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은 시간 나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무 박정선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정선이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집을 나간 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녔다.
제주도에 놀러 갔던 정선이는 그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대로 눌러앉았다. 처음에 정선이는 건축현장에서 목수일을 하다가 돈이 좀 모이자 제주와 서귀포 5일장을 돌아다니면서 짜장면과 짬뽕을 파는 포장마차를 했다. 그때 남편을 사별한 여성을 만났다. 가정을 이룬 정선이는 포장마차를 그만두고 감귤 농사를 지었다.
호사다마라고 햇던가! 어느날 정선이는 청천벽력같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서울의 유명 병원에서도 방법이 없다고 했다. 새로운 암치료법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나에게 한방 항암요법을 부탁했다. 정선이에게 한약을 처방하면서 나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보라고 일렀다. 그리고 영화로도 나온 '버킷 리스트' 한 권을 사서 보내 주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하게 죽는 것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느라고 그랬던가? 정선이로부터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
어머니는 오늘도 포도당 링거를 맞고 계셨다. 링거액 색깔이 노란 것으로 보아 비타민제 삐콤헥사를 첨가한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정선이의 소식을 알려 드렸다.
"어머니 정선이라고 아시나요?"
"....."
"제 국민학교 동창 빵꾸집 아들 정선이요."
옛날부터 정선이 아버지는 자전거 수리점을 했다. 어느 때부터인지 동네 사람들은 정선이네 집을 '빵꾸집'이라고 불렀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정선이가 생각나시는 모양이었다.
"정선이..... 안다."
"오늘 죽었대요."
"나이가 아깝다."
"참 안됐어요."
"너는 술 많이 마시지 말아라."
"왜요?"
"제 명에 못 죽어."
"명심할게요."
"담배도 끊어."
"담배는 몇 년 전에 끊었어요."
"정말이니?"
"담배 끊은 지 3년도 넘었을 걸요."
"잘했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는 어머니는 나의 건강을 염려하셨다. 나는 담배를 중학교 때 배웠다. 그 후 담배를 매일 하루에 한 갑은 피웠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담배를 끊으라고 성화셨지만 나는 쇠 귀에 경 읽기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담배를 피는 중에 '나는 왜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했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습(習)'이 문제였던 것이다! 담배가 나 자신에게 백해무익할 뿐만 아니라 환경도 오염시킨다는 결론에 이르자 나는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었다. 남은 담배와 라이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금단증세같은 것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30년 이상 피운 담배를 단칼에 끊었다.
그때 4번 침상의 소이 할머니가 희소식을 전한다.
'어머니가 내가 먹던 귤을 달래서 먹었다오."
"몇 개나요?"
"반 개 정도 드셨다우."
음식만 보면 도리질을 치시던 어머니가 귤 반 개를 달래서 드셨다니 식욕이 예전처럼 다시 돌아오려는 것일까? 어쨌든 식욕이 돌아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어머니의 팔다리의 관절과 근육을 풀어 드리고 오른쪽 무릎 관절 운동을 시켜 드리는데 아프다고 하신다. 오랜 시간 누워만 계셨기 때문에 무릎 관절이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빨대를 꽂은 뉴케어와 야쿠르트를 손수 오른손으로 들고 드시게 하였다. 한 모금 빨고는 한 번 쉬고 하시기를 몇 번이던가! 조금씩 밖에 드시지 못하는 그 모습이 나는 내내 안타까왔다. 한참 시간이 걸려서야 어머니는 마침내 두 병을 다 드셨다. 냅킨으로 어머니의 입술을 닦으면서 칭찬을 해 드렸다.
어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6남매를 키우면서도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던 것 같다. 6남매를 다 키우면 언젠가는 밝은 미래가 오리라는 그 희망..... 그런 희망이 있었기에 어머니는 손바닥이 갈라지는 힘든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 고생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겨울방학이 돌아오면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작은 저수지가 있는 지실로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곤 했다. 미꾸라지를 잡는 도구래야 물을 푸기 위한 양동이 하나, 담을 대야 하나, 그리고 삽 한 자루가 전부였다.
저수지 아래는 크고 작은 논다랭이가 꽤 넓은 들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논다랭이마다 물이 떨어지는 작은 움벙들이 있었다.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움벙의 얼음을 깨고 시린 손을 참으면서 양동이로 물을 퍼내야만 했다. 물을 다 퍼내고 삽으로 개흙을 한 삽 가득히 떠서 논바닥 얼음판 위에 엎어 놓으면 손가락 굵기만한 살진 미꾸라지들이 꿈틀거렸다.
겨울잠을 자다가 갑자기 얼음판 위로 올라온 미꾸라지들은 놀라서 그런 건지 추워서 그런 건지 통 맥을 추지 못했다. 꼼지락거리는 미꾸라지들을 그냥 집어서 대야에 담으면 끝이었다. 미꾸라지 잡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손발이 어는 줄도 몰랐다. 움벙 몇 군데를 돌고 나면 어느덧 대야에는 미꾸라지가 꽤 많이 담겨 있었다.
미꾸라지를 많이 잡은 날이면 우리 형제들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집에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를 대견해 하셨다.
어머니는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해금을 깨끗이 빼낸 미꾸라지를 물이 펄펄 끓는 양은솥에 넣고 양념을 하셨다. 무우를 숭숭 썰어 넣고 푸성귀도 손으로 뚝뚝 분질러 넣고는 고추장을 풀어서 끓인 얼큰하고 구수한 추어탕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었다.
"겨울방학 때 지실에서 미꾸라지 잡아오면 끓여주시던 추어탕 기억나세요?"
"그래."
"그때 추어탕이 참 맛있었는데요."
"미꾸라지 잡아 오면 끓여 주마."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추어탕을 끓여 주실 듯이 미꾸라지를 잡아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일어나실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삽을 들고 나가서 미꾸라지를 잡아올 텐데...... 하지만 지금 지실 그 논다랭이의 움벙에는 미꾸라지가 없다. 그 많던 미꾸라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요즘도 가끔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 추어탕집을 찾곤 하지만 옛날의 그 맛이 아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추어탕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오련가?
"외증손녀 보고 싶지 않으세요?"
"너무 멀다."
"일어나시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
그때 또 어머니가 시골의 고향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
"집에 데려다 줘."
"왜요?"
"집에 승윤이가 와 있어."
"승윤이 안 왔대도요."
나는 고향집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손녀가 집에 없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직접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였다.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먹고 있다."
"반찬은 누가 좀 해서 드렸나 모르겠네요."
"그냥 있는 대로 먹고 있다."
"승윤이가 집에 와 있나요?"
"아니, 승윤이가 여기 왜 있어?"
"어머니가 자꾸만 승윤이가 집에 와 있다고 그래서요. 어머니에게 확인시켜 드리려고요."
나는 어머니 들으시라고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통화를 했다. 그런 다음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직접 바꿔 드렸다. 승윤이가 집에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이웃집으로 마실을 갔다고 하신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이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걸 여태 깨닫지 못했다니!
"어머니, 명륜이가 보고 싶으세요?"
"그래."
"명륜이를 한국에 나오라고 할까요?"
"나오라고 하지 마라."
"왜요?"
"돈 많이 들어."
"돈 걱정은 마세요."
"....."
갑자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신다. 어머니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니 가슴이 아파 온다. 여동생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두고두고 외손녀를 찾으셨을까? 아무래도 여동생을 한국에 한 번 나왔다 가라고 해야겠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까지 항공료는 왕복 1200만 원 정도 든다. 어머니도 그것을 알고 돈을 많이 쓸까봐 걱정하는 듯하셨다. 자나깨나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시려는 어머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가 잠들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오다.
2012년 11월 29일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상미인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다 17 (0) | 2012.12.18 |
---|---|
[謹弔] 이재영 진보신당 전 정책위의장 (0) | 2012.12.14 |
대통령 선거 에피소드 (0) | 2012.12.10 |
天上美人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다 15 (0) | 2012.12.08 |
천상미인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다 14 (0) | 2012.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