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실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벽쪽을 향해 누워 계신다. 매일 밤낮으로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등허리 욕창을 예방하기 위해 간병사가 등에 베개를 바쳐 놓았다. 간병사의 말이 오늘은 어머니가 식사도 잘하셨고, 한약도 잘 드셨다고 한다.
새로 보내온 둘째 외손녀 사진을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예쁘지요?"
"이쁘다"
"누구 닮은 것 같아요?"
"지 아빠."
저번에 물었을 때도 어머니는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어머니는 등에 바친 베개가 불편하셨는지 빼 달라고 하셨다. 욕창 예방을 위해서 바친 것이니 조금만 더 참으시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빼 달라고 하신다. 5분 정도 기다렸다가 어머니의 등에 바친 베개를 빼 드렸다. 몸을 반듯하게 누일 수 있게 되니 자세가 좀 편해지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양쪽 다리와 왼쪽 팔의 관절과 근육을 풀어 드리고 오른손 들어올리기 운동을 20회 하시도록 했다. 재활운동을 하는 도중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돈이 없어 중학교에 못 가고 서당에 다녔던 일 생각나세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눈물을 흘리신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신가 보다.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부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가난은 어린 나를 일찍부터 철들게 했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충주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법관이 되어 가문을 일으켜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출세를 해야 우리 집이 일어설 수 있다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6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중학생용 영어문법 책을 마스터 해놓고 있었다. 암기 능력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원서 마감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아무래도 너는 중학교를 포기해야겠다."
"왜요?"
"수업료를 낼 돈이 없다."
"그래도 보내 주세요."
"안돼. 그런 줄 알아라."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말에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꿈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듯했다. 나는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설득해서 나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셨지만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달랑고개 너머 덕해라는 동네에 있었던 서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서당 아랫목에는 긴 수염에 갓을 쓴 근엄한 훈장님이 앉아 계셨고, 윗목에는 예닐곱 명의 학동들이 빙 둘러앉아 책상다리를 한 채 한문을 암송하고 있었다. 훈장님 옆에는 길다란 곰방대와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훈장님의 함자는 송, 인자, 섭자이셨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나는 훈장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훈장님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훈장님이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아버지가 좀더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해서 나의 서당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책보에 천자문과 도시락을 둘둘 말아서 어깨에 걸고 집을 나서면 달랑고개쯤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동창들을 만났다. 저녁 때 서당에서 돌아올 때에도 동창생 녀석들을 만나야만 했다. 의젓한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동창생들을 마주치는 것이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동창생 녀석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나는 몹시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빨리 지나치기 위해 나는 앞만 보고 늘 뛰다시피 걷곤 했다.
서당에 가면 학동들은 먼저 훈장님에게 큰절을 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훈장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전날 배운 한문을 암송해야 했다. 만일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훈장님의 곰방대가 날아와 머리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학동들에게는 훈장님의 곰방대는 공포 그 자체였다.
훈장님은 나에게 천자문을 반 쪽씩 가르쳐 주시고 외게 하셨다. 나는 천자문을 곧잘 외웠기 때문에 훈장님의 곰방대에 맞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언젠가 천자문을 암송하는데 그만 그날 분량의 마지막 구절에서 막혀 버리고 말았다. 훈장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머리를 향해 곰방대를 날리셨다. '따악' 하는 순간 머리에서 극심한 통증과 함께 별이 반짝였다. 지금도 나는 훈장님의 그 곰방대를 잊지 못한다.
수업료는 여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쌀 한 말이 전부였다. 수업료를 낼 때가 되면 아버지는 곡식이 든 자루를 지고 달랑고개를 넘어오셨다. 그리고 훈장님에게 내가 천자문을 잘 배우고 있는지 물으셨다.
이러구러 서당에 다니고 있던 가을이었을 거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너를 중학교에 보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의 꿈을 다시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는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게 하고 나를 다시 국민학교 6학년에 집어 넣으셨다. 1년 후배들과 함께 다시 국민학교에 다니려니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나와 전교 수석을 다투던 동창생 두 녀석은 충주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런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래도 중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있었기에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년말이 되고 중학교 원서를 쓸 때가 다가왔다. 나는 충주중학교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충주중학교는 가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생을 배출할 만큼 명문중학교였다. 당시 충북의 제일명문 청주고등학교에도 몇 명씩 진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학금을 받아야 된다면서 충주중학교 대신 엄정면에 있는 신명중학교 진학을 명하셨다. 당시 신명중학교는 명문중학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신명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서서히 식어 갔다. 공부 대신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 담배도 이 때 배웠던 것 같다. 한 번은 본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던 변소에서 담배를 피다가 선생님한테 걸렸다. 아이들이 칠뜨기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선생님이었다. 나의 귀를 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가 담배를 문 채 한나절이나 무릎을 꿇고 있어야만 했다. 수업이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교무실을 오가는 선생님들은 '이 놈은 그럴 놈이 아닌데.....' 하시면서 꿀밤을 한 대씩을 때리셨다. 그래도 성적은 늘 상위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3학년 말 고등학교 입시원서를 쓸 때가 다가왔다. 신명중학교에서 청주고등학교를 진학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나는 충주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담임 선생님이 '너는 충고에 갈 실력이 안돼.' 하시면서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나는 충고가 아니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담임 선생님은 결국 내 고집에 두 손을 드시고 나는 내 뜻대로 원서를 썼다.
충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기간 내내 5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별로 없다. 문과였던 나는 수학이 하기 싫어서 '공통수학 정석'과 '수학 1 정석'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했다. 성문종합영어는 3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성적은 전교 탑 클래스를 유지했다. 3학년 때는 전교 2등까지 한 적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전교 수석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연 아버지가 대학에 보내 주실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에 내 운명을 걸기 싫었다고나 할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서울대학교는 포기하고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버지는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진학을 강요하셨다. 당시 충북대 사범대는 수업료가 없었기 때문에 등록금이 상당히 쌌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교육공무원이 되기를 바라셨다. 외아들로 일찍 부친을 여읜 아버지는 자식을 공무원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 최대의 꿈이셨다.
이번에는 나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아버지의 결심은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려대를 포기하고 충북대로 진로를 바꿨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충북대에 무슨 학과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어쨌든 충북대 입시 원서를 들고 담임 선생님한테 갔다. 담임 선생님이 무슨 과를 갈 거냐는 물음에 나는 무슨 과를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선생님이 내 적성에 맞게 정해 주시는 학과로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권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1년 동안 나를 관찰한 결과 충북대학교에 있는 학과 중에서는 국문학이 내 적성에 맞을 거라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나는 국어교육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범대에 가게 되었다. 교육자가 되겠다는 사명감이나 마음의 준비도 없이.....
3학년 때 나는 ROTC에 지원해서 예비역 장교후보생이 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특전사에서 2년 4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나는 감물중학교에 국어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이것이 내가 교사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참 형편없는 선생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가난하면서도 공부를 안하는 아이들을 참 많이도 때렸던 것 같다. 아이들이 가난을 벗어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은 매질을 하는 선생은 실패한 선생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통해서 오히려 많이 배우고 깨달았던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우리 교육계가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육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기득권층을 위한 교육, 아이들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한 교육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나는 마침내 민족, 민주, 인간화를 부르짖으며 교육민주화를 위해 떨쳐 일어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참여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다가 1989년도던가? 노태우 독재정권의 공안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해직이 되었다. 이후 10여 년의 길고 긴 해직생활에 들어갔다.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는 장탄식을 하셨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나는 쫓겨나듯 분가를 했다.
노태우 독재정권 하에서 나는 복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해직 기간에 나는 평소 읽고 싶었던 제자백가서를 독파했다. 3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지막에 읽은 책이 주역이었다. 주역의 마지막 장을 덮는데 내 머리를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불현듯 사람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알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며칠 동안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만난 것이 한의학이었다. 그런데 한의학과에 대해서 알아보니 옛날의 그 한의학과가 아니었다. 1975년도만 해도 나는 한의학과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는 수학능력 시험 전국 1% 안에 들어야만 진학할 수 있는 인기학과가 되어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나는 94학년도 수학능력 시험에서 전국 1% 안에 들었으며 나이 40이 넘어서 95학번으로 한의대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 기쁨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의대도 문제가 많았다. 한의대에 다닐 때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의대의 문제와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만약 내가 생각했던 대로 순조롭게 진학을 했다면 나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국민학교 때 삼총사 중 한 친구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서 사법고시 합격으로 판사가 되었고, 또 한 친구는 의대에 진학해서 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머니는 학교 진학을 놓고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셨다. 빚을 내서라도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셨다. 그러나 번번이 아버지의 의견에 밀려 어머니는 결국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셨다. 어머니의 눈물은 항상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었으리라.
내 평생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지금 한의계 현실이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의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나는 운명을 개척하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생각해 보면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도 같다. 어려서 서당에 다닌 것도 어쩌면 나중에 한의사가 될 운명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2012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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