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1955년
복숭아꽃이 수 놓여진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싸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 전례가 없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감을 두껍게 칠하고 이를 충분히 말린 위에 전면적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긁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간혹 사용했던 기법이다. 그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무덤벽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전람회가 열린 미국공보원 직원이 소장하던 것이다.
손, 종이에 유채, 18.4×32.5cm, 1954년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 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갈색조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선은 흰 선의 한 자락을 집어들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의 주변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손을 그린 2점 중 하나로,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유채와 연필, 10.5×12.5cm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5×37cm, 1953년
두 아이와 게와 물고기, 종이에 먹과 수채, 10.5×12.5cm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는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그림들이다. 세 명의 남자아이가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원산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와 부모의 약값 대신으로 얻어간 그림이라고 한다. 벌거숭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붉은 색조와 초록빛을 띤 물고기의 색이 독특하다. 이중섭은 물고기, 게와 노는 두 남자아이 그림을 거의 같은 형태로 무려 다섯 번이나 그렸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소재를 거듭 탐구하듯 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부부,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중의 하나.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는 듯한 설정이지만 아래 암탉의 자태를 보면 교미를 위한 자세다. 두 마리의 닭이 모여 이루는 형태가 꼬리로 인하여 덜 완결되기는 했지만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는데서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으로 된 언어다.
여섯 마리의 닭, 종이에 연필과 수채, 26×36.5cm
두 마리의 닭을 통해 다툼과 어울림의 여러 정황을 노래한 이중섭은 여러 마리의 닭이 펼치는 드라마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즐기던 소재를 더욱 심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한데, 푸르고 붉은 색깔의 닭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중앙 뒤의 닭을 빼고 오른쪽 닭의 꽁지를 잡고 있는 남자아이를 선으로만 그린 연필화 한 점이 전한다.
닭과 게, 종이에 연필과 과슈, 29×41cm
<여섯 마리의 닭> 그림의 왼쪽 위에 등장하는 닭을 그대로 옮긴 듯 그려져 있고, 닭이 굽어보는 쪽에는 게 한 마리를 배치했다. 게 주위에는 복숭아꽃잎을 배치하여 닭이 물고 있는 복숭아와 연관을 지니도록 했고, 색채로도 청색과 분홍빛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꾀해 하나의 산뜻한 소품을 완성했다.
여인,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이중섭의 초기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그린 연필화로 전 해에 그려 지유텐에 출품한 것이 엽서그림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굵직한 연필선이 특징인데 훗날 특장이 되는 굵고 거친선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의 개성이 벌써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은 고갱이 자주 그린 태평양 연안지역에서 입는 사롱이라는 치마와 흡사한데, 이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향이라는 서명은 이 그림에서 처음 쓰였다. 훗날 아내가 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소년, 26.4×18.5cm, 종이에 연필, 1942∼5년
<소년>과 <세 사람>은 8. 15직후에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기 위해 원산에서 들고 왔으나 늦어서 미수에 그쳤다는 바로 그 그림들이다. 1943년부터 이중섭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42년에 그렸던 것을 다시 손 봐 출품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년>은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하는 헐벗은 둔덕 가운데 난 길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가지만 벌린 나무가 있고 아래 구석에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가 있다. 무대는 어느 산등성인 듯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 아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가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스산한 정감이다. 이러한 느낌을 하늘에는 가로줄을, 헐벗은 땅 부분에는 무수한 세로줄을 그었다가는 지우거나, 바탕재인 종이가 패일 듯 힘주어 그음으로써 더욱 강화했다.
세 사람, 18.2×28cm, 종이에 연필, 1942∼5년
<세사람>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스산한 감정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숨으려 드는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 단말마와 같은 일제의 등살에 못살게 된 식민지 민중의 내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1940년말~1941년 후반에 그린 그림 엽서, 14×9cm
후배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중섭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있던 이중섭은 겨울을 맞아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고 그림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활을 쏘는 사람들,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14cm, 1941년 말
소와 말을 타는 사람들,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1년말
소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다. 1941년 한 해 동안 작은 크기이지만 80매에 이르는 그림을 고심해서 그렸다.
환상적인 바다풍경,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0년말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는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생활의 곤란으로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편지를 통해서 볼 때 이중섭은 매우 명랑하고 낙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비극적이었다. 가족과의 편지 왕래는 이중섭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거듭된 생활의 곤란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이중섭은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그의 그림 편지는 대단히 흥미롭다. 당시 이중섭은 가족과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이중섭은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가 실패로 돌아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 그림은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자신만을 그린 이중섭의 자화상으로는 유일한 그림이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1956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개인전 직전 처음으로 몹시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던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마치자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은 서울로 가서 병원을 오가던 그가 다소 안정을 되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가리키는데 크레파스를 그어 마련한 거칠거칠한 질감이 계절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상태로 등장하는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희거나 노란 색을 칠한 새가 그런 느낌을 자아낸다.
구상네 가족,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1955년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어른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어른 여자와 한 아이가 이를 쳐다보고 있고 화면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부러워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다. 가족과 헤어져 있던 이중섭은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다. 구상과 이중섭이 서로 손을 조응하고 있는 모습에서 서로의 돈독한 우정을 읽을 수 있다. 이중섭이 입고 있는 옷은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옷으로 보인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년.
1955년 5월 대구 개인전에 출품된 그림으로 말년의 작품에 해당한다.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는 완전히 넘어져 땅바닥에 깔려 있고, 왼쪽의 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한쪽마저 상대방에게 올려놓았다. 싸움이 완전히 끝난 상황이다. 이런 설정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 소도 이긴 소도 모두 몰골이 형편없어서 싸움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1956년.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화면 앞으로 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 위에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검게 표현되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하는 일련의 그림 중 하나이다. 화면의 전체에 물감이 칠해지고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고, 하단에 담을 설정해 흰 새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제목은 당시 막 개봉된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린 것 같다.
이중섭
1916년 4월 10일-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임. 부농집안. 1923년 5세무렵 아버지 죽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25년-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선구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됨. 김찬영의 집에 가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유적 안에서 잠자기도 하고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년-졸업.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음.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다.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다.
1934년-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름.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음.
1935년-졸업 후 곧 일본 토오쿄오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음.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됨.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함.
1938년-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론가들의 대호평을 받다.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하다.
1940년-졸업. 토오쿄오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 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하여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함.
1941년-26세.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하다.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하다. 5번째 지유텐에 <망월>과 <소와 여인> 출품, 회우로 추대되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동자인 이쾌대의 형 이여성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글을 읽고 감화받은 결과로 보인다.
1942년-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하다. 경성에서 식민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다. 시인 오장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임.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3년-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소묘3>, <소묘 4>, <소묘5>,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힘.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다시 가기를 포기하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나,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됨.
1945년-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다.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함. 여기서 8. 15를 맞이함.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했다. 최재덕과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리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다. 벽화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감. 그해 연말 평양체신회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 개최.
1946년-31세.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화부원이 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림. 시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음. 이후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된 점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1947년-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다. 아들 태현 태어나다.
1949년-34세. 봄 아들 태성 태어나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35세.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 북진.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옴.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함.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 나 군인을 때리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음.
1951년-36세. 연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가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피난민과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임.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됨.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 두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가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됨.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오다.
1952년-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 달 같이 지내다. 3. 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 시작되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상스다방에서 전람회를 열다.
1953년-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을 지게됨.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실망과 고민을 안게 되다. 8월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주일 남짓 만에 귀국. 유강렬의 호의로 통영으로 가서 그림을 제작하고 개인전을 열다.
1954년-39세. 봄에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그림을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함. 서울로 가다.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을 세움.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하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병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 이 무렵 간염이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1955년-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다.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내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고,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다.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지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다. 여관방을 전전하면서 그림을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함.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 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함. 이때 황달이 극심해지다.
1956년-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함.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다.
1960년-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시인이자 문필가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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