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형예술의 모든 것

이중섭의 그림세계 1

林 山 2010. 1. 9. 14:19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거대한 물고기와 노는 두 남자아이를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래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주도 또는 부산 시절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본다.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 을 써서 대이상향 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가족, 종이에 유채, 41.6×28.9cm

 

가족이라는 주제는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월남한 이산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이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극단적인 예였다. <가족>의 위쪽의 아이에게 긴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은 꽃을 쥐도록 했는데 꽃잎이 뚝뚝 듣도록 했고, 아내쪽에는 새를 배치했다. 셋 모두 앞을 보도록 한것과 달리 아래의 아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도록 하고, 고개를 쳐들어 셋을 보도록 연출했다.  

 

소,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소와 새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소와 어린이, 나무판에 유채, 29.8×64.4cm 

 

기진맥진한 소는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지고 가던 지게를 세우고 남자아이가 딱한 처지의 소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앉아 두 손으로 꼬리와 뒷다리를 쥐었다. 무슨 행동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재빨리 소 불알을 훌트면 기운이 버쩍 난다고 한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곤란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히 계산되었으므로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닭과 가족,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닭은 결혼직후 이중섭이 일삼아 키우기도 했고, 즐겨 먹던 것이다. 두 아이는 병아리가 든 광우리를 들고, 아래 두 사람은 성징이 불분명하여 아이들로 착각하게 하지만 암탉을 안은 듯한 왼쪽은 아내고, 오른쪽은 지아비로 닭에게 어떤 작용을 가하고 있다.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박명자-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 하다. 일어서서 날아오를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후자는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보강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어떻게 보든 함의가 풍부한 그림이다. 비슷한 유형의 그림들이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까마귀는 6.25 전쟁 전만 해도 흔한 새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포성과 화약 냄새 때문인지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통영에서 그려졌다고 하는데 평화로웠던 그 곳에서 반갑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릴 소재다. 까마귀를 이루고 있는 붓질을 자세히 보면 날려져 있어서 마치 글씨예술(서예)의 비백과 같다. 그래서 전통 예술의 냄새가 진한 것이다. 대한 미협전에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종이에 유채, 36×27cm, 1951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뒤의 것은 물고기와 게를 앞세운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앞사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는 방법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새을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밖에도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맨 앞과 뒤에 있는 아이들이 잡은 끈인데, 이를 두 번째 아이가 잡아 당기므로 해서 더욱 재미있게 연관지웠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 평면으로 칠하고 테를 둘러 정연해 보이나 억센 붓질로 그렸다.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발 앞에 있는 게를 잡으려는지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아이를 그렸다. 턱을 쳐들고 위를 보도록 해 얼굴이 마치 고개를 뒤로 젖히듯 배치되어 있는데, 몸체는 앞을 향하고 있다. 또한 게가 정확히는 풀빛에 가까운 특이한 색으로 눈길을 모은다. 이런 눈속임 장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중섭의 연출이 그만큼 높은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전체는 매우 거칠게 그려졌는대 칼칼한, 조야한 맛을 우리 미감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흰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또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소, 종이에 유채, 27.5×41.5cm

 

다친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소 그림에서도 매우 드문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므로 뿔을 앞세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태세다. 거의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흰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 같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 같다. 

 

복사꽃이 핀 마을, 종이에 유채, 29×41.2cm, 1953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 남긴다. 이 그림은 이곳에서 그려진 풍경화 가운데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린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이다. 통영에서 그린 다른 소그림들에서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느낌이 난다. 이런 것이 기운생동의 미감이 아닐까? 

 

길, 종이에 유채, 41.5×28.8cm, 1953년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 전면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이중섭

 

1916년 4월 10일-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임. 부농집안. 1923년 5세무렵 아버지 죽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25년-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선구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됨.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년-졸업.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음.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다.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다. 

1934년-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름.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음. 

1935년-졸업 후 곧 일본 토오쿄오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음.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됨.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함. 

1938년-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론가들의 대호평을 받다.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하다. 

1940년-졸업. 토오쿄오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 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하여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함. 

1941년-26세.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하다.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5번째 지유텐에 <망월>과 <소와 여인> 출품, 회우로 추대되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동자인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글을 읽고 감화받은 결과로 보인다. 

1942년-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하다. 경성에서 식민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다. 시인 오장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임.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3년-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소묘3>, <소묘 4>, <소묘5>,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힘.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다시 가기를 포기하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나,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됨. 

1945년-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함. 여기서 8. 15를 맞이함.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했다. 최재덕과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리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감. 그해 연말 평양체신회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1946년-31세.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림. 시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음. 이후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된 점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1947년-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다. 아들 태현 태어나다. 

1949년-34세. 봄 아들 태성 태어나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35세.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 북진.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옴.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 나 군인을 때리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음. 

 

1951년-36세. 연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가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피난민과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임.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됨.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 두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가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됨.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오다.

 

1952년-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 달 같이 지내다. 3. 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 시작되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상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다. 

1953년-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을 지게됨.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과 고민을 안게 되다. 8월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주일 남짓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으로 가서 그림을 제작하고 개인전을 열다. 

1954년-39세. 봄에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그림을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함. 서울로 가다.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을 세움.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하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병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 이 무렵 간염이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1955년-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다.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내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고,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다.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지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다. 여관방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함.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 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함. 이때 황달이 극심해지다. 

1956년-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함.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다. 

1960년-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시인이자 문필가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