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장판지에 유채, 31×41cm, 1956년.
만년에 정릉에서 살 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슴과 학으로 여겨지는 동물과 불로초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이상을 배경으로 한 십장생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운 날씨인 듯 한데 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상투까지 틀고 있어서 특이한 느낌을 준다. 이중섭은 복고적인 태도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작품들을 꽤 많이 그렸으나 평단의 호평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류의 그림들은 대부분 사장됐다.
달밤, 종이에 잉크와 수채, 17.5×13.5cm.
구름에 둘러싸인 달을 바라보고 누운 어린이가 나오는 특이한 설정의 그림이다. 달과 구름은 자주 애용되어 온 소재다. 이중섭은 구름을 단순한 소재로만 다루지 않았다. 덩어리 구름과 꼬리 구름의 처리에서 그가 전통적인 미감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름과 달 아래에 자족적인 모습의 누운 어린이를 배치하여 자연과 어린이로 새롭게 끌고 간 점이 이중섭답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24.5cm.
자신과 헤어져 일본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의 하나다. 서귀포에서 살 때 자주 가서 놀던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즐겁게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과의 유대를 끊지 말자고 말하는 듯하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7×39.5cm.
두터운 바탕칠 위에 정성들인 선묘로 아이들과 나뭇잎, 물고기,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끈을 설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에는 채색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왼쪽의 아이는 뒤만 보이고 머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한 아이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라면 그림에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셈이다.
꽃과 어린이, 종이에 펜과 수채, 17 ×15.3cm 1940년말
네 어린이와 비둘기, 종이에 연필, 31.5×48.5cm.
종이 위에 확신을 가지고 긁다시피 그어댄 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연필화 즉 종이에 연필로 그린 이중섭의 작품들은 스케치나 소묘, 또는 밑그림이라고 부르기에 미흡한 점이 많다. 그러나 요즘 연필화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일본, 한국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붓이나 연필을 구사하는 글씨예술(서예)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이중섭은 1940년대부터 이를 감지하고 독특한 붓질과 연필구사법을 개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꽃과 어린이와 게, 종이에 잉크, 9 ×14cm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어린이, 종이에 펜과 유채, 19.2 ×12.2cm
개구리와 어린이, 종이에 잉크와 수채, 10.5 ×25.7cm
판자집 화실, 종이에 펜과 수채, 26.8×20.2cm.
한간짜리 판자집의 네 벽에서 한 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부를 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지붕과 실내는 약간 비스듬하게 설정해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했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도 봉투까지 쓰기를 마치고 누워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자족하고 있는 모습이다. 겨울 언저리임을 알 수 있는 풍경과 주변 색깔에 비해 자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란색은 매우 효과적이다. 창조의 기쁨에 다른 곤란은 문제도 아니라는 이중섭의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다.
작품, 1904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소와 소녀,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소묘, 종이에 연필, 23.3 ×26.6cm 1941년, 제6회 지유텐 출품작
망월, 제4회 지유텐 출품작
그림엽서, 1941년 중반기
망월, 1943년 제7회 지유텐출품작
오장환 시집의 속표지 그림
소, 종이에 연필, 26.5 ×33cm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은박지에 유채,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소장
동원유원지, 종이에 연필과 수채, 유태 19.2 ×26.5cm
게와 담배대, 종이에 연필과 수채 19.2 ×26.5cm
이중섭
1916년 4월 10일-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임. 부농집안. 1923년 5세무렵 아버지 죽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25년-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선구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됨.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년-졸업.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음.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다.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다.
1934년-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름.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음.
1935년-졸업 후 곧 일본 토오쿄오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음.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됨.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함.
1938년-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론가들의 대호평을 받다.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하다.
1940년-졸업. 토오쿄오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 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하여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함.
1941년-26세.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하다.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5번째 지유텐에 <망월>과 <소와 여인> 출품, 회우로 추대되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동자인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글을 읽고 감화받은 결과로 보인다.
1942년-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하다. 경성에서 식민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다. 시인 오장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임.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3년-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소묘3>, <소묘 4>, <소묘5>,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힘.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다시 가기를 포기하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나,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됨.
1945년-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함. 여기서 8. 15를 맞이함.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했다. 최재덕과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리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감. 그해 연말 평양체신회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1946년-31세.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림. 시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음. 이후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된 점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1947년-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다. 아들 태현 태어나다.
1949년-34세. 봄 아들 태성 태어나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35세.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 북진.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옴.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 나 군인을 때리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음.
1951년-36세. 연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가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피난민과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임.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됨.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 두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가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됨.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오다.
1952년-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 달 같이 지내다. 3. 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 시작되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상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다.
1953년-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을 지게됨.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과 고민을 안게 되다. 8월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주일 남짓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으로 가서 그림을 제작하고 개인전을 열다.
1954년-39세. 봄에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그림을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함. 서울로 가다.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을 세움.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하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병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 이 무렵 간염이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1955년-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다.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내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고,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다.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지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다. 여관방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함.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 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함. 이때 황달이 극심해지다.
1956년-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함.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다.
1960년-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시인이자 문필가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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