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산
언제였던가? 검단산(黔丹山, 657m)을 오르다가 갑자기 일이 생겨 중간쯤에서 도로 산을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꼭 정상에 오르리라 작정을 하고 검단산을 다시 찾았다.
검단산 등산로는 다양하다. 종주로는 창우동에서 출발해서 295m봉-큰고개-400m봉-585m봉-정상-삼거리-554m봉-철탑고개-전망대-고추봉-큰고개-524m봉-용마산을 지나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은고개로 내려선다. 그 외 창우동-호국사-585m봉-정상, 창우동-현충탑-헬기장-곱돌약수터-정상, 하산곡동 산곡초교-육각정자-백곰샘-삼거리-정상, 산곡초교-철탑고개-554m봉-정상, 배알미동 아래배알미-통일정사-정상, 아래배알미-용담사-371m봉-정상, 윗배알미-계곡-정상 등 여러 등산로가 있다.
검단산은 한남정맥(광주산맥)의 지맥 꼬리 부분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산은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 있다. 검단산은 용마산을 거쳐 남한산(南漢山)과도 연결되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예봉산, 예빈산과 마주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검단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했을 만큼 산세가 우렁차다.
검단산에서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는 이성산(二聖山)과 금암산(金岩山), 그리고 일자산(一字山)으로 이어진다. 검단산에는 세종대왕의 능을 쓰려다가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우동 산기슭에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가 있다.
검단산은 한성백제(漢城百濟)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었던 산으로 추정된다.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4년부터 근고초왕 26년까지 370여년 동안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읍지였다. 위례성은 현재 검단산과 남한산 사이의 하남시 고골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왕은 위례성의 진산(鎭山)인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산 이름 '검단산(黔丹山)'을 글자로 풀어보자. '검(黔)'은 '검다'의 뜻이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시대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이라고 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제사장이자 통치자였다. '왕검'은 후에 '임검(壬儉)'으로, '임검'은 '임금'으로 변했듯이 '검(黔)'은 '금'이 되었다. '금'은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다. 단(丹)'은 요즘 통용되는 '붉다'가 아니라 '제단'의 뜻이다. 그러므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때 '검단산'이 '금단산'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한강에 접해 있는 검단산 일대가 각지에서 이 강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집산지였기에 이곳에서 '검사와 단속'을 하던 곳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검단산 입구에는 '창고가 있던 곳'이란 뜻의 창우동(倉隅洞)이 있다. 검단산 정상에는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고, 최근까지 군부대가 있었다.
또 다른 설은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 산에 은거하였다 하여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검단선사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검단선사가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전북 고창의 선운사(禪雲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할 뿐이다. 두 선사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청주목 검단산 부분에도 검단선사가 등장한다.
한강변에 자리잡은 하남시 배알미동(拜謁尾洞) 아래배알미리(下拜謁尾里)에서 검단산을 오르기로 했다. 윗배알미리(上拜謁尾里)에서도 검단산을 오르는 산길이 있다. 아래배알미리에서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는데 마침 어탕국수라고 써붙인 매운탕집이 있었다. 간판에는 전직 대통령이 왔다간 집이라고 사진까지 붙여 놓았다. 큰 기대를 안고 들어갔지만 막상 국수맛을 보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국수 중 최악이었다. 면은 마트에서 사왔는지 물국수에다 어탕 특유의 얼큰하고 구수한 맛은 간곳없고 맵기만 했다. 몇 젓가락 뜨다가 말고 도저히 더 먹을 수 없어 돈만 내고 도로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음식을 가지고 영업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배알미리(拜謁尾里)의 유래는 이렇다.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가는 길에 이 마을을 지나갔다. 단종을 불쌍히 여긴 백성들은 호송군졸들의 눈을 피해 유배 행렬이 마을을 지난 뒤에야 '뒷(尾)'모습을 바라보며 '배알(拜謁)'했다. 백성들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알하던 마을'이라서 '배알미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동쪽에서 오는 길손들은 검단산 자락의 이 마을에 이르러 임금이 있는 한양의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배알(拜謁)의 예를 올렸으며, 한양을 떠나는 사람들도 이 마을에 이르면 삼각산을 향해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지 이곳에 이르면 임금이 있는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배알의 예를 올렸다. 그 배알하는 마지막 지점(尾)이 바로 이 나루터였다.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마지막 마을'이라 지금의 '배알미리'가 되었다고 한다.
배알미리 한강변에는 '도미(都彌)의 아내' 전설로 유명한 도미진(渡迷津)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도미진은 두미나루, 되미나루, 두미진(斗迷津)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를 참고하면 도미진의 위치는 팔당댐과 팔당대교 사이의 배알미리가 유력하다. 하남시 창우리 강변이 도미진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 도미진 나루터는 흔적조차 희미한 채 배알미리는 유원지로 변해 버렸고, 창우리에는 팔당대교가 건설되면서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도미의 처'는 백제의 제4대 왕인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6)으로부터 정절을 지켜낸 백제 여인의 이야기다. 백제의 도읍지 부근에 도미라는 평민이 살았다. 도미의 처는 보기 드문 미인으로 행실이 바르고 절개가 굳은 여인이었다. 그 소문은 개루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도미의 처를 탐내고 취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어느 날 왕은 도미를 궁궐에 잡아두고 자신으로 변장시킨 신하를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가짜 왕은 '그대를 걸고 둔 내기장기에서 내가 이겼다. 그대는 이제 내 소유다. 당장 대궐로 들어와 수청을 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도미의 처를 범하려고 하였다. 도미의 처는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가짜 왕을 먼저 방에 들게 한 뒤 자신을 닮은 여종을 들여보냈다.
도미의 처에게 속은 것을 안 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 벌로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강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런 다음 왕은 도미의 처를 궁궐로 끌고 와서 강제로 범하려고 했다. 왕이 도미의 처를 범하려 하자 그녀는 달거리(月經)를 핑계로 시간을 끌다가 가까스로 궁궐을 탈출했다. 도미의 처는 나루터에서 배를 얻어 타고 남편을 찾아 떠났다. 그녀가 탄 배는 고구려 땅인 천성도(泉城島)에 닿았고 거기서 두 눈을 잃은 채 풀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하던 도미를 만났다.
도미는 아내를 만나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도미 부부는 고구려와의 국경선인 한강을 건넜다고는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왕의 보복을 피해 다시 고구려의 더 깊은 땅 산산(蒜山)으로 도망쳤다. 백제와 원수였던 고구려인들은 이들을 딱하게 여겨 음식과 옷은 물론 집까지 마련해 주었다. 고구려인들의 도움으로 도미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은 396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제17대 왕인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을 국경선으로 한 것은 백제의 아신왕 이후라는 이야기다. 개루왕 때 한강이 고구려와의 국경선이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다른 시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또, 도미 부부가 악랄한 백제왕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것과 고구려인들의 도움으로 이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고구려인들의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 有操行'이라고 나와 있다.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로 성품이 공순하고 행동을 바르게 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서에도 개루왕은 성품이 온순히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좋은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미의 두 눈을 빼고 그의 처를 강제로 취하려고 했다는 개루왕의 행실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평민이었다던 도미의 처가 여종이 있었다는 것도 의문이다. 평민이 종을 둘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설화는 설화일 뿐 그대로 믿지는 말자.
찔레꽃
6월 초순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산길 초입에서 향그러운 찔레꽃 향기가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 2001년 5월 26일이었던가? 백두대간 마룻금을 걷다가 삼도봉에서 만났었다. 향기가 진해서 오히려 더 서러운 찔레꽃을.......
현악기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 장사익은 찔레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막 지기 전 찔레꽃의 그 진한 향기를 장사익은 맡아 보았을까?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산골무꽃
광릉골무꽃
산골무꽃과 광릉골무꽃도 앙증맞게 피었다. 어머니의 바느질하시던 엄지손가락을 떠나지 않던..... 그 엄지 골무를 닮았다.
통일정사
통일정사 관음전 석가모니삼존불
계곡을 따라서 한참 올라가자 검단산 정상과 통일정사(統一精舍)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통일정사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통일정사는 절이라기보다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였다. 요사채에서는 주말을 맞아 통일정사를 찾은 꽤 여러 명의 신도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관음전(觀音殿)으로 들어가 석가모니 삼존불(釋迦牟尼 三尊佛) 앞에서 합장삼배를 올리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빌었다. 예불을 마치고 나오자 관음전 바깥 벽에 붙어 있는 '관음찬(觀音讚)' 주련(柱聯)이 눈에 들어왔다. '관음찬'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白衣觀音無說說(백의관음무설설) 백의관세음보살은 말없이도 설법하고
南巡童子不聞聞(남순동자불문문) 남순동자는 듣지도 않고 설법 알아듣네
甁上綠楊三際夏(병상녹양삼제하) 병에 꽂은 푸른 버들은 언제나 여름인데
巖前翠竹十方春(암전취죽시방춘) 바위 앞 푸른 대숲은 온천지에 봄이로다.
관세음보살은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중생들 앞에 현현하기에 32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관세음보살은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이다. 한민족이 백의민족이어서일까?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할 때 반드시 말씀으로만 설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의 자비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자체가 설법이다. 즉 무언(無言)의 설법인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을 보자. 선재동자(善財童子)는 53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친견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 28번째 선지식인 관세음보살을 만난다. 선재동자는 진리를 찾아 남쪽으로 여행을 했으므로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한다.
관음도(觀音圖)를 보자. 관세음보살의 왼쪽 아래에는 언제나 남순동자가 있다. 관세음보살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동자 때문이다. 보살과 동자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말이 없다. 그럼에도 보살은 설법을 하고 동자는 그 설법을 알아듣는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마음만으로도 통하고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이런 관계가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관계가 아닐까?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의 관계가 이런 관계라면 그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겠는가!
관세음보살은 한 손에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는 불사약(不死藥)인 감로수가 들어 있는 약병을 들고 있다. 약병에는 언제나 푸른 버들가지가 꽂혀 있다.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바로 중생들의 탐욕과 분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푸른 버들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삼제하(三際夏),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여름이다.
관세음보살이 거하는 곳은 아름다운 바위가 있는 푸른 대숲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어디를 가더라도 시방춘(十方春), 늘 푸르른 봄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그 모습이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을 빠짐없이 감싸주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나타낸 것이다. 무언의 설법과 무문(無聞)의 깨달음은 곧 지혜를 뜻한다. 이처럼 관음찬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선재동자의 지혜가 조화의 극치를 이룬 한 폭의 그림이자 찬탄송이라 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 신앙은 티베트인들에게 있어 거의 절대적이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환생(還生)이라고 믿어지고 있으며, 송첸감포가 라사의 홍산(紅山)에 세운 포탈라궁은 관세음보살이 거주한다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을 재현한 것이다. 티벳인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외는 '옴마니반메훔(ॐ मणि पद्मे हूँ, 唵麼抳抳鉢訥銘吽)'도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직역하면 '옴,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티베트인들은 이 진언을 외면 관세음보살이 재앙이나 질병, 도적 등의 재난을 막아주고, 큰 자비를 얻거나 나아가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관세음보살 신앙은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도 성하다. '능엄경(楞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의 영향 때문이다. '능엄경'은 선(禪)을 닦아 인간의 감각작용에서 유발되기 쉬운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요의(要義)를 설한 경전이고, '법화경'은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 두 경전의 영향으로 한중일 삼국에 있어서 관세음보살 신앙은 석가모니불 신앙보다 앞선다. 그래서일까? 고려시대에 그려진 탱화는 관세음보살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탱화나 불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주인공도 단연 관세음보살상이다.
통일정사 관음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지장보살, 왼쪽에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었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을 보라!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하며 자비로운가!
'관음찬'을 음미하면서 절 마당에서 잠시 쉬는데 비구니 스님이 얼음을 띄운 냉커피를 마시라고 내왔다. 마침 갈증이 났던 차에 냉커피를 한 입 들이키자 목줄기를 따라 뱃속까지 시원해져 왔다.
통일정사는 2006년 103세의 나이로 입적한 보각(普覺) 스님(속명 이정수)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창건했다. 스님은 1904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1914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스님은 유관순 열사와 함께 3·1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3·1 운동에서 화를 면한 스님은 1924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하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스님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스님은 보성고보 교무주임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장석철 씨와 결혼을 하면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해방 후 터진 6.25 한국전쟁에서 사랑하는 두 아들 장 용과 장 경을 잃는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을 지켜준 것은 독실한 불심이었다.
1958년 스님은 53세의 늦은 나이에 법주사 수정암의 하계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한 지 3개월만에 불국사 하동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30여년의 토굴생활 끝에 스님은 1970년 남북통일을 염원하면서 통일정사를 창건했다. 분단 상황이 남한과 북한 인민 모두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절 이름을 보아도 스님이 얼마나 조국통일을 염원했는지 알 수 있다.
통일정사 보각선사 사리탑
통일정사 상봉발원단
절 마당 한켠에는 보각선사(普覺禪師)의 사리탑(舍利塔)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바로 위 큰 바위에는 상봉발원단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제단 양쪽 옆으로는 석등을 세워 놓았다. 왼쪽 석등에는 '상봉발원 장경모정수', 오른쪽 석등에는 '상봉발원 장용모정수'라는 새겨져 있었다. 두 아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어미의 애타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천륜은 속세를 떠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바위에는 단군상이 있고, 그 밑에 삼장법사(三藏法師)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스님의 통일기원시(統一祈願詩)가 새겨져 있었다.
統一祈願詩(통일기원시)
護國道場裡(호국도량리)
나라 위한 도량에는
香燈滿法堂(향등만법당)
법당에 향등 가득하네.
願蒙諸佛力(원몽제불력)
부처님께 원하옵니다.
統一萬年光(통일만년광)
통일만년 빛나게 하소서.
통일을 염원하는 일붕 스님의 간절한 염원이 싯구 한 자 한 자마다 전해져 왔다. 남북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통일이 되면 육로로 러시아, 중국을 경유해서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한 인민들이 자유로이 왕래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 그마저도 못하고 있는 지지리도 못난 남한과 북한...... 분단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분명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통일 반대 세력을 척결하지 않으면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다.
비구니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통일정사를 떠났다. 절에서 200~300m 정도 도로 내려와 작은 개울에 놓인 다리 오른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가 풀숲에는 가늘고 긴 줄기 끝에서 피어난 씀바귀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묵묘에는 꿀풀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다.
흰씀바귀꽃
씀바귀꽃
검단산 오르는 길
가녀리게 피어난 씀바귀꽃
바람이 불면 쓰러질 듯
하늘하늘 순박한 씀바귀꽃
꿀풀꽃
요즘 아이들은 모를 거다.
꿀풀꽃을 뽑아 쪽 빨면 달콤한 꿀이 나온다는 것을.....
꿀풀꽃의 꿀향기를 맡아본 것이 그 언제적일까?
내 유년의 기억에는 언제나 달콤한 꿀풀꽃.....
검단산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하남시 미사리와 팔당대교
검단산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예봉산과 예빈산
한동안 가파른 비탈길을 더위잡아 검단산 주능선에 올라섰다. 창우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조망이 뛰어난 전망바위가 나타났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하남시 미사리 일대와 한강, 팔당대교, 남양주시 와부읍, 예봉산과 예빈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칠 것 없는 풍광이 일망무제로 펼쳐졌다. 가슴이 탁 트이면서 저 구석구석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랄까! 산사람은 바로 이런 맛에 산을 오르는 것이다.
전망바위 근처에는 참조팝나무와 기린초 군락이 있었다. 산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야생화는 산사람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참조팝나무꽃
바위틈에 피어나 별을 닮은 꽃송이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곤소곤 수군수군
수줍은 듯 사알짝 연분홍으로 물들었네
기린초꽃
기린초(麒麟草)는 산지의 바위틈에서 잘 자란다. 꽃이 돌나물꽃과 비슷한 것은 기린초가 돌나물과이기 때문이다. 기린초는 그 잎이 옛날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의 뿔을 닮았다고 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검단산 정상
주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쉼터 겸 전망대를 만났다. 나무 판자로 난간을 설치하고 의자를 만들어 사람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망대에서는 검단산 정상이 바로 앞에 보였다.
붓꽃
검단산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활짝 핀 붓꽃을 만났다. 산기슭에서 각시붓꽃이나 금붓꽃은 자주 보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붓꽃을 만날 줄은 미처 몰랐다. 산행길에서 만나는 들꽃은 청량제나 다름없다. 어쩌면 저리도 이쁘고 청초할꼬!
검단산 정상
마침내 검단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 한쪽에는 파라솔을 펼쳐 놓고 아이스크림과 음료, 생수, 캔맥주를 팔고 있었다. 날도 덥고 해서 얼음과자를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땀을 흘린 뒤에 차가운 얼음과자를 입에 넣자 차가운 냉기에 이가 시릴 정도였다.
검단산 정상도 전망이 매우 뛰어났다. 정상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감상했다.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예봉산과 예빈산, 운길산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편의 예봉산과 예빈산이 손에 잡힐 듯 솟아 있었다. 철문봉에서 예봉산, 율리봉, 예빈산(직녀봉), 견우봉, 승원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팔당호를 향해서 뻗어내렸다. 운길산은 예빈산과 견우봉 뒤로 봉우리만 보였다. 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 산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검단산도 저 건너 예봉산이나 예빈산에서 바라볼 때 진면목을 관할 수 있으리라.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팔당호와 두물머리
북동쪽 저 아래로 팔당호와 두물머리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저 두물머리에서 서로 만나 한강이 된다. 두물머리 농민들은 유기농지를 지키기 위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맞서 투쟁해왔다. 지난해였던가? 농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나는 두물머리 투쟁의 현장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4대강 곳곳에서는 물이 썩어가는 등 헛삽질을 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예산낭비의 대표적인 국책사업인 4대강 사업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운무로 인해 시야가 그리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양평 청계산 뒤로 용문산과 백운봉, 유명산, 중미산이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광주시 퇴촌면
남동쪽으로는 토마토 축제로 유명한 광주시 퇴촌면이 앵자봉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호동의 용해곡 상봉에서 발원한 경안천은 북으로 흘러 퇴촌면 정지리에서 팔당호로 흘러든다. 백병봉에서 양자산, 앵자봉을 지나 무갑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퇴촌의 병풍 역할을 하면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렸다.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검단산-고추봉-용마산 주능선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남 검단산과 남한산
남쪽으로는 검단산에서 고추봉, 용마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치달려 가고, 남서쪽으로는 성남 검단산과 남한산이 솟아 있었다. 검단산에서 용마산을 거쳐 남한산까지 연계 산행을 해보는 것도 좋다. 하남의 창우동에서 출발해서 검단산-고추봉(두리봉)-용마산-은고개-도마치고개-감투봉(삿갓바위)-장작산-감투봉-노적산-약사산-약수산-남한산에 이르는 능선은 약 20km로 8~10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검단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남시 전경과 용마산, 아차산, 도봉산, 삼각산
북서쪽으로는 하남시와 한강 건너편으로 서울 광진구의 용마산과 아차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도봉산과 삼각산이 흐릿하게 윤곽만 보였다.
이처럼 검단산은 한강과 접해 있고 산세가 막힘이 없이 툭 터져 있어 동쪽과 서쪽, 북쪽 방면의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 정상에서는 두물머리에서 합류하는 남한강과 북한강, 팔당댐으로 생긴 팔당호수가 한눈에 조망된다. 뿐만 아니라 도봉산, 삼각산, 용마산, 아차산, 예봉산, 유명산, 용문산, 남한산 등 주변의 명산도 두루 볼 수 있다. 특히 검단산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해돋이와 해넘이 풍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다음에 올 때는 검단산에서 해돋이나 해넘이 풍경을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201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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