표에 높은 가치를 매겼다.     

 

 민추협 시절의 김대중과 김영삼, 1984

 

1984년 5월 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추종하던 신민당의 양대 소장파로서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를 받은 정치인들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였다. 민추협은 김대중-김영삼 공동대표 체제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미국으로 추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동교동계의 김상현이 대표직무대행을 맡았다. 11월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1985년 1월 18일 12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추협을 기반으로 김상현을 비롯하여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된 구 신민당 중진 김재광, 이민우, 이기택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당시 신민당의 총재는 이민우였지만 신민당에 대한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의 암살과 재수감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다. 이때 미국 하원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했다. 미국 정부는 전두환이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에 있던 그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전두환은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포공항 입국장을 나온 김대중은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신생 야당 신민당의 위력을 잠재우기 위해 창당한 지 겨우 25일 밖에 안된 2월 12일 12대 총선을 실시했다. 그러나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둔 신민당은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 등 총 67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민정당 2중대 민한당을 제치고 제1 야당으로 떠올랐다. 그 후 민한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이 가세한 신민당은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986년 2월 필자는 국립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이 해 김대중은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취임이 저지되었다. 12월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자 이철승 등 내각제 개헌파들이 이에 가세했다. 이민우, 이철승 등 내각제 개헌파와 양김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의 충돌로 신민당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이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알아내려는 전두환 독재정권의 공안당국에 붙잡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고 기도했다.

 

1월 15일 경찰은 조사를 받던 박종철이 자기압박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종철의 부검의였던 중앙대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했다. 이에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1월 19일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이며, 고문 가해 경찰은 경위 조한경과 경사 강진규 2명뿐이라고 정정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정정발표에도 불구하고 연행시간과 결정적인 사망 경위, 고문 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이 밝혀지지 않은 채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는 설득력이 전혀 없는 해명과 함께 고문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고, 광주민중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내무부 장관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코메디 같은 말로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강민창과 정호용의 말은 한동안 전두환 군부학살정권의 비도덕성을 풍자하는 유행어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대통령 전두환, 1987.4.13

 

1987년 3월 1일 필자는 충주시 산척면의 산척중학교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산척면은 필자의 고향이기도 했다. 필자는 고향에서 민주화와 농민운동를 위해 의기투합한 선후배들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출방법을 둘러싼 개헌논쟁을 종식시키고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평화적 정권이양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는 구실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속셈이었다.   

 

통일민주당 인천 동북구 지구당 창당 방해사건, 우측은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일명 용팔이 김용남

1985.4.23  

 

5월 1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파 의원 74명을 이끌고 내각제 개헌파 이민우의 신민당을 집단 탈당한 뒤 새로운 야당인 통일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동원해서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로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기관이 야당의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것은 한국 역사의 수치였다. 안기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창당되었다. 당세를 정비한 통일민주당은 4.13 호헌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종교계와 협력하여 호헌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광주민중항쟁 7주기 추도미사 도중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사제단의 끈질긴 추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일기 증언에 의해 이 사건의 은폐, 조작 경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황적준이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의 부검소견서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고 증언하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언론은 최초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 고위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 보도했다. 보도를 통해 대공경찰의 대부라고 불리던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축소 조작한 뒤, 희생양이 된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준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데 앞장섰던 강민창은 치안본부장직을 물러났다. 이어 치안본부장 강민창, 치안감 박처원, 경정 유정방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되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살인적인 폭압성과 불법성이 여지없이 폭로된 이 사건은 6.10 민주대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5월 27일 통일민주당은 사회단체 등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대통령직선제개헌 관철을 위한 집회와 시위 등 장외투쟁을 강화하였다. 전두환 파쇼정권의 폭압성과 불법성에 분노한 국민들은 호헌반대 서명운동과 함께 삭발, 단식 등의 저항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이한열, 1987.6.9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 철폐 6. 10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시위과정에서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한열은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 총처럼 직격으로 발사한 SY44 최루탄을 머리에 맞은 것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1면 머릿기사에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야만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전세계에 고발하였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촉구하는 시민들의 시위, 1987.6.10

  

서울 남대문 대로에서 호헌철폐'를 외치며 시위중인 시민들, 1987.6.10

  

 군산시청 앞 대로에서 6.10 민주대항쟁에 참가한 시민들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같은 날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주임사제 이한우 신부)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때부터 전두환 독재정권의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6.10 민주대항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6월 11일 국민운동본부는 명동성당에서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를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6월18일 전국 16개 지역 247곳에서 1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열렸다. 종로에서는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봉기했고, 동대문에서는 2천5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면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부산 서면로타리에서는 30여만 명의 시민이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가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을 벌이자 전국적으로 이에 호응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8개 도시에서 130여만 명이 참가했다. 이날 시위로 전국의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타고 3,467명의 시민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시국수습책을 발표하는 민정당 대표 노태우, 1987.6.29

 

1987년 6월 29일 국민들의 저항에 굴복한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항의 시국수습책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노태우의 6·29 특별선언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6·29 선언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문제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기만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각성된 민중들은 6·29를 '속이구'로 불렀다.    

 

국민운동본부와 재야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착수, 양심수 전원석방과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태우의 6·29 선언은 전국민적 항쟁에 직면하여 위기에 몰린 5공 군사반란집단이 내놓은 일시적인 양보조치에 불과했다. 절대권력자였던 전두환의 묵인 없이 노태우 단독으로 6·29 선언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6·29 선언은 국민운동 지도부와 김대중, 김영삼을 분열시키고 민주대연합을 와해시키려는 전두환 5공 정권의 전술이었다.   

 

6.29 선언 당시 노태우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의식해서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5공의 내각제 헌법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는 박철언의 주도하에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들이었던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이 6·29 선언문을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이한열 영결식에 모인 100만 명의 추모인파, 1987.7.9

 

1987년 7월 5일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이 마침내 스물 두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7월9일 이한열의 영결식이 열린 서울시청 광장에는 시민, 학생 등 1백여만 명이 운집하여 광화문 일대에서 대통령 선출권을 되찾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7월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수용하여 김대중 등 2,335명을 사면 복권하고, 357명을 석방했으며, 270명을 수배 해제했다. 6·29 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12월 16일로 예정되었다.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국 대학 총학생회 협의체인 1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출범하였다. 전대협 초대 의장에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인 이인영이 선출되었다. 

 

노태우의 6·29 선언을 이끌어낸 통일민주당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자 선출문제를 놓고 김대중계와 김영삼계가 서로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던 날인 10월 29일 김대중계 의원들은 통일민주당에서 집단탈당하여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통일민주당은 양김의 분열로 창당 5개월여만에 분당되고 말았다.  

 

13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주요 후보는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와 통일민주당(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평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이었다. 그외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사회민주당의 홍숙자, 일체민주당의 김선적, 무소속의 백기완 등 4명의 군소후보도 출마했지만 전혀 변수가 되지 못했다. 백기완은 재야운동권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출마하였으나 군정종식을 위한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

 

세인의 관심은 단연 이른바 '1노3김'에 모아졌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동지였다는 점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후보단일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이했다. 야권의 분열은 민주적 정권교체를 갈망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병 중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구와 경북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노태우는 집권 여당의 이점을 살려 친여지역인 강원과 충북의 지지를 기대했다. 김영삼은 연고지인 부산과 경남,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지지표를 모아 갔다. 광주학살 주범중 1인인 노태우는 호남에서 달걀과 돌세례를 받고 유세를 중단해야만 할 정도로 배척을 받았다. 김영삼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전역당했던 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영입하여 지지율이 한때 40%을 넘어서기도 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과 선거일 바로 전날 용의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선거전은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돌아섰다. KAL기 폭파사건 공식적으로 북한이 저지른 것으로 발표되었다. 만약 북한이 KAL기 폭파사건을 일으켰다면 신군부 반란세력과 한통속인 셈이었다. 한편에서는 KAL기 폭파사건이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정보기관이 자행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12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결과 노태우는 36.6%의 지지를 얻어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28%, 김대중은 27%, 김종필은 8.1%을 각각 얻었다. 만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단일화를 했다면 노태우를 물리치고 군사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백기완은 양김의 대통령 욕심으로 군사정권의 종식이 실패하자 보수 야당과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1988년 1월 11일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는 광주민중항쟁의 치유책을 마련하기 위해 이회창 전 대법관 등 명망가 55명으로 구성된 민주화합추진위(민화위)를 만들었다. 노태우는 광주민중항쟁에서 비롯된 지역감정이나 갈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권이 불안정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민화위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책임을 전두환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면죄부를 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화위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5.18 광주민중항쟁에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부여했다. 민화위의 건의에 따라 노태우는 정부의 사과와 피해자 보상 등 치유책을 마련했다.

 

취임 선서를 하는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1988.2.25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공 군사반란세력의 후신인 민정당의 노태우가 민주진영인 야당의 분열로 정권을 잡았으나 계속되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4월 26일 총 299명(지역구에서 224명,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75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제13대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은 125석으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였다. 평민당은 70석으로 제1 야당, 민주당은 59석으로 제2 야당이 되었다. 공화당은 35석, 한겨레민주당은 1석을 얻었다. 무소속은 9명이 당선되었다. 민화위 활동과 야당의 분열로 총선 승리를 낙관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당은 국민들의 냉정한 심판을 받았다.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현대중공업 회장 정몽준은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 동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필자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보수신문 일색인 한국에 진보적 논조의 일간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한겨레신문 창간주주로 참여했다. 한겨레신문이 프랑스의 진보적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 같은 신문이 되기를 기대한 필자는 충주지국장까지 맡았다. 그러나 후에 한겨레신문이 경향신문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지국장도 그만두고 신문구독도 끊었다. 나중에는 한겨레신문 주식까지 액면가로 내놓았다. 진보정당을 무시하고 노무현과 민주당을 지지한 한겨레신문은 기껏해야 중도보수 신문일 뿐이었다. 한겨레신문은 필자가 바라던 신문이 아니었다.  

 

1988년 6월 5일 결성된 삼청교육대진상규명전국투쟁위원회(삼청투쟁위)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노태우 정권에 요구하였다. 삼청투쟁위가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 사회문제화되자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자행된 사상 유례없는 비인도적인 인권유린 사건인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약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피해사례를 접수하자 군부대내 사망자 54명, 후유증 사망자 397명, 부상자 2786명, 행방불명자 4명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다. 전두환과 함께 삼청학살 주범 가운데 한명인 노태우 정권이 인권유린이 자행된 지 8년이 지나서 발표한 이 통계도 그 정확성이 의심스러웠다. 여러 가지 정황이나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볼 때 삼청학살의 축소 은폐 의혹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명예회복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삼청학살 주범 노태우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국회 5공특위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민주당 의원 노무현, 1988  

 

여소야대 정국으로 노태우 정권과 민정당은 궁지에 몰렸다. 야당의 주도로 1988년 6월 27일에는 제13대 국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불법과 비리를 파헤치기 위한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 위원장 민주당 이기택)', 7월 13일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광주특위, 위원장 평민당 문동환)'가 설치되었다.

 

5공비리특위(5공특위)는 전두환 정권 당시 각종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전두환 개인연구소 일해재단, 새세대 심장재단, 새마을본부, 전두환일가 해외재산도피, 연희동 사저, 노량진수산시장 비리, 국제그룹 등의 부실기업정리, 삼청교육대, 미국 노드럽사 전투기 도입 스캔들 등 44건의 조사에 들어갔다. 광주특위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과정,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광주민중항쟁 유혈진압에 대한 미국의 역할, 공수부대의 지휘책임, 광주학살 발포명령 책임자 등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펼쳤다.

 

5공특위와 광주특위 청문회는 처음부터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민주당은 5공특위를 주도했고 평민당은 광주특위를 주도하였다. 김영삼이 청문회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김대중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김대중은 청문회보다 노태우와 중간평가합의 등의 논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이해찬, 이상수와 함께 노동위원회 3총사로 불리던 노무현은 청문회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광주청문회에 불려나온 증인들 가운데는 필자가 아는 사람도 꽤나 많았다. 증인들은 하나같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거짓 증언들을 늘어놓았다. 광주청문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발포 명령은 최고 권력자만이 내릴 수 있는 사안이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는 전두환이었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할 수 없었다. 국민들은 이 뻔한 사실도 규명하지 못하는 광주청문회에 분노했다. 국민들은 정치적 사건의 규명은 정치인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9월 17일부터 서울에서 159개국 8465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24회 하계 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이후 올림픽 유치에 관해 결코 유쾌하지 못한 무수한 뒷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올림픽 대회 개막식에서 대통령 노태우는 공식 개회선언을 하였다. 아시아 국가들중 두번째로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노태우 정권의 이미지 개선에 큰 역할을 했지만, 5공특위와 광주특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희석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1988년말 노태우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4인은 4당 영수회담을 열고 광주민중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만 희생양으로 삼는 선에서 5공특위와 광주특위를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노무현을 비롯한 민주당과 평민당 소장파 의원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무현은 집권당의 방해 때문이라면 청문회가 공전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존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언젠가는 5공비리와 광주학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989년 1월 온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5공특위와 광주특위는 민정당이 불참함으로써 파행으로 치달았다. 3월 22일 결국 청문회의 무기한 연기가 결정되면서 5공비리특위와 광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같은 달 재야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전국적인 통합조직으로 민중해방과 자유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출범시켰다. 전민련은 결성선언문에서 반외세 자주화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에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민련은 출범 당시 서울민족민주운동협의회 등 12개의 지역운동통합단체와 전노협 등 8개의 부문운동통합단체, 200여개의 개별운동단체가 참여했다. 이후 전민련은 각종 경제관련 정책에 대한 비판 및 대안 제시, 국가보안법 등 악법개폐운동, 주한미군 철수 등 반외세투쟁 등을 주도하였다.

 

문익환 목사 

 

3월 25일 전민련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조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민주당 당원 유원호, 재일동포 정경모와 함께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조선 주석 김일성에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도 회담했다. 문익환은 김일성, 허담과 회담후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내외신기자 회견을 갖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에 대한 합의성명을 발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교조 창립대회, 1989.5.28 

 

5월 28일 연세대에서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기치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었다. 1987년 9월 27일 결성된 전국교사협의회를 모태로 출범한 전교조는 유치, 초등, 중등 교원을 조합원으로 한 진보적 성격의 노동조합으로 민주노총에도 가입하였다. 전교조는 노태우 독재정권의 용공조작 등 비열한 탄압으로 많은 교사들이 감옥에 가고 해직되었다.

 

당시 전교조 조합원이었던 필자도 연세대에서 열린 역사적인 전교조 창립대회 현장에 있었다. 교육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필자는 국가보안법과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노태우 군사정권의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해직되었다.

 

전대협 대표로 평양을 방문한 임수경 

 

6월 30일에는 한국외대 4학년 임수경이 비밀리에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3기 전대협 대표(전대협 의장 임종석)로 조선을 방문했고, 7월 1일에는 전남 함평출신 평민당 의원 서경원이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는 사건이 터졌다.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 등이 방북하고 전교조가 결성되자 노태우 정권은 공안탄압정국을 조성하였다.  

 

1989년말 우여곡절 끝에 5공특위는 전두환을 증인으로 채택한 청문회를 속개하기로 결정하였다. 4당 지도부는 전두환이 청문회에서 증언하되 서면을 통한 질문에 종합적으로 답변하고 보충질문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로 타협했다. 이것은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에게 일방적인 해명의 기회를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문권을 봉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평민당과 민주당 지도부가 이처럼 어이없는 합의를 하자 질문권을 계속 주장하기로 하고 미리 작전까지 짜 놓았던 양당 소장파 의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12월 31일 밤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은 5공비리에 대한 직접개입을 전면부인하고 변명성 발언으로 일관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의 대국민 연설이었다. 전두환의 모르쇠로 일관하는 발언이 시작되자 전국각지에서 국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전두환의 국회 모독행위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국회에 대한 모독행위는 바로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평민당 소장파 의원들은 원내총무실과 대표실을 찾아가 대책을 세워줄 것을 주문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평민당에서 먼저 판을 깰 때까지 항의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평민당 지도부도 민주당과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이 광주학살 대목에서 '자위권 발동…' 운운하며 거짓말을 늘어놓자 평민당 의원 정상용이 참지 못하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명령자 밝혀!'라고 소리치면서 앞으로 뛰어나옴과 동시에 평민당 의원 이철용이 증언대로 뛰어나가며 '살인자 전두환!' 하며 고함을 질렀다.

 

청문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민정당 의원들이 들고일어나 삿대질을 해대자 이에 맞서 평민당 의원들의 맞고함이 시작되었다. 민정당과 평민당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동안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침묵을 지켰다. 이때 민주당 의원 노무현이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소동이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은 퇴장을 했고 노무현은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명패를 집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노무현은 전두환이 아니라 야당답지 못한 민주당 지도부, 궁극적으로는 김영삼을 향해 명패를 날린 것이다.

 

5공비리특위와 광주특위는 정치세력간의 야합에 의해 큰 성과도 없이 유야무야 막을 내렸다. 결국 5공비리와 광주학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으로 남게 되었다. 청문회를 지켜본 국민들은 정치비리 척결은 국회의원 등 정치인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3당합당을 발표하는 대통령 노태우, 1990.1.22

 

노태우 군사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당 총재 김영삼, 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이 힘들고 귀찮았고, 김영삼은 제3당 통일민주당으로는 5년 뒤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김종필은 권력을 누리던 여당 시절이 그리웠다.

 

1990년 1월 22일 대통령 노태우는 밀실야합을 통해 전두환 신군부 군사정권을 계승한 집권여당 민정당과 정치권 민주세력의 일부인 김영삼의 민주당, 구군부를 승계한 김종필의 공화당을 합당해 보수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켰다. 3당야합으로 민자당은 일거에 거대야당이 되었고, 평민당은 외톨이 소수야당 신세가 되었다.   

 

4.26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여소야대를 만들어 노태우 정권의 민정당을 심판했으나 김영삼과 김종필은 민심을 배반했다. 3당야합으로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의 양대 상징이던 김영삼은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었다. 김영삼은 더 이상 민주화의 상징이 아니라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3당야합으로 민자당이 만들어지던 날 성균관대학교 수원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는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단병호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창립대회 직후 경찰은 130여명의 노동조합 관계자들을 연행하였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노동기본권의 쟁취, 비민주시대의 청산 등을 과제로 선언하였다. 노태우 군사정권은 복수노조를 금지하고 노동쟁의의 제3자 개입 등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3당이 야합하고 전노협이 결성되던 날은 공교롭게도 교육민주화를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참여했던 필자가 충주의 산척중학교에서 해직된 날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권의 사법부는 필자에게 징역 6월, 자격정지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필자는 무죄의 신념으로 항소와 상고를 했다. 검찰도 물론 상고를 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 주심 이회창을 비롯한 대법관들은 필자에게 벌금 50만원의 형량을 최종 확정판결했다. 

 

3당야합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일거에 여대야소 정국으로 역전된 직후 이루어진 개각의 성격은 민주세력에 대한 공안통치의 강화와 기득권층을 위한 성장 위주의 정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3당합당으로 힘을 얻은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무노동 무임금을 강행했다. 그 결과 최루탄의 사용이 급격하게 증가되었으며 시국사범이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또 국민들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추진중이던 금융실명제가 전면 보류되었다. 이후 국회는 각종 악법의 날치기 통과 등 반민주적인 운영이 일상화되었다.

 

4월 24일 전국농민협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 등 100여개 농민단체가 연합하여 식량자급형 농업과 환경 보전을 통한 농민의 권익 보호, 민족 자주적 경제건설을 목적으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결성되었다. 8·15 해방 직후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이후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조직인 전농의 강령은 농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제반 법률 및 제도의 철폐, 농업육성과 농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민족의 자주 자립 통일을 위한 농업기반 조성 등이었다. 전농은 신자유주의 농업부문의 시장개방과 무분별한 농축산물의 수입개방의 반대, 추곡수매가 인상 및 수매량 확대 요구, 농가부채해결 및 농정 공약의 이행을 촉구 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무현은 3당합당을 할 때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6월 15일 삼당합당을 반대하는 이기택, 노무현 등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박찬종, 이 철 등 무소속 의원들은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때부터 이들의 민주당을 꼬마 민주당이라 부른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공포, 1990.8.6

 

1990년 8월 6일 민화위의 건의에 따라 노태우 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했다. 이 법이 공포되자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광주항쟁 관련자 보상법 시행으로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 정권과 같은 군사독재정권이라는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민중당 창당대회, 1990.11.10 

 

1990년 11월 10일 6.10 민주대항쟁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 독자출마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도권 합법정당인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상임대표에는 이우재, 정책위원장에는 장기표, 사무총장에는 이재오가 선임되었다.

 

김대중은 3당야합에 의한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위기를 맞았다. 1991년 3월 26일 실시된 기초지방자치단체 의회의원선거에서 평민당과 꼬마 민주당은 크게 패배했다. 패배의 최대 원인은 야당의 분열이었다. 

 

1991년 4월 1일 필자가 전교조에 가입해서 해직될 때까지의 교단생활을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참교육 일기'가 참세상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일기를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교육현장 경험이 당시 교육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던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을 내게 된 것이다.

 

4월 15일 김대중은 3당야합으로 만들어진 거대여당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신민연)와 평민당을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창당했다.

 

 

백골단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한 명지대생 강경대

1991.4.26

   

 연세대 정문에서 경찰의 폭력살인 만행을 규탄하며 강경대의 죽음에 항의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명지대생 강경대의 장례행렬 

 

1991년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및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타도'을 위한 시위를 벌이던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 특수진압부대인 백골단의 쇠파이프 난타로 인해 심장막 내출혈로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태우의 3당야합 정권이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강경대 치사사건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잘 알고 있었던 경찰은 운구행렬이 망월동 묘역으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 당시 필자는 광주의 시민, 학생들과 함께 최루가스를 마셔가면서 운구행렬의 진로를 뚫기 위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이 '쉭~! 쉭~!' 소리를 내면서 도처에서 날아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찰 백골단의 강경대 치사사건은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노태우 3당야합 정권의 퇴진과 민자당 해체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 이후 노태우 독재정권의 폭력적인 공안통치 종식을 요구하는 대학생과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분신한 전남대생 박승희, 1991.4.29

 

1991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2학년생 박승희는 명지대생 강경대를 사망에 이르게 한 노태우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너를 끼얹고 분신하여 5월 19일 사망했다.

 

분신한 안동대생 김영균, 1991.5.1

 

1991년 5월 1일에는 '노태우 군사정권의 공안통치 분쇄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면서 안동대생 김영균이 분신하였다. 김영균은 5월 2일 사망했다. 5월 3일에는 경원대생 천세용이 '6천 경원대 단결 투쟁으로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면서 분신하여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5월 4일에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구속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중 5월 6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창수의 사망직전 안기부(현 국정원)가 개입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장례행렬

1991.5.8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은 '노태우 독재정권의 명지대생 강경대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요구하며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하였다. 5월 10일에는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가 '노태우 독재정권 타도와 노동해방'을 외치며 분신하여 5월 12일 사망하였고, 5월 18일에는 연세대 앞 철교에서 시민 이정순이 '공안통치 종식과 노태우 독재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사망하였다. 5월 18일에는 전남 보성고등학교 학생 김철수가 '노태우 군사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6월 1일 사망했다. 5월 22일에는 광주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시민 정상순이 '노태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하여 5월 29일 사망하였다.  

 

시위도중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질식사한 성균관대생 김귀정

1991.5.25

 

1991년 5월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노태우 독재정권의 명지대생 강경대 폭력살인과 공안통치를 규탄하는 시위도중 경찰 백골단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으로 질식사했다. 무술유단자와 특전사 출신들을 특채한 경찰 백골단은 청색 자켓과 흰색 헬멧을 착용하고 시위현장에서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공포의 대상이었다. 백골단은 군사독재정권의 상징이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당야합정권은 잔인한 경찰 백골단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했다. 

  

경찰이 조작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의 주인공 강기훈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분신 사망이 이어지자 수세에 몰린 노태우 독재정권의 검찰은 사태를 호도하기 위해 분신 사망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간부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했다. 유서대필사건은 독재정권 치하의 국가권력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얼마나 부도덕하고 타락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판단 오류나 실수가 아닌 정권차원에서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이었다.   

 

 외국어대학교에서 달걀과 밀가루를 뒤집어 쓴 국무총리 정원식

 

명지대생 강경대 타살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한 노태우 독재정권은 부도덕하게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날조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려고 기도했다. 또, 1991년 6월 3일 노태우 독재정권은 교활하게도 외국어대학교에서의 6공의 얼굴마담인 국무총리 정원식에 대한 밀가루 투척사건을 역이용해 학생들의 패륜행위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공권력을 동원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무력화시키려고 획책했다.

 

KBS, MBC 등 공중파 방송국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수구보수 언론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노태우 정권의 얼굴마담인 국무총리 정원식에게 항의한 대학생들을 '스승도 못 알아보는 패륜아'로 몰아부치는 등 왜곡과 과장보도를 통해서 여론을 호도하였다. 이처럼 언론들은 선정적이고 편향적인 보도로 노태우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폭력성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진실을 왜곡했다. 밀가루와 계란 투척사건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매도하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이고 몰역사적인 태도였다. 

   

 

   시인 김지하                      서강대 교수 박 홍  

 

하나뿐인 생명을 불사르면서까지 군사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민주화운동 진영에 찬물을 끼얹은 두 장본인은 바로 시인 김지하와 서강대 교수 박 홍이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 김지하는 1980년 감옥에서 석방되자 생명사상을 들고 나와 진보운동 진영과 갈등을 빚었다. 경찰에 의한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분신정국을 맞아 그는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면서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 진영의 치열한 저항을 '죽음의 굿판'으로 비하했다. 박 홍은 노태우 독재정권에 대하여 학생들이 분신으로 저항하자 이를 비난하면서, 분신을 배후에서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수구보수 신문들은 마치 박 홍의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했다. 

 

김지하와 박 홍은 한국판 매카시즘의 광풍을 몰고 왔다. 노태우 독재정권은 검찰에 ‘분신 배후수사'를 지시하였으며, 나아가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예고했다. 김지하와 박 홍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사이비 지식인이자 반민주적 인물로 세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자신의 명성을 악용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린 지식독재자들이었던 이들은 노태우 독재정권의 충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91년 9월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이기택의 꼬마민주당은 민주당이라는 당명으로 합당했다. 김대중과 이기택은 당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2년 2월 8일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 정주영은 보수논객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통일국민당(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정주영의 국민당 창당은 연말에 실시될 예정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2월 25일 홀로서기를 추구하던 박찬종은 정치권의 세대교체와 범국가적 개혁을 주창하며 신정치개혁당(신정당)을 창당하였다.

 

12월 1일 연세대에서 재야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전국적인 결집체로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출범했다. 분열됐던 재야세력을 하나로 모으면서 민족민주운동진영 투쟁의 구심점이자 정치적 대표체가 된 전국연합은 민중생존권 수호, 사회 전영역의 민주개혁 실현, 민족자주권 쟁취와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목표로 활동했다. 출범 당시 전국연합에는 전노협과 전농, 한총련 등 14개 부문 운동단체와 서울, 부산, 광주 등 13개 지역 운동단체를 포함해 모두 27개 전국단체가 참가했다. 이후 전국연합은 총선 및 대선에 대한 공동대응, 범민족대회 참여 등 통일운동의 대중화,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 지원, 국가보안법이나 노동법 등 각종 악법개폐운동 등을 하였다. 

 

1992년 3월 24일 총 299명(지역구 237명, 비례대표인 전국구 62명)을 선출하는 14대 총선이 실시되어 민자당은 149석, 민주당은 97석, 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그외 신정당은 1석, 무소속은 21석을 각각 얻었다. 선거 결과는 민자당의 참패, 민주당의 승리, 국민당의 약진이었다. 국민들은 여당의 일방적인 독주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는 진보성향의 민중당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민중당은 현실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해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말았다.

 

14대 총선에서 이명박은 김영삼의 추천으로 민자당 전국구로 정치에 입문해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 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정몽준은 울산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0월 민자당 내 민정계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종찬은 민주계 수장 김영삼과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자 김현욱, 박철언,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새한국당은 14대 대선 후보로 이종찬을 추대했으나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자 박철언, 김용환 등은 국민당으로 당을 옮겼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김영삼은 내각제 파동, 박철언과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특유의 오기와 배짱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민주당에서는 김대중, 국민당에서는 정주영이 출마하였다. 신정당의 박찬종, 87년 대선 때 후보단일화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백기완도 재야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민중후보로 출마하였다. 그외 무소속의 김옥선, 대한정의당의 이병호도 출마했다. 한국당의 이종찬도 출마했으나 12월 13일 후보를 사퇴하고 정주영 지지를 선언했다.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가 된 14대 대선에서 세인의 관심은 단연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결로 모아졌다. 선거 결과 김영삼 42%, 김대중 33.8%, 정주영 16.3%, 박찬종 6.4%, 백기완 1%로 나타났다. 997만여표를 얻은 김영삼은 804만여표를 얻은 김대중을 약 193만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4대 대선에서도 지역감정은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14대 대선에서 낙선한 김대중은 국회의원직 사퇴와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계은퇴 뒤에도 김대중은 여전히 현실 정치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1993년 1월 김대중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정계복귀를 염두에 두고 현실 정치의 벽을 넘나들었다.     

 

김영삼 정권은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세무조사와 함께 정주영을 대통령선거법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를 함으로써 정치보복을 가했다. 김영삼의 정치보복을 견디지 못한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하였던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김영삼, 1993.2.25

 

1993년 2월 25일 3당야합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였다. 김영삼은 자신의 3당야합 정부를 문민정부라 명명하고 개혁과 부패 일소 정책을 표방했다.

 

1993년 초 육사 31기생이 동기회장을 놓고 난투극을 벌인 끝에 서울 용산의 군인아파트에 회원 명단이 살포되기도 하는 등 하나회의 해악과 불법성이 속속 드러났다. 1993년 4월 2일 김영삼 정권은 군부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강제로 해산시켜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다.  

 

김영삼 정권은 취임 초기부터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 민중 운동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탄압했다. 문민정부는 허울좋은 이름뿐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본질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3월 13일 대통령 김영삼은 종군위안부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일본에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보상을 정부예산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분노한 국민들은 김영삼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4월 25일 고려대학교에서 전국의 대학생 8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출범하였다. 한총련은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를 기치로 내걸고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한총련은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도 가입했다. 

 

한총련은 연세대학교에서의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 시위로 인해 김영삼 독재정권의 대대적 탄압을 초래하였다.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한총련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한총련이 정치적으로 극좌파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한총련의 친북 성향을 좌파로 오해하는 정치이론에 미숙한 한국인들의 판단기준에 의한 것이다. 정치이론상 한총련의 활동은 노동자 계급운동인 좌파적 경향(진보)이 가미된 민족주의 운동(보수)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친북 성향의 민족주의는 보수 우파에 가깝다.

 

6월 3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는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시민과 학생등 1만여명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8월 12일 김영삼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공포하여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 금융거래 질서가 정상화되고 조세부담의 형평성이 커지며, 부정부패 및 사회부조리가 감소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사정 등 지나치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일부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정착에 실패하고 말았다. 금융실명제는 이후 대체입법이 이루어지면서 막을 내렸다. 

 

1994년 김영삼 정권은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3당야합 수구보수당이라는 민자당에 개혁적 이미지를 심으려고 노력했다.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이었던 김문수는 민중당이 창당될 때 노동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이재오는 중앙대학교 재학시절 6.3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하여 제적된 이후 군사독재정권하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5번이나 투옥되었다. 이재오는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거쳐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이 되었다. 이우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농민운동가로 민중당의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이들 3인은 운동권 경력을 바탕으로 수구보수 민자당으로 전향하여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들이다.  

 

필자는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때인 1989년 교직에서 해직된 이후 줄곧 교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법정투쟁과 복직투쟁을 해왔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교육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복직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태우 3당야합정권을 계승한 김영삼 보수정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필자는 해직기간에 평소 하고 싶었던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95년 3월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95년 3월 30일 김종필은 김영삼과 반목한 끝에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은 전 국무총리 정원식에게 패했다. 6월 27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이 그대로 표출되어 민자당의 패배로 나타났다. 6.27 지방선거에서 각 정치세력은 지나치게 지역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선거 막판에 불기 시작한 지역감정 분위기가 그대로 지방분할구도로 이어졌다.

 

민주당 전 총재 김대중은 민주당의 후보 경선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물론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결과 서울시장을 비롯한 광역자치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352명, 광역의회 의원 857명을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민자당은 3당합당의 한 주역이었던 전 대통령 노태우의 비자금 비리가 폭로되는 등 5·6공 비리의혹과 김영삼 정권 출범 후에도 대형사고가 계속 터져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6.27 지방선거에서 이기택은 당내 소수파를 이끌며 '3김 세대교체론'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 선출과정에서 김대중과 맞섰다. 김대중은 민주당 총재 이기택과 결별하고 신당을 창당하기로 결심했다. 7월 17일 김대중은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9월 5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95명 가운데 민주당을 탈당한 65명은 김대중을 총재로 한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회의는 창당과 동시에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 노태우와 반란수괴 혐의로 구속된 피고인 전두환, 1995.11.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이학성 등 군사반란 수괴들과 그 일당. 1996

 

1995년 11월 6일 노태우는 비자금 사건으로, 12월 3일 전두환은 군사반란 수괴 혐의로 구속되었다.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자 재판 당시 처벌된 고위장성들은 대부분 하나회 출신이었다.

 

12월 21일 대통령 김영삼의 지시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같은 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은 개혁신당과 통합하고 통합민주당(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대표는 이기택, 김원기, 장을병이 공동으로 맡았다.

 

11월 1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1993년 6월 결성)를 모체로 사회개혁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결성되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어용성을 비판하면서 출범한 민주노총은 진보적 노동운동계의 대표적 단체가 되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임금투쟁, 합법화와 관련한 노동법 개정 운동, 해고자 복직 운동, 사회개혁 운동 등을 펼쳤다.

 

1996년 1월 김영삼은 전 국무총리 이회창을 민자당에 영입했다. 2월 6일 김영삼의 집권 민자당은 대외적인 이미지 쇄신과 총재인 김영삼의 당지도력 강화를 목적으로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였다. 신한국당으로의 당명 변경은 5.6공과의 단절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명을 바꾼다고 신군부와 구군부 세력을 계승한 3당야합 군사정권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3월 김영삼은 이회창을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하였다.  

 

1996년 4월 11일 총 299명(지역구 253명, 비례대표 전국구 46명)을 선출하는 15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신한국당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통합민주당 15석, 무소속 16석으로 나타났다. 신한국당은 과반수에 못 미치는 139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으나 자민련과 민주당 의원들을 영입하여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국민회의는 야당 분열의 결과 정대철, 이종찬, 김덕규 등 중진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4.11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이명박은 종로에 출마하여 통합민주당 부총재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 이종찬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 담당자 김유찬이 선거비용 7억원을 누락시키고 7천만원만 신고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국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명박은 재판을 받는 도중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후에 이명박은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나 서울고등법원에서 벌금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명박의 범인 도피 혐의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대한축구협회장과 국제축구연맹 부회장 정몽준은 무소속으로 울산 동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MBC 인기 앵커 출신 정동영은 국민회의 후보로 전주시 덕진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3월 11일부터 진행되어 12월 16일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항소심에서 전두환 피고인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원 추징이 선고되었다. 노태우 피고인에 대해서는 징역 15년에 벌금 2626억원 추징이 선고되었다.

 

1997년 4월 17일 상고심 재판부는 12. 12 사건을 군사반란, 5. 17과 5. 18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 두 피고인은 1997년 12월 22일 대통령 김영삼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 두 군사반란 수괴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

   

  5.18 희생자 묘역의 정문인 '민주의 문'

  

 망월동 광주민중항쟁 희생자 묘역 전경

  

 5.18 묘역 통로에 깨진 채 묻혀 있는 전두환의 민박 기념비

  

  전두환 기념비에 대한 안내문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성지로 바꾸자는 움직임은 1990년부터 일어났다. 1994년 11월부터 시작된 '5. 18 성역화 사업'으로 1997년 4월 30일 운정동 산34번지 일대의 5만 280평 부지에 '5. 18 희생자 묘역'이 새로이 조성되었다. 구 묘역에 묻혔던 희생자 영령들은 모두 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광주광역시는 구 묘역을 당시의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사적지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국립5·18민주묘지는 민주의 문, 숭모루, 역사의 문, 추념문, 유영봉안소, 추모탑, 부조, 헌수기념비, 사진자료전시관 등을 갖추었다. 5월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5·18민주묘지는 이 땅에 다시는 독재와 불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준엄한 역사교육의 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를 갈망하는 세계인의 가슴속에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1997년 7월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은 이인제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0월 10일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 패한 경기도지사 이인제는 전 국회의장 이만섭을 총재,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한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11월 21일 신한국당 대표 이회창은 김현철 비리를 비롯 집권말기의 김영삼 정권이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자 김영삼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당명을 변경했다고 3당야합 보수정당이라는 본질을 바꿀 수는 없었다.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집행위원들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12월 3일 김영삼 정권은 취임 4년만에 국민들에게 IMF 구제금융사태(환란)라는 유사이래 최대의 경제위기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외채는 304억 달러에 달했다. 한국은 졸지에 국제 거지가 되고 말았다. 국제신용도는 하락했고, 기업은 줄줄이 부도와 경영위기를 맞았다. IMF 환란으로 알짜 기업들은 헐값으로 외국으로 팔려 나갔고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김영삼은 IMF 구제금융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11월 10일 당시 경제부총리 홍재형과의 전화통화 이전까지만 해도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만큼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IMF 구제금융사태는 사실 박정희 정권이 싹을 틔우고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곪을 대로 곪은 다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져 온 영남지역과 보수세력을 계승한 정권이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의 썩을 대로 썩은 영남 보수세력 정권은 한국 경제를 통째로 말아먹고 거덜내고 말았다. 따라서 IMF 구제금융사태는 김영삼 정권이 경제파탄의 책임을 지고 퇴진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세계화를 내세우며 출발한 김영삼 정권의 경제정책은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15대 대선은 국민회의 김대중,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신당 이인제의 3파전이었다. 그외 국민승리21 권영길, 통일한국당 신정일, 바른나라정치연합 김한식, 공화당 허경영도 출마했다.

 

국민회의 김대중은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과 연대하여 이른바 'DJT 연합'을 구축하면서 충청도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올라갔다. 반면에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표현되는 경제위기에 몰린 김영삼 정권의 지지도는 최악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은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과 신한국당 탈당후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독자출마한 이인제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민중운동진영의 진보세력은 국민승리21을 만들어 권영길을 대선 후보로 촐마시켜 제도권 정치 진입을 시도했다.

 

김대중은 이회창을 불과 1.5% 차이로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써 광복 후 50년만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은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를 지배해온 영남세력을 물리치고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이다. 그만큼 김대중 정권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처음으로 여당에 몸을 담게 되었다.

 

1998년 1월 12일부터 MBC, KBS,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언론기관은 106개 시민단체와 함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맞은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며 금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국민들은 304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를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정부에 매도했다. 전국에서 349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225톤(2조5천억원)의 금을 모아 그 중 196.3톤을 수출하여 18억2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IMF 환란으로 국가 경제를 거덜내고 국민들을 거지로 만든 김영삼 정권에게는 마인 댄스(mine dance, 의식잠재우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MBC, KBS,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기득권층과 독재권력의 나팔수들인 수구보수 신문과 공중파 방송들은 앞장서서 '금모으기 운동'과 '달러모으기 운동'이라는 마인 댄스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환각제를 먹은 것처럼 또 마인 댄스를 열심히 추면서 애국하는 심정으로 금과 달러를 갖다 바쳤다. 사실 국민들은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초래한 경제위기의 실정을 '허리띠를 푼 우리들 탓'이라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영삼 정권의 마인 댄스는 그야말로 도랑도 치면서 가재도 잡는 일석이조의 대성공이었다. 금모으기 운동은 IMF 환란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김영삼 정권은 퇴진의 위기를 모면했다.  

 

김영삼 정권은 취임 초기부터 구호만 요란했던 민주화 개혁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룩하지 못했다. 김영삼의 재임 말년에 발생한 한보그룹 사건 등 굵직한 비리에 연루된 차남 김현철 등과 측근들이 저지른 권력형 비리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샀으며, 김영삼은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김영삼은 역대 최고의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은 채 물러났다.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김대중, 1998.2.25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권은 여소야대의 이른바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가 갖는 한계를 간직한 채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공동정부는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원내 과반수를 차지한 한나라당은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장기간 거부하였다. 또, 한나라당 단독으로 기아자동차 비리에 연루된 자당 의원 강경식과 이신행, 국세청을 동원한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자금모금 의혹 사건인 이른바 세풍사건에 연루된 서상목을 보호하기 위해 방탄국회를 여는 등 여론을 무시하고 다수당의 횡포를 저질렀다.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최종 형량을 선고 받기 직전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자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노무현은 국민회의 후보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후보 정인봉을 물리치고 6년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1998년 8월 필자는 그동안 다니던 한의과대학에 휴학계를 제출하였다. 정부의 특별임용조치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0월 1일 필자는 충북 단양군 단양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거의 10여 년만의 복직이었다. 아이들과 소백산을 오르내렸으며 방학 때는 지리산 종주를 하기도 했다. 종례 시간에는 뒷동산에 올라 소백산 비로봉을 바라보면서 명상을 하기도 했고, 겨울에는 난로에 쌍화탕을 달여서 선생님들이 수시로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단양 읍내에는 단양중학교에 스님 선생이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양호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침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단양중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보람도 있었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1999년 4월 전북지사 유종근의 서울관사에서 거액의 달러뭉치와 귀금속을 도둑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농림부 장관 김성훈의 집에서는 고가의 미술품이 도난당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특별검사제가 도입된 고급 옷 로비 사건도 터졌다. 당시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 그룹 회장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법무부 장관 김태정의 부인 연정희에게 김봉남(앙드레김)이 디자인한 1380만원짜리 호피무늬 반코트를 상납하려다 들통난 사건이다. 전 통일부 장관 강인덕의 부인 배정숙은 이형자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하는 등 로비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국민들은 김대중 정권의 도덕불감증에 분노했다.  

 

6월 7일 발생한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사건은 김대중 정권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발령을 받은 대검찰청 공안부장 진형구는 1998년 당시의 조폐공사 파업을 검찰이 유도했다고 말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진형구는 취중실언이라고 변명했지만 여야 합의에 따라 특별검사제가 도입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치검찰의 타락상이 여지없이 폭로되었고, 김대중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한나라당이 계속 방탄국회를 단독으로 소집하자 국민회의와 자민련 공동여당은 의원 빼가기를 통해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등원거부로 맞섰다. 김대중 정권과 집권 여당 국민회의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1999년 9월 1일 필자는 단양중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교단을 떠났다. 그동안 중단했던 한의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과 아이들, 학부모 모두 필자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학교에서는 조회시간을 열어 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꽃다발도 받았다. 10년 전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교단에서 강제로 해직되었을 때의 그 초라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필자의 발로 떳떳하게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1999년 2학기 필자는 세명대 한의과대학에 복학했다.

 

2000년 1월 20일 국민회의는 16대 총선을 3개월 앞두고 이른바 386세대(1980년대 학번의 30대)의 '젊은 피' 수혈 등 조직을 확대 개편해 새천년민주당(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다. 그리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5백만 표를 얻은 바 있는 당무위원 이인제를 중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해 원내 과반수 의석을 목표로 제16대 총선에 임했다.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2000.1.30 

 

2000년 1월 30일 진보세력의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재창당했다. 당내 주요 세력은 자주파로 불리는 민족해방(NL) 계열과 평등파로 불리는 민중민주(PD) 계열이었다. 자주파 계열은 대의원 숫자에서 우세를 보이며 당내 영향력을 행사했다. 3월 8일에는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조순, 김윤환, 김동주 등이 주도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전 재무부 장관 김용환도 초미니 정당인 한국신당을 창당했다.

 

4월 13일 총 273명(지역구 227명, 비례대표 전국구 46명)을 선출하는 1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 민주국민당 2석, 한국신당 1석, 무소속 5석으로 나타났다. 유권자들은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식의 극심한 정치혐오증을 보여 투표율은 57.2%에 불과했으며, 정국은 다시 여소야대로 돌아갔다. 민주당은 자민련과 의석을 합치더라도 과반수에 미달했다. 

 

노무현은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 을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정몽준은 울산광역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4.13 총선에서 노무현의 낙선을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통해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을 만들었다. 노사모는 당시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던 지역주의 타파를 열망하는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청장년층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었다.

 

필자도 당시 노사모 회원으로 참여해서 잠시 활동한 바 있다. 그러다가 16대 대선이 실시되기 몇 달 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노사모에서 탈퇴하였다. 당시 노무현을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노사모 회원들의 활동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노사모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을 목격하고 차기 대통령은 노무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4개월 뒤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의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6월 13일 김대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조선을 방문하고 6.15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6.15 공동선언문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통일 방향 설정,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을 담고 있었다. 김대중의 조선 방문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월 13일 김대중은 군사독재하에서의 민주화운동,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민주화 운동지지,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냉전관계의 완화,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정립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위원회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훗날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반대하는 수천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월간조선 기자는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으려고 로비를 한 것 아니냐며 집요하게 캐물었다고 한다.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나라에서 반대를 표시하는 편지가 날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편지들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온 것이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 로비로 인해 한국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그는 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대중의 위대함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감명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권은 1960년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정권창출 과정에서 김영삼 정권과 비슷한 방법, 즉 구군부 군사반란 세력인 김종필, 박태준 등과의 연합을 통해서 집권한 것은 김대중 정권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역사적 사명은 민주주의를 보다 발전시키고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을 정책적으로 배려하는 것이었다. 또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경제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IMF 환란의 후유증을 물려받은 위기관리자로서의 김대중 정권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저항을 노사정위원회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적당하게 해결하려고 기도하였다.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도 그대로 존속되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구속은 김영삼 정권 때보다도 오히려 대폭 증가하였으며,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 등 노동악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았다. 또 경제민주화에도 실패하여 국내외 독점자본의 지배를 가속화시켜 김영삼 정권에 이어 우량기업들이 해외로 줄줄이 팔려 나갔다.   

 

김대중 정권은 김영삼 정권과 본질적 차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권인 것처럼 보였다. 대학생들을 포함한 민주화운동 세력은 과거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한국의 민주화를 진전시켰으며, '햇볕정책'으로 남북간의 긴장완화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권대통령(?)에게 전면적인 저항을 할 수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 되었다. 

 

김대중 정권하에서 자본의 자유는 더욱 확대되었고, 그에 반비례해서 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축소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었다. 김대중 정권도 이름만 허울좋은 국민의 정부였을 뿐 김영삼 정권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2000년 12월 학년말 시험을 치른 필자는 원전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아 유급을 하게 되었다. 평소 원전 담당 교수가 학자로서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 필자는 시험 답안지에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써냈다. 그로 인해 이른바 괘씸죄에 걸린 것이었다. 유급이 확정되자 필자는 대학 본부를 찾아가 부총장에게 원전 교수는 교수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후배들을 위해서 퇴출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후에 원전 교수는 학교를 떠났다.   

 

2001년 5월 12일 필자는 백두대간 단독종주를 시작했다. 지리산 천왕봉부터 걷기 시작해서 60일만인 7월 10일 마침내 설악산을 넘어 진부령에 도착했다. 2개월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내려오자 허리 둘레는 10cm, 몸무게는 5kg이 줄어 있었다. 풍찬노숙으로 백두대간을 순례하면서 필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백두대간은 필자의 스승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자타불이(自他不二)! 자리이타(自利利他)!

 

2002년 3월부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국민경선제가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과 국민(50%)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3월 16일 노무현은 광주에서 김근태의 사퇴와 노사모의 활약으로 동교동계 구파의 지원을 업고 대세론에 편승하던 이인제와 동교동계 신파로 분류되는 한화갑을 물리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급상승하면서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4월 26일 노무현은 서울 경선에서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2002년 5월 6일 김대중은 세 아들의 각종 비리의혹 사건 연루설로 물의를 빚고 있는데 대해 사과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장남 김홍일은 나라종금로비 사건, 차남 김홍업은 알선수재와 변호사법 위반, 3남 김홍걸은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한 비리에 각각 연루되었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퇴임 때까지 그를 정점으로 하는 1인 보스 체제와 그를 추종하는 주류 동교동계의 권력 독점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임기말에 이를수록 권노갑, 박지원, 한광옥, 박주선, 임창렬, 유종근, 김옥두 등 김대중의 측근과 친인척에 의한 권력형 비리가 터져나왔다.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했다. 김대중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 지도자로서 흑인들을 해방시키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남아공 국민들은 물론 전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넬슨 만델라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5월 31일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제17회 FIFA 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월드컵 대회에서 브라질이 우승, 독일이 준우승을 했으며, 한국은 4위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까지 오른 것은 월드컵 조직위원장 정몽준의 역할이 컸다.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 진행중이던 6월 13일 지방선거가 일제히 실시되었다. 6.13 지방선거는 48.9%라는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지역주의 조장과 인신공격, 금품살포 등이 난무했다.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 참패, 민주노동당 약진, 자민련 몰락으로 나타났다. 6.13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권, 특히 김대중 정권의 부정부패와 반민중성을 철저하게 심판했다. 자민련과 민주당의 참패는 김대중과 김종필을 퇴출시켰다. 이로써 3김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한나라당의 압승은 김대중의 세 아들과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로 인한 반사이익으로 거둔 것이었다. 한나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못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후보들은 '부패정권 심판하자!'는 구호 하나만으로도 민주당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한나라당은 전국 16개 광역시도 중 11곳을 석권하여 지방정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232개 시장·군수·구청장을 뽑는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140석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서울 25곳 중 22곳, 경기도 29곳 중 24곳, 인천 10곳 중 8곳을 차지하여 수도권에서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현대건설 회장을 역임한 한나라당의 이명박은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지낸 민주당의 정치 초년생 김민석을 물리치고 제32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민주당은 전통적 강세지역인 수도권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참패하고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면서 호남당으로 전락했다. 민주당 후보들은 한나라당과 이회창을 겨냥해 '원조부패론', '부패인물 심판론'으로 맞섰지만 대통령 아들과 측근, 친인척이 관련된 비리의혹과 잇따라 터진 각종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권자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뼈아픈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민주당을 심판하기 위해 표를 몰아준 것이다. 자민련과의 공조가 깨지고 이인제의 경선 사퇴로 충청지역의 민심이 이반된 것도 민주당 참패의 한 원인이었다.  

 

전통적 지지기반인 충청지역에만 사활을 건 자민련은 충남 1곳만 당선돼 창당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민주노동당(노동당)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광역의원 선거에서 8%대의 지지율을 확보해 자민련을 끌어내리고 제3당으로 부상했다. 진보정당의 약진은 기존 보수정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기대심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노동당은 기초단체장 2명과 비례대표 9명을 포함한 광역의원 11명이 당선되고, 정당득표에서도 8.13%를 얻어 전국 정당으로 도약했다. 노동당은 또 2004년 총선까지 22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게 돼 진보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월드컵이 진행중이고 6.13 지방선거가 실시되던 날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월드컵과 지방선거의 열기가 가라앉고 여중생 사망사건이 시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자 미군에 대한 규탄 여론이 확산되면서 시민사회단체의 시위가 잇따랐다.  

 

2002년 9월 5일 필자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것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진보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진보정당에 작은 힘이라도 실어주기 위해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참다운 지식인이나 지성인은 사회의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 또, 지성인은 항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기울어진 사회의 균형추를 맞춰주는 일이야말로 지성인의 사명이다. 

 

2002년 FIFA 월드컵 바람을 타고 11월 11일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정몽준 돌풍으로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민주당은 대선 패배론으로 술렁거렸다. 노무현의 개혁성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골적으로 노무현을 흔들었던 민주당 의원들은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 교체론까지 들고 나왔다.

 

2002년 11월 16일 유시민, 명계남, 문성근 등 친노무현 성향의 정치세력은 부패청산과 국민통합, 참여민주주의, 인터넷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을 창당하였다. 개혁당은 궁지에 몰린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막판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후보를 단일화하기로 합의했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11월 24일 단일후보는 마침내 노무현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은 대선 하루 전날 저녁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 집회 

 

2002년 11월 20일 여중생 사망사건의 가해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 대해 무죄 평결이 나고, 이틀 뒤에는 마크 워커 병장에 대해서도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주한 미군을 규탄하는 여론은 인터넷을 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11월 26일부터 촛불 집회를 열었다. 촛불 집회는 6월 민주대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민적인 항의 시위였다. 국민들은 제 나라 국민도 보호하지 못하는 김대중 정권과 한국을 식민지로 여기는 미국에 항의하는 촛불 시위를 연일 벌였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6.10 민주대항쟁 이후 최초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시국회의가 개최되어 투쟁 방향을 논의하였다. 가톨릭, 성공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종교계도 미국 정부의 무성의함에 항의했다.

 

촛불 시위에 전국민적인 참여 열기가 이처럼 높았던 것은 여중생 장갑차 압사 사건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진상이 규명되지 못했던 주한 미군의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외 2002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부당판정 사건이나 FIFA 월드컵 거리응원도 한몫 했다. 12월 6일 서울에서 3만여 명이 참여한 집회에서 시위대는 경찰저지선을 뚫고 미국대사관 진출에 성공하였다. 12월 14일 부산 집회에서 시위대는 부산진구의 주한 미군 히야리아 기지(Camp Hialeah) 정문의 경찰저지선을 돌파했다.

 

전국 각지에서 주한 미군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반미 여론이 확산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1월 27일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대통령 부시의 간접적인 사과를 전했다. 12월 13일 부시는 김대중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시 한 번 유감을 표하고, 불평등 식민지 조약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주한미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in Korea, SOFA)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소파(SOFA) 개정 논의가 있었으나 김대중 정권의 무성의와 군부 등 미국에 의존적인 보수 세력들에 의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주요 대선 후보는 민주당의 노무현, 한나라당의 이회창, 노동당의 권영길이었다. 그외 하나로국민연합의 이한동, 국태민안호국당의 김길수, 사회당의 김영규 등도 출마하였으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선거의 양상은 처음부터 민주당의 노무현과 한나라당 이회창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노무현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었고, 이회창은 '부패정권 심판, 정권 교체' 등을 주장했다.

 

선거 결과 투표에 참가한 2476만여 명중 노무현은 1201만여 표(48.9%)를 얻어 1144만여 표(46.6%)를 얻은 이회창을 물리치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2.19 대선은 선거 사상 처음으로 지지자에 대한 세대간 대결 양상이 벌어졌다. 20~30대 등 젊은 세대는 개혁 성향의 노무현을 지지한 반면에 50~60대 등 안정을 바라는 중장년 세대는 보수 성향의 이회창을 지지했다.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근거지인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지역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은데 이어 호남에서 9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려 지역감정이 여전함을 보여 주었다.

 

노동당 후보 권영길은 95만여 표(3.9%)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권영길은 텔레비전 토론 등을 통해 급진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진보정당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필자는 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충북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공간을 통해서 필자를 비롯한 노동당원들은 유권자들에게 권영길 후보의 홍보와 함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노무현, 2003.2.25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정권의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노무현 정권은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지지와 김대중 지지세력에 힘입어 집권할 수 있었다. 국민들은 소외계층의 사회적 권리와 복지를 중시하는 쪽으로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과의 대결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국민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2003년 7월 이명박은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청계천을 시민 문화시설로 변화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상 문제가 불거지는 등 문제점도 많았다.

 

이명박은 시장 재임내에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청계천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기 때문에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 물을 사용하게 하였다. 또,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문화재들을 파괴하거나 훼손함으로써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상류를 복원하지 않음으로써 청계천 유지비로 연간 69억 6000만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계천을 새로 만들 경우 유지보수의 한계성 때문에 2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청계천의 개발로 이곳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서울시 행정부시장 양윤재가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 기소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는 비리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2003.11.11 

 

2003년 11월 11일 친노무현 성향의 개혁당과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민주당내 개혁세력이 합쳐서 열린우리당(우리당)이 창당되었다.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 등을 4대 강령으로 내건 열린우리당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면서 전국정당을 표방했다. 

 

2003년 11월 18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제88차 회의에서 필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면 특별사면과 복권, 전과기록의 삭제, 복직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피해보상이었다. 국가유공자는 물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정부차원에서 충분한 보상과 예우를 해준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피해보상과 예우를 해주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이 진정한 참여정부라면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해 국가유공자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준한 피해보상과 예우를 해주었어야만 한다. 피해보상이 없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은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박대 이것이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자 한계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피해보상과 예우는 차기 정권의 몫으로 넘어갔다.

 

2003년 12월 29일 16대 국회에서 '삼청교육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재적의원 206명중 찬성 193표, 반대 2표, 기권11표로 통과되었다. 그동안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단체 소송을 벌였으나 사법부는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하곤 했었다. 국가 공권력이 자행한 범죄행위에 대해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은 책임을 지지않으려 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예속된 사법부도 독재자들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렸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도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신군부와 구군부 파시스트들과 3당야합을 했던 김영삼은 그렇다 치자. 인권을 중시하고 민주화 투쟁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김대중 정권의 삼청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 실종은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으로 인해 노벨 평화상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노벨 위원회는 김대중에게서 노벨 평화상을 회수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2004년 1월 29일 '삼청교육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 노무현의 결재를 받아 관보에 실려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야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게 비로소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명예회복과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폭력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이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다쳤지만 가해자는 단 한 사람도 실형으로 구속되거나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다. 인권을 유린한 삼청학살의 비인도적 범죄자들에게 실정법상 책임을 묻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가치가 없다. 그런 국가는 더 이상 법치국가도 민주국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삼청학살의 야만적 범죄행위는 군부대 안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사진 같은 확실한 증거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가해자들이 삼청학살 범죄행위의 증거들을 인멸시켰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파공작원을 위한 특별법과 삼청교육에 대한 특별법 제정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보상을 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도 삼청학살의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가해 당사자인 민정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광주특위와 5공특위 때처럼 사활을 걸고 진상규명을 방해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2004년 2월 20일 필자는 민주노동당 충주지구당(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세가 약했던 충주지구당은 지구당 사무실조차도 마련하지 못해 민주노총 충주지회 사무실에서 곁방살이를 해야만 했다. 단 1명의 상근자인 사무국장의 상근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얼마후 당원배가운동으로 당원들이 증가하면서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2월말 필자는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8년만에 졸업했다.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동조하에 민주당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출신 국회의장 박관용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여당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노무현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탄핵소추안 가결로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고 국무총리 고건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은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민의 70%가 탄핵을 반대했다.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광화문 일대를 비롯하여 전국각지에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4월 15일 총 299명(지역구 243명, 비례대표 전국구 56명)을 선출하는 17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탄핵에 반발한 유권자들의 탄핵 후폭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 152석, 한나라당 121석, 민주노동당 10석, 민주당 9석이었다.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얻어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 열린우리당은 최초로 원내 과반수을 차지하였다. 탄핵정국으로 갑자기 치솟은 노무현의 인기를 등에 업고 검증도 안된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비례대표 22번으로 출마한 열린우리당 선거대책위원장 정동영은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한 취지로 '어르신들은 투표를 안하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분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젊은이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걸려있기 때문에 투표를 꼭 해야 합니다'라고 한 발언으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열린우리당에 적대적이었던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수구보수 신문들은 정동영의 발언중에서 유독 굵게 표시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이것이 노인 폄하 발언이라는 논란이 일자 정동영은 열린우리당 선대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비례대표를 반납하였다.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받은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여 참패가 예상되었음에도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121석을 얻었다. 총선 전 전당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을 물리치고 총선 승리 공약으로 대표에 선출된 박근혜의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거대여당 견제론에 바탕을 둔 선거운동으로 한나라당은 참패를 모면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한나라당을 살린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 등 10석을 얻어 최초로 원내 정당이 되었다. 민주노동당 충주지구당 위원장이었던 필자는 충주지역 선거운동의 책임을 지고 17대 총선에 임했었다. 충주는 총선 후보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명부 득표율을 올리는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필자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개원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선 후보로 출마할 수 없었다.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어 노동당에 밀려 제4당으로 몰락했다. 탄핵에 앞장섰던 야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치일선에서 퇴출되었다.

 

국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그러나 입으로만 진보와 개혁을 외치고 다니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노무현 정권은 '국민참여의 시대를 열겠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을 중단하겠다.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면서 요란하게 출범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민중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 협상을 강행했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한국과는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이라크에 수천 명의 국군을 파병했으며, 새만금 방조제를 허가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환경범죄를 저질렀다. 또, 집회와 시위 등 국민들의 정당한 국민참여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짓밟고, 비정규직을 찬바람 부는 길거리로 내몰았다. 

 

북유럽식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모색하겠다던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인간을 비인간적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길로 달려 나갔다. 변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에서도 쓰라린 배신을 당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을 복지국가는 커녕 다국적 기업의 자본수탈을 보장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시장국가로 만들었다. 

 

'입으로만 진보와 개혁' 이것이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었다. 노무현의 '무늬만 진보'에 현혹되어 그를 선택했던 국민들은 처절한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2004년 6월 6일 민주노동당 당직선거에서 자주파 후보들이 최고위원직을 싹쓸이하는 이른바 세팅 선거가 이루어졌다. 새 대표에는 김혜경, 사무총장에는 김창현, 정책위의장에는 주대환이 당선되었다. 여성최고위원에는 김미희, 이정미, 유선희, 박인숙, 일반명부 최고위원에는 최규엽, 이영희, 김종철, 노동부문 최고위원에는 이용식, 농민부문 최고위원에는 하연호가 당선되었다.

 

자주파는 세팅 선거를 통해서 민주노동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가 실종된 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었다. 필자는 민주노동당이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당을 바로 세우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을 바로 세우자는 운동에 동참한 당원들은 자주파에 대해 스스로를 '민주노동당파'라고 불렀다. 이들 민주노동당파는 '민주노동당을 사랑하는 평당원들의 모임(민사평)'을 결성하였다. 평소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했던 필자는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민사평에서 공개적인 정파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자율과 연대)'의 결성을 주도했다.

 

2004년 7월 1일 대통령 노무현은 정동영을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다. 같은 날 이명박은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버스 중앙차로제가 실시되어 버스의 통행 속도가 빨라졌고 대중교통 이용객도 증가하였다. 버스 요금은 교통카드의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적자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회사들의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청계천 복원과 버스체계 개편 등을 이유로 타임지는 이명박을 환경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도입 초기 혼란을 빚은 점과 준공영제 도입으로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보전하는 데에 수천억의 예산이 들어가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에 내정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명박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종교적 발언으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서울시 봉헌 발언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었다. 또, 그의 업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서두른 나머지 금융 그룹 AIG에게 특혜를 주었고, 그로 인해 AIG가 1조원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 의혹은 특검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재임시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한 이명박의 말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 박근혜 후보 측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2004년 8월 민주노동당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필자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당원들과 함께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를 창립하고 대표에 선출되었다. 자율과 연대는 공개적 정파를 주장하면서 다른 정파들도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당원들에게 평가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내에 분명히 존재하는 자주파, 평등파 등 그 어떤 정파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떳떳하지 못한지..... 이후 자율과 연대는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주파의 과오와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2004년 9월 필자는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의 자녀들을 위해 교육과 의료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2003년 설립된 사회봉사단체인 작은사랑실천운동연합(작사련) 이사장을 맡았다. 작사련은 초창기부터 편부모를 둔 아이들이나 소년소녀가장들에게 가장 필요한 쉼터와 공부방을 마련해주는 일을 해나갔다.

 

작사련은 불우아동들을 위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 경기, 충북 등지에 지부를 설치했다. 충북지부는 충주시를 중심으로 충주지역아동센터, 행복을꿈꾸는지역아동센터, 산척지역아동센터, 앙성지역아동센터, 엄정지역아동센터를 만들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둥지가 되어 주었다. 경기지부는 성남시를 중심으로 성남지역아동센터, 태평3동아동센터, 금광동공부방, 공동생활가정 우리집을 설립하였다. 서울지부는 서울지역아동센터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2005년 2월 27일 민주노동당 정기 당대회가 열렸다. 이 날 당대회에서 결의문 안건은 '민주노동당은 다시 한 번 반전 평화를 위해 투쟁에 나설 것이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위한 특별결의안', '민족의 식량을 더 이상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에 내어줄 수 없다' 등 7건이 제출되었다. 결의문 안건을 보더라도 자주파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4월 1일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 조선일보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최순영이 위장전입의 수법으로 그린벨트 지역의 농지와 주택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수억원대의 차익을 챙겼다는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노동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조선일보의 기획성 보도였다. 

 

최순영은 농지는 농사를 짓기 위해 샀고, 현지 동네에 들어가 몇 달을 살면서 실제로 알로에 농사를 지었던 만큼 위장전입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 집을 판 것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남편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며, 시세차익도 별로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순영의 해명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민주노동당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2006년 1월 7일 필자는 1월 20일~24일로 예정된 당직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주대환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사회민주주의자 주대환은 매우 실용적인 정치철학의 소유자였다. 주대환의 정치철학은 필자와도 아주 잘 들어맞았다. 불행하게도 주대환이나 필자는 지지기반이 될 만한 조직이 없었다. 자주파는 민주노총 금속연맹위원장 출신의 문성현, 평등파는 전 국회의원인 조승수를 밀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문성현은 47.58%로 1위, 조승수는 44.79%로 2위, 주대환은 7.62%로 3위를 했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다시 치뤄진 결선투표에서 문성현은 53.62%의 득표율로 46.38%를 얻은 주승수를 물리치고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자주파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민주노동당에서 그 어떤 당직에도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국민중심당 창당대회, 서울 올림픽경기장, 2006.1.17 

 

2006년 1월 17일 전 충남지사 심대평의 주도로 구 자민련과 국민신당 탈당파 인사들은 보수정당인 국민중심당을 창당했다. 당대표는 심대평이었다. 국민중심당의 창당 배경에는 한나라당의 행정수도 반대에 반발한 측면도 많았다. 2006년초 정동영은 열린우리당 의장에 취임했다. 

 

2006년 4월 필자는 팔자에도 없는 산척초등학교 총동문체육대회 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일년 뒤 초등학교 총동문체육대회를 개최하게 된 동창회에서 반강제로 떠맡긴 것이다. 동창생들의 의도는 기부금을 많이 내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자갈밭을 팔아서 기백만원을 내놓았다. 5월 12일 필자가 2001년 5월 12일부터 7월 10일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겪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쓴 책 '산으로 가는 길'이 에세이출판사에서 나왔다.

 

2006년 5월 31일 제4회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노무현 정권의 '입으로만 개혁'은 지방선거에서 철저한 심판을 받았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16개 시도중 한나라당이 12곳을 휩쓸었으며, 열린우리당은 전북 단 1곳만 당선되었다. 광주와 전남은 민주당, 제주도는 무소속이 차지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55곳을 쓰나미처럼 휩쓸었다. 민주당은 겨우 20곳, 열린우리당은 19곳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광역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557석을 싹쓸이하듯 차지했다. 나머지는 민주당이 80석, 열린우리당이 52석, 민주노동당이 15석, 국민중심당이 15석을 얻었다.

 

선거 결과 우리당의 참패 원인은 한나라당이 결코 잘해서가 아니었다. 열린우리당이 못해도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다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과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은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당은 호남당, 국민중심당은 대전 충남에서만 지지를 받았다.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정강 정책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은 퇴출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다. 노동당은 광역의원 15석, 기초의원 66석을 얻음으로써 진보정치를 지방의회에서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충주에서는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 3명의 민주노동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아쉽게도 모두 낙선했다. 필자가 자갈밭을 팔아서 선거자금으로 거금 3백만원을 내놓은 보람도 없이.....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자타가 인정한 민주노총 충주지회 의장 출신 한만수 후보와 농민운동가로 알려진 신기령 후보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외로 득표율이 낮았다. 필자는 선거에서 고생한 후보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면서 다음 선거를 기약하자고 위로했다.

 

2006년 10월 24월 개인사업가 장민호(미국명 마이클 장),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과 중앙위원 이정훈, 모 학원장 손정목, 장민호의 회사 직원 이진강 등이 국가보안법상 간첩, 특수잠입, 탈출,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검찰은 기소장에서 장민호 등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직접 또는 이메일로 지령을 받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을 반미운동에 활용하고, 민주노동당 방북대표단 및 당직자 성향분석, 각종 선거동향 등을 조선에 넘겼다고 밝혔다. 법원은 일심회를 국가보안법(국보법)상 이적단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적성은 인정했다.    

 

민주화운동자관련자증서 

 

2007년 8월 1일 필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를 받았다. 암울했던 노태우 독재정권 시절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되어 교단을 떠나야만 했던 지난 10여년간의 세월이 필자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와 함께 생활지원금 신청서도 들어 있었다. 안내서에는 구금과 해직기간에 따라서 최고 5천만원까지 지급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2006년도 연간 가구당 소득이 4인 가족 기준으로 3천6백만원 이하여야만 생활지원금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조건을 정하고 그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치졸한 짝이 없는 정책이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한 이상 노무현 정권은 해직이나 구금기간 동안의 실질적인 보상을 해주어야만 마땅했다. 

 

민주인사들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는 폭압적인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한국이 비록 부르조아 민주주의나마 민주화를 이루고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인사들에게 큰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민주인사들의 투쟁과 희생이 없었다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가족과 측근들만 챙겼을 뿐이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도은 해직과 투옥 등 많은 온갖 고초와 희생을 치룬 민주인사들에게 피해보상과 예우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인사들을 거지 취급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의 역사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가와 민주인사들을 홀대하면서 후손들에게 과연 어떻게 바른 역사를 가르칠 것인가? 역사를 망각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정부는 진리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이바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라가 그 공로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또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공헌을 한 유공자에 대해서는 국가가 그에 걸맞는 응분의 보상을 반드시 해준다는 믿음도 국민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구국의 대열에 기꺼이 나설 것이다.   

  

통합신당 창당대회, 서울 올림픽경기장, 2007.8.5

 

2007년 8월 5일 중도개혁세력임을 주장하는 세력이 민주와 개혁, 평화, 중도, 미래세력의 대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자유주의 중도보수 정당인 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 신당)을 창당했다. 통합신당은 열린우리당 탈당파 80명, 민주당 탈당파 4명,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일부세력, 시민사회세력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8월 20일 통합신당은 당세가 약해진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통해 의석수 143석의 원내 제1당이 되었다. 

 

8월 19일 전 서울시장 이명박은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를 물리치고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전 대통령 박정희 밑에서 정치를 배우고 국회의원과 한나라당 대표까지 역임한 박근혜를 이명박이 이긴 것은 기업 전문경영인 출신에 서울시장을 지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9월 15일 권영길은 자주파의 지원으로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심상정과 노회찬을 물리치고 노동당의 17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세번째 대선 후보로 선출된 권영길은 '진보로의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0월 14일 통합신당은 예비 경선과 본 경선을 거쳐 정동영을 대선 후보로 선출하였다. 정동영의 국민경선제 승리 효과는 민주당 경선 당시의 노무현에 비해 너무나 미미했다. 경선 결과는 그 누구라도 조직력에서 가장 앞선 정동영의 압승을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통합신당의 후보 경선은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박스떼기' 등 부작용만 남긴 채 끝났다. 또, 정동영이 대통령 노무현의 명의를 도용한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은 것은 대선 후보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것이었다. 경선 기간중 정동영이 문화방송 MBC 기자로 재직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찬양기사를 쓰고, 전두환의 해외순방을 예찬한 사실이 있다는 설이 폭로되기도 했다. 

  

창조한국당 창당대회,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 2007.10.30  

 

2007년 10월 30일 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문국현은 우리당 소속이었던 김영춘과 정범구, 이용경 전 KT사장, 이정자 녹색구매네트워크 상임대표 등과 함께 자유주의 중도보수 정당인 창조한국당을 창당했다. 이후 이들 대부분은 문국현의 CEO식 리더십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결별을 선언하였다. 11월 4일 창조한국당은 문국현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무소속 대선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이회창이 출마한 것은 정치적 행보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지지도가 정동영을 추월하고 있었고,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했으며, 이명박의 정치 스타일과 비리 혐의에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이명박이 경제만 강조한다면서 좌파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이명박은 전형적인 보수적 인물이었다.

 

12월 3일 무소속 5선의 정몽준은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현대건설 사장 출신 이명박과 현대중공업 회장인 정몽준의 만남으로 현대가의 화합이 이루어졌다. 정몽준은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특별당비 10억원을 납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을 며칠 앞둔 2007년 12월 13일 대법원은 일심회 사건의 주동자인 장민호에게 징역 7년에 추징금 1900만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또, 함께 기소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이정훈과 손정목에게 각각 징역 3년과 4년, 이진강에게 징역 3년,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일심회 사건 변호인인 김승교는 일심회 사건에 대한 판결을 '국가보안법에 의한 민주노동당 탄압'이라고 비판하였다. 김승교는 일심회가 유출하였다고 주장한 국가 기밀은 네이버에도 나오는 자료들에 불과하다면서 이 사건은 수지 김 사건과 같은 전형적인 조작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심회 사건 관련자들의 처리를 놓고 민족해방 계열 자주파와 양심적인 민주노동당원들은 치열하게 대립했다. 양심적인 민주노동당원들과 민중민주주의 계열 평등파는 간첩사건보다 일심회 관련자들이 당 대표단과 당직자들의 신상명세를 조선의 공작원에게 넘긴 사실에 분노했다. 이는 당헌 당규상 명백한 해당행위였다. 양심적인 민주노동당원들은 일심회 관련자들을 당헌과 당규에 따라 제명할 것을 지도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자주파는 여론을 무시하고 일심회 관련자들을 감싸기에 바빴다. 이때부터 노동당은 분당의 길로 나아갔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주요 대선 후보는 보수 한나라당의 이명박, 중도보수 통합신당의 정동영, 보수 무소속 이회창, 중도보수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중도진보 노동당의 권영길 등이었다. 그외 민주당의 이인제,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참주인연합의 정근모, 경제공화당의 허경영, 새시대참사람연합의 전관, 한국사회당의 금민, 화합과도약을위한국민연대의 이수성 등도 나왔다. 선거는 초반부터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이 1강1중1약 구도를 이루었다. 문국현과 권영길은 군소후보였다.

 

대선사상 63%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대선 결과 이명박은 48.7%를 얻어 26.1%를 얻은 정동영을 물리치고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회창은 15.1%, 문국현은 5.8%, 권영길은 3%를 각각 얻었다. 이명박은 과반수에 가까운 득표로 호남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1위를 하였다.   

 

이명박의 승리는 한미 FTA나 아프간 파병에 대한 국민적 반대 여론을 감안할 때 유권자들의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당 후보의 대선 참패는 이미 열린우리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참패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명박의 독주는 시작되었다.

 

신군부 세력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결코 서민들을 위한 정치세력이 아님에도 노무현 정권의 개혁에 대해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은 이명박의 과거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회고적 성장과 경제회복 담론에 도취되었다.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 지속적인 서민경제의 불황과 빈부격차의 심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빈곤에 시달렸던 민중들에게 대기업 CEO 출신 이명박의 경제대통령 이미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비롯한 수구보수 신문들은 지난 10년 내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음해성 보도를 한 반면 한나라당을 공공연하게 편들고 지속적으로 이명박의 달콤한 성장 담론을 국민들에게 세뇌시켰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들은 이명박의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마구 불어넣어 주었다. 이명박은 바로 언론을 통한 이미지 정치에서 이겼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10년을 되돌아본 유권자들은 보수 언론에 세뇌를 당했건 어쟀든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정권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이명박에 대한 묻지마 몰표로 이어졌다. 정동영이 얻은 26%는 부도덕한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차마 찍을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선택한 것이었다.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은 다름아닌 바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었던 것이다. 

 

대선 참패의 원인은 정동영에게도 있었다. 정치적 리더쉽 부재, 이합집산을 통한 여당의 분열, 후보 단일화 실패, 네거티브 일변도의 선거전략, 서민을 위한 세밀한 정책의 부재 등이 그것이다. 정동영은 정치적 리더쉽의 부족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이인제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또, 국민중심당 총재 심대평이 이회창, 전 자민련 총재 김종필이 이명박을 지지하면서 정동영의 회심의 카드였던 서부벨트론은 꿈으로 끝났다. 서부벨트론은 호남과 충청을 연결하여 이명박을 영남 후보로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자 정동영이 도리어 호남 후보로 고립됐다.

 

정동영은 이명박 자녀의 위장취업 의혹이 훨씬 더 국민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는데도 대선 기간 내내 BBK 의혹 하나에만 집중하는 네거티브 선거전략에 매달렸다. 이명박은 이미 BBK 의혹이 터질 것을 알고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동영 자신의 출마였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국민들의 철저한 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권의 적자인 동시에 열린우리당의 최대 계파 수장인 정동영이 대선 후보로 출마하자 유권자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창조한국당 후보 문국현이 정동영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부한 명분도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정동영)이 대선에 출마했다는 것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급조된 창조한국당의 문국현은 노동당의 권영길을 2.8%나 앞서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의 돌풍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문국현도 이명박처럼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이지만 철학과 행동방식은 전혀 달랐다. IMF 구제금융사태 당시 유한킴벌리 사장 문국현은 4조2교대로 근무방식을 바꾸어 해고자 없이 경제위기를 넘겼다. 그가 창안한 노사 상생, 평생학습 모델은 삼성전자, 포스코 등의 기업들에 전파되기도 했다. 

 

문국현은 경제 해법에 대해 사람에 대한 투자, 중소기업 육성, 비정규직 해결, 재벌의 은행 지배 금지 등을 제시했다. 경제가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대선전에서 이명박의 경제정책을 '가짜 경제'로 규정하고 자신의 경제정책을 '진짜 경제'로 선언하면서 문국현은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5년 전에 써먹은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를 또 다시 들고 나왔다. 결과는 참담했다. 지난 16대 대선에서 얻은 3.9%보다 1% 가까이 지지율이 줄어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들이 대변한다는 노동자, 농민 등 서민들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자주파가 장악한 민주노동당은 민생정당을 표방하면서도 서민들 피부에 와닿는 공약보다 전국연합의 통일전선체 전략에 따라 ‘코리아연방공화국’에 집착하면서 경선 후 한달이 넘도록 대선 슬로건조차 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선거전략이 전무했다. 

 

민주노동당은 당이 지도해야 할 민주노총과 전농에 오히려 일방적으로 의존했다. 또, 자주파와 평등파간 갈등과 담합에 따른 자기정화능력의 상실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의심케 했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대중적 진보정치의 실천적 방법론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경제가 화두가 된 대선 정국에서 생뚱맞게 조선의 통일전략에 따른 통일운동을 하고 있었다. 8~10%대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을 까먹는 대선 후보 선정도 문제였다. 당 외부로부터 '민주노동당에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다.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운동권 정치를 처절하게 심판했다. 16대 대선에서 충북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필자는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의 모습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17대 대선에서는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이 아닌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유권자들을 속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선진당 창당대회, 장충체육관, 2008.2.1 

 

2008년 2월 1일 이회창과 그의 추종세력은 정통 보수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자유선진당을 창당했다. 자유선진당은 김종필의 자민련과 심대평의 국민중심당에 이어 대전과 충남을 근거지로 한 지역 정당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며칠 뒤 국민중심당은 자유선진당에 흡수 통합되었다.  

 

2008년 2월 3일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역 센트럴씨티 6층에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가 열렸다.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평등파 심상정은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있는 자주파의 친북노선 청산을 주장하며 전 사무부총장 최기영과 전 중앙위원 이정훈 등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 등을 담은 당 혁신안을 상정했다. 
 
자주파는 '진보정당에서 부르조아 법정의 판결문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최기영과 이정훈의 제명을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당원들이 분노한 것은 두 당원의 간첩행위보다 오히려 당직자들의 신상명세를 조선 공작원에게 넘긴 해당행위였다. 한나라당이 범법행위에 연루된 자당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탄국회를 열었던 것처럼 자주파들도 해당행위를 한 두 당원을 보호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를 방탄당대회로 만들었다.

 

자주파 대의원들과 자주파에 기생하는 운동권이라는 비판을 받는 '다함께' 대의원들은 제명 안건을 삭제하는 수정동의안을 발의해 출석 대의원 862명 중 553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비대위안이 부결되고 제명을 반대하는 수정동의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비대위 대표 심상정은 당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이날부터 필자는 보수화된 민주노동당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
 
자주파와 다함께 두 세력은 비대위안을 완전히 걸레로 만들고 모든 핵심적 문구를 깡그리 삭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안으로 통과시켰다. 정작 중요한 재정혁신건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고, 자주파가 공격받을 수 있는 안건들은 아예 심의조차 되지 못했다. 자주파와 다함께 대의원들은 별 차이도 없는 수정동의안들을 무수히 제출하면서 고도의 시간끌기 전략을 구사했다. 두 당원의 제명 안건이 부결되자 자주파가 장악한 민주노동당에서 당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종북주의 민주노동당은 이제 더 이상 노동자, 농민 등 서민을 위한 정당이 아니었다. 국민들로부터 전국연합의 통일전선체, 조선로동당 2중대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2008년 2월초 필자는 충주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보수화된 민주노동당을 미련없이 떠났다. 

 

통합민주당 창당대회, 국회 의원회관, 2008.2.17

 

2008년 2월 17일 통합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보수 통합민주당(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대표는 손학규와 박상천이 공동으로 맡았다. 통합민주당이 창당하면서 열린우리당 출범으로 비롯된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이명박,  2008.2.25 

 

2008년 2월 25일 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한 신군부 세력을 계승한 한나라당의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전형적인 보수세력으로 지배층과 기득권층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집권 기간에 소외계층은 더욱 소외될 것이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 결과 증가하는 사회적 저항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진보신당 창당대회, 서울 동대문 서울패션아트홀, 2008.3.16

 

2008년 3월 16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김석준, 정종권, 이용길, 박김영희, 윤난실, 신언직, 이홍우, 이상구, 길기수, 김백규, 안병일, 선창규, 김병일, 조명래, 염경석, 노옥희, 이승필, 최송춘, 서군택, 이성화, 조현연, 김종철, 김용신, 최은희, 오재영, 박학룡, 김득의, 한경석, 박철한 등을 중심으로 한 평등파는 '평등, 생태, 평화, 연대'를 기치로 내걸고 진보신당연대회의(진보신당)를 창당했다. 진보신당은 정강 정책면에서 민주노동당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민주노동당이 친북 성향이 강한 반면 진보신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의 권력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진보신당은 정강 정책상 사민주의 정당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신당은 사민주의를 개량주의로 폄하하는 자가당착성을 보였다. 진보신당의 정체성 혼란은 당명에서도 드러났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들은 당명을 공산당이나 사회당 또는 사민당으로 내걸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진보신당으로 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공산당이나 사회당은 국민들이 외면할 것이고 사민당은 당내 좌파들이 개량주의라고 공격할 것이 뻔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진보신당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3월 21일 한나라당 후보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서청원, 홍사덕, 김일윤 등 친박근혜 인사들은 집단탈당하여 보수 친박연대를 창당하였다.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정치인들은 신당을 창당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우선 대선 이후 방치되어 있던 미래한국당에 대거 입당한 뒤 총선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당명을 친박연대로 변경하였다. 미래한국당은 2008년 3월 12일 참주인연합에서 당명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박근혜는 친박연대에 합류하지 않고 여전히 한나라당에 적을 두었다. 

 

2008년 4월 9일 총 299석(지역구 245석, 비례대표 전국구 54석)을 뽑는 제18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46%로 역대 총선사상 최저투표율을 기록했다. 이처럼 투표율이 낮은 것은 유권자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정치 자체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했다. 노무현을 선택했던 사람들 가운데 '투표를 해보니 달라진 것도 없고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생각한 유권자들은 투표장에 발길을 끊었다.

 

총선 결과 한나라당 153석(비례 22), 통합민주당 81석(비례 15), 자유선진당 18석(비례 4), 친박연대 14석(비례 8), 민주노동당 5석(비례 3), 창조한국당 3석(비례 2), 무소속 25석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뉴타운, 특목고, 수도권 규제완화 등 부자들만을 위한 부동산, 교육 정책을 들고 나와 민주화 이후 호남과 더불어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수도권에서 111석중 79석을 석권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경제회복 담론이 수도권에서 주효한 것이다. 보수세력은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친박무소속연대까지 합치면 203석을 차지하여 대약진을 기록했다. 한나라당 정몽준은 5선을 거둔 울산 동구를 떠나 서울 동작 을구에서 출마하여 통합민주당 후보 정동영을 물리치고 6선에 성공했다. 

 

민주노동당은 분당 여파로 지난 17대 총선에서 얻은 10석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경남 사천의 강기갑은 여론조사에서 줄곧 앞서던 한나라당 사무총장 이방호를 178표차로 물리쳤다. 강기갑은 친박연대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실제로 4월 2일 한나라당 전 대표 박근혜 지지모임인 박사모는 '강기갑 후보 한 사람이 당선된다고 해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면서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대한 낙선운동을 공식 선언한 바 있었다. 경남 지역 공천 탈락자들과 박근혜계 인사들도 이방호를 한나라당 공천 파동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낙선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민주당은 개혁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지역연합이나 세대연합을 내세우다가 참패했다. 통합민주당 대표 손학규는 종로에서 한나라당의 박진에게 패했고, 보건복지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한 김근태는 도봉 갑에서 한나라당의 정치 초년생 신지호에게 고배를 마시면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탄핵정국의 도움으로 국회의원이 된 전대협 의장과 386 출신들도 대거 탈락했다. 진보신당은 노회찬과 심상정 두 공동대표를 비롯해서 출마자 전원이 낙선했다. 비례대표도 의석 배분 기준 득표율인 3%에 미달하는 2.9%를 기록하므로써 당선자 배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정당 지지율 2%를 넘겼기에 정당등록취소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당보조금도 일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7월 3일 정몽준은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에 이어 2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7월 6일 통합민주당은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통합'을 빼고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하고 정세균을 대표로 선출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정강 정책상 큰 차이가 없는 보수정당이었다. 차이는 단지 민주당의 근거지가 호남이이라면 한나라당의 근거지는 영남이라는 것 뿐이었다.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 2009.1.28 

 

2009년 1월 28일 용산 4구역 재개발에 반대하여 건물 옥상에 올라가 농성하던 영세 세입자들을 경찰 특공대가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일어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가 발생하였다. 용산참사는 용산 4구역의 재개발로 삼성물산, 포스코, 대림 등 건설재벌과 부동산 소유자들이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취하기 위해 세입자들의 재산을 사실상 빼앗고 쫓아내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용산구청과 경찰 특공대, 용역깡패들이 세입자들을 폭력으로 내쫓은 것은 건설재벌과 부동산 소유자들의 개발이익을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다. 4.29 재보궐 선거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와 2010년 지방선거의 전초전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선거 결과 5석중 민주당은 1석, 진보신당 1석, 무소속이 3석을 차지했다. 4.29 재보궐 선거는 외견상 민주당의 승리였다. 민주당 후보 홍영표는 인천 부평구에서 당선되었다. 전주시 덕진구의 정동영과 전주시 완산구의 신건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동영과 신건은 민주당행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정동영은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손학규-김문수 전현직 경기도지사 대리전으로 치뤄진 수도권 기초단체장 시흥시장 재보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 김윤식이 한나라당 후보 노용수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민주당 후보가 시흥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손학규도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북 경주시에서는 박근혜계 후보인 무소속의 정수성이 당선되었다. 울산 북구에서는 민주노동당의 김창현과 후보단일화 협상을 거쳐 후보로 나선 진보신당의 조승수가 당선되었다. 조승수의 당선으로 원내정당이 된 진보신당은 국회 내에 사무실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대변인을 통해 원내정당에게만 허용되는 국회 정론관 브리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보조금도 1억 4천만원 정도 늘어났다.

  

평택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투쟁 현장, 2009.7.25 

 

상하이차에 매각된 이후 경영 악화로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쌍용차가 전체 직원의 37%에 달하는 2600여 명을 정리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자, 5월 21일 쌍용차 노조는 정리해고가 통보된 노조원 1100명을 중심으로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가는 쌍용차 사태가 일어났다.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사측은 식수 반입과 의료진의 공장 내 진입을 방해하는 등 인권을 무시한 과잉 대응을 했으며, 경찰은 최루액을 살포하고 테이저건을 사용하는 등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공장 안에는 5600ℓ가 넘는 시너 등 폭발 위험이 큰 휘발성 물질이 저장돼 있는 도장 공장 등이 있어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제2의 용산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쌍용차 사태는 노사간 정리해고자 40% 구제안이라는 큰틀에 합의함으로써 끝났다. 극한상황 속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전개한 77일에 걸친 투쟁의 결과는 사실상 노조의 항복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재를 통한 사태의 해결보다는 공권력을 동원해 쌍용차 노조원들을 진압하기에만 급급했던 이명박 정권은 반민중적 신자유주의 공안정권의 실체를 드러냈다.

 

쌍용차 사태는 노동자들의 광범위하고 강력한 연대투쟁 없이는 결코 자본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정리해고 명단에서 빠진 쌍용차 노동자들은 사측과 함께 파업의 반대편에 섰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내지 투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는 쌍용차 노동자들 사이에도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당 등의 지원과 연대투쟁이 있었지만 너무나 부족했다. 

 

금속노조는 쌍용차 파업 지원을 위한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 등 대기업 노조들은 방관적 태도로 일관했다. 나아가 현대차지부는 동조 파업안을 부결시키기까지 했다. 대기업 노조들은 노동운동의 생명인 연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사 이기주의와 실리주의에 매몰되었다. 정리해고가 제도화되자 고용불안에 따른 노동운동의 위축과 개별화로 인해 민주노총은 연대성을 상실했다. 연대성을 상실한 노동운동은 더 이상 노동운동이 아니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외자유치론 또는 해외매각론에 따라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매각하여 쌍용차 사태를 야기시킨 당사자는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었다. 독일의 폭스바겐차는 상하이차와의 합작을 통해 중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차는 중요한 기술만 빼가고 부실화를 방치했다. 상하이차는 이른바 쌍용차를 '먹튀', 즉 먹고 튄 것이다. 따라서 쌍용차의 경영이 악화된 것은 노조의 잘못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상하이차에 잘못 매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들이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면 쌍용차 사태의 결과가 이처럼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계승한 민주당은 자신들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해외매각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였다. 또,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잘못 매각해 최악의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해 쌍용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 나아가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공당다운 처사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과 성명 하나 내지 않았다. 쌍용차 사태는 기업의 해외매각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전 대통령 고 노무현의 빈소, 2009.5

 

2009년 5월 23일 박연차 리스트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던 전 대통령 노무현은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30m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후 63세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서 전국적으로 촛불 추모집회를 열어 이명박 정권을 규탄했다.

 

2009년 7월 22일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언론장악 7대 악법'이라 불리는 미디어 관련법(미디어법) 개정안 가운데 신문법과 방송법, IPTV법을 민주당 등 야당과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시민사회단체 등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야당과 언론단체, 시민사회단체들은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전파법, DTV전환 특별법은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족벌신문과 재벌 대기업의 방송장악을 보장하는 법이고, 정보통신망법과 언론중재법은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국회의장 김형오로부터 사회권을 부여받은 한나라당 국회부의장 이윤성은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본회의 개회를 선포하고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한 뒤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육탄저지 속에 미디어 관련법들을 표결 처리했다. 그러나 투표종료를 선언했던 방송법은 재석의원(147명) 부족으로 다시 재투표를 거쳐 통과시켜 원천무효 논란이 일었다. 

 

한나라당에 의해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되자 민주당 대표 정세균과 원내대표 이강래는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언론노조는 미디어법 개정에 반대하는 세번째 총파업에 돌입했다. 총파업에는 MBC, YTN, CBS, EBS, SBS 등 방송사 대부분이 참가했다. KBS 노조도 본사에서 한나라당 규탄 집회를 열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한나라당을 규탄하고 미디어법 폐기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민주당 등 야당과 언론노조,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법 반대운동은 반정부 저항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전 대통령 고 김대중의 빈소, 2009.8

 

2009년 8월 18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던 전 대통령 김대중은 1달여의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 김대중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이 사망함으로써 민주당이 배출한 두 전직 대통령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        

 

2009년 9월 7일 정몽준은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대표직을 사퇴한 박희태의 뒤를 이어 한나라당 대표가 되었다. 입당 1년 9개월만에 정몽준은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된 것이다. 정몽준은 현재 전 대표 박근혜와 함께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몽준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군 가운데 박근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그는 대선 후보로서 인물, 경력, 자금, 조직 등 4박자를 다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만약 정몽준이 이끄는 한나라당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 틀림없다.

 

2009년 10월 28일 재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다. 10.28 재보궐 선거는 미니 총선의 성격을 띠었다. 민주당은 경기 수원 장안의 이찬열과 안산시 상록 을의 김영환, 충북 증평 진천 괴산 음성의 정범구 등 3명이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수도권과 충청권을 석권하면서 압승했다. 전 민주당 대표 손학규는 최측근인 이찬열의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하여 당선시킴으로써 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질 전망이다. 경남 양산에서 한나라당 후보 박희태는 친노무현 후보인 민주당 후보 송인배에게 고전 끝에 3천여 표차로 승리했다. 강릉시는 한나라당 후보 권성동이 당선되었다. 

 

10.28 재보궐 선거의 승패는 행정수도 세종시 문제로 분노한 충북표가 결정했다. 2010년 5월 지방선거와 2012년 4월 제19대 총선, 2012년 12월 대선에서도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4대강 사업은 여전히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지금까지 영남세력 보수 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과 호남세력 보수 민주당이 주물러 왔다. 한국 정치사에서 구시대의 유물인 지역당은 영원히 퇴출시켜야 한다. 양심적인 유권자라면 지역당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진보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진보정당이 국회 다수당이 되는 날을 보고 싶다. 그래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유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 

 

유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는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그는 독일의 공영방송인 ARD(Allgemeine Rundfunkaustalt Deutschlands)의 북부지역방송 NDR(Norddeutsche Rundfunk) 카메라 기자로 광주를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푸른 눈의 목격자'란 별명을 얻었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대학가를 돌아다니던 그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